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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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문학적 체험의 원형질로 돌아가는 언덕길처럼 다가온다. 더 이상은 불가능하고 뒤돌아 보기도 뭔가 어색한 그런 시간의 저편들이 간직하고 있는 크고 작은 외상들의 흔적들 속에서 나는 그 시간들의 아리고도 간지러운 기억들을 다시 만난다. 그 기억들 속에서 익숙한 이미지와 말들이 다시 내 의식 속으로 기어들어 오지만 이제 더 이상 격렬한 흥분이나 그에 부수되는 죄의식, 공포, 두려움은 없이 다만 알 듯 말 듯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회한이랄까 그런 해묵은 통증만이 전해져 온다.

그의 첫 작품집 <객지>들의 작품들 예를 들면 표제작 <객지>, 그리고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등을 숨가쁘게 읽어 내려가며 문학이 이 닫힌 사회에서 얼마나 큰 감동으로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제치던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객지>와 비슷하게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백무산의 <동트는 미포만을 새벽을 딛고>같은 시집들, 김영현의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그리고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 김한수의 소설들이 내 의식에 새겨 놓은 깊은 상처를 기억한다. 싸움으로 전이된 그 힘들이 소진되고 나비가 된 뒤 남겨진 누에고치처럼 남겨졌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내 의식 속에 생생히 살아 움직일 것이다.

80년부터 시작된 계몽과 신화의 역사는 이제 황석영이 <오래된 정원>으로 끌어안음으로써 정리가 된 것같다. 황석영 이전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더 이상 이런 류의 작품은 쓰여지지도, 쓰여질 수도 없을 것이다. 지난 10여 년 간 허영과 욕망의 상징처럼 이리 저리 휘둘린 문학장에서 돌아온 수인 황석영이 여전히 한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치 성난 사람처럼 그곳에서 매몰차게 돌아선 나에게 위안이 된다. 물론 황석영은 그가 거쳐온 지난 시간들을 부질없는 미망으로 사로잡고 시대착오적인 계몽의 깃발을 다시 올리려 하지 않는다. 이제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계몽의 깃발을 꽂을 만한 곳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트로츠뎀!)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 듯한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나직이 되뇌고 있을 뿐이다.

그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우리 역시 그 역사의 시간들을 외상처럼 간직하며 살고 있다. 우리들은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미아처럼 묵직이 간직해야 할 그 무엇도 없다는 듯 오늘의 안락과 평화만을 간구하며 일상의 깊은 수렁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 무엇이 그 무엇일 수 있고 그 무엇이 그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알고자 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이 심연의 허무 속에서 그 무엇이 희망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이 10여 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이런 혼돈 그 자체는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외면하거나 섣부른 대답으로 희망을 갈음하고자 하지 않는 그 정직함이 아직 미약하기는 하나마 우리에겐 희망의 작은 씨앗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황석영에게 지금-여기는 낯설다. 그래서 그는 지금-여기를 건너뛰고, 오래된 정원이 존재하는 갈매와 그 갈매의 기억을 붙안고 생존의 고투를 벌인 감옥과 이념의 붕괴와 새로운 혼돈을 보게 되는 독일과 러시아를 에두르고 있다. 그에게 2000년을 경과한 지금-여기의 모습은 아직 낯설고 그는 조심스럽다. 아직까지 황석영의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건 그에게 있어 지금이 단식 이후 찾아오는 복식의 시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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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 - 프로이트전집 7 프로이트 전집 7
프로이트 지음, 이한우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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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나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내 일상에서 친숙한 것이었던 사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형체까지 선명한데도 좀체 이름이 떠오르지 않고 그와 유사한 이름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사물은 이렇게 요약된다. '군에서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이 타는 군용차로서 개량 짚차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 동생한테도 물어봤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듯했다. 불현듯 왜 이런 문제를 가지고 내가 골머리 앓듯 헤매는지 그 이유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중고차 사이트에 들어가 내가 그토록 발견하고자 했던 차의 이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이름은 바로 레토나. 오랜 궁금증 뒤의 해답은 내 예상대로 매우 친숙한 이름이었고, 왜 이런 망각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왜 그 이름이 갑자기 궁금증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보게 되었다. 물론 이런 일들 사이에 나는 프로이트의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을 읽었다. 물론 예의 궁금증은 이 책을 읽기 전의 일이었고 그 해답은 우연히도 이 책을 읽은 후 곧바로 나왔다.

이런 사태를 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기로 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어떻게 보면 내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에서 촉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일상생활에 관련된 농담, 실수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나는 내 일상생활에서 그 예가 될만한 것을 꾸준히 찾게 되었고(물론 그 과정은 무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예의 그 레토나 건이 등장한 것이다. 그 문제가 발생하자 나는 해답을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는데, 이는 평소 내가 프로이트의 저작들 상당수를 읽지 못했다는 강박증을 상기시켰고 그에 따라 레토나 건과 관련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프로이트의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을 읽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책을 읽자마자 마치 이 책을 다 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답은 우연히 찾아왔던 것이다.

이 문제를 약간 다르게 보자면 그 문제는 내가 요즘 차를 가끔 운전할 기회가 생기면서 차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는 사실과 그리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차를 살 여유가 없었고 굳이 차를 사게된다면 중고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중고차는 속기 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급적 새차 중에서 싼 걸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군대 시절 레토나가 생각보다 그렇게 비싸지 않으며 사회에서도 레토나는 실용적일 수 있다는 얘기를 무의식 중에 떠올렸다. 그래서 나의 욕망은 자연스레 레토나를 상기하게 되었으나 정작 그 레토나라는 이름이 나의 의식에 떠오르는 것은 완강히 거부되었다. 그 대신 코란도라는 이름이 대체되어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레토나는 나에게 완강히 거부되었을까. 아마도 그 중간 글자 '토'에 대한 공포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구토'와 관련된 것으로 구토는 나에게 항상 술과 관련된 괴로움, 세상 밑으로 꺼지는 두려움, 즉 죽음의 이미지를 안겨준다. 특히 요즘처럼 술을 멀리 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예전보다 강한 공포를 안겨준다. 결정적으로 그 마지막 글자 '나'는 그 구토의 대상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레토나에 대한 망각은 차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묘하게 결합된 일종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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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전집 3 - 수필
김윤식 엮음 / 문학사상사 / 199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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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대도시 생활에 가장 근접한 삶을 살았던 시인 이상은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전근대적 초자아에 짓눌린 자아의 해방을 위해 글을 썼다. 그 글은 주로 시나 소설 등의 작품으로 드러나는데, 기하학적 수식과 해체된 언어로 이루어진 그의 시는 지금보아도 낯설기만 하다. 그것이 그가 배운 근대적 지식을 통해 자아의 탈출구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음은 어느 정도 해명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언어유희의 많은 부분은 미궁으로 둘러 싸여 있다.

난해한 시세계에 비해 수필은 어느 정도 정돈된 언어를 드러내 보인다. 어떤 글은 이상답지 않게 평범한 의식을 그야말로 평범한 언어로 풀어놓은 것도 있다. 그리고 여동생 옥희에게 보낸 편지는 마치 20세기 초반 어느 단편소설의 목소리처럼 형제애를 애끓는 어조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글에서 만나는 이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기괴한 작품 취향을 가진 괴짜이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되 그로부터 빚어지는 분열을 평범한 사람보다 때로는 격심하게 겪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요양차 성천으로 갔을 때 거기서 그가 마주했던 자연의 풍광, 인정세태를 도시적 사물을 끌어 들여서만 묘사할 수 있었던 건 서울토박이 이상의 독특함이 아닐까. 그렇게 놓고 보면 이상은 현대 문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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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근대성과 순간의 시학 - 김수영.김종삼 시의 시간의식
남진우 지음 / 소명출판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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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는 이들, 특히 그 중에서도 학문을 업으로 하는 이들에게 있어 창작과 비평을 아우르는 일은 일종의 끝없는 지향으로 존재한다. 비평을 통해서 좌절된 창작의 숨결을 들이미는 일이 그다지 드물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일 텐데,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남진우는 문학이 삶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이들 중에서는 가장 큰 행복을 구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대중적으로 비평가로서, 그것도 <인물과 사상>을 둘러싼 논쟁의 일 당사자로서 많이 알려져 있고, 그것보다 더 드물 게 시인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 가장 낯선 것은 학자로서의 남진우일 것이다.

그의 삶은 온통 문학적 후광을 업은 책읽기로 둘러싸여 있다. 그가 자신의 주체를 세우고 반성할 때 항상 책에서 펼쳐진 상상과 사유가 가로놓여 있다고 할 때 그는 김수영적 책읽기, 김현적 책읽기의 가장 최근의 계승자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 쓰기를 통해 절대적 현존을 꿈꾼다는 측면에서 그는 가장 순수한 미학주의자로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현존을 가득 채우는 책과 시로서 모더니즘적 현존을 꿈꾸었던 김수영과 김종삼을 그의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일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그의 어느 평론집 제목은 김종삼의 시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195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김수영, 김종삼은 그 당시 활동한 그 어느 시인보다 학문연구자들에 의해 조명된 시인들이다. 남진우는 이들 두 시인의 시간의식을 거멀못으로 하여 우회적으로 자신의 존재론적 해명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상상적 도정이나 귀향적 도정이니 하니 다소 비평적 수사를 동원하여 그 두 시인의 시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이 책은 방법론의 측면에서는 현재의 연구 분위기를 타지 않는, 아마 저 10여 년 전 어간의 지점에 놓여 있다. 시간의식이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축 사이의 관계 설정이고, 이런 틀은 그 어느 시인을 가져다 대도 좋을 정도의, 이미 방법론적 측면의 긴장감은 사라진 것에 속한다.

이처럼 방법론적 진부성을 상쇄시키면서 이 책의 가치나 득의의 영역을 열어놓는 것은 그동안의 비평 작업을 통해 길어 올린 선명한 수사적 문체가 건져내는 비평적 날카로움 혹은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시 연구가 대체로 방법론적인 모색에 치중한 나머지 세부 비평에 등한시함으로써, 방법론에 작품을 맞추고 있다는 재단의 혐의를 종종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달리, 남진우의 글은 오히려 세부 비평의 재치에 상당수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은 비평적 관심, 창작적 관심을 부정할 수 없고, 오히려 그런 차원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학문적 관심의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물론 남진우가 앞으로 어떤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나아갈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의 비평적 감수성이 학문적 성과로 이어질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정선을 유지하며 양쪽의 긴장감과 노력을 유지하는 일의 어려움은 그의 문학적 행보에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유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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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의 퇴폐와 작은주체
신범순 지음 / 신구문화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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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에 이 책의 저자 신범순의 평론집 <글쓰기의 최저 낙원>을 구해서 몇 편의 평론을 읽어본 바 있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그 평론집은 그 당시만 해도 지식 대중의 관심을 어느 정도 얻었던 문학평론의 후광을 입고 언론의 주목을 받은 책이었다. 그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신진 평론가 권성우, 이광호의 평론집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 책이 내게 의미롭게 다가온 것은 저자의 글쓰기가 내가 익숙해 있던 평론가들의 글쓰기와 미묘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급 화제였던 계몽을 계몽적인 방식으로 논하는 강한 주체들이 위세를 떨치는 지점에서 신범순의 글쓰기는 그들과는 다른 입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신범순의 문화 분석, 시 비평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의 글이 읽어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글이 난해한 개념이나 어휘를 동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의 호흡법에 있다. 그의 글은 일목요연하게 떨어지는 글이 아니라 꽤나 유장하고 때로는 한국어의 문법을 벗어나 있는 것같으면서도 그것에 투철한 글이다. 그것은 시 비평가로서의 그의 글쓰기 전략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바슐라르의 현상학적 방법에서 우러나온 바슐라르의 아우라를 입은 글쓰기를 그가 추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글이 김현 글을 연상시키는 구석도 바로 이런 지점과 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신범순의 이런 글쓰기는 너무나 단정적이고 교조적인 목소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신선한 하나의 목소리였다. 물론 그는 계몽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날 것 그대로가 아니라 그의 사유를 통해 변형된 방식으로 되묻는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계몽적이지만 억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한국 현대시의 퇴폐와 작은 주체>라는 다소 난삽한 느낌을 주는 제목은 생소함을 주지만 이 책에 담긴 하나 하나의 글은 한 권의 책을 위해 쉽게 주조된 글이 아니라 그가 긴호흡으로 차근차근 써 온 글이라는 점에서 글땀 내음이 물씬 풍기는 책이다. 그는 학문적 탐구와 동시대 비평을 오가면서 그동안 평가 절하 내지 보류, 무시되어 온 퇴폐의 위상을 끌어올리며 진지한 탐구의 주제로 삼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시의 주체를 하나의 동일한 주체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 한 편의 시에서도 다양한 주체가 등장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우리의 일상의 세세한 결에 대한 점검, 확인을 통해서 걸러지는 작은 주체들에 관심을 갖기를 당부하고 있다.

그가 다루는 퇴폐, 주체의 문제들은 그동안 경시되거나 일방적 시선으로만 이해되어 온 것들로서, 그가 글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처럼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런 작업을 하자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건 그가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가 입론으로 삼고 있는 니체와 들뢰즈의 어떤 담론들이 아직 이 땅의 의식 지평에 이제야 서서히 떠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그가 국문학자로서는 드물게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번역해 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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