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1
이성숙 지음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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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가 매매춘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기존의 매매춘 관련 페미니즘 담론은 매춘 여성의 현실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매춘 추방 운동은 매춘 여성의 인권을 사각지대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와 아울러 서구 역사를 훑으면서 매매춘의 근절 불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적어도 생소한 것은 아니다. 그 대안으로 매매춘과 매춘 여성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것만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안을 내놓는다고 해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매매춘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이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독교주의적 억압, 가부장주의적 억압의 틀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을 만인이 공유하게 될 때 매춘은 인간 본성의 필연적 욕구 배출의 통로로서 인정되고, 그 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보통 임금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을 파는 건전한 임금 노동자로서 지위가 부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매춘 관련 페미니즘 담론의 다양한 조류를 비판하고, 서구 역사의 경험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비판적 의욕과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과도한 욕망은 다소 도식화된 시각적 틀의 제시만으로 그치기 십상이다. 매춘 문제와 관련해 저자는 우리에게 시각을 바꾸라고만 한다. 그러나 매춘 문제는 우리의 일상적 생활 경험과 동떨어진 추상 수준의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이다. 저자의 논의처럼 매매춘과 매춘 여성을 긍정하는 시각을 가지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가. 물론 이것은 저자나 개인적으로 마음을 먹은 몇 사람의 변화가 아닌 전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요구하는 문제이다. 또 이 문제는 특정한 대상을 대하는 시각이나 가치관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일반적 수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이 저자의 주장처럼 토대의 변화나 제도상의 변화를 매개하지 않은 추상적 선언 차원의 담론으로 가능한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추상적 담론 수준에서 제기하는 시각의 전환이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도덕주의적 호소가 아닐까? 정신과 지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이제 그 대칭항으로 변하는 것, 그런 변화를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저저가 추상적으로나마 공상하는 미래 사회의 어느 가정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자. 남편은 아내와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아 아내의 욕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 관계를 맺지 않으며, 바로 옆 건물의 매춘 타운 208호실의 A라는 젊은 아가씨를 매일 찾는다. 아내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곧 관계를 청산할 생각이다. 또 아들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성불구자가 되자 며느리는 남편의 성불구를 이유로 떠나가고 아들은 매춘 여성과의 관계도 불가능해진 자신의 처지에 깊은 좌절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수능시험을 마친 딸은 정부의 고급 관리나 전문 경영인을 주로 상대하는 고급 매춘 여성이 되기 위해 모대학 성산업대학 고급매춘여성학과에 지원한 상태이다.

이것은 가상에 불과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불가능한 세상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논의는 가능성 있는 우려와 불안, 의혹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되지 않고 있고, 추상적 담론을 지지해줄 토대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현재 객관적으로 존재할 매춘 여성의 고통과는 무관한 지적 담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저자의 주장은 기존의 지배적인 페미니즘 주장과는 달라 숙고해볼 점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 주장 역시 이 책의 독자에게는 무력감만 심어줄 뿐이다. 매춘이 가부장제적 권력관계와 섹슈얼리티와 육체에 대한 기독교주의적 억압 그 양자와 연관된 고리라고 할 때, 매춘 여성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주장하는 저자의 시각은 매춘 여성을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담론적 시헤자의 모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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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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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는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시 읽기의 어려움이란 딴 데 있지 않다. 시쓰기란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주조하고 그 이미지들이 병치됨으로써 하나의 문학적 공간을 탄생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그 이미지들을 주조하는 언어나 화법은 대개 소설이나 일반적인 글에서 보게 되는 명료한 구문을 벗어난 분절적이며 파편화된 어구들이 병첩되거나 때로는 기괴한 약호나 기호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기호들의 해독에 시 읽기의 참 묘미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독자들은 시를 통해서 자신이 처한 외적 현실을 한발짝 떨어진 견지에서 바라보며 삶의 위안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시인의 주관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화법은 오히려 독자들의 시 읽기의 즐거움을 해치게 된다. 물론 흔히 난해시라고 분류될 수 있는 시들의 존재 의의를 평범한 독자라 하더라도 깡그리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갈수록 고립화된 담안으로의 행보를 계속하며 상호 소외의 길을 걷는 작금의 시의 실상은 적어도 대중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자기를 놓을 줄 모르는 유미적 유폐자의 모습이 아닐지 반성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시인도 시를 떠나서는 그네들의 독서 대중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그 역시 시를 통해 삶의 구원을 찾는 또다른 생활인이 아니던가.

그런 측면에서 나희덕의 시는 적어도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대중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그녀의 화법은 분절적이지 않으며 우리 말의 화법을 따르면서도 깔끔한 맛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읽기에 편하다. 읽히지 않는 시란 달리 말하자면 읽을 수 없도록 쓰여진 시인 셈이다. 시인 스스로 자기만의 성을 쌓는다는 건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빚어지는 오만의 산물이라면 눈치 있는 독서 대중은 그의 전략에 비웃음을 던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나희덕의 시는 애초 그런 전략 자체에서 거리가 멀다. 그리고 나희덕 시의 또 다른 미덕은 자신의 바라보며 귀기울이는 대상에 자기 자신을 던져놓고 멀찍이서 그 자신의 대상화해서 바라볼 줄 아는 반성적 사유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의 핵심에는 그 자신의 삶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격렬하지 않고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날픈 듯하지만 그 만큼의 무게로 역설적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시들에는 그 힘겨운 날갯짓의 편린들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우리가 삶을 대하는 가장 보편적인 시선이기 때문에 그 정서적 공감대는 폭넓은 편이다. 우리는 삶에 대해 그다지 격렬해질 수는 없다. 때때로 그런 순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나희덕의 시적 화자처럼 삶의 미세한 결을 따라가면서 그 곳에서 언뜻 내비치는 의미를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반성적 사유는 시에 있어 필수 요소라 하겠지만, 이것이 반복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반성적 사유 그 자체가 견고한 핵심에 존재하면서도 그 반성적 사유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관습이나 형식적 한계로 자신을 얽어맨다고 느낄 때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독자의 주목과 인정을 받는 시인이라면 앞으로의 한 걸음에 대해서 항시 고민하게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나희덕에게 있어 이 시집은 그가 넘고 있는 산의 정상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정상은 코앞이고 그는 이제 다른 목표를 정해 하산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하산이란 등산의 대칭적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어떤 길을 향해 어떤 행로를 밟을지 지켜보는 건 시 읽기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시적 언어는 미지의 세계로의 열림 바로 그 자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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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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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이후 지식계에 탈식민주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학계 일각에서는 해체주의의 뒤를 잇는 고급 수사의 일종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과연 그러하냐 여부를 떠냐 탈식민주의가 내세우는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사이의 권력 관계를 해체하려는 관심은 의사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지배와 연이은 미국의 신식민주의적 지배 경험을 가진 우리 상황에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이드를 필두로 한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제국주의 국가의 작가들이나 공문서 등을 통해 서사 담론의 권력성을 폭로함으로써 서구 정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현 시기 중동, 아시아 각국과 미국을 필두로한 유럽 사이의 갈등을 어떤 시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사이드 이후 세대의 사이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사이드 자신이 제국주의 서사의 권력 욕망을 비판하면서 미국 중심 학계에서 권력을 얻고 있는 상황은 일종의 모순이라는 점, 그리고 탈식민주의가 이론화되기 이전 제3세계에서 지속적으로 터져나온 탈식민주의적 목소리를 불가시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탈식민주의자의 원형이라할 프란츠 파농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미약하지만 우리나라에도 그의 저서가 출간되었는데,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그 첫 번째 번역서이다. 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출신의 흑인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다시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활동한 정신분석의인 파농은 백인의 아이덴티티를 욕망하지만 끝내 좌절될 수밖에 없는 시도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결국에는 신경증과 정신병, 자살 충동에까지 이르는 흑인들을 지켜보며, 검은 피부라는 것을 천형이나 원죄로 내면화해 온 서구 백인들의 지배적 서사에서 벗어나는 길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흑인근본주의자처럼 생물학적 요소를 본질화하는 우월주의는 경계한다. 말로는 쉽지만 이런 갈등과 불안을 극복하고 안정감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파농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검은 피부이고, 그 검은 피부는 서구 역사 속에서 열등함의 기표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인간 삶에 있어 이 검은 피부는 다양한 차별과 굴종, 노예의식의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역사에 있어 유태인에게도 다양한 비난과 모욕이 가해져왔고, 아시아인도 서구인의 의식 속에는 열등한 종족이라는 느낌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민족이나 종족, 인종, 성의 차이를 떠나 모든 인간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지금 앞으로의 세계사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중산층이나 지배자, 우월한 자에게 이런 문제의식이 자발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 언제나 결여나 결핍을 느끼는 쪽에서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공감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연대함으로써 문제는 공론화되거나 해결의 과정을 밟아왔다. 그럴 때 어찌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노예라는 위치에 대해 비관하기보다는 그 위치가 오히려 떳떳하고 당당한 의식을 갖게 해준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리라. 그런 면에서 파농은 비단 흑인 중의 뛰어난 지식인이나 저항가가 아니라 주체적인 의식을 가진,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복한 노예의 상징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 길에는 적어도 그 이상의 고난과 불안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은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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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혐오자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14
에드 맥베인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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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무수히 많다.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헐리우드 영화 초기 필름느와르라는 하나의 독특한 장르로 양식화되었고, 이후 끊임없이 재현의 소재가 되어왔다. 법의 정의로운 집행자를 지향하는 경찰 사회의 명분과는 달리 사람들은 경찰 사회가 그다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실정법들이 권력자들에 의해 쉽게 짓밟히는 경우들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현대 사회에서 욕망은 점증하지만 그것들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신문 지문을 통해 해외 토픽으로 종종 보도되는 증오범죄를 소재로 하고 있다. 특정한 계층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증오를 동기로 한 이 증오범죄는 현대 사회 그 자체를 타깃으로 삼기 때문에 그 어떤 범죄보다도 사람들을 패닉 상태에 빠뜨리기 쉽다. 87분서라는 가상의 경찰 조직의 형사들이 차례로 죽어나가지만, 경찰은 이 범죄가 형사를 상대로 한 증오 범죄라고 믿을 뿐, 범행의 동기나 범인의 신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작품 중반 이후 범인의 시점으로 묘사되는 장면이 등장함으로써 곧 범죄의 전모가 드러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되지만, 주인공 캐레라 형사는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사건에 힘겨워한다. 이런 상황은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와 함께 더욱 곤혹스런 느낌을 준다. 더위에 어쩔줄 몰라 하듯 캐레라는 사건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결국 범죄의 전모는 밝혀지지만 그 해결의 과정은 의외로 단순하고 돌발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전까지의 팽팽한 긴장, 미궁 속의 헤매는 듯한 느낌이 이 소설의 묘미라면 결말부의 해결 방식은 다소 안이하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이전에 제시되었더라면 느닷없다는 느낌은 덜 했을 것같다. 이런 약점을 제외한다면 이 소설은 경찰이 범죄를 대하는 방식이나 범인 유추 과정에서의 과학적 추리 등 재미있는 구석이 많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소설이나 필름느와르는 미국의 전형적인 대중 장르이다. 미국 외에는 이런 장르가 전형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장르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 미국적인 특수성이 놓여 있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복잡한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욕망의 강도는 더 강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욕망의 충족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욕망과 그 실현 사이의 갭이 큰 사회에서 욕망은 범죄를 낳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기괴한 모습으로 변형된다. 그 욕망의 심연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서사가 바로 경찰소설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비교할 때 우리 소설에서 경찰이나 범죄를 다루는 경우가 없다. 영화에서는 간간이 이런 작품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냈다는 인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공공의 적>이 흉내 차원이라면 <복수는 나의 것>은 이 흉내 차원을 넘어 한국적 현실에 좀 더 다가간 측면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경찰혐오자>는 형사를 감정과 생활이 있는 한 명의 현대인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투적인 경찰 영화의 전형화에서 벗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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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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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사가 홍성욱 씨의 책으로는 두 번째 접하는 책이다. 페미니스트 오조영란 씨의 남편이기도 한 저자는 90년대 초 학계에 경계 허물기 열풍이 불어닥쳤을 때 그 대표적인 본보기로 꼽힌 인물이다. 과학기술사라는 다분히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영역에 관심을 가진 그는 pc통신 문화에 대한 글을 많이 써 왔고, 특히 정보를 매개로 펼쳐지는 사이버스페이스 상의 문제점에 정통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지금은 캐나다의 모 대학에서 종신교수로 활동하고 있지만 국내 사정에도 밝다.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은 벤담의 파놉티콘 구상에서 근대 사회를 감시의 사회로 규정한 푸코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공장과 작업장에서의 감시, 그리고 전자 정보 매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감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의회나 언론을 넘어 파놉티콘적인 근대 기획을 넘어서는 역파놉티콘의 전망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 푸코식으로 현대 사회를 파놉티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패배주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인 발상으로, 권력의 차원에서 주체의 행위성을 간과하게 된다. 우리는 저자의 말처럼 파놉티콘을 넘어 파놉티콘 그 자체를 역감시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특정한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그 자체는 의도와 목적에 따라 우리의 삶을 짓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는 파놉티콘적인 시선을 거부하며 그 시선으로 다시 그 시선을 감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은 이런 가능성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푸코식의 비관을 내뱉기 쉽지만 말이다. 의정부 장갑차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들이 백악관 홈페이지를 다운시키자는 운동을 펼쳤던 사실은 현대 사회에서 정보 파놉티콘이 응시의 대상에 의해 어떻게 저항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훌륭한 예일 것이다.

여하튼 이런 전망에서 본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프라이버시, 즉 정보 파놉티콘 세상에서의 프라이버시는 이제 소극적으로 방기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이 주목하면서 빼앗기지 않아야 할 요소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푸코를 비롯해 파놉티콘과 연관된 여러 논의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논의의 기반을 정교화하고, 신문이나 잡지 보도 내용을 현장감을 부각시키는 체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파놉티콘과 연관된 벤담의 생각이나 도안을 삽입한 것은 적절했다고 본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은 사람조차도 파놉티콘 구상의 배경이나 현실화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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