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상을 떠난 폴 오스터는 가지 않은 혹은 가지 못한 운명의 길에 대한 마지막 책을 남겼습니다. 줄리언 반스는 마지막이라고 선언한 책에서 (어쩌면 또 나올수도 있다는 기대는 하고 있겠습니다마는) 기억을 잃어가고 병에 걸리며 늙어가는 인생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최근 부모님은 확실한 노년에, 저는 분명한 중년에 들어가며 노화와 죽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노년의 자애와 환상 없이 작가가 들려주는 냉철한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새겨집니다.
존재가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 그동안에 벌어지는 사고와 질병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우주의 일일 뿐이라는 것, 따라서 싸우거나 노여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위로가 됩니다.
앞서 쓰여진 모든 이야기가 동시대에 함께 살고 있는 그의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다니 정말로 그가 나의 팔에 슬며시 손을 올려준 기분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얼마전에 짧지 않은 입원을 했다하고, 이언 매큐언도 비슷한 나이이니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는 무엇이 될까요?

"너희가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희 인생 최고의 몇 년이 될 거라는 걸 잊지 마라." 옥스퍼드에 다니는 동안 이 예언이 이따금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라는 건가?" 나는 그런 의문을 품으며 우울로 빠져들곤 했다.
프루스트는 어딘가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은, 설사 연인 사이라도, 똑같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설사 연인 사이라도"를 "특히 연인 사이일 때는"으로 바꾸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왜 감정생활이 더 투명해지고 이해하기 쉬워져야 하는가? 더 늘어난 세월은 그저 우리를 더 좆같이 망쳐버릴 새로운 근거와 주제만 제공할 뿐일 수도 있는데. 나는 노년의 고요를 믿은 적이 없다. 그건 늘 노인을 더 우러러보게 하려고, 또 우리가 더 속 편하게 살려고 만든 우화처럼 보였다.
잘 들어, 스티븐은 폭풍이야, 항구가 아니라. 너한테는 놀라운 일일지 몰라도. 허리케인 스티브. 그래, 그게 멍청하게 들린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너하고 늘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억압적일 수 있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사랑은, 현실에서는, 소설가 아저씨, 당신이나 당신 족속이 묘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세월은 깊은 성숙을 주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마치 어떤 고대 희곡 속의 불운한 운명의 피조물들처럼, 자신들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자기 삶을 반복해야 하는 저주에 걸려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책을 아주 많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 자신이 조언 센터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스티븐과 진을 내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취급하여, 그들을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살살 이끌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삶과 픽션을 혼동하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나쁜 사람이었던 적이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 강력한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공정하다고, 또는 공정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 뒤에, 어쩌면 우리의 현재 이해를 넘어선 어떤 근본적 수준에서는 공정성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가의 믿음이 대비책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이런 느낌의 출처는 아마도 종교적 믿음의 찌꺼기(또는 심지어 그런 믿음이 충만한 상태)일 것이다. 나는 비르히니아 토레시야의 애처로움과 당혹스러움—세계의 본성과 마주한 그녀의 순수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는 삶이 공정하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것, 종종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고, 가끔 나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며, 모든 평온한 표면 밑에는 늘 갑작스러운 혼돈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만큼은 이 행성에서 충분히 긴 세월을 보낸 게 분명하다. 아내는 충만한 삶을 살던 시절에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37일 뒤에 죽었으며, 나는 그녀의 빛이 죽어가는 것에 맹렬히 분노했지만, 공정함이나 정의가 교활하게 위장하고 이 문제에 끼어든다고 상상하지 않았다. 내가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간단한 구절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그 무렵 갑자기 내게 다가왔고 또 지금도 내가 계속 활용하고 있는 이런 말이었다. "우주가 그냥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죽어갈 때도 그럴 것이다. 내가 벗하며 갈 수 있는 암이 변이를 일으켜서건 다른 병으로건, 아니면 어떤 하얀 밴이 내 차를 추돌해서건, 아니면 복수심에 찬 소리 없는 전기 자전거가 보청기를 안 끼고 나갔다는 이유로 나를 벌하건. 그래서 나는 맹렬한 분노가 거의 없기를 바란다.
노화에 관한 두 가지 노련한 발언.
1) 나보다 여섯 살 연상인 아내 팻이 했던 말. "나이가 들수록 당신에게서 가장 용납하기 힘든 특질들이 견고해진다."
2) 나보다 열여덟 살 연하인 파트너 레이철이 하는 말. "늙는 건 용납되지만 늙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몸이 쇠퇴해도 머리와 심장은 여전히 작동한다.
"나는 사는 데 관심 있을 뿐, 그냥 존재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나는 병과 노쇠를 생각할 때 가끔 이 사건을 떠올린다. 그냥 우주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당신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그러니까 씨발 어서 안으로 꺼져, 알았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나?
지금만큼 나이를 먹지 않았을 때 내 규칙 가운데 하나는 "모든 책을 마지막 책인 것처럼 쓰자"였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다그친 것은 죽음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작업을 해내도록 조용히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필요한 허세였다. 내 가족이 죽지 않았지만 죽었다 생각하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그렇다고 죽기를 바랐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두 규칙 때문에 내 책 가운데 어느 한 권이라도 그런 규칙이 없었을 경우보다 나아지거나 나빠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모든 책을 마지막 책인 것처럼 쓰는 것이 더 가혹하고, 동시에 더 현실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따금 이런 생각도 딸려 나온다. "이것으로 끝내도 나쁘지 않을 듯해."
그때 내가 둘러본 세상에서 "무르익음"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부모와 조부모와 그들의 친구들은 어떤 면으로도 "무르익어" 보이지 않았고 그저 늙어 보일 뿐이었다. 일부는 중년으로 늙었고, 일부는 노년으로 늙었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무르익지 않았고, 기껏해야 시들었을 뿐이었다
나를 철학적으로 만드는 게 나에게 무르익음이 도래해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쇠퇴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 몸의 일부는 수십 년 동안 천천히 기능이 약해져 왔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당신이 우리의 관계를 기쁘게 여겼기를 바란다. 나는 분명히 그랬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즐거웠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팔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 —아니, 당신은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나는 슬쩍 사라지겠다. 아니,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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