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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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적어도 우리 지식계에서는 거의 시도된 바 없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일본 사상계의 거목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근대와 번역의 문제를 두고 벌인 대담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근대가 어떻게 찾아왔는가를 되물을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다. 일본보다는 반세기 정도 늦게 시작된 우리의 근대는 후진국적인 조숙성의 특징인 완성과 더불어 지양을 추구해야 하는 모순적인 과정에 놓여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소개와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 문화론의 부각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번역은 단순한 기게적 언어 변환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서 제기한 번역과 탈식민성 논제를 통해서 이제 번역은 근대의 심층적 의식 구조를 탐사할 수 있는 핵심적인 계기로 부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번역의 위상은 그에 합당한 권위를 얻지 못하고, 학문 미달 행위의 일종으로 치부되고 있는 실정이다. 번역 그 자체가 만사일 수는 없지만 번역은 적어도 정신의 기계적 수용을 넘어 한 사회의 창조와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필수 요건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수 없다.

일관된 형식과 논지를 갖춘 논설이 주는 유기성과 일관성을 바랄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지성의 향기가 흐르는 대담의 자유로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일본의 경우 번역을 둘러싼 시대 분위기의 양태, 어떤 책들이 번역되었으며 번역상의 흥미로운 점들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번역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의 소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포맷은 우리의 경우를 역추적할 수 있는 훌륭한 전거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번역과 근대의 문제를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흔히 개화기로 통칭되는 1890년대 이후일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이 새로 수용되며 우리 식으로 정착되던 초창기인 개화기의 경우를 검토해보는 것은 사상사적인 문제를 넘어 사회문화적으로도 현재의 맥을 짚어나가는 작업에 있어 필수적이다.

우리의 경우 번역은 원전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보다는 일역본에 대한 중역의 형태를 띤 것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필로소피’에 해당하는 우리말 ‘철학’은 일본인에 의해 조어된 인공물인데, 이런 경우는 부지기수이다. 따라서 근대적 용어가 인간 의식에 작용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런 사정에 대해 진지성을 발휘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하는 문제의 중요성 여부에 대한 당신의 감각!)

이 책은 근대의 문제를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우리에게 그 자체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와 더불어 이 책의 번역을 맡은 임성모의 성실한 역주는 그 정성만으로도 읽는 이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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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
권명아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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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자기정체성을 형성해가는데 있어 가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처럼 존재한다. 운명이기에 어떤 계기를 통해서도 벗어나기 힘들다. 그때 그는 ‘가족 로망스’로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난 원래는 고귀한 집안 출신인데 어쩌다 보니까 지금처럼 되었다”는 식의 얘기를 꾸며냄으로써 그는 환상적인 만족을 느낀다. 그렇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도 ‘가족 로망스’는 필수적이다.

사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가족은 다시 불려온다. 그 가족은 어떤 균열과 상처도 없는 원형의 공간, 모성의 공간으로 고난에 찬 이들의 혼란을 감싼다. 그때 그 과정은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명명되고 비판된다. 그러나 가족은 비판되면서 동시에 수용된다. 가족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당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라! 사회는 개인에게 그렇게 역설하고 상처입은 영혼은 알게 모르게 그곳으로 향하는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하고 섬뜩함을 느낀다. 그렇다. 인간의 자궁을 빌어 태어난 그 누구에게도 가족은 끊임없이 자신의 발목을 물고 늘어지는 여귀의 집요한 손짓처럼 존재한다.

이 책은 가족을 둘러싼 서사의 기원과 생성, 그 효과의 메커니즘을 근현대 한국소설들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다. 통념처럼 가족의 문제는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며, 모성신화와 가족주의는 일정 부분 파시즘적 형식으로 존재했음이 명백하다. 그리고 부르주아 여성 작가 전경린의 로맨스, 불륜은 근대 낭만주의 연애의 서사에 불과하다.

모두 맞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느껴지는 허전함은 무엇일까. 상상력의 부족이랄까. 현상을 분석할 때 분석의 틀에 정공법적으로 맞아떨어지는 현상만을 취사선택할 때 아귀가 맞아떨어진다는 흡족함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연관성이 없을 듯한 현상에 대해 본질의 잣대를 갖다댈 때의 난감함과의 부딪침을 애써 비껴갈 때 거기에는 균열을 은폐한 완벽함의 공허함만이 남는 건 아닐까. 방현석과 배수아, 신경숙의 텍스트가 일종의 취사선택의 결과라고 했을 때 그 무의식의 균열과 혼란마저도 드러냈으면 하는 것, 그것마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유별난 독자의 욕망이다. 따라서 가장 무난한 선택이라는 인상은 저자의 상상력에 대한 아쉬움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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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입문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31
미키 기요시 지음 / 소화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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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學)은 진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고 진리에 근거한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특별히 분명하게 하려고 한 것은 진리가 지니는 행위적인 의미이다. 철학은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언제나 다만 궁극적인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나날이 접촉하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을 가르쳐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심원하게 보이는 철학이라고 해도 모두가 헛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미키 기요시를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원 발표시간 때이다. 어느 발표자가 칸트미학의 구성적 상상력을 논하면서 미키의 <구성력의 논리>라는 그당시로서는 생소한 책을 인용했다. 패전 전 일본 철학자 미키 기요시라는 존재는 내게 생소하게 다가왔고,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다 옥사했다는 대목에서는 기묘한 느낌까지 주었다.

20세기 초 일본의 철학은 흔히 알려져 있다시피 칸트나 헤겔류의 독일 관념주의가 우세했고 세기말에 유행한 신칸트주의 철학이 일본을 석권하다시피 했고, 하이데거같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이 학계를 휩싸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그 흐름은 우리 초기 철학계의 뿌리이기도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관념주의에 익숙하고, 영미 분석철학에는 약한 국민이 됐다.

1920년 이후 러시아 혁명과 맑시즘이 세계적인 유행으로 일본 지식계를 강타했고, 이때부터 일본에는 맑스주의자들이 속속 등장했고, 정통은 아니었지만 미키 역시 이런 분위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군국주의자와 정통 맑스주의자 양측으로부터 질시와 박해를 받았지만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만큼 자신의 소신을 철학으로 실천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부분은 <철학입문>의 서문에 미키가 적어놓은 것이다. 이 책은 칸트철학의 견지에서 지식의 문제를 해설한 지식의 문제를 1장에서, 헤겔의 변증법에 기반한 행위의 문제를 2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철학은 궁극적인 문제와 더불어 현실적인 문제를 아우를 때만 진정한 철학일 수 있다는 말은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사회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 처한 운신의 폭이 좁은 철학자의 내밀한 현실 발언으로 읽혀진다.

미키의 이 책을 읽다보면 지금 우리의 철학이란 게 과연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궁극적인 문제에만 정향된 채 현실적인 문제를 놓쳐버린 공허한 말의 성찬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철학은 순전히 지식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파시즘과 맞서싸우다 끝내 파시즘의 몰락을 지켜보지 못하고 외롭게 죽었다는 점에서 미키기요시와 발터 벤야민은 비슷한 운명처럼 느껴진다. 벤야민에게서는 유대신의 강력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지만 미키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다는 외로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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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완 2008-10-07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키가 파시즘에 맞서 싸웠나? 진짜?

홍정완 2008-10-07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키가 파시즘에 맞서 싸웠나? 진짜?

홍정완 2008-10-07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키가 파시즘에 맞서 싸웠나? 진짜?

홍정완 2008-10-07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키가 파시즘에 맞서 싸웠나? 진짜?

홍정완 2008-10-07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키가 파시즘에 맞서 싸웠나? 진짜?

홍정완 2008-10-07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키가 파시즘에 맞서 싸웠나? 진짜?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
김영건 지음 / 책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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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이후 우리 문학비평은 시류나 정치적 동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언급되어온 얘기를 여기서 입 아프게 반복할 생각은 없다. 우리 문학비평은 맑시즘을 건너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생태학주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 전공자가 아니면 선뜻 이해할 수 없는 각종 주의에다 푸코, 들뢰즈, 크리스테바, 비트겐슈타인 같은 이론가들의 이름들을 무수히 건너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수한 주의와 이론가들에 대한 섭렵과 언급이 과연 지적 엄격성과 현실적 정당성을 깊이 캐묻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는가. 여기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저자 김영건은 영미분석철학 전공자답게 논리적 엄격성이라는 난마같은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문학비평에 대해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가라따니 고진의 글을 표절했다는 의혹으로 곤혹을 치른 문학비평의 대가 김윤식에 대해서는 그의 지적 고민의 근저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그의 논의가 지적 엄격성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각종 현란한 어구로 말의 성찬을 늘어놓는 식의 젊은 비평가들의 문학비평에 대해서도 날라리같은, 그 플라넬같은 성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책을 읽으면서 동감하는 부분이다. 해마다 문학비평은 그 현실적 정당성에 대한 캐묻기를 생략한 채 마치 유행에 따라 철지난 옷을 벗어던지듯 새로운 것만을 향해 나갔다. 물론 사유는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고 학문적 논의가 반드시 현실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학비평은 김영건의 비판에서 상당 부분 자유롭지 못하다.

또 하나 이 책에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은 김영민을 시발로 한 탈식민주의적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다. 다만 여기서는 김영민의 글이 주 대상이라서 조한혜정같은 사람의 논의에까지 정당성을 가진 비판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때 논문중심주의에 갇힌 우리 학문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주창해서 참신한 느낌을 주던 김영민의 생각이 여기서는 무참히 깨지고 있다. 김영민의 진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김영민 자신도 논문이라는 형식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안일하고 폐쇄적인 성격을 띤 학문 풍토를 비판하는 매개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라는 그의 저서에서도 얼핏 느끼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김영민 식 글쓰기 자체의 가치도 상대적임을 면치 못한다. 우리 현실에 기반한 학문은 중요한 가치지만 그렇다고 학자가 논문 형식에서 벗어난 수필류의 글만 쓴다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섣부른 탈식민성이 오히려 알맹이 없는 잡담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과연 우리가 바랄 바인가? 루카치나 아도르노같이 논문 형식을 탈피하면서도 논문 이상의 의미를 담은 자유로운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적 엄정성과 상당한 공부가 수반되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김진석처럼 섣불리 대가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해 김영건씨도 지나가면서 비판했지만 나 역시도 같은 느낌이다.

김영건은 요즘들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생태문학과 생태주의에 대해서도 그 논의의 엄정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지적 사대주의와 그 대척점에서 생태주의가 지적 엄정함을 상실하며 낭만주의적 유아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비중이 덜하지 않은 페미니즘이나 90년대 이후 독자적인 입지를 굳힌 신보주의적 동양주의 문학비평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의아함을 던져준다. 저자 자신의 관심 분야가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준비 부족 탓일까. 이 책에서 보여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저자에게 신뢰를 느낄 수 있지만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전적인 침묵은 저자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유보하게 만드는 맹점이다. 검증할 수 없는 탓이다.

김영건은 문학 비평에 대해서 할 말을 했지만 문학비평가 그 누가 나서서 이 성실한 비판에 답을 해줄까. 기다려보자. 아마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명의 논객을 상대하기 귀찮아서이거나 누구나 가진 약점에 대해 고달픈 변명을 늘어놓기 뭐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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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lesshin 2004-06-19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훌륭한 리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3
백문임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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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본이 많이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책의 규격이 그 내용까지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문고본 하면 가벼운 읽을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관습이 여전하다. 실제로 과거 문고본을 살펴봐도 그 내용만큼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범우 문고판이나 삼중당 문고판은 주로 10대 청소년 층에서 값싸게 지식과 감성을 얻을 수 있었다지만 그 내용은 그리 가벼운 게 아니었다. 다만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문고판화는 익히 알려진 고전에만 적용되었다.

최근 들어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를 비롯 여러 출판사에서 문고본 교양 서적을 출판하고 있지만 거기에도 그 나름의 한계가 있다. 외국의 저명한 출판사가 발간한 시리즈를 번역해서 출판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간 것이 책세상 문고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산한 지식을 문고판 형태로 출간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데는 우리 자신에 대한 비하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우리가 하면 얼마나 잘 하겠는가 라는 자조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비하로 이어진다. 이런 비하와 자조를 넘어서 젊은 학자들의 참신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게 됨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책세상 문고 43권으로 출판된 젊은 국문학자 백문임씨의 <춘향의 딸들>은 <춘향전>을 기원으로 한 20세기 대중문화 속의 여성 주인공들에 대한 한 여성주의적 읽기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속고>같은 신파극, <무정>같은 근대소설, 영화화된 <춘향전>들, 60년대 유행한 <월하의 공동묘지>같은 여귀 영화들이 그 대상이다.

이와 같이 대중문화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읽어내려는 노력은 주로 영화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대중화되어 있지만, 백문임씨처럼 국문학자가 장르를 뛰어넘어 그것도 주로 영화에 상당수 분량을 할애하여 연구결과를 내놓은 것은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대학원의 일부 여자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을 취한 연구들이 시도된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낯섬으로 인해 보수적인 학계에 쉽사리 수용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한 세기에 걸친 근대 대중문화의 궤적을 훑어 그 맥을 짚어내려는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 참신하고 이후 여러 가지 연구의 시발점으로 충분히 그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맥을 짚어내는 원천으로 <춘향전>이라는 단선적 코드에만 의존한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춘향전>은 수세기 동안 기층민의 삶의 코드의 하나로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삶에서 반추된 자양분이겠지만, 그것은 필자 자신도 느낄 테지만,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과 더불어 급속도로 해체된 것이다.

그것은 최근 영화화된 임권택의 <춘향전>이 별 반향을 얻지 못하고 조용히 퇴장한 사실을 보아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필자의 논의에서 결락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춘향전>을 논의의 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이다. 왜 유독 <춘향전>인가 그리고 필자의 논의 내용이 사실 영역에 속한다 하더라도 <춘향전>의 여성주의적 코드가 과연 <장화홍련전>이나 <심청전>의 그것보다 지금 시점에서 비판적 생산성이 있을까.

젊은 연구자들의 산뜻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는 문고본을 내고 있는 책세상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문고본의 확대야말로 지식 문화의 대중화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 길에 많은 출판사들의 참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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