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5
한학성 지음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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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를 보면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다. 그리 유창한 영어는 아니지만 그는 영어를 어떤 식으로 마스터했을까 하는 것.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그것도 외국인 바이어를 상대하는 비즈니스맨도 아닌 그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는 <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라는 책에서 나왔다. 물론 같은 어족에 속한다는 어원적 기득권은 있지만, 고등학교 과정만으로도 영어 구사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인 한학성의 답변이다.

복거일의 도발적 문제제기로 시작된 영어 공용어화론의 배경과 논쟁 과정상의 허점, 다양한 논의들이 가진 허점, 그리고 가능한 대안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언어에 대해 가진 깊은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을 되묻게 된다. 논쟁의 열기가 식은 이 시점에서 영어를 공용어화 해야 되느니 마느니 침을 튀기는 것보다 정작 중요한 일은 이런 주장이 제기된 배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살펴보고,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하는 일이다.

나는 이 책을 두고 친구와 설전을 벌이게 됐다. 물론 그 논쟁은 뚜렷한 입장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책을 두고 진지한 토론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만족스러웠다.

영어를 대하는 관점상의 차이는 전제하더라도 영어를 10년 이상 공부하면서도 영어가 언어로서 충분히 녹아 내리지 못하는 현상은 문제적이다. 언어적 기득권이 없다는 상황적 특수성은 감안하더라도 지금의 영어는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교육되고 학습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문자 중심의 교육에 편중된 영어 교육의 폐해로 인해 상당수 엘리트마저 간단한 영어 한 마디 쉽게 하지 못하는 반불구자(!)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서 이 책은 영어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당국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 이의에는 그 나름의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영미에 편향된 우리의 영어 교육 모델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한국 화자를 위한 영어 교육을 제시하고 있다.

한학성의 주장은 기형적인 영어 교육의 폐해를 절실히 느끼는 이 땅의 수많은 영어 학생들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외침이다.

언어를 의식적 학습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벌써 무의식적인 존재인 언어 그 자체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의식을 의식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려는 정신분석학적 고통을 이런저런 이유로 감내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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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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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를 좀 더 심도 있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정신 문화의 기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특정 사회의 특정 성원들의 믿음의 기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어느 때나 요청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현상만을 말 그대로 '추수'하기에도 시간은 항상 모자란 판국이니 말이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단말마적인 반응으로만 넘겨버릴 수 없는, 뱃속의 가시 같은 존재가 문제가 된다면 번거롭기만 한 이런 노력도 그리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세계의 허다한 나라 중에서도 일본은 가장 기묘한 나라로 다가온다. 과거 역사에 대한 묘한 청산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주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역사 왜곡은 변신한 가해자의 전 모습을 끈질기게 캐물어야 하는 피해자의 기억을 이어받고 있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기미가요와 히노마루의 법제화를 피해자들이 거부하는 이유조차 모른 채, [원령공주]같은 저패니메이션의 세계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우리 시대에 있어 일본은 신화가 탈정치적인 모습으로 일상의 대중문화에 파고든 기묘한 나라이다.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박규태의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는 가해자의 심리의 근저를 파고드는 심문자의 입장에서 읽어본 책이다. 이 책에는 일본의 창조신화로부터 시작해서, 전통종교 신도, 백제를 통해 전래된 불교, 그리고 이 둘이 일본적으로 변형된 각종 일본식 불교, 기독교, 옴진리교로 대표되는 신흥 종교 등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일본 문화의 초심자에게는 이만큼 개론서로서의 역할이 충분한 책도 드물어 보인다. 일본 신화에 대한 관심이 <고사기>같은 묵직한 책을 곧바로 집어들게 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 중간 매개가 필요하다고 할 때, 박규태의 이 책은 그런 측면에서 충실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같다. 특히 이 책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상징천황제의 기저에 깔린 의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창조신화와 신도에 대한 설명과 현대 일본 대중문화의 기저에 깔린 에콜로지의 기원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신도론적 관점에서 <원령공주>를 해석하고 있는 결론이다.

물론 이 책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책이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 정도로 삼고 읽어보는 게 중요할 것같다. 특히 저패니메이션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일본 신도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신도는 가장 일본적인 사고 방식으로서 거기에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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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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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과 추리문학의 만남이라는 신선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즐거운 살인>은 맑스주의자가 추리문학을 통해 서구 사회의 무엇을 읽어내고 무엇을 비판할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고전 추리물 출판과 더불어 추리문학 읽기 붐이 형성되고 있는 시점이라 <즐거운 살인>의 출판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추리문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추리문학론이 부재한 상황에서 <즐거운 살인>은 비판적 인식이나 개괄적 지식을 독자에게 공급하는 유일한 지침이 될 것이다.

추리문학을 저급한 대중문학의 일종으로 치부하고 백안시하는 우리의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서구의 경우 추리문학은 고급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로 대단히 활성화되고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자본주의적 발전의 형태와 속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수 백 년에 걸친 완만한 발전으로 자본주의적 생활 양식과 습성이 대중들의 의식과 행동에 결정적으로 각인된 서구의 독서 환경과 우리의 속도전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빚어낸 독서 환경 사이의 차이는 밑바탕에 대한 천착을 부정하고 오로지 서구 자본주의의 고급스러운 문학에 대한 탐식에 매달려 왔다. 그런 탓에 고급문화에 대한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가치평가는 자연스레 대중문화에 대한 저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추리문학으로 통칭하기에 이 범주가 포괄하고 있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주목할 부분은 범죄소설이다. 지금도 가장 많은 서구 대중 문화가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도덕적 일탈이다. 개인적 수준의 범죄에서부터 조직이나 국가 차원의 범죄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은 다양하다. 거기서 추리나 스릴러, 공포같은 다양한 하위장르들이 탄생하고, 문학 컨텐츠는 궁극적으로 영상 컨텐츠로 탈바꿈하여 대중문화의 지층을 넓히고 있다. 유명한 고전 영화의 경우 상당수가 소설을 오리지널 소스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즐거운 살인>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범죄는 인간성의 심층에 놓여 있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지표이다. 현대인은 선행보다 악행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만델이 얘기한 바이지만 현대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억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행에 대한 관심이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성에 대한 통찰을 열어주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추리문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나 관심은 필요하며, 우리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우리 얘기의 등장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추리문학은 극소수 작가에 한정되어 있는 편이며, 우리 것에 대한 편견 탓인지 그렇게 주목받고 있지 않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고급문학주의가 대중에게 심어놓은 대중문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크게 작용할 것같다. 그러나 요즘의 추리 문학 붐은 '저급한 대중문학'이라는 왜곡된 망령의 힘이 미치지 않는 독자층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우리의 문학은 그 폭이 좁고 그 영향력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런 경향을 불식시키고 대중들의 진정한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소설가들의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문학성은 그 소재에 있지 않고 그 소재를 가공하는 작가의 정신에서 비롯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전문출판사 <이후>는 구태의연한 사회과학을 넘어 구태를 지양한 참신한 사회과학을 추구하는 듯하다. 소수의 젊은 인력들의 노력은 참신한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즐거운 살인>에서도 적지 않게 보이는 교정 미흡의 흔적들은 그 노력을 갉아먹는 듯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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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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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근대적 개념인 주체보다는 기계라는 개념을 쓰고 싶어요. 현실을 훨씬 더 생동감 있게 반영한다고 생각되거든요. 곧, 어디에 접속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것들로 변이되고 표현된다는 점에서 주체 개념보다는 기계 개념이 더 적절하다고 봐요. 제가 쓴 글들은 제 고유의 산물이 아니에요. 저는 주변의 수많은 사건과 사유의 편린들을 `절단·채취'하는 기계였을 뿐이죠.”

이 글 서두에서 인용한 글은 김윤식이 아니라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수유연구실 원장(?) 고미숙이 인터뷰 과정에서 밝힌 고미숙 표 비평론의 한 대목이다. 최근 저서인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은 이러한 고미숙 표 비평론을 확인할 수 있는 예이다. 고미숙의 이 책은 개화기시가나 신문 논설을 1차 자료로 삼고, 몇 권의 책을 방법론으로 삼아 ‘썰’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책 한 권 쓰는 거 아무 것도 아니다.

1장 ‘민족’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2장 ‘섹슈얼리티’는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3장 ‘병리학’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아이디어를 ‘절단,채취’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미숙과도 희번죽한 얼굴로 인터뷰까지 했던 이명원이 김윤식식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건 왜일까. 아이디어의 출처를 밝히고 안 밝히고의 차이일까. ‘표절’은 앞으로도 수시로 우리를 뒤흔들 것이다. 그러나 과연 ‘표절’ 논쟁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인가. 도덕성 재무장의 필요성인가, 인식과 지평의 확대인가, 아니면 상처뿐인 폐허인가.

고미숙은 단순한 사람이다. 불필요한 늬앙스를 배제하려면 ‘단순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심플한’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고미숙에게는 주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단순하거나 심플한 것이다. 그에게는 그가 말하는 ‘기계’적 역동성만이 존재하고, 그의 다른 저서 제목이 밝혀주듯 그는 ‘비평기계’일 뿐이니까. 그는 그 역동성을 사랑할 뿐, 고답적인 주체나 자의식의 환상을 벗어나 있다. 비평기계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 수 없고 끊임없이 유동한다. 그에게 장소는 문제되지 않고 기계의 움직임을 추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상관없다. 그것이 김윤식과 고미숙의 차이라면 차이랄 수 있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만을 두고 본다면 김윤식과 고미숙은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 이명원이 산파처럼 끼여들었던 것이다.

고미숙의 심플함은 그 나름으로 견딜만하지만 ‘비평기계’를 대하는 나같은 이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무언가 결락된 부분을 느낀다. ‘비평기계’가 생산하는 ‘기계적 비평’을 흔쾌히 자의식 없이 좋아하기에는, 주체나 자의식을 깔끔히 벗어던지고 기계의 단순함을 만끽하기에는 우리는 여전히 주체의 장안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미숙의 이문열 비평을 읽어보셨는가. 다른 페미니즘 비평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파토스가 없다. 낯설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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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세계의 만남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45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장화경 옮김 / 소화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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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는 충격적인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암살한 안중근의 처형 장면이 스틸 사진으로 공개된 것이다. 물론 그 보도가 나간 이후 유족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뉴스에 보도된 사진의 인물은 실제 안중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견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정작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우리들이 의사로 추모하는(그러도록 강요되어온) 안중근이 아니라 그 의거의 피해자가 된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일본이다. 이토는 안중근의 행위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악인으로 규정되었고, 우리에게 있어 이토는 소극적인 앎, 단순한 앎의 대상이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일본에 한해서 보면 적극적 앎보다는 소극적 앎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는 맹목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가로놓여있다. 민족주의가 끼친 해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편견없이 일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길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의 95%는 일본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그 관심도 비이성적이다.

<일본과 세계의 만남>은 미국의 일본학 연구자 마리우스 잰슨이 지난 200여년간 일본과 세계의 만남을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막부시대, 메이지시대, 20세기로 3분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이 책은 근대적 격변기마다 일본이 어떤 식으로 외부세계를 이해하고 대응해나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일본 역사는 다소 생소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비슷한 사정에 처해 있던 우리 역사와 대비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한일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면 흥미롭기까지 하다. 특히 근대적 격변기의 몇 몇 인물을 거멀못삼아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 지루한 느낌도 덜하고, 명료한 느낌을 주는 논리 전개가 일본 저서를 읽을 때와는 좀 색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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