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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최근 김영하작가의 북클럽을 통해 추천해주시는 책들을 읽고 시간이 되면 라이브 방송도 보았습니다. 8월의 책은 이자벨아옌데의 ‘영혼의 집’이었는데 바로 어제의 라이브 북토크 중 작가님이 엄마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 가족의 이야기를 알아보는 시간이 중요함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읽게 된 이 책을 통하여 그 의미를 다시 알게 되었네요. 삼천과 새비의 이야기가 오로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미선과 지연에게도 차곡차곡 쌓여진 모습을 보며 울컥울컥 하다가 결국에는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냥 눈물이 주르르 흐른 정도가 아니라 어깨가 들썩이고 콧물까지 흐르는 울음 중에 이 북받치는 감정이 너무나도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겨우 추스르고 책장을 덮은 후에도 한동안 얼굴을 감싸고 있을 정도였지요. 저에게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 책이 너무 오랜만이라 삼천과 새비가 더욱 소중해지면서 더이상 볼 수 없는 할머니들이 그리워졌습니다.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녀는 열일곱 살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일평생 입다물고 죽은듯이 살았던 열일곱의 증조모가 마지막 나날에야 자유로워졌다.
예전에는 부모가 누구인지에 따라 귀한지 천한지를 갈랐다고 아저씨는 말했다. 그러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온 뒤 조선인들은 양반이고 상민이고 간에 그저 천한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 사람들은 기런 걸 좋아한단다. 아저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 영옥이는 씩씩하고 밥도 잘 먹고, 크게 웃고 공도 잘 차고 달리기도 잘하지. 희자랑도 친하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 아재빈 키가 크구 목도 길구, 항상 웃구 밥도 잘 자시구. - 듣기 좋구나. 끝이 아니라요. 아재비랑 있으면 우리 어마이랑 아바이랑 모두웃구, 새비 아즈마이두 웃구, 희자도 웃구, 아재비가 오기 전이랑 달라요. 아재비는 해 같은 사람이라요. 낭중에두 해를 보믄 아재비가 생각날 것 같아요 - 말 하는 거 보라우 영욱이는 낭중에 시인을 해야 갔어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영옥이 받아라. 희령에서 잘 지내느냐. 내는 일없다. 이상하게두 재봉틀 돌리고 있으면 너가 내 곁에 붙어서 종알종알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어. 시끄러운간나, 기게 영옥이었더랬지. 목소리가 까랑까랑해서 백 리 밖까지 들릴것 같았다. 그 목소리로 이 책을 몇 번이고 읽어줬더랬지. 몇 번을 들어도 재미가있었어. 영옥아, 내레 너를 처음 봤을 적부터 더러운 정이 들 줄 알고 있었다. 저리 가라면서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도 너는 강아지마냥 내게 오더구나. 세상이 뒤집히구, 나도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비웃어도 할말이 없어. 내 너를 전쟁통에 만났다.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내 살아 있을 때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영옥아 영옥아 이렇게 불러 본다 항상 건강해라 건강해라 영옥아 할마이가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공공장소에서 남편이나 자식에게 화를 내는 여자들, 버스에서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 길에서 전화 통화를 하며 분노를 쏟아내는 여자들을 엄마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런 상스럽고 저급한 짓을 하는 건 자기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런 엄마가 본인이 평생을 피해가고자 했던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다. 엄마의 지적이 마음에 내리꽂히는 것과는 별개로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분노를 발산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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