국민투표로 브렉싯이 결정되고 나서는 아주 정이 떨어져서 영국 뉴스를 잘 안본다. 여튼 엊그제 브렉싯 딜 초안이 나왔다고 해서 시끌벅적 해서 보니... 글쎄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영국의 정치 부재를 다시금 느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영국이 EU 단일 시장을 아주 떠나는 것은 애초부터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고, 더군다나 북아일랜드 국경 문제는 아예 손을 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영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현실론을 주입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는(즉, 명목상으로는) EU를 떠나지만 경제적으로는 EU 단일 시장에 잔류하는 타협안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 수상인 테레사 메이의 일성은 브렉싯 민즈 브렉싯이라는 것이었고, 나쁜 딜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노 딜로 나가는 게 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깜짝 놀랐다. 뭔 생각이지? 이 사람들 정말 하드 브렉싯 하려고 작정한 거야? 실제로 메이는 노동당이 제안한 유럽 관세 동맹 잔류안도 일거에 거절해 버렸었다. 브렉싯 민즈 브렉싯이므로...
그러다 엊그제 나온 딜 초안을 보니 사실상, 일시적이라고는 하지만 관세 동맹 잔류안에 가까운 딜이더라. 이게 머지? 그동안 한 말은 하드 브렉싯이었는데 정작은 소프트 브렉싯이네...? 이러니 온 나라가 난리가 난 것이다. 강경파는 강경파대로, 잔류파는 잔류파대로...
내 생각에 이번 딜은 영국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노동당이 이 안을 받아들여서 그냥 의회 통과가 되었으면... 애초 노동당 안과 비숫하니까. 그러나 노동당은 거부키로 결정해 버렸다. 그러므로 의회 통과가 쉽지 않아 보인다. 만약 이번 안이 의회에서 좌초되면 메이는 사임해야 하리라 본다. 그러면 또 지지고 볶고를 하겠지. 노동당은 이번이 조기 총선을 통한 집권 기회로 보는 것 같다.
하나같이들... 정말 어떻게 하는 것이 영국 사회 전체를 위해 나은 길인가를 고민하는 정치 세력은 별로 없어 보인다. 강경파의 경우에는 메이를 배신자라고 맹렬히 비난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대안은 없다. 그냥 노딜로 나가자고? 그러면 북아일랜드 문제는 어떻게 할 건데? 보리스 존슨 등의 강경파들은 이런 질문에 입을 다문다. 한심하다. 이런 사람들이 영국의 주류 정치인들이고 메이를 대체할 인물로 지지율 1위이다.
애초에 브렉싯 투표의 가장 커다란 이슈는 이민자 문제였다. EU에서 탈퇴해서 이슬람 이민자들, 난민들 받지 말자! 그러나 EU와 이슬람 이민자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람? 유럽의 경계 근방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난민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다. 터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등. 수십 만 명의 난민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그들 나라에 비하면 고작 수천 명 수준인 영국은 힘들다고 말할 꺼리도 없다. 더군다나 그 난민 문제의 시발이 이라크,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대대적인 군사 공격이었고, 영국은 그 주축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영국이 EU를 나가면 난민 분담이라는 책임을 온전히 회피할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소리.
물론 EU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 특히 폴란드 사람들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아우성은 많았다. 그래서 폴란드 사람들이 많은 곤혹을 치루었고, 이제 폴란드 사람들은 영국에 잘 안온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러면 다른 나라에서 그 빈 곳을 메우게 마련이다. NHS는 만성적으로 간호사 부족에 시달린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간호사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동유럽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동유럽 노동자 유입에 대한 여론이 안좋아지자 그 프로그램을 갑자기 폐기한다. 그러면 여전히 부족한 간호사 인력은 어떻게 확보하지? 필리핀에서 간호사를 데려 온다! 뭐 하자는 건지...?
어제도 라디오에서 어떤 할머니가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하드 브렉싯을 주장하더라. 예전에 테레비에서 본 가난한 썬더랜드 지역의 아주 가난해 보이는 할머니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치과 치료도 제대로 못받을 정도로 삶에 찌들어 사시는 듯 보였는데, 브렉싯을 통해 영국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더라. 이런 분들을 비웃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 분의 삶에 찌들은 행색과 그분이 입에 올리는 거창한 이념 사이의 관계가 결코 우발적인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거부하기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