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생각은 성노동자를 희생자로 여기는 것은 그녀를 주체로 보지 못하게 만들며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주체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마 성노동 그 자체의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바로 성노동자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가로막는다는 생각도 이와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희생자의 파토스"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예컨대 발리바르는 '희생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곧바로 그/녀들의 주체화를 가로 막는 것은 아니다'라고 명시적으로 반박한다. 반대로 희생자는 자신이 부당하게 희생되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자신의 탈-희생자화가 만인의 해방의 조건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즉 스스로를 '인민의 인민'으로 제시함으로써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성노동자의 주체화를 위해 성노동자가 이 사회의 희생자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분명 오류다. 이러한 '부인'은 성매매를 정당화하려는 남성주의자들의 논리가 다시 슬며시 뒷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한국인권뉴스, 한국양성평등연대 등 "성거래" 영구존속론자가 끼어드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성노동자의 운동을 '계약'을 깨뜨리는 부당한 사용자(포주든 클라이언트든) 등에 대한 저항 내지 보다 나은 계약을 위한 운동으로 가두고(따라서 성노동 운동을 자신이 목소리 높여 비판하는 자유주의적 한계 내로 가두고) 성노동 그 자체는 즉시 문제 삼지 않거나 먼 미래의 과제로 무기한 연기시키는(즉 성매매의 폐지라는 목표의 실현시점만을 연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폐지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 자체를 연기시키는) 위험을 갖는다.



게다가 한 발 더 나아가서 성노동이 그 자체로 폭력이 아니며, 따라서 다른 노동과 다를 바도 없는 노동일 뿐이라고 본다면, 특정한 산업분야로서의 성산업을 폐지할 이유 자체가 모호해질 수 있고, 여기까지 논의가 이르게 되면 성매매 궁극적 폐지론과 영구존속론은 사실상 차별점을 상실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성노동을 (궁극적이든 즉각적이든) 어쨌든 폐지시켜야 되는 이유는 성노동 그 자체가 남성주의적 사회에 의한 (간접화된) 집단 강간이며, 따라서 명백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폭력의 희생자인 성노동자에게 행해지는 사회의 '이중낙인'을 제거하기 위해 성노동의 폭력성 자체를 부인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생각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이중낙인은 그 자체로 폭력의 폭력, 폭력에 대한 폭력의 과잉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력"이라는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중력에서 탈출하자고 말할 수 없다면, '성노동은 폭력이다'라는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남성에 의한 여성 유린으로서의 성노동의 폭력에서 탈출하자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러한 폭력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길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진보연대가 성노동자 운동에 굳건히 연대하고 있는 것을 누구 못지 않게 지지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사회진보연대 내에서 더 깊이 이루어지고 현재의 노선이 재고될 수 있기를 또한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미 올린 '논평'이라는 글에서 했던 말을 중언부언한 것을 용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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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 수학적 사유를 강조하는 책들

2004년 04월 23일   강성민 기자 이메일 보내기

변화의 시대, 수학적 사유를 강조하는 책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고 있다. 수학을 통해서 생각하면 기존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에 빠져들게 되고 그것은 세계관의 변화와도 직결된다는 주장들이다. 그 가운데 '사고혁명'(루디 러커 지음, 김량국 옮김, 열린책들 刊)은 대표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수, 공간, 논리, 무한 그리고 정보라는 다섯 영역에 따라 사고할 수 있다.

수학의 다섯가지 사유의 유형

예를 들어 인간의 손은 5로 표현될 수 있으며, 공간적 관점에서 보면 곡면이고, 논리의 관점에서는 근육의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또한 무한의 관점에서는 무수한 수학적인 점들의 응집체가 된다. 이 밖에도 손은 그 외양을 결정하는 DNA 암호 속에 포함된 정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수학의 다섯 영역을 독특한 방식으로 연관시키며 독자들을 수학의 깊은 세계로 안내한다. 욕실의 타일에서부터 두뇌 반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다비드의 별 등 수학과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도 여기에서는 수학적 사고를 설명하는 소재가 된다.


결국 강조되는 것은 수학에서 건져낸 '사고의 도구들'이다. 저자는 수학이 하나에서부터 무한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대체 언어가 된다는 점에서 수학의 힘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수학'(경문사 刊)도 비슷한 책이다.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수학은 인간의 정신적 한계를 확장하고, 물리학의 최소단위까지 접근하는 동시에, 우주의 가장 바깥까지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놀라운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수학을 도구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근본적인 진리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수학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O.J 심슨 재판이나 주말 저녁 온가족이 함께 볼 영화고르기,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예상치 못했던 소재들까지 다뤄진다.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수학을 보다 친숙한 것으로 다가가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수학이란 '수에 대한 학문'이기 전에 '사고 방식에 대한 학문'이라는 저자의 생각이다. 수학은 사물을 뒤집어 놓기도 하고 늘였다 줄였다 심지어 없애보기도 하면서 그것의 진정한 본성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 저자가 볼 때 인간의 생리와 경험은 근본적인 지식과 진리에 닿고자 하는 의식에 방해물이 돼왔다. 하지만 수학의 도움으로 인간은 사물을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수학은 '관계에 대한 학문'이다. 수학이 우리 주위의 기본 관계들을 어떻게 밝혀주는지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인과 관계, 증거와 증명의 관계, 진리와 미의 관계가 그것이다. 저자는 시적 열정이 풍부한 서술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과 우주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동전의 앞뒷면과 같음을 이야기한다.


교양과학 서적을 만드는 출판사들 사이에선 '경험의 법칙'이 하나 있다. "책에 수식이 하나 들어갈 때마다 독자가 반으로 줄어든다"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법칙이다. 그런데 이런 금기를 아랑곳않고 수학의 매력을 발산하는 책이 '사인 코사인의 즐거움'(엘리 마오 지음, 파스칼북스 刊)이다. 이 책은 삼각함수에 관해 그 탄생에서부터 20세기 양자역학의 탄생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역사적인 관점에서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돋보이는 건 삼각함수의 해석학적 성격과 기하학적 의미다. 삼각법이 복소수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무한급수를 해석하는 틀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깊이의 수학'을 보여주기에 무리가 없다.

우주론으로 확대되는 수학의 힘

전문가들에게도 수학은 신비에 휩싸인 사고의 영역이다. 거기엔 우리 시대의 기하학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무한 변화가 약동하고 있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수학의 밀레니엄 문제들7'(케이스 데블린 지음, 전대호 옮김, 까치 刊)이다. 미국의 억만장자 랜던 클레이가 문제당 1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건 21세기 최고의 수학 난제 7가지를 소개한 책인데, 저자는 명확하고 직관적인 글솜씨로 일반인들의 눈높이로 끌어내려 설명해주고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리만 가설', '양-밀스 이론과 질량 간극 가설', '내비어-스톡스 방정식' 등이 '무엇인지'가 아니다. 저자가 추구하는 목표는 오히려 문제들의 배경을 보여주고, 문제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야기하고, 그 문제들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 설명하고, 왜 수학자들이 그 문제를 중시하는지 이해시키는 것이다. 그 동안 일상생활이 수학적 원리로 이뤄져있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처럼 통해왔지만, 그 원리를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수학의 세계에 발목잡힌 인간군상들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 새로운 점이다.


수학적 사유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 '아름답다'는 데 있다. '20세기 수학자들과의 만남'(경문사 刊)의 저자 양재현 인하대 교수는 그 이유를 창조성과 엄밀성에서 찾는다. 수학의 발전이 양수에서 음수, 다시 무리수로 변해온 것이 모두 세계를 좀더 세밀하고 명확하게 이해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 그 욕망은 우주는 팽창된 것이고 무한하다는 물리학의 정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주의 점'(재너 레빈 지음, 이경아 옮김, 한승 刊)은 수학의 한 영역인 '위상학'(topology)를 우주론에 대입시켜 우주는 무한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을 편다. 우주가 하나의 점에서 팽창한 둥근 점이고 당연히 시작과 끝이 이어진 球形의 유한체라는 가설인 셈이다. 우주에 끝이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을 증명하는 엄밀한 과학적 논리, 그 과학적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일상의 예들이 잘 조합돼 있는 책이다.


©2004 Kyosu.net
Updated: 2004-04-23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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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소수정치와 네그리의 삶정치


조정환





어떤 탈근대적 저자들은 출현하고 있는 모델의 주변부에서 구멍이 난 곳을 찾는다. 그러나 그 주변부는 초월의 문턱 즉 거의 초월에 해당하는 내재성이며, 유물론적 리얼리즘이 신비주의에 고개를 숙이게 마련인 모호한 장소이다. 어떤 이들은 끊임없이 이 주변부를 읽는다(데리다). 다른 이들은 마치 그것이 마침내 포착된 부정적인 것의 힘을 모으는 곳인 양 그것을 응시한다(아감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레비나스에게서처럼) 타자를 기다리는 갈망 속에서 신비주의로 귀결한다[네그리, 2004, 126].





1. 서론

네그리(Antonio Negri)는 오랫동안 정치적 활동에 종사했으며 정치를 자신의 사유의 중심에 놓아 왔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분명한 윤곽을 갖는 정치학이 있다. ‘코뮤니즘(communism)’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세계 질서의 주권적 배치를 규명하고 그것을 변형시켜 나갈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을 규명하는 혁명적 정치학이 그것이다. 최근에 그것은 ‘제국’, ‘비물질노동’, ‘다중’ 등의 개념적 요소들을 축으로 하는 ‘삶정치(학)’으로 다시 짜이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전통에서 설명되어온 ‘공산주의=경제적 코뮤니즘’과의 구분을 위해 자신의 ‘삶정치적 코뮤니즘’을 ‘내재적’인 것이자 ‘자율주의적’인 것으로 설명해 왔다.

그렇다면 들뢰즈(Gilles Deleuze)에게도 정치학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내용, 어떤 특징을 갖는 것인가? 들뢰즈에게는 정치학이 없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임은 들뢰즈의 직접적인 발언들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그는 인간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정치를 느끼면서 정치를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사유의 분명한 윤곽이나 방향을 특징짓기는 쉽지 않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의 정치학을 서로 다르게 특징짓는 것은 아마도 그의 사유의 복잡성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의 존재론적 정향에 주목한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는 그에게서 ‘내재성의 정치학’을 읽어내며(하트 참조), 다양성 및 욕망 개념에서 출발한 폴 패튼(Paul Patton)은 ‘탈영토화의 정치학’을(패튼 참조), 차이의 철학과 외부의 사유에서 시작한 이진경은 ‘노마디즘의 정치학’을(이진경 참조) 읽어내고 있다. 니콜래스 쏘번(Nicholas Thoburn)은 들뢰즈의 정치학을 맑스의 정치학과 좀더 분명히 대면시키면서 들뢰즈의 정치학을 ‘소수정치학’으로 독해하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를 보여주었다(쏘번 참조).

들뢰즈의 정치학을 읽어내는 이 독해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글의 관심사는 오히려 들뢰즈의 정치학1.과 네그리의 정치학의 차이 및 공명의 관계에 두어진다. 이 차이와 공명의 관계가 발생하는 곳은 존재론적 수준에서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Bergson)을 따라, 가능성-실재성의 관계쌍을 기각하고 잠재성-현실성의 관계쌍 속에서 존재를 사유한다. 반면 네그리는 잠재성-가능성-현실성의 이행을 통해 존재를 사유한다. 나는 존재의 잠재성, 가능성, 현실성에 대한 두 사람의 이러한 이해의 차이로부터 어떻게 서로 다르면서도 깊게 공명하는 정치학이 발전하는지를 살펴보는 한편, 이것이 맑스주의의 혁신에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는지를 검토해 볼 것이다.

2. 정통에 대한 거부와 가능성의 존재론으로서의 맑스주의

이미 밝힌 것처럼 우리의 문제는 맑스주의 혁신의 지평에서 들뢰즈와 네그리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존재론과 정치학에 대한 비교로 나아가기 전에 이 글에서 내가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미리 밝혀두기로 하자. 나는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하나의 특정한 경향성에 붙이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요컨대 맑스주의는 코뮤니즘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을 규명함으로써 그때그때의 코뮤니즘적 주체성의 구성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참여하는 이론적 및 정치적 실천들이다. 그것은 결코 맑스에 의해 이미 표명된 말들에 대한 충실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또 그것은 맑스의 담론에서 파생된 특정한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혹은 정치학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맑스주의가 기억의 정치학이 아니라 미래에서 영감을 얻는 혁명적 실천인 한에서 맑스주의에 ‘정통’(orthodox)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통’은 우리를 과거의 기억에 묶어 놓음으로써 새롭게 사유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밧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맑스주의를 일체의 정통에 대한 거부로, 다시 말해 과거의 혁명적 기억들까지도 도래할 가능성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여 현재의 ‘때’ 속에 합류시키는 방식으로 과거와 관계 맺는 태도로 이해한다.2. 요컨대 맑스주의는 잠재성과 현실성의 이중운동 혹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을 ‘가능성’을 중심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운동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재정의는 다음 두 가지 해석 경향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첫째로 이것은 맑스주의를 현실성을 중심으로 해석해온 현실주의적 객관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현실주의적 해석은 코뮤니즘을 존재의 잠재성과 접목시킬 수 없다. 그 무능력으로 인하여 그것은 자본주의 붕괴론에 기초한 혁명적 기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안정론에 기초한 구조개혁주의로 이동했다. 둘째로 이것은, 맑스주의를 잠재성 쪽으로 구부려 마침내 현실성에서 유리된 ‘아름다운 영혼’3.에 의지하게 된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이 경향은 잠재성의 발견을 통해 현실(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행했으나 그 잠재성을 현실성과 연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코뮤니즘을 부정하는 반맑스주의로 흐르거나 코뮤니즘을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럴 때 잠재성은 현실의 주변이나 구멍 혹은 초월적 영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잠재성과 현실성이 서로 대립적으로 이해되곤 하기 때문에 가능성에 대한 맑스주의의 강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4. 가능성은 현실적 잠재성이자 잠재적 현실성이며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의 장이기도 하다. 가능성은 두 수준 사이의 발생공간이자 생성의 표면이다. 따라서 가능성의 존재론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잠재력(potentiality)이 현실의 구성력(constituent power)으로 나타나는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3. 들뢰즈의 ‘잠재성의 존재론’

그렇다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및 정통 맑스주의의 퇴조 속에서 혁명적 사유의 재구축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들뢰즈는 맑스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들뢰즈 자신은 ‘정통적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자신을 ‘맑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양면적 태도를 취했다. 『맑스의 위대함』에 대한 구상은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 기초한 맑스주의 혁신의 플랜이었을 것이다.(쏘번 참조) 들뢰즈는 ‘존재론적 선회’를 통해 ‘객관적 현실의 인식’에 정향되어 있는 기존의 인식론적 맑스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일의적이다’; ‘사유와 연장은 평행하는 존재의 속성이다’; ‘실재는 현실적인 것인 동시에 잠재적인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반복해서 주사위를 던지는 제곱능력의 차이들이다’;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 차이들의 분화이자 배치이다’.5. 이러한 생각을 맑스의 생각과 비교해 보자. 우리는 맑스가 『자본론』(Das Kapital)에서 ‘자본주의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가 높은가 낮은가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맑스, 1990, 5)는 진술에서 우리는 현실성에 대한 경험적 묘사가 그의 탐구과제가 아님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문제는 이 법칙들 자체에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하며 또 관철되는 이 경향들 자체에 있다’(5)고 말하면서 자신의 연구대상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이다’(5)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경험적 자본주의를 그 값으로 갖는 상대적 규정관계들, 자본주의의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반면 들뢰즈는 ‘현실의 운동이 그렇게 나타나도록 만드는 잠재적 이념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탐구했다.


맑스적인 의미의 사회적 이념들은 존재하는가? 맑스가 “추상적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여기서 추상되는 것은 노동생산물들의 특정한 질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질이다. 하지만 생산성의 조건들, 사회의 노동력과 노동수단들은 추상되지 않는다. 사회적 이념은 사회들의 양화가능성, 질화가능성, 잠재력의 요소이다. 이 이념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이념적인 다양체적 연관들의 체계, 또는 미분적 요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미분비들의 체계이다. (…) 그런 비율적 관계들의 변이성에는 특정한 특이점들이 상응한다. 이 변이성과 특이점들은 규정된 한 사회를 특징짓는 구체적이고 분화된 노동들 속에서 구현되고, 이 사회의 실재적 결합관계들(법률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 속에서 구현되며 이 결합관계들의 현실적 항들(가령 자본가-임금노동자) 속에서 구현된다.(들뢰즈, 2004, 405)


이 인용문의 후반에서 드러나듯이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관계,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그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언명한다. 사회적 이념에서 미분비들의 체계로, 미분비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에서 사회의 실재적 결합관계들과 이 결합관계의 현실적 항들로의 존재론적 이행에 대한 위의 서술은 잠재성에서 가능성으로, 다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존재의 운동에 대한 언명이다.6. 하지만 그의 주요한 관심은 이 운동과 이행에 두어져 있기보다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의 독립성을 밝히고 현실적인 것을 잠재적인 것으로 미분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혁명적 잠재력은 물론이고 혁명적 가능성마저 현실성 혹은 실현가능성의 척도로 재단되어 억압되고 있던 당대 서구운동의 개혁주의적 추세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유의미하고 유효한 전략적 구부림이었다. 순수회상, 지속, 에레혼, 아이온, (비)-존재 등의 ‘비가능한’ 이름들을 통해서만 환기할 수 있었던 존재의 잠재성에 대한 호소는 실용과 실리에 깊게 물든 운동에 충격을 추었고 1968년에 온갖 현실주의적 환상을 깨고 일어난 다중의 목소리와 겹쳐졌는데, 이로 인하여 들뢰즈는 누구도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잠재성의 철학자로 되었다.

잠재성의 복원7.을 통해 존재를 일의적인 것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것은 현실주의적 객관주의적 맑스주의를 파열시키고 새로운 단절선을 출발시키는 획기적 성과임이 분명하다. 들뢰즈는 맑스주의적 유물론이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현실의 승인과 인식’을 넘어 사유와 연장, 잠재와 현실을 포괄하는 존재의 이중운동에 대한 물음과 배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의 대부분은 잠재성의 실재성을 입증하는 데 할애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환기되어야 한다. 잠재성은 직접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재성의 실재는 주로 철학적 개념으로만, 그리고 예술적 형상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이 분석되지 않고 잠재성이 그 자체로, 즉 이념으로서의 차이 자체로 분석될 때 여기에 수반되는 가장 큰 위험은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들로 전락하는 것이다.8. 들뢰즈는 과연 이 위험을 피하는 데 성공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통해 가능했는가?

들뢰즈는 베르그송(Bergson)을 따라 가능성을 현실성의 전사(傳寫)로, ‘해(解)를 받아들일 논리적 가능성’(들뢰즈, 2004, 353)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의미의 가능성은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 그가 가능성-현실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쌍을 잠재성-현실성이라는 베르그송적 쌍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가능성에 대한 다른 이해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능력들을 실현할 새로운 배치를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일까? 말년의 들뢰즈는 가능함, 가능태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한 순간에 조용하고 아늑한 한 세계가 있다. 갑자기 그 장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한 표정이 떠오른다. 여기서 타자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매우 다른 어떤 것, 가능한 세계 혹은 두려운 어떤 세계의 가능태로서 나타난다. 이 가능성의 세계는 현실 아닌, 혹은 아직은 현실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표현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표현된 것, 표정 혹은 표정에 상당하는 것이다. 타자란 우선 이러한 가능한 세계의 실존이다. 그리고 이 가능한 세계 역시, 그 자체 내에 고유한 하나의 현실을 가능성으로서 지닌다. 즉 표현자가 “나는 두렵다”고 말하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표현된 그대로의(설사 그의 말이 거짓일지라도) 현실을 가능함(le possible)에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타자 개념에 있어 가능한 세계와 표정은 표현된 것과 표현으로 각기 구별될지라도, 가능성의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표정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념의 접점은 구성요소들을 끊임없이 가로지르며, 그 안에서 오르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각 구성요소는 강도적 특질, 일종의 강도적 세로좌표이다. 이는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다양한 의미값들이 주어지거나 하나의 일관된 기능으로 지시됨에 따라서 일반화되거나 특수화될 수 있는 순수 단순한 어떤 특이성―‘하나의’ 가능한 세계, ‘어떤’ 표정, 단어‘들’―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들뢰즈․가타리, 1995, 29~34,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가능성은 결코 현실성의 단순한 전사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강도적 특질, 특이성, 표정 등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가능태를 미적 범주로 확정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기보다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기념비란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함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시킴, 즉 거기에 실체를 부여함이다. 다시 말해 사건에다가 하나의 육체를, 삶을, 우주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루스트는 예술-기념비를 체험보다 우위의 어떤 삶으로, 그 ‘질적인 차이들’로, 또한 우주 렘브란트나 우주-드뷔시와 같이 그 자체 고유의 한계들, 자체들 간의 거리들과 근접함들, 자신의 고유의 성좌들, 그러한 것들이 운행시키는 감각의 집적들을 구축하는 ‘우주들’로 정의한다. 이 우주들은 잠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가능태들, 즉 미적 범주로서의 가능태(가능함,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질식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가능함의 실존이다. 반면 사건들은 잠재태의 현실, 모든 가능한 우주들을 조감하는 사유-본질의 형식들이다. 그렇다고 감각보다 개념이 원칙적으로 우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감각에 대한 개념 하나라도 그 자체의 고유한 방법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며, 또 개념이 그 절대 형태 내에 필연적으로 존재해 있지 않다 해도, 감각은 가능한 자기의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들뢰즈․가타리, 1995, 256, 강조는 인용자)


잠재태로서의 개념과 가능태로서의 감각을 대비시키는 이상의 인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들뢰즈가 강도, 특이성, 표현, 분화, 극화의 개념을 통해 가능성, 가능태, 가능한 것을 사고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가능성-현실성’의 쌍을 대체하는 ‘잠재성-현실성’의 쌍을 통해서 우리는 분리된 두 범주를 확인하는 것에 머문다. 이 양자가 서로의 반쪽이라고 말해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강도, 특이성, 구성으로 나타나는 가능성의 장을 통해 잠재성과 현실성의 교차와 이행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성의 장이야말로 들뢰즈의 초험적 경험론의 대상이며 네그리의 맑스주의적 유물론의 대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공명을 확인한다.

물론 들뢰즈는 가능성의 장을 주로 예술에서 확인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확인될 수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살적 구현’은 삶의 일상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운동의 객관법칙을 규명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운동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여 움직이며 구현되는 코뮤니즘의 살을 규명했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즘의 가능성의 장이며 가능태이다. 물론 우리가 읽고 있는 현실의 『자본론』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살의 형성을 간헐적으로, 그리고 난외적으로만 다룬다. 그렇지만 자본론의 초고인 『요강』(Grundrisse)은 ‘사회적 노동’의 형성과 구현의 과정을 보여주고 또 전망함으로써 삶 속에 실재하는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밝힌다. 이처럼 가능태는 결코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점차 예술로 전화하는 삶 전체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맑스주의는 삶의 이 가능성의 탐구와 코뮤니즘적 가능성의 장에의 참여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혁신하는 정치학이다.

이제 예술 영역을 넘어 좀더 직접적으로 들뢰즈의 정치 개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전통적 정치학에서 정치는 권력의 점이자 절편으로 흔히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정치가 오직 현실성의 수준에서만 탐구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우파는 물론이고 좌파 역시도 권력에 대한 이 현실주의적 이해를 계승했다. 혁명정치는 현실의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지배적인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지배/피지배 관계를 부단히 재생산하는 정치 개념, 즉 다수주의적 정치 개념이다. 들뢰즈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는 소수적 정치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현실 권력의 문제를 잠재력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하고 권력이 잠재성의 삶을 절단하는 체제임을 밝혀낸다. 이러한 인식에서 현존하는 다수주의적 정치 개념으로부터의 단절선이 출현한다. 그것은 소수정치의 선, 즉 현존하는 체제가 삶에 새겨놓은 절단선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파열하는 특이성의 선들을 발견-접속하여 공통적 탈주의 선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들뢰즈의 정치학에 대한 쏘번과 하트의 해석을 비교해 봄으로써 들뢰즈 정치학의 한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니콜래스 쏘번은 들뢰즈의 사유에서 두 가지 삶의 과정, 태도를 확인한다. 다수적인 것과 소수적인 것이 그것인데, 다수적인 것이 동일성, 표준, 상수를 추구하는 가수적(可數的)인 과정을 지칭하는 것임에 반해 소수적인 것은 삶의 일탈 혹은 탈영토화의 과정을, 몰적 표준에 대항하여 세계의 잠재성을 불러내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본다.(쏘번, 56) 다수적인 과정이 다수주의적 형태를 가짐에 반해 소수적 과정과 경향 속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하나는 하위체계를 구성하는 소수성이며 또 하나는 잠재적이고 창조된 생성으로서의 소수주의적인 것이다.(56) 이 세 가지 형태들이 과정, 태도, 경향을 함축하는 한에서 이것들은 정치적이다. 쏘번이 ‘소수정치’라는 개념을 제안하는 곳은 여기에서이다. 소수정치는 ‘동일성을 강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혁신, 실험, 그리고 뒤섞임의 과정’이며 그 속에서 ‘공통체의 형식들, 실천의 기술들, 윤리적 태도들, 스타일들, 지식들, 그리고 문화적 형식들’이 구성되는 과정이다. 쏘번은 이 과정이 ‘갇힌’ 상황에서, 즉 어떤 자율적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운동을 동일성으로 가두는 사회적 힘들이 가득찬’ 공간에서 수행하는 정치이며 민중이 없는 상황에서 전개하는 발명의 정치라고 해석한다.(58)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집단이 아님은 물론이고 코뮤니즘의 가능성이나 정치적 살도 아닌 일종의 정치적 구성의 양식으로 이해된다.(153) 그것은 활력, 논쟁, 지속적 심문, 계략, 발명의 활기찬 과정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동일성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맑스주의가 가능성의 정치(학)인 한에서 그것은 체제에 의해 주어지는 동일성에 대한 거부이며 잠재성을 불러내는 과정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분명히 활력, 논쟁, 계략, 심문, 발명 등에 의해 추동된다. 하지만 쏘번은 들뢰즈가 이 발명의 정치의 공통적 행위자를 이름 부르기를 거부했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구성의 양식’으로 이해될 뿐 구성의 정치적 주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설명은, 들뢰즈가 새로운 민중의 생성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들뢰즈 정치학에 대한 적실한 설명으로는 보기 어렵다. 마이클 하트는 쏘번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들뢰즈에게서 실체(표현자)가 양태들(표현되어지는 것)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내재하게 되는 것은 속성들(표현들)을 통해서이며 속성들 속에 포함된 형식들의 공통성(commonality)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and the Problem of Expressionism)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들뢰즈에게서도 속성들의 표현은 존재의 공통 형식들을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트는 이것을 다음처럼 분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화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속성들에 의해 신은 양태들의 세계 안에서 절대적으로 내재적이다(완전히 표현된다). 다른 한편 속성들의 공통 형식들을 통해 양태들은 신적인 실체에 완전히 분유한다. 내재성과 분유는 속성들의 표현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이다. 표현적 속성들에 의해 주어지는 이해와 유비적 고유성들에 의해 부과되어지는 복종을 구별해주는 것은 이러한 분유이다. 기호들의 체계는 우리에게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침묵하는 기호들과 기호학의 계명들은 존재론을 폐장(閉場)시킨다. 오직 표현만이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열어 놓을 수 있다.(하트, 195)


그렇지만 절대적 내재성은 일의성에 대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속성들은 (내재성으로부터 뒤따르는) 내부적인 공통 형식에 의해 특성화될 뿐 아니라 외부적 복수성에 의해서도 성격이 규정된다. 다시 말해서 표현적인 긍정 신학이라는 이러한 이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무한한 속성 속에 구현된 형식적[형상적] 공통성을 상이한 속성들 사이의 형상적 구별에 의해 보충할 필요가 있다. 신의 본질은 하나의 속성 안에서 표현될 뿐 아니라 무한한 수의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 안에서도 표현된다.(198)


속성들은 형상적으로는 구별되고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하다. (…) 속성들은 각각 상이한 형상으로, 그러나 동일한 의미로 존재를 표현한다. 일의성은 속성들 사이의 형상적 차이를, 그러나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론적 공통성을 함축한다.(198)


따라서 속성들은 우리에게 조직화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하트는 들뢰즈가 이 속성들의 조직화에 부정적이거나 그것에 무관심했다고 분석한다.(232)9. 쏘번이 소수정치를 동일성에의 참여이자 그것과의 교전이며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로 이해하지만 그의 소수정치학은 존재론적 일의성에 적극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민중의 생성의 문제에 무관심하게 (혹은 부정적으로) 되었는데 이것이 들뢰즈의 이 취약점이 투영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 정치(학)이 다양한 속성들의 공통성을 조직화하는 과정으로 파악되기보다 동일성과의 교전이라는 수준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 이럴 때 민중의 부재 속에서 전개되는 그 교전은 동일성에 대한 반작용에 지나지 않으며 잠재력의 우선성은 부정된다. 이러한 이해에서 존재론적 자율에 대한 부정이라는 관념이 발생한다. 자율은 존재론적 일의성, 다양한 특이성들의 공통성, 그리고 공통성의 조직화에 기초한 내재적 코뮤니즘의 이념이다. 자율에 대한 거부는 존재론적 일의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부재(이것은 쏘번에게서만 나타난다)와 속성들의 공통형식에 대한 회의(이것은 쏘번과 들뢰즈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가 남겨놓은 정치학적 흔적이다.

4. 네그리의 ‘가능성의 존재론'

이미 말한 바처럼 들뢰즈는 속성들의 공통성의 조직화 가능성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는 칸트(I. Kant)적 공통감(권리상 자연적인 공통감)을 본성상 올바른 사유, 초험적 모델로서의 재인과 결부된 사유의 이미지로 비판할 뿐만 아니라,(들뢰즈, 2004, 300~301) 나아가, 소통과 창조를 대립시키면서 특이성들 사이의 소통불가능성을 역설했다.10. 그렇다면 일의성을 강조하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공통성을 부정하는 그의 정치학 사이에는 깊은 균열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공통성의 조직화 가능성을 강조하는 네그리와 들뢰즈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들뢰즈가 소통과 공통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공통성과 소통의 실존양식들(재인의 공통감과 부당한 종합들, 그리고 합의적 여론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는 것이 옳다. 그는 구성되고 생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전제되어 있는 공통감을 비판하며(들뢰즈, 2004, 301) 지층화된 기호체제에 입각한 소통의 양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소통불가능성은 실제로는 재현불가능성을 의미한다.11. 이것은 소통의 실존양식에 대한 비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나아가 그는 도주선들이 서로 연결됨으로써만 블랙홀로 빠져들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들뢰즈, 2001, 555) 이것은 그가, 다른 한편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 조직화의 가능성과 그 필요성을 긍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들뢰즈는 특이성들의 공통적 조직화를 원리적으로 승인하고 있지만 그가 그것을 풍부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논의는 도주적 생성에 집중되며 이 점에서 생산적 구성에 집중되는 네그리의 논의와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네그리는 부정적 종합들에 긍정적 종합들을 대치시키고 후자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또 발전시키려 시도하는 점에서 들뢰즈와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존재론이 ‘잠재성의 존재론’(鈴木 泉, 190~208)이라면 네그리의 존재론은 가능성의 존재론이다.

물론 네그리는 존재의 일의성의 관점을 들뢰즈와 공유한다. 하지만 그는 잠재성의 실재성의 규명에 철학적 노력을 기울이는 들뢰즈와는 달리,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이중운동 속에서 ‘가능적인 것의 구성’에 관심을 집중하며 가능성의 장을 경유하는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규명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잠재성(차이 자체 혹은 차이의 이념)은 직접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되기보다 그것의 가능적 조직화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탐구되며 현실성도 가능성(경향)에 비추어서 해석되고 비판된다. 잠재성으로서의 행위할 힘(power to act)과 그것의 자본주의적 현실태인 노동이 산 노동의 가능성의 계보적 형태들(전문적 노동자, 대중 노동자, 사회적 노동자) 속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잠재적인 것을 다중 속에 있는 (존재하고, 사랑하고, 변형하고, 창조하는) 행위할 힘(powers to act)이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이미 다중의 잠재적 역능이 어떻게 투쟁에 의해 구축되고 욕망 속에 공고화되는지를 보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잠재적인 것이 가능한 것의 경계선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지, 그래서 현실적인 것에 닿을 수 있는지 연구해야만 한다.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가능한 것을 통과하여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이행은 근본적인 창조행위이다. 산 노동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구축하는 것이다. 산 노동은 가능성의 전달수단이다.(네그리․하트, 2001, 456~7, 강조는 인용자)


네그리는 ‘잠재성의 창조적 역능’을, ‘존재가 언제나 창조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의 행위임을 강조할 필요에 대해 인정한다’.(457) 하지만 그는, 가능성을 실재성의 재현으로만 간주하는 베르그송주의의 존재론은 ‘창조된 존재의 현실성, 그것의 존재론적 무게, 세계를 구조화하고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창조해 내는 제도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한 불충분하다’(457)고 본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관심이 처음에는 다중을 구성하는 잠재성의 요소들이 지닌 강렬도에 있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잠재성들이 축적되어 스스로의 힘에 적합한 실현의 문턱에 도달한다는 가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470)고 말하게 된다. 네그리에게서 문제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던져지고(분화와 극화, 밖주름운동) 다시 현실성에서 잠재성으로 떨어지는(미분화, 안주름운동)의 주사위 놀이, 영원회귀의 운동이 아니다. 그가 파악하는 존재에게 영원회귀의 원환적 운동은 없다. 실재하는 것은 잠재성에서 가능성으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의 부단한 이행운동이다. 생산된 현실성은 이 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행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구성하므로 이 운동은 직선으로 진행되는 회귀하지 않는 시간이다.12. 이것은 날아가는 화살촉의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불려진다.(네그리, 2004, 16~17) 들뢰즈가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아이온의 시간을 구별하고 아이온의 선차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둔다면 네그리는 아이온의 시간의 선차성에 대한 인정 위에서 아이온이 크로노스를 향해 이행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관심의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것의 존재론이 분석의 중심지형이다’(네그리․하트, 2001, 470)라고 단언한다.

가능성은 존재가 힘으로 나타나는 평면, 즉 역사적 경향의 평면이다. 이 평면에서 힘들의 적대가 움직인다. 맑스의 추상 개념은 가능성의 평면에서의 이 적대를 드러내 보여준다. 첫 번째의 추상, 즉 추상노동은 자본 측에서의 추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산 노동을 양화하여 그것의 잠재력으로부터 그것을 분리시킨다. 임금노동은 자본이 산 노동으로부터 잠재력(행위할 힘, 창조력)을 분리하여 통제하는 추상의 형식이며 일종의 형식적 추상이다.(457)13. 그것의 결실은 이윤이다. 두 번째의 추상은 노동 측에서의 추상이다. 산 노동의 이 추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행위할 힘의 전반적 틀이며 잠재적인 것 자체이다.(457) 이 실질적인 추상에서 산 노동은 행위할 힘의 적극적 표현으로 드러나며 자본주의에 예속된 임금노동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규제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적 노동으로서, 가능성의 형식으로서 드러난다. 이 사회적 노동은 현존질서와 질서 재생산의 규칙들을 넘어서는 생산적 힘 혹은 ‘생산적 과잉’이다. 그리고 ‘이 생산적 과잉은 해방의 집합적 힘의 결과인 동시에 노동의 생산적이고 자유로운 역량들의 새로운 사회적 잠재성의 실체이다.’(457~8) 즉 실질적 추상의 결실은 ‘내재적 코뮤니즘’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회적 잠재성의 실체이자 실질적 가능성의 장인 사회적 노동이 갖는 두 가지 특질에 대한 네그리의 분석이다. 첫째로 그것은 특이하며 보편적인 활동력이다. 둘째로 그것은 확장력, 존재론적 구축의 힘, 가치변환의 힘이다. 첫 번째 특질 때문에 업(業, res gestae)의 장 전체는 ‘척도 바깥에서’ 잠재성에 의해 물들여진다. 잠재성이 전진하면서, 기록과 업적(業績)으로서의 역사(historia rerum gestarum)는 실효된다. 역사(history)가 끝나면서 유일한 역사적 능력은 역사성(historicity), 업의 시간에 주어진다. 이것은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을 접속시키는 특이한 잠재성들이며 특이성으로부터 공통성을 생산하는 행위의 시간이다. 두 번째 특질 때문에 잠재성들은 ‘척도를 넘어서는’ 혁신기계들로 표현된다.(471) 특이한 잠재성들은 낡은 가치체계 및 착취체계에 지배당하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고유의 환원불가능한 가능성들을 창조한다.(471) 첫 번째 특질에서 업은 파괴력으로 나타나며 두 번째 특질에서 업은 구성력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은 파괴와 구성의 함수를 갖는 가능성의 기계의 기능이 된다. 이것을 통해 우연성에서 필연성이 구성되는 것이다.

5. 소수정치 대 삶정치

그러면 이 구성의 이념은 들뢰즈의 사유와 대립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들뢰즈 역시도 ‘우리는 카오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질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들뢰즈․가타리, 1995, 289) 그에 따르면 카오스를 물리치는 세 가지 승자가 있다.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가 그것이다. 이들은 카오스에 침잠하여 그것과 투쟁하는 것을 통해 얼마만큼의 질서를 가져온다. 철학의 변주들(variations), 과학의 변수들(variables), 예술의 변종들(variétés)이 그것이다. 변주들은 분리된 관념들의 연상이 아니라 한 개념 내의 불분명한 지대들을 통과하는 재연결들이고, 변수들은 사물들 내에 있는 특성들의 연결이 아니라 국부적 확률들로부터 총체적 우주론으로 전개되는 지시관계의 분할구도상에서의 유한좌표들이며, 변종들은 기관 내에서 감각의 재생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을 되돌릴 수 있는 비유기체적 구성의 구도상에서 지각의 존재, 감각의 존재를 세운다.(294)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 『니체와 철학』, 『주름』,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천개의 고원』 등을 통해 철학의 변주들을 제시했고 『프루스트와 기호들』, 『감각의 논리』, 『카프카』 『시네마』를 통해 예술의 변종들을 제시했다. 또 곳곳에서 그는 과학이 생산한 변수들에 대해 서술했다. 그렇다면 네그리가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건져내는 활동으로 평가했고, 실제로 자신의 작업들 전체에서 힘들여 가공한 업(res gestae), 즉 산 노동에 대해서 들뢰즈는 어떻게 평가했는가? 분명히 『앙띠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에서 그는 이 문제를 다룬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생산’, 그리고 『천개의 고원』에서의 ‘생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에게서 맑스와 네그리가 분석의 중심에 놓은 노동은 점차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앙띠 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생산에서 노동은 욕망하는 생산의 일부로 사고되지만 욕망하는 생산을 부당하게 종합하는14. 사회체들에 포섭된 형태로 등장한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생성(되기)을 생산으로부터 구별짓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의 배제는 더욱 뚜렷해진다.


되기는 결코 모방하기도 동일화하기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퇴행하기-진보하기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대응하기도 아니고 대응관계를 설립하기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생산하기, 즉 계통을 생산하기 계통을 통해 생산하기도 아니다. 되기는 자기 나름의 고름을 갖고 있는 하나의 동사이다. 그것은 “…처럼 보이다”, “…이다”, “…와 마찬가지이다”, “생산하다” 등으로 귀착되지 않으며 우리를 그리고 귀착시키지도 않는다.(들뢰즈․가타리, 2001, 454)


계통관계나 유전적 생산이 없는 서식, 전파, 생성을 어떻게 상상해 볼 수 있을까? (…) 우리들은 계통관계와 전염병을, 유전과 전염을, 유성생식이나 성적 생산과 전염을 통한 서식을 대립시킨다. 인간 패거리이건, 동물 패거리이건 하여간 패거리들은 모두 전염, 전염병, 전쟁터, 파국과 더불어 증식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하지 않지만 그러나 매번 다시 시작하면서 영토를 얻어가는 성적 결합에서 태어난 그 자체로는 생식능력이 없는 잡종들과 같다. 반자연적 관여들, 반자연적 결혼들은 모든 왕국을 가로지르는 참된 <자연>이다. 전염병이나 전염에 의한 전파는 유전에 의한 계통관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두 주제가 서로 섞이고 서로 상대를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흡혈귀는 계통적으로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전염되어 가는 것이다. 전염이나 전염병은 예컨대 인간, 동물, 박테리아, 바이러스, 분자, 미생물 등 완전히 이질적인 항들을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자연>은 이런 식으로만, 자기자신에 반해서만 진행한다. 우리는 계통적 생산이나 유전적 생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것들에서는 동일한 종 내에서의 성의 단순한 이원성과 여러 세대에 걸친 작은 변화들만이 차이로서 유지될 뿐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공생하고 있는 항들만큼이나 많은 성들이 있으며 전염과정에 개입하는 요소들만큼이나 많은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이 남성과 여성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들은 바람을 타고 다른 세계에서 오며, 뿌리들 주변에서 리좀을 형성하고 생산이 아닌 오직 생성의 견지에서만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460)


생성개념이 이처럼 유전적 ‘재생산’에서 분리-대립되는 한에서 그것이 사회적 생산에서 분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소수자가 혁명적인 것은 세계적 규모의 공리계를 의문시하는 이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역량, 즉 독자성은 프롤레타리아 속에서 형상과 보편적 의식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기왕에 획득한 사회적 지위나 심이어 이미 이론적으로 극복한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한 그것은 오직 “자본” 또는 자본의 일부(가변자본)로서 나타날 뿐 자본의 판(=계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껏해야 그러한 계획은 관료적인 것이 될 뿐이다. 반대로 자본의 판에서 벗어나고 항상 그렇게 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대중은 끊임없이 혁명적으로 되고 가산 집합들 간에 성립되는 지배적 균형을 파괴할 수 있다. 아마존-국가, 여성들의 국가, 임시적 노동자들의 국가, (노동 “거부” 국가가 어떨지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소수자가 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국가를 구성하지 않는 것은 국가-형식도 또 자본의 공리계 또는 이에 대응하는 문화라는 것이 소수자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901~2)


이 대목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사회적 생산과 노동을 생성에서 배제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노동이 자본의 판에 포섭된 가변자본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 속에서 노동을 종합할 가능성을 찾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동관을 비판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여기서 오뻬라이스모가 들뢰즈와 (그리고 오뻬라이스모 당시의 네그리 자신도) 공유했던 ‘노동력=가변자본’이라는 등식에 대한 네그리의 문제제기를 서둘러 살펴보도록 하자.


이 비물질노동의 형식들에서 협력은 노동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이다. 비물질노동은 즉각적으로 사회적 상호행위와 협력을 포함한다. 달리 말해 비물질노동의 협력적 측면은, 이전의 노동형식들에서처럼, 외부에서 부과되거나 조직되지 않는다. 오히려 협력은 노동활동 그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이다. 이 사실은 노동력이 ‘가변자본’으로, 즉 자본에 의해서만 활성화되고 응집되는 힘으로 생각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과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에 공통적인) 낡은 관념을 의문에 붙인다. 왜냐하면 노동능력의 협력적 힘들(특히 비물질적 노동능력)은 노동에게 그 자신을 가치화할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Hardt and Negri, 2000, 294, 번역은 인용자).


네그리에게서 노동은 (특히 비물질노동은) 협력을 내재화하는 생성의 활동으로 평가됨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노동은 자본의 판에 예속된 인간 활동으로, 체제 재생산의 활동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생성은 직접적 노동거부를 통해, 노동으로부터의 탈주를 통해, 생성의 활동들인 예술, 과학, 철학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된다. 이것이 소수정치(학)이라면 네그리의 삶정치학은 예술, 과학, 철학 등까지 모두 노동으로 포섭되어진 삶정치적 상황에서, 그것들을 비물질노동의 양상들로 파악한다. 그는 산 노동을 포섭하며 그것의 공통성을 착취하는 체제로부터 탈출할 출구를, 노동에 내재하는 협력적 자기가치화 능력에서 찾는다.15.

이 분명한 차이를 다시 우리가 설정한 애초의 문제틀 속으로 가져가 보기로 하자. 소수정치에서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분화와 극화)은 다수적인 것의 합성과정이며 지층과 체제의 구축과정으로 파악된다. 현실적인 것은 하나의 결과, 산물로 이해될 뿐 새로운 이행과 구성의 평면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소수정치는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을 미분하는 정치로 나타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잠재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으로 운동하는 잠재화의 정치학이다. 그것은 ‘기관 없는 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의식에 의해 이끌린다. 역행(involution). 이것은 소통되고 전염되기 위해 유전적인 계통적 진화(evolutioon)이기를 그치는 리좀권 속에서의 사건이다. 소수정치적 역행은 현실적인 것에서의, 갇힌 상황으로부터의, 지층들로부터의, 체제로부터의 도주이다. 소수정치에서 민중은 없다. 오히려 민중은 창조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 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럭을 형성하는 일’(들뢰즈․가타리, 2001, 454)이다.

그렇다면 소수정치가 창조해야 할 이 민중과 삶정치가 말하는 다중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들뢰즈와 네그리는 공통적으로 근대적 혹은 고전적 민중의 부재를 말한다. 네그리에게서 민중은 근대적 주권들의 초석으로서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하는 하나’이다.(Hardt & Negri, 2004, 99) 탈근대로의 이행 속에서 민중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은 크게 와해되었다. 들뢰즈도 주체로서의 민중의 해체를 현대의 특징으로 보는 점에서 네그리와 공명하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 도브첸코, 베르토프 등의 고전영화와 2차대전 전후의 미국영화에서 민중은 ‘비록 억압되고 배반되고 종속되고 맹목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며’, ‘현실화 과정 속에 있는 잠재적 실존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들뢰즈, 2005, 419~20) 그것은 현실화되기 전에 이미 현실적인 것으로서, 추상적이지 않은 이상적인 것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예술로서의 영화가 민중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탁월한 혁명예술 혹은 민주적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나왔다는 것이다.(420) 이 믿음은 ‘노예적 대중을 영화의 대상으로 삼은 히틀러의 도래, 민중의 일체성을 당의 전제적 단일성으로 대체한 스탈린주의, 더 이상 스스로를 과거의 민중들이 응집하는 도가니나 장차 올 민중의 어린 배아로서 믿을 수 없게 된 미국 민중의 해체’(420)를 통해 와해된다. 그 결과 현대적 정치영화는 ‘민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아직 없다 …. 민중이 결여되어 있다.’(420)는 기저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들뢰즈는 진단한다. 카프카, 클레, 제3세계의 시네아스트 등은 제3세계 및 소수집단들의 삶과 관련하여 민중의 부재를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부재하는 민중에 대한 이 보고서는 정치적 영화의 포기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제3세계와 소수집단들이 이제부터 정초해 나가야 할 새로운 기초를 이룬다. 예술, 그리고 특히 영화는 이러한 과업에 무엇보다도 참여해야 한다. 이미 존재한다고 전제된 민중에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중의 창조에 기여할 것. 주인, 식민 지배자들이 “여기에는 결코 민중이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순간에, 결여된 민중은 이미 하나의 생성이 되고, 이 민중은 판자촌과 수용소, 혹은 게토, 즉 당연히 정치적인 예술이 헌신해야 할 새로운 투쟁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421~2, 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함으로서 민중의 부재가 아니라 민중의 새로운 창조에 방점을 찍는다.

이 생성으로서의 민중이 네그리의 다중과 겹치는 것일까? 이렇게 묻는 순간, 다중이 생산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구축된 개념임에 반해 (민중의) 생성은 생산과는 다른 과정이라는 앞에서의 논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네마』(Cinema)에서 생성으로서의 민중에 대한 서술이 역사적임에 반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므로 후자에서 민중의 생성 논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논리의 첫 번째 근거는 카오스로부터 카오이드들(Chaoïdes=카오스를 재단하는 평면들 상에서 산출된 현실들)을 재단해 내는 세 가지 사유 혹은 창조의 형식이 예술, 과학, 철학이라는 명제에서 찾아진다. 둘째로 들뢰즈는 ‘이 세 가지 평면들의 접합(단일성이 아닌), 그것이 곧 두뇌’(300)이며 두뇌가 주체가 되는 자리에서 일대전환이 나타난다고 본다. 이제 사유하는 것은 두뇌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두뇌의 결정체일 뿐이다. 이 곳에서 철학, 예술, 과학은 객체화된 두뇌의 정신적 대상들이 아니라 두뇌가 ‘주체로 즉 사유-두뇌로 되는 세 가지 양상들이며, 두뇌가 카오스에 잠겨 카오스와 대적하기 위해 타고 가는 세 개의 뗏목들, 세 개의 평면들이다’. 사유-두뇌는 정신 그 자체이며 주체이고 자기초월체(superjet)이다. 개념적 사유-두뇌(철학)는 개념들이 창조되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개념적 인물들을 이끌어 내고 감각적 사유-두뇌(예술)는 구성의 평면에서 변종이 된 진동으로서 영혼 혹은 힘으로 되어 미학적 형상들을 창조하며, 인식적 사유-두뇌는 지시관계 혹은 좌표화의 평면에서 기능들과 부분적 관찰자들을 창출한다.(304~312) 민중이 창조되는 세 번째 과정은 철학, 예술, 과학 사이의 내재적 간섭이다. 간섭은 예술이 비-예술을, 과학이 비-과학을, 철학이 비-철학을 필요로 하는 한에서 필연적이다. 이 세 평면들은 실현되는 동시에 사라져 줄 것이 요청되는 시작이나 끝으로서의 부정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성이나 발전의 매순간 부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은 어디에서 창조되는가?


이 세 개의 부정이 두뇌 평면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서로 구별된다 하더라도, 두뇌가 침잠하는 카오스와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침잠 속에서 ‘다가올 민중’의 그림자가 카오스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오는 것 같다. 그것은 예술이, 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이 부르는 그대로, 대중적-민중, 세계적-민중, 두뇌적-민중, 카오스-민중이다. 그것은 클레의 비-개념적 개념이나 칸딘스키의 내적 침묵처럼, 세 개의 학문 속에 누워있는 비-사유적 사유이다. 바로 거기에서 개념들, 감각들, 기능들은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와 동시에 철학, 예술, 과학은 구별 불가능한 것이 된다. 마치 철학, 예술, 과학은 서로 다른 본질을 통해 연장되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니는 동일한 한 그림자를 함께 나눠 갖고 있는 듯하다.(314)


민중이 창조되는 곳은 두뇌가 카오스와 관계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철학, 예술, 과학에 자신의 힘을 나눠주는 카오스-민중이자 두뇌적-민중이다. 그것은 결정할 수 없고 구별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일종의 그림자 존재로서, 잠재력으로서 생성된다. 철학, 예술, 과학은 이 잠재력을 분유하며 수행하는 평면들이다. 카오스-민중이자 두뇌적-민중인 이 생성의 민중은 개념상에서 척도 바깥의 것이자 척도 너머의 것인 네그리의 다중과 많은 점에서 겹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나타난다. 들뢰즈의 두뇌적-민중은 사유하는 정신적 주체성으로 나타남에 반해 네그리의 다중은 노동하는 사회적 주체성으로 나타난다. 네그리에게서 철학, 예술, 과학은 탈근대적 다중지성의 조건 하에서 작용하는 비물질노동의 형태들임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이것들은 결코 노동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다중이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힘들의 연결로서, 즉 가능성의 수준에서 정의되고 있음에 반해 들뢰즈의 생성하는 민중은 예술, 철학, 과학에 자신의 힘들을 나눠주는 잠재성의 수준에서 정의된다. 네그리에게서 다중의 공통성은 산 노동 속에서 발생하고 발전하는 협력임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두뇌적-민중들(과학, 예술, 철학) 속에서의 내재적 간섭으로 나타난다. 들뢰즈에게서 새로운 민중은 정신적이다. 그에게서 ‘사유하는 것은 바로 두뇌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두뇌의 결정체일 뿐이다’.(302~3) 이러한 생각은 맑스의 시험을 이겨내는가?


두뇌 속에서 사유의 총체로 현상하는 바와 같은 전체는 세계를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으로 점취하는 사유하는 두뇌의 산물인데, 이 방식은 세계의 예술적 종교적 실천적이고 정신적인 점취와는 상이하다. 즉 두뇌가 사변적 이론적 상태에만 있는 한에 있어서, 현실적 주체는 여전히 두뇌 밖에서 자립적으로 현존한다. 따라서 이론적인 방법에 있어서도 주체, 즉 사회는 전체로서 항상 표상에 어른거리고 있어야 한다.(맑스, 2000, 72)


맑스에게서 사유는 두뇌를 통해 세계를 점취하지만 실제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사회이다. 사유가 주체적이려면 그것은 현실적 주체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사유와 몸의 결합의 이론, 즉 혁명의 두뇌인 철학이 혁명의 심장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의 강한 주장이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두뇌가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몸-주체를 갖지 않은 두뇌-주체의 시대. 들뢰즈는 이 현실적 주체로서의 사회가 두뇌-주체로 전환한 시대로서 현대를 파악한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의 일반지성 개념의 분명한 반향을 발견한다. 두뇌-사회의 시대.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의 생성하는 민중이 네그리의 다중 개념의 핵심적 특징들(지성, 감각, 정동, 소통)을 이미 예견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새로운 민중은 발생하고 있는 다중의 징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양자 사이의 간극에서 사유해야 한다. 새로운 민중은 다중에게 ‘당신이 현실성으로 추락할 위험을, 그래서 주권존재로 전화할 위험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16. 이에 대한 네그리의 응답은 다중은 현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다중이 새로운 민중에게 묻는다. 왜 두뇌적-민중은 철학, 과학, 예술이라는 ‘세 딸’(들뢰즈․가타리, 300)만을 거느려야 하는 것인가? 더 많은 딸들과 아들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활동들이 오늘날 두뇌적-민중의 사회적 자식들이 아닌가? 만약 두뇌적-민중이 이 세 딸만을 자신의 딸로서 인정하고 노동의 이름 하에 수행되는 다른 활동들을 배제한다면, 플라톤이 모방을 통한 분유만을 인정했던 것과 유사한 위계를 새로운 민중 내부에 도입하는 것은 아닌가? 현실성으로부터 잠재성의 독립성(‘잠재성은 현실성의 반쪽이다’17.)과 그것의 정신적 본질(‘두뇌는 정신 자체이다’)18.을 강조함으로써 사유에 부당한 특권을 부여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정신과 물질, 사유와 연장을 가로지르는 다중의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것을 저해하지는 않겠는가? 탈근대가 비물질성의 헤게모니에 의해 감싸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물질적인 것을 비물질적인 것의, 현실적인 것을 잠재적인 것의 결정체로 파악하여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것은 잠재성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부정을, 이 세계에 대한 감각적이고 주체적이며 실천적인 태도의 약화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이제 글을 맺자. 들뢰즈와 네그리는 맑스의 실제적 포섭을 극단적으로 사유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주체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들은 실제적 포섭의 심화시대를 제2인터내셔널적인 붕괴론과 정치적 기회주의에 따라 대응하지도 않고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적 동일성으로 파악한 제3인터내셔널의 방법에 따라 사유하지도 않는다. 또 이들은 실제적 포섭의 시대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던 비판이론들과는 다른 혁신의 정치학을 제시한다. 소수정치와 삶정치는 이런 점에서 실제적 포섭의 심화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시하려는 노력이다. 앞에서의 분석에 따를 때, 소수정치는 삶정치의 적극적 구성 요소로 이해된다. 소수정치는 지배적 현실의 해체와 파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도주를 함축하며 좀더 적극적인 경우에는 그 파열선과 도주선의 블럭화(즉 네트워킹과 공통화)를 의미하는데, 이것들은 삶 속에서 발생, 형성, 구성되는 협력적 공통되기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 위에서 노동거부는 새로운 삶의 공통적 생산의 한 계기이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중은 삶의 공통적 구성능력에 붙여진 이름이고 코뮤니즘은 삶의 공통되기의 과정 자체이다. 자율은 갇힌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이 어떤 초월적 매개도 없이, 아니 그러한 매개의 거부 위에서 구축하는 공통체적 주체성 그 자체의 이름이다. <미주>

1. 여기서는 주로 니콜래스 쏘번의 ‘소수정치(학)’적 독해를 논의의 중심에 놓을 것이다.

2. ‘때’에 대해서는 들뢰즈 외에 실린, 조정환의 글 「비물질노동과 시간의 재구성」 참조.

3. 들뢰즈는 ‘아름다운 영혼’에 빠질 위험을 ‘피흘리는 투쟁들과는 거리가 먼 차이, 서로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차이들에 그치고 마는 위험’으로 정의한다.(들뢰즈, 2004, 19)

4. 맑스의 추상적 가능성 및 구체적 가능성 개념에 대해서는 M. Hardt & A. Negri, 2004, p. 144~5 참조.

5.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는 들뢰즈, 2004, 449~460 참조.

6.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을 비롯한 철학적 저작들에서 가능성 범주를 기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기각되는 것은 ‘재현적 가능성’이며 ‘실재적 가능성’의 개념은 견고하게 유지되고 발전된다. 예컨대 강도, 특이성, 각개성(heccéite) 등의 개념이 그것이다.

7. 스토아학파의 비물체성, 스피노자의 실체, 라이프니츠의 단자, 니체의 힘, 베르그송의 지속 등은 잠재성 개념의 복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다.

8. “동일자에서 벗어나 있고 부정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차이들을 불러들이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가장 큰 위험은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흘리는 투쟁들과는 거리가 먼 차이, 서로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차이들에 그치고 마는 위험이다.”(들뢰즈, 2004, 19) 들뢰즈는 이러한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문제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동일성을 박탈하고 그의 선한 의지를 깨뜨리는 가운데 그 영혼을 파괴하는 힘을 낳는다. 문제틀과 미분적 차이가 규정하는 어떤 투쟁과 파괴들. 이것들에 비추어 보면 부정적인 것의 투쟁과 파괴들은 외양에 불과하다. (…) 모든 사유는 침략이다.”(같은 책, 20쪽)라고 말한다.

9.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전개된, 쏘번의 소수정치학에 대한 보충적 비판은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Deleuze, Marx and Politics) 역자서문 중에서 17쪽~27쪽 참조.

10. “소통이란 개념이 아니라 ‘합의’를 창출하기 위한 의견들의 가능태로서만 작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들뢰즈, 1995, 14). “소통이란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도는 것이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창조이다”(같은 책, 159). 그런데 그가 소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보학, 마케팅, 디자인, 광고학’ 등을 지칭한다(같은 책, 20 참조).

11. 클로소프스키로부터의 다음과 같은 인용을 통해 그는 자신의 소통불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소통불가능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개인의 존재가 다수의 개인들에게 귀속될 수 없도록 해주는 원리이며 이 원리는 자기동일적인 인격체를 고유하게 구성한다”(들뢰즈, 1999, 460).

12.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행로는 직선으로 전개된다”(네그리, 2004 137). 이 직선 운동에 팽창 개념이 결합되면서 운동은 나선형적 형상으로 이해된다.

13. 네그리의 창조 개념은 특이성에 강조점을 둔 들뢰즈의 창조 개념에 비해 특이적인 동시에 언제나 집단적이고 공통적이다.

14. 부당한 종합들에서 연결은 외삽으로, 이접은 배제적 이중구속으로, 통접은 적용으로 나타난다.

15. 노동력 속의 자기가치화 능력에 대한 네그리의 이러한 승인을 니콜래스 쏘번은 사회민주주의적 문제의식 속으로의 회귀라고 비판한다.

16. 이러한 문제제기는 쏘번에게서 이루어졌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민중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지 ‘새로운 민중의 생성’ 혹은 ‘생성하는 민중’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민중의 부재 속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민중의 생성’이라는 생각은 ‘민중의 부재’ 개념에 기초한 쏘번의 생각보다는 한층 더 ‘가능성으로서의 다중’에 접근한다.

17. 이에 대해서는 들뢰즈, 2004, 453을 참조하라.

18. 이에 대해서는 들뢰즈․가타리, 1995, 304를 참조하라.<주제어>

가능성, 잠재성, 현실성, 특이성, 공통성, 실제적 포섭, 삶정치, 삶권력, 코뮤니즘, 다중, 제국, 소수정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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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 안또니오. 『혁명의 시간』,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04(Negri, Antonio. Time of Revolution, Continum,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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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질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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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번, 니콜래스. 『들뢰즈 맑스주의』,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5(Thoburn, Nicholas, Deleuze, Marx and Politics, Routledge, London,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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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nor politics' of Gilles Deleuze and the 'biopolitics' of Antonio Negri


Joe Jeong-Hwan(Sung-Kong-Hoe University)

Gilles Deleuze and Antonio Negri had developed their unique politics. We can sum up Gilles Deleuze's politics as 'minor politics' and Antonio Negri's politics as 'biopolitics'. They had groped for the possiblility of new subjectivity in the age of real subsumption of labor under capital. The politics of them are different from the auto-destruction theory and the political opportunism of 2nd International. They did not think proletariat as a revolutionary identity as the politics of Third International. They proposed a politics of innovation which is different from the critical theory of Frankfurt School that viewed the age of real subsumption pessimistically. So 'minor politics' and 'biopolitics' are considered as the important efforts which suggest the theoretical framework of 'What is to be done' in the age of real subsumption. I propose an idea which interpret the 'minor politics' as a component of 'biopolitics'. 'Minor politics' of Deleuze implies the destruction of the dominant system and the flight from it. And more positively it means the creation of blocs of lines of flight. We can consider it as a component of becoming-common of the creative powers of multitudes. 'Biopolitics' of Negri have developed more fully the potential of 'minor politics' through linking the concept of singularity in minor politics with the concept of commonality. It develops an concept of modern proletariat as the common constituent power of Geschichte. It is named by multitude. The minority in Deleuze and the multitude in Negri is the possible agency of becoming-common without any transcendent mediation.




Key Words: possibility, virtuality, reality, singularity, commonality, real subsumption, biopolitics, biopower, communism, multitude, empire, minor politics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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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7 2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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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영문)

라캉닷컴(Lacan.com)에서 지젝에 관한 소개내용을 옮겨온다. 마지막에 감사의 뜻이 언급되고 있지만,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마이어스의 원서를 안 갖고 계신 분들도 주요 대목들을 대조하여 읽어보면, 훨씬 이해가 빠를 듯하여 옮겨놓는다.

 

 

 

 

INFLUENCES

The three main influences on Slavoj Zizek's work are G.W.F. Hegel, Karl Marx and Jacques Lacan

1. Hegel provides Zizek with the type of thought or methodology that he suse. This kind of thinking is called dialectical. In Zizek's reading of Hegel, the dialectic is never finally resolved.

2. Marx is the inspiration behind Zizek's work, for what he is trying to do is to contribute to the Marxist tradition of thought, specifically that of a critique of ideology.

3. Lacan provides Zizek with the framework and terminology for his analyses. Of particular importance are Lacan's three registers of the Imaginary, the Symbolic and the Real. Zizek locates the subject at the interface of the Symbolic and the Real.

The Imaginary
The basis of the imaginary order is the formation of the ego in the "mirror stage". Since the ego is formed by identifying with the counterpart or specular image, "identification" is an important aspect of the imaginary. The relationship whereby the ego is constituted by identification is a locus of "alienation", which is another feature of the imaginary, and is fundamentally narcissistic. The imaginary, a realm of surface appearances which are deceptive, is structured by the symbolic order. It also involves a linguistic dimension: whereas the signifier is the foundation of the symbolic, the "signified" and "signification" belong to the imaginary. Thus language has both symbolic and imaginary aspects. Based on the specular image, the imaginary is rooted in the subject's relationship to the body (the image of the body).

The Symbolic
Although an essentially linguistic dimension, Lacan does not simply equate the symbolic with language, since the latter is involved also in the imaginary and the real. The symbolic dimension of language is that of the signifier, in which elements have no positive existence but are constituted by virtue of their mutual differences. It is the realm of radical alterity: the Other. The unconscious is the discourse of the Other and thus belongs to the symbolic order. Its is also the realm of the Law that regulates desire in the Oedipus complex. Th symbolic is both the "pleasure principle" that regulates the distance from das Ding, and the "death drive" which goes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by means of repetition: "the death drive is only the mask of the symmbolic order." This register is determinant of subjectivity; for Lacan the symbolic is characterized by the absence of any fixed relations between signifier and signified.

The Real
This order is not only opposed to the imaginary but is also located beyond the symbolic. Unlike the latter, which is constituted in terms of oppositions such as "presence" and "absence", there is no absence in the real. The symbolic opposition between "presence" and "absence" implies the possibility that something may be missing from the symbolic, the real is "always in its place: it carries it glued to its heel, ignorant of what might exile it from there." If the symbolic is a set of differentiated signifiers, the real is in itself undifferentiated: "it is without fissure". The symbolic introduces "a cut in the real," in the process of signification: "it is the world of words that creates the world of things." Thus the real emerges as that which is outside language: "it is that which resists symbolization absolutely." The real is impossible because it is impossible to imagine, impossible to integrate into the symbolic order. This character of impossibility and resistance to symbolization lends the real its traumatic quality.

THE SUBJECT
Unlike almost all other kinds of contemporary philosophers, Zizek argues that Descartes' cogito is the basis of the subject. However, whereas most thinkers read the cogito as a substantial, transperent and fully self-conscious "I" which is in complete command of its destiny, Zizek proposes that the cogito is an empty space, what is left when the rest of the world is expelled from itself. The Symbolic Order is what substitutes for the loss of the immediacy of the world and it is where the void of the subject is filled in by the process of subjectivization. The latter is where the subject is given an identity and where that identity is altered by the Self.

Reading Schelling via Lacan
Once the Lacanian concepts of the Imaginary, the Symbolic and the Real are grasped, Zizek, in philosophical writings such as his dicussion of Schelling, always interprets the work of other philsophers in terms of those concepts. This is so because "the core of my entire work is the endeavour to use Lacan as a privileged intellectual tool to reactualize German idealism". (The Zizek Reader) The reason Zizek thinks German idealism (the work of Hegel, Kant, Fichte and Schelling) needs reactualizing is that we are thought to understand it in one way, whereas the truth of it is something else. The term "reactualizing" refers to the fact that there are different possible ways to interpret German idealism, and Zizek wishes to make "actual" one of those possibilities in distinction to the way it is currently realized.

At its most basic, we are taught that German idealism believes that the truth of something could be found in itself. For Zizek, the fundamental insight of German idealism is that the truth of something is always outside it. So the truth of our experience lies outside ourselves, in the Symbolic and the Real, rather than being buried deep within us. We cannot look into our selves and find out who we truly are, because who we truly are is always elsewhere. Our selves are somewhere else in the Symbolic formations which always precede us and in the Real which we have to disavow if we are to enter the Symbolic order.

The reason that Lacan occupies a privileged position for Zizek's lies in Lacan's proposition that self-identity is impossible. The identity of something, its singularity or "oneness", is always split. There is always too much of something, and indivisible remainder, or a bit left-over which means that it cannot be self-identical. The meaning of a word, i.e., can never be found in the word itself, but rather in other words, its meaning therefore is not self-identical. This principle of the impossibility of self-identity is what informs Zizek's reading of the German idealists. In reading Schelling, i.e., the Beginning is not actually the beginning at all - the truth of the Beginning lies elsewhere, it is split or not identical to itself.

How, precisely, does the Word discharge the tension of the rotary motion, how does it mediate the antagonism between the contarctive and the expansive force? The Word is a contraction in the guise of its very opposite of an expansion - that is, in pronouncing a word, the subject contracts his being outside himself; he "coagulates" the core of his being in an external sign. In the (verbal) sign, I - as it were - find myself outside myself, I posit my unity outside myself, in a signifier which represents me. (The Indi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

The Subject of the Enunciation and the Subject of the Enunciated
The subject of enunciation is the "I" who speaks, the individual doing the speaking; the subject of the enunciated is the "I" of the sentence. "I" is not identical to itself - it is split between the individual "I" (the subject of enunciation) and the grammatical "I" (the subject of the enunciated). Although we may experience them as unified, this is merely an Imaginary illusion, for the pronoun "I" is actually a substitute for the "I" of the subject. It does not account for me in my full specificity; it is, rather, a general term I share with everyone else. In order to do so, my empirical reality must be annihilated or, as Lacan avers, "the symbol manifests itself first of all as the murder of the thing".

The subject can only enter language by negating the Real, murdering or substituting the blood-and-sinew reality of self for the concept of self expressed in words. For Lacan and Zizek every word is a gravestone, marking the absence or corpse of the thing it represents and standing in for it. It is partly in the light of this that Lacan is able to refashion Descartes' "I think, therefore I am" as "I think where I am not, therefore I am where I think not". The "I think" here is the subject of the enunciated (the Symbolic subject) whereas the "I am" is the subject of the enunciation (the Real subject). What Lacan aims to disclose by rewriting the Cartesian cogito in this way is that the subject is irrevocably split, torn asunder by language

The Vanishing Mediator
The concept of "vanishing mediator" is one that Zizek has consistenly employed since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A vanishing mediator is a concept which somehow negotiates and settles - hence mediating - the transition between two opposed concepts and thereafter disappears. Zizek draws attention to the fact that a vanishing mediator is produced by an assymetry of content and form. As with Marx's analysis of revolution, form lags behind content, in the sense that content changes within the parameters of an existing form, until the logic of that content works its way out to the latter and throws off its husk, revealing a new form in ots stead. Commenting Fredric Jameson's "Syntax of Theory" (The Ideologies of Theory, Minnesota, 1988), Zizek proposes that

The passage from feudalism to Protestantism is not of the same nature as the passage from Protestantism to bourgeois everyday life with its privatized religion. The fisrt passage concerns "content" (under the guise of preserving the religious form or even its strengthening, the crucial shift - the assertion of the ascetic acquisitive stance in economic activity as the domain of manifestation of Grace - takes place), whereas the second passage is a purely formal act, a change of form (as soon as Protestantism is realized as the ascetic acquisitive stance, it can fall off as for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

Zizek sees in this process evidence of Hegel's "negation of the negation", the third moment of the dialectic. The first negation is the mutation of the content within and in the name of the old form. The second negation is the obsolescence of the form itself. In this way, something becomes the opposite of itself, paradoxically, by seeming to strengthen itself. In the case of Protestantism, the universalization of religious attitudes ultimately led to its being sidelined as a matter of private contemplation. Which is to say that Protestantism, as a negation of feudalism, was itself negated by capitalism.

THE FORMULAS OF SEXUATION

Jouissance
The pleasure principle functions a a limit of enjoyment; it is a law that commands the subject to "enjoy as little as possible". At the same time, the subject constantly attempts to trangress the prohibitions imposed on his enjoyment, to go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The result of transgressing the pleasure principle is not more pleasure, but pain, since thre is only a certain amount of pleasure that the subject can bear. beyond this limit, pleasure becomes pain, and this "painful pleasure" is what Lacan calls jouissance: jouissance is suffering. The term expresses the paradoxical satisfaction the subject derives from his symptom, that is the suffering he derives from his own satisfaction.

 

 

 



Woman
Lacan in Encore states that jouissance is essentially phallic: "jouissance, insofar as it is sexual, is phallic, which means that it does not relate to the Other as such." However, Lacan admits a specifically feminine jouissance, a supplementary jouissance which is beyond the phallus, a jouissance of the Other. This feminine jouissance is ineffable, for women experience it but know nothing about it. Going beyond the phallus, it is of the order of the infinite, like mystical ecstasy.

"Woman doesn't exist", la femme n'existe pas, which Lacan rephrases as "there is no such a thing as Woman", il n'y a pas La femme. Lacan questions not the noun "woman", but the definite article which precedes it. For the definite article indicates universality, and this is the characteristic that woman lacks: "woman does not lend herself to generalisation, even to phallocentric generalisation." He also speaks of her as "not-all", pas toute; unlike masculinity - a universal function founded upon the phallic exception (castration), woman is a non-universal which asmits no exception. "Woman as a symptom" (Seminar RSI) means that a woman is a symptom of a man, in the sense that a woman can only ever enter the psychic economy of men as a fantasy object, the cause of their desire.

For Zizek, woman is what sustains the consistency of man; woman non-existence actually represents the radical negativity which constitutes all subjects. The terms "man" and "woman" do not refer to a biological distinction or gender roles, but rather two modes of the failure of Symbolization. It is this failure which means that "there is no sexual rapport".

POSTMODERNITY
For Zizek, present society, or postmodernity, is based upon the demise in the authority of the big Other. Continuing the theorists of the contemporary risk society, who advocate the personal freedoms of choice or reflexivity, which have replaced this authority, Zizek argues that these theorists ignore the reflexivity at the heart of the subject. For Zizek, lacking the prohibitions of the big Other, in these conditions, the subject's inherent reflexivity manifests itself in attachments to forms of subjection, paranoia and narcissism. In order to ameliorate these pathologies, Zizek proposes the need for a political act or revolution - one that will alter the conditions of possibility of postmodernity (which he identifies as capitalism) and so give birth to a new type of Symbolic Order in which a new breed of subject can exist.

The Law
Zizek refers to the law throughout his work. The term "the law" signifies the principles upon which society is based, designating a mode of collective conduct based upon a set of prohibitions. However, for Zizek, the rule of the law conceals an inherent unruliness which is precisely the violence by which it established itself as law in the first place.

"At the beginning" of the law, there is a certain "outlaw", a certain real of violence which coincides with the act itself of the establishment of the reign of the law... The illegitimate violence by which law sustains itself must be concealed at any price, because this concealment is the positive condition of the functioning of the law.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

The authority of the law stems not from some concept of justice, but because it is the law. Which is to say that the origin of the law can be found in the tautology: "the law is the law". If the law is to function properly, however, we must experience it as just. It is only when the law breaks down, when it becomes a law unto itself, and it reaches the limits of itself, do we glimpse those limits and acknowledge its contingency by reference to the phrase "the law is the law".

The Desintegration of the Big Other
One key aspect of the universalization of reflexivity is the resulting desintegration of the big Other, the communal network of social institutions, customs and laws. For Zizek, the big Other was always dead, in the sense that it never existed in the first place as a material thing. All it ever was (and is) is a purely symbolic order. It means that we all engage in a minimum of idealization, disavowing the brute fact of the Real in favor of another Symbolic world behind it. Zizek expresses this disavowal in terms of an "as if". In order to coexist with our neighbors we act "as if" they do not smell bad or look ridiculous.

The big Other is then a kind of collective lie to which we all individually subscribe. We all know that the emperor is naked (in the Real) but nonetheless we agree to the deception that he is wearing new clothes (in the Symbolic). When Zizek avers that "the big Other no longer exists" is that in the new postmodern era of reflexivity we no longer believe that the emperor is wearing clothes. We believe the testimony of our eyes (his nakedness in the Real) rather than the words of the big Other (his Symbolic new clothes). Instead of treating this as a case of punctuting hypocrisy, Zizek argues that "we get more than we bargained for - that the very community of which we were a member has disintegrated"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There is a demise in "Symbolic efficiency".

Symbolic efficiency refers to the way in which for a fact to become true it is not enough for us just to know it, we need to know that the fact is also known by the big Other too. For Zizek, it is the big Other which confers an identity upon the many decentered personalities of the contemporary subject. The different aspects of my personality do not claim an equal status in the Symbolic - it is only the Self or Selves registered by the big Other which display Symbolic efficiency, which are fully recognized by everyone else and determine my socio-economic position. The level at which this takes place is not

that of "reality" as opposed to the play of my imagination - Lacan's point is not that, behind the multiplicity of phantasmatic identities, there is a hard core of some "real Self", we are dealing with a symbolic fiction, but a fiction which, for contingent reasons that have nothing to do with its inherent structure, possesses performative power - is socially operative, structures the socio-symbolic reality in which I participate. The status of the same person, inclusive of his/her very "real" features, can appear in an entirely different light the moment the modality of his/her relationship to the big Other changes. (The Ticklish Subject: the Absent Center of Political Ideology)

The Return of the Big Other
Besides the construction of little big Others as a reaction of the demise of the big Other, Zizek identifies another response in the positing of a big Other that actually exists in the Real. The name Lacan gives to an Other in the Real is "the Other of the Other". A belief in an Other of the Other, in someone or something who is really pulling the strings of society and organizing everything, is one of the signs of paranoia. Needless to say that it is commonplace to argue that the dominant pathology today is paranoia: countless books and films refer to some organization which covertly control governments, news, markets and academia. Zizek proposes that the cause of this paranoia can be located in a reaction to the demise of the big Other:

When faced with such a paranoid construction, we must not forget Freud's warning and mistake it for the "ilness" itself: the paranoid construction is, on the contrary, an attempt to heal ourselves, to pull ourselves out of the real "illness", the "end of the world", the breakdown of the symbolic universe, by menas of this substitute formation.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

Paradoxically, then, Zizek argues that the typical postmodern subject is one who displays an otright cynicism towards official institutions, yet at the same time believes in the existence of conspirancies and an unseen Other pulling the strings. This apparently contradictory coupling of cynicism and belief is strictly correlative to the demise of the big Other. Its disappearance causes us to construct an Other of the Other in order to escape the unbearable freedom its loss encumbers us with. Conversely, there is no need to take the big Other seriously if we believe in an Other of the Other. We therefore display cynicism and belief in equal and sinceres measures.

Postmodernism: An Over-Proximity to the Real
One of the ways in which Zizek's understanding of the postmodern can be characterized is as an over-proximity of the Real. In postmodern art (or postmodernism0 Zizek identifies various manifestations of this, such as the technique of "filling in the gaps". What Zizek means by this can be seen in his comparative analysis of The Talented Mr. Ripley (book and film). In Patricia Highsmith's novel, Ripley's homosexuality is only indirectly proposed, but in Anthony Minghella's film Ripley is openly gay. The repressed content of the novel, the absence around which it centers, is filled in. For Zizek, what we lose by covering over the void in this way is the void of subjectivity:

By way of "filling in the gaps" and "telling it all", what we retreat from is the void as such, which is ultimately none other than the void of subjectivity (the Lacanian "barred subject"). What Minghella accomplishes is the move from the void of subjectivity to the inner wealth of personality.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s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

In Highsmith's novel the status of Ripley's sexuality is. at most, equivocal. As such, the book remains "innocent" in the eyes of the big Other because it does not openly trangress one of its norms. While we can interpret the clues in the story as indicating Ripley's homosexuality, we do not have to do so. The film, on the other hand, "shows it all", Ripley is here objectively homosexual. So whereas in one instance the reader can decide subjectively whether or not Ripley is gay, the film allows no such room for manoeuvre and the viewer is forced to accept Minghella's reading of the text.

IDEOLOGY
For Zizek, we are not so much living in a post-ideological era as in an era dominated by the ideology of cynicism. Adapting from Marx and Sloterdijk, he sums up the cynical attitude as "they know that, in their activity, they are following an illusion, but still, they are doing it". Ideology in this sense, is located in what we do and not in what we know. Our belief in an ideology is thus staged in advance of our acknowledging that belief in "belief machines", such as Althusser's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t is "belief before belief."

Pinning Down Ideology with Points de Capiton
One of the questions Zizek asks about ideology is: what keeps an ideological field of meaning consistent? Given that signifiers are unstable and liable to slippages of meaning, how does an ideology maintain its consistency? The answer to this problem is that any given ideological field is "quilted" by what, following lacan, he terms a point de capiton (literally an "upholstery button" though is has also been translated as "anchoring point"). In the same way that an upholstery button pins down stuffing inside a quilt and stops it from moving about, Zisek zrques that a point de capiton is a signifier which stops meaning from sliding about inside the ideological quilt. A point de capiton unifies an ideological field and provides it with an identity. Freedom, i.e, is in itself an open-ended word, the meaning of which can slide about depending on the context of its use.

A right-wing interpretation of the word might use it to designate the freedom to speculate on the market, whereas a left-wing interpretation of it might use it designate freedom from the inequalities of the market. The word "freedom" therefore does not mean the same thing in all possible worlds: what pins its meaning down is the point de capiton of "right-wing" or "left-wing". What is at issue in a conflict of ideologies is precisely the point de capiton - which signifier ("communism", "fascism", "capitalism", "market economy" and so on) will be entitled to quilt the ideological field ("freedom", "democracy", Human rights" and son on).

The Two Deaths
The fact that for Zizek the apparently all-inclusive whole of life and death are supplemented, by both a living death and a deathly life, points to the way in which we can die not just once, but twice. Most obviously, we will suffer a biological death in which our bodies will fail and eventually disintegrate. This is death in the Real, involving the obliteration of our material selves. But we can also suffer a Symbolic death. This does not involve the annihilation of our actual bodies, rather it entails the destruction of our Symbolic universe and the extermination of our subject positions.

We can thus suffer a living death where we are excluded from the Symbolic and no longer exist for the Other. This might happen if we go mad or if we commit an atrocious crime and society disowns us. In this scenario, we still exist in the Real but not in the Symbolic. Alternatively, we might endure a deathly life or more a kind of life after death. This might happen if, after our bodies have died, people remember our names, remember our deeds and so on. In this case, we continue to exist in the Symbolic even though we have died in the Real.

The gap between the two deaths, Zizek argues, can be filled either by manifestations of the monstrous or the beautiful. In Shakespeare's Hamlet for example, Hamlet's father is dead in the Real, however, he persists as a terifying and monstrous apparition because he was murdered and thereby cheated of the chance to settle his Symbolic debts. Once that debt has been repaid, following Hamlet's killing of his murderer, he is "completely" dead. In Sophocles' Antigone, the heroine suffers a SYmbolic death before her Reak death when she is excluded fom the community for wanting to bury his traitorous brother.

This destruction of her social identity instils her character with a sublime beauty. Ironically Antigone enters the domain between the two deaths "precisely in order to prevent her brother's second death: to give him a proper funeral that will secure his eternalization" (The Ticklish Subject: the Absent Centre of Political Ontology). That is, she endures a Symbolic death in order that her brother, who has been refused proper burial rites, will not suffer a Symbolic death himself.



 

 

 

The Spectre of Ideology
Zizek distinguishes three moments in the narrative of an ideology.
1. Doctrine - ideological doctrine concerns the ideas and theories of an ideology, i.e. liberalism partly developed from the ideas of John Locke.
2. Belief - ideological belief designates the material or external manifestations and apparatuses of its doctrine, i.e. liberalism is materialized in an independent press, democratic elections and the free market.
3. Ritual - ideological ritual refers to the internalization of a doctrine, the way it is experienced as spontaneous, i.e in liberalism subjects naturally think of themselves as free individuals.

 

 



 

These three aspects of ideology form a kind of narrative. In the first stage of ideological doctrine we find ideology in its "pure" state. Here ideology takes the form of a supposedly truthful proposition or set of arguments which, in reality, conceal a vested interest. Locke's arguments about government served the interest of the revolutionary Americans rather than the colonizing British.

In a second step, a successful ideology takes on the material form which generates belief in that ideology, most potently in the guise of Althusser's State Apparatuses. Third, ideology assumes an almost spontaneous existence, becoming instinctive rather than realized either as an explicit set of arguments or as an institution. the supreme example of such spontaneity is, for Zizek, the notion of commodity fetishism.

In each of these three moments - a doctrine, its materialization in the form of belief and its manifestation as spontaneous ritual - as soon as we think we have assumed a position of truth from which to denounce the lie of an ideology, we find ourselves back in ideology again. This is so because our understanding of ideology is based on a binary structure, which contrasts reality with ideology. To solve this problem, Zizek suggests that we analyze ideology using a ternary structure. So, how can we distinguish reality from ideology? From what position, for example, is Zizek able to denounce the New Age reading of the universe as ideological mystification?

It is not from the position in reality because reality is constituted by the Symbolic and the Symbolic is where fiction assumes the guise of truth. The only non-ideological position available is in the Real - the Real of the antagonism. Now, that is not a position we can actually occupy; it is rather "the extraideological point of reference that authorizes us to denounce the content of our immediate experience as 'ideological.'" (Mapping Ideology) The antagonism of the Real is a constant that has to be assumed given the xistence of social reality (the Symbolic Order). As this antagonism is part of the Real, it is not subject to ideological mystification; rather its effect is visible in ideological mystification. Here, ideology takes the form of the spectral supplement to reality, concealing the gap opened up by the failure of reality (the Symbolic) to account fully for the Real.

While this model of the structure of reality does not allow us a position from which to assume an objective viewpoint, it does presuppose the existence of ideology and thus authorizes the validity of its critique. The distinction between reality and ideology exists as a theoretical given. Zizek does not claim that he can offer any access to the "objective truth of things" but that ideology must be assumed to exist if we grant that reality is structured upon a constitutive antagonism. And if ideology exists we must ne able to subject it to critique. This is the aim of Zizek's theory of ideology, namely an attempt to keep the project of ideological critique alive at all in an era in which we are said to have left ideology behind.

RACISM AND FANTASY

Fantasy as a Mask of the Inconsistency in the Big Other
One way at looking at the relationshipbetween fantasy and the big Other is to think of fantasy as concealing the inconssistency of the Symbolic Order. To understand this we need to know why the big Other is inconsistent or structured around a gap.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that when the body enters the field of signification or the big Other, it is castrated. What Zizek means by this is that the price we pay for our admission to the univerdal medium of language is the loss of our full body selves.

When we submit to the big Other we sacrifice direct access to our bodies and, instead, are condenmned to an indirect relation with it via the medium of language. So, whereas, before we enter language we are what Zizek terms "pathological" subjects (the subject he notates by S), after we are immersed in language we are what he refers to as "barred" subjects (the empty subject he notates with $). What is barred from the barred subject is precisely the body as the materialization or incarnation of enjoyment (jouissance). Material jouissance is strictly at odds with, or heterogenous to, the immaterial order of the signifier.

For the subject to enter the Symbolic Order, then, the Real of jouissance or enjoyment has to be evacuated from it. Which is another way to saying that the advent of the symbol entails "the murder of the thing". Although not all jouissance is completely evacuated by the process of signification (some of it persists in what are called the erogenous zones), most of it is not Symbolized. And this entails that the Symbolic Order cannot fully account for jouissance - it is what us missing in the big Other. The big Other is therefore inconsistent or structured around a lack, the lack of jouissance. It is, we might say, castrated or rendered icomplete by admitting the subject, in much the same way as the subject is castrated by its admission.

What fantasy does is conceal this lack or incompletion. So, as we saw previoulsly when alluding to the formulas of sexuation, "there is not sexual relationship" in the big Other. What the fantasy of a sexual scenario thereby conceals is the impossibility of this sexual relationship. It covers up the lack in the big Other, the missing jouissance. In this regard, Zizek often avers that fantasy is a way for subjects to organize their jouissance - it is a way to manage or domesticate the traumatic loss of the jouissance which cannot be Symbolized.

The Window of Fantasy
For Zizek, racism is produced by a clash of fantasies rather than by a clash of symbols vying for supremacy. There are several distinguishing features of fantasy:
1. Fantasies are produced as a defence against the desire of the Other manifest in "What do you want from me?" - which is what the Other, in its incosnsistency, really wants from me.
2. Fantasies provide a framework through which we see reality. They are anamorphic in that they presuppose a point of view, denying us an objective account of the world.
3. Fantasise are the one unique thing about us. They are what make us individuals, allowing a subjective view of reality. As such, our fantasies are extremely sensitive to the intrusion of others.
4. Fantasies are the way in which we organize and domesticate our jouissance.

Postmodern Racism
Zizek contends that today's racism is just as reflexive as every other part of postmodern life. It is not the product of ignorance in the way it used to be. So, whereas racism used to involve a claim that another ethnic group is inherently inferior to our own, racism is now articulated in terms of a respect for another's culture. Instead of "My culture is better than yours", postmodern or reflexive racism will argue that "My culture is different from yours". As an example of this Zizek asks "was not the official argument for apartheid in the old South Africa that black culture should be preserved in its uniqueness, not dissipated in the Western melting-pot? (The Fragile Absolute, or Why the Christian Legacy is Worth Fighting For)

For him, what is at stake here is the fethishistic disawoval of cynicism: "I know very well that all ethnic cultures are equal in value, yet, nevertheless, I will act as if mine is superior". The split here between the subject of enunciated ("I know very well...") and the subject of the enunciation ("...nevertheless I act as if I didn't") is even preserved when racists are asked to explain the reasons for their behavior. A racist will blame his socio-economic environment, poor childhood, peer group pressure, and so on, in such a way as to suggest to Zizek that he cannot help being racist, but is merely a victim of circumstances. Thus postmodern racists are fully able to rationalize their behavior in a way that belies the traditional image of racism as the vocation of the ignorant.

The Ethnic Fantasy
If "ethnic tension" is a conflict of fantasies, what is then the racist fantasy? For Zizek there are two basic racist fantasies. The first type centers around the apprehension that the "ethnic other" desires our jouissance. "They" want to steal our enjoyment from "us" and rob us of the specificity of our fantasy. The second type proceeds from an uneasiness that the "ethnic other" has access to some strange jouissance. "They" do not things like "us". The way :they" enjoy themselves is alien and unfamiliar. What both these fantasies are predicated upon is that the "other" enjoys in a different way than "us":

In short, what really gets on our nerves, what really bothers us about the "other", is the peculiar way he organizes his jouissance (the smell of his food, his noisy songs and dances, his strange manners, his attitude to work - in the racist perspective, the "other" is either a workaholic stealing our jobs or an idler living on our labor. (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

So ethnic tension is caused by a conflict of fantasies if we regard fantasy as a way of organizing jouissance. The specificity of "their: fantasy conflicts with the specificity of "our" fantasy".

For Zizek, the perception of a threat, by "them" as well as by "us", remains strong. The last two decades have witnessed a marked rise in racial tension and ethnic nationalism. Following Lacan and Marx, Zizek ascribes this rise to the process of globalization. This process refers to the way in which capitalism has spread across the world. displaceing local companies in favor of multinational ones. The effects of this process are nor necessarily just commercial, for what is at stake are the national cultures and politics bodies which underpin, and are supported by, resident industries. When McDonald's opens up in Bombay, for example, it is not just another business, but represents a specifically American approach to food, culture and social organization. The more capitalism spreads, the more it works to dissolve the efficacy of national domains, dissipating local traditions and values in favor of universal ones.

The only way to offset this increased homogeneity and to assert the worth of the particular against the global is to cling to our specific ethnic fantasy, the point of view which makes us Indians, British or Germans. And if we try to avoid being dissolved in the multicultural mix of globalization by sticking to the way we organize jouissance, we will court the risk of succumbing to a racist paranoia. Even if we attempt to institute a form of equality between the ways in which we aorganize enjoyment, unfortunately, as Zizek points out, "fantasies cannot coexist peacefully" (Looking Awry

The Ethics of Fantasy
For Zizek is the state that should act as a buffer between the fantasies of different groups, mitigating the worst effects of thoses fantasies. If civil society were allowed to rule unrestrained, much of the world would succumb to racist violence. It is only the forces of the state which keep it in check.

In the long term, Zizek argues that in order to avoid a clash of fantasies we have to learn to "traverse the fantasy" (what lacan terms "traversing the fantôme). It means that we have to acknowledge that fantasy merely functions to screen the abyss or inconsistency in the Other. In "traversing" or "going through" the fantasy "all we have to do is experience how there is nothing 'behind' it, and how fantasy masks precisely this 'nothing'".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The subject of racism, be it a Jew, a Muslim, a Latino, an African-American, gay or lesbian, Chinese, is a fantasy figure, someone who embodies the void of the Other. The underlying argument of all racism is that "if only they weren't here, ife would be perfect, and society will be haromious again". However, what this argument misses is the fact that because the subject of racism is only a fantasy figure, it is only there to make us think that such a harmonious society is actually possible. In reality, society is always-already divided. The fantasy racist figure is just a way of covering up the impossibility of a whole society or an organic Symbolic Order complete unto itself:

What appears as the hindrance to society's full identity with itself is actually its positive condition: by transposing onto the Jew the role of the foreign body which introduces in the social organism disintegration and antagonism, the fantasy-image of society qua consistent, harmonious whole is rendered possible. (Enjoy Your Symptom! Jacques Lacan in Holliwood and Out)

Which is another way of saying that if the Jew qua fantasy figure was not there, we would have to invent it so as to maintain the illusion that we could have a perfect society. For all the fantasy figure does is to embody the existing impossibility of a complete society.

Lacan.com thanks Tony Myers who graciously lent material from his Slavoj Zizek, London: Routledge, 2003.
 
06. 05. 14.
 
P.S. 아래는 라캉닷컴이 제공하고 있는 지젝의 간략한 전기적 이력이다.
 
He was born the only child of middle-class bureaucrats (who hoped he would become an economist) on 21 March 1949 in Ljubljana, the capital of Slovenia and, at that time, part of Yugoslavia. Yugoslavia was, then, under the rule of Marshal Tito (1892-1980), one of the more 'liberal' communist countries in the Eastern Bloc, although, as Zizek points out, the freedoms the regime granted its subjects were rather ambivalent, inducing in the population a form of pernicious self-regulation. One aspect of state control that did have a positive effect on Zizek, however, was the law which required film companies to submit to local university archives a copy of every film they wished to distribute. Zizek was, therefore, able to watch every American and European release and establish a firm grasp of the traditions of Hollywood which have served him so well since.

Zizek's interest in the films of Hollywood was matched only by a dislike for the films and, particularly, the literature of his own country. Much of Slovenian art was, for him, contaminated by either the ideology of the Communist Party or by a right-wing nationalism. Slovenian poetry specifically is still, according to Zizek, falsely venerated as "the fundamental cornerstone of Slovene society". Consequently, from his teenage years onwards, Zizek devoted himself to reading only literature written in English, particularly detective fiction.
 
Pursuing his own cultural interests, Zizek developed an early taste for philosophy and knew by the age of 17 that he wanted to be a philosopher. Studying at the University of Ljubljana, Zizek published his first book when he was 20 and went on to earn a Bachelor of Arts (philosophy and sociology) in 1971, and then went on to complete a Master of Arts (philosophy) in 1975. The 400-page thesis for the latter degree was entitled "The Theoretical and Practical Relevance of French Structuralism", a work which analysed the growing influence of the French thinkers Jacques Lacan, Jacques Derrida, Julia Kristeva, Claude Lévi-Strauss and Gilles Deleuze.
 
Unfortunately, although Zizek had been promised a job at the university, his thesis was deemed by the officiating panel to be politically suspicious and he therefore lost the job to another candidate who was closer to the party line. According to his fellow Slovenian philosopher Miaden Dolar (b. 1951), the authorities were concerned that the charismatic teaching of Zizek might improperly influence students with his dissident thinking.

Disappointed by this rejection of his talents, Zizek spent the next couple of years in the professional wilderness, undertaking his National Service in the Yugoslav army, and supporting his wife and son as best he could by occasionally translating German philosophy. However, in 1977 several of his influential connections secured him a post at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League of Slovene Communists where, despite his supposedly dissident politics, he occasionally wrote speeches for leading communists and, during the rest of the time, studied philosophy.
 
In these years, Zizek became part of a significant group of Slovenian scholars working on the theories of the French psychoanalyst Jacques Lacan (1901-1981) and with whom he went on to found the Society for Theoretical Psychoanalysis in Ljubljana. This group, among whose best-known members are Dolar and Zizek's second wife Renata Salecl (b. 1962), established editorial control over a journal called Problem! (in which Zizek was not afraid to author bad reviews of his own books, or even to write reviews of books that did not exist), and began to publish a book series called Analecta. Zizek himself is unsure as to why so many Lacanians should have gathered in Ljubljana, but he does point out that, in contrast to the other countries in the former Yugoslavia, there was no established psychoanalytic community to hamper or mitigate their interest in the usually controversial work of the Frenchman.

Although still disbarred from a traditional university position, in 1979 Zizek's friends procured him a better job as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Ljubljana's Institute for Sociology. At the time, Zizek thought that this was an intellectual cul-de-sac in which the communist regime placed those who were inconvenient to them. As it transpired, however, this job, which would be the envy of most academics, meant Zizek was able to pursue his research interests free from the pressures of teaching and bureaucracy. It was there that, in 1981, he earned his first Doctor of Arts degree in philosophy.
 
It was also in 1981 that Zizek travelled to Paris for the first time to meet some of the thinkers he had been writing about for so long and writing to - (he has several books by Jacques Derrida, for example, dedicated to him). Although Lacan was chief among these thinkers, he died in 1981 and it was actually Lacan's son-in-law, Jacques-Alain Miller, who was to prove more decisive in Zizek's development.

Miller conducted open discussions about Lacan in Paris (and he still does), but he also conducted a more exclusive thirty-student seminar at the Ecole de la Cause Freudienne in which he examined the works of Lacan on a page by page basis. As the only representatives of Eastern Europe, both Zizek and Dolar were invited to join this seminar and it is there that Zizek developed his understanding of the later works of Lacan which still informs his thinking today. Miller also procured a teaching fellowship for Zizek and became his analyst. It was during these analytical sessions with Miller, which often only lasted ten minutes, that Zizek learned the truth of his oft-reported assertion that educated patients report symptoms and dreams appropriate to the type of psychoanalysis they are receiving. The result of Zizek's fabrication was that the sessions with Miller often ended up as a game of intellectual cat-and-mouse.

This game ended in something of an impasse when Zizek completed his second Doctor of Arts (this time in psychoanalysis) at the Universite Paris-VIII in 1985. Miller, with whom Zizek had successfully defended his thesis, was the head of a publishing house but he delayed publishing Zizek's dissertation and so Zizek had to resort to a publisher outside the inner circle of Lacanians. This second major disappointment of his professional career threw Zizek back on his own resources. These resources were already being put to more obvious political ends back in Slovenia where Zizek became a regular columnist in a paper called Mladina. Mladina was a platform for the growing democratic opposition to the communist regime, a regime whose power was gradually diminishing throughout the second half of the 1980s in the face of growing political pluralism in both Yugoslavia and the Soviet Union.
 
In 1990, the first democratic elections were held in Slovenia and Zizek stood for a place on the four-man Presidency - he came a narrow fifth. Although he stood as a Liberal Democrat candidate, this position was more strategic than a matter of conviction as he was attempting to defeat the conservative alliance between the nationalists and the ex-communists. Zizek does not, as he has often said, mind getting his political hands dirty. Nor did he mind becoming the Ambassador of Science for the Republic of Slovenia in 1991.

Although Zizek continues to provide informal advice to the Slovenian government, his energies over the past decade have been firmly geared towards his research. Indeed, since 1989 and the publication of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Zizek has launched over 15 monographs, and a number of edited works written in English, on an eager public. He has also written books in German, French and Slovene, as well as having his work translated into Dutch, Japanese, Korean, Portuguese, Spanish, Slovak, Serbo-Croatian and Swedish. The prolific intensity of Zizek's written output has been matched by his international success as a lecturer where he has faithfully transcribed the molten energy of the word on the page to the word on the stage across four different continents.
 
Apart from his post at what is now the Institute for Social Sciences at the University of Ljubljana, Zizek has also held positions at SUNY Buffalo; the University of Minnesota, Minneapolis; the Tulane University, New Orleans; the Cardozo Law School,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New York; Princeton University;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New York; and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 since 1991. He also maintains his editorial role for the Analecta series in Slovenia, as well as helping establish Wo es war (a series based on Lacanian psychoanalysis and Marxism) and SIC (a series devoted to Lacanian analyses of culture and politics) in German and English.

At all stages in Zizek's life, then, we can detect the insistence of a theme. When he was growing up he preferred the films of Hollywood to the dominant culture of poetry in his own country. As a student he developed an interest in, and wrote about, French philosophy rather than the official communist paradigms of thought. When he began his professional career he preferred to read Lacan in terms of other philosophers rather than adhering to the orthodox Lacanian line. And, as we have seen, as a philosopher himself, he constantly refers to popular culture rather than those topics customarily studied by the subject. In each case, therefore, Zizek's intellectual development has been marked by a distance or heterogeneity to the official culture within which he works. He has always been a stain or point of opacity within the ruling orthodoxy and is never fully integrated by the social or philosophical conventions against which he operates.

The point is that although Zizek's unauthorized approach has cost him the chance to become part of the established institutions on at least two occasions (once with his Master's thesis and once with his second Doctorate), he has defined his position only in his resistance to those institutions. This is not necessarily a question of Zizek initiating some kind of academic rebellion, nor even of proving how in the long run his talents have surpassed the obstacles erected against them, but rather of claiming that the character or identity of Zizek's philosophy is predicated upon the failure of the institutions to accomodate his thought.
 
The eventual success of Zizekian theory proceeds partly from its clearly failure, from the fact that Zizek was able to perceive himself as alien to the system in which he worked. It was this alienation, this difference to the discourse of philosophy of which it was and is a part, which forged the identity of Zizek's own thought. Because Zizekian theory was no part of the objective system, it was in itself subjective. The reason that this is so pertinent is that Zizek describes the formation of what is known as the "subject" in a similar way. Indeed, one of Zizek's main contributions to critical theory is his detailed eleboration of the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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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평론 14호 / 발행일:2005-10-11 프린트
[시몽동 읽기(1)] 초개체성, 기술적 활동, 물상화 -- 시몽동 읽기
P. 비르노 & 히로세 / 역자 : 김상운




초개체성, 기술적 활동, 물상화
―질베르 시몽동을 읽다





* 출  처 : 情況, 2004년 12월호, pp. 94~113.
* 원  제 : 超個体性, 技術的活動, 物象化―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を読む
* 글쓴이 : 빠올로 비르노와 히로세 쥰(廣瀨 純)
* 이탈리아어판 : http://multitudes.samizdat.net/article.php3?id_article=1563
* 옮긴이 : 김상운(sanggels@freechal.com)
* 교정자 : 양창렬(nomade02@hotmail.com)



히로세 : 오랫동안 거의 잊혀져 왔던 프랑스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1924~89)의 사상이 80년대 말부터 프랑스 철학 무대 위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우선 그가 사망한 1989년에 박사학위 부논문인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1)가 재간행되었고(초판은 1958년), 또 1958년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주논문2)의 후반부가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3)라는 제목을 달고 같은 해[198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주논문의 전반부는 1964년에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4)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1995년에 같은 제목으로 재간행되었습니다. 1992년에는 파리의 ‘국제철학학교’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에서 시몽동의 작업에 관한 대규모 콜로키움이 개최되었고, 이 콜로키움에서는 시몽동의 작업의 풍요로움을 결정적인 방식으로 재발견해냈습니다.5) 그리고 1993년에는 질베르 오트와에 의해 시몽동의 사유에 관한 최초의 전문서적6)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1999년에 이르면 이번에는 뮤리엘 콩브가 PUF 출판사의 유명한 총서인 ‘Philosophies’의 한 권으로 시몽동 입문서7)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시몽동의 사유에 관한 가장 최신의 저작으로는 자크 루Jacques Roux가 편저하여 2002년에 간행된 논집8)이 있습니다.


시몽동의 사상을 부활시키려는 듯한 현재의 흐름은 현대 철학의 대안적 흐름과 다소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프랑스에서 질 들뢰즈에 대한 독해의 심화라고 하는 흐름이 바로 그것입니다. 적어도 시몽동에 대한 재평가의 흐름에 있는 모든 논자들은 당신이 시몽동의 이름을 몇 번이나 언급하면서 쓰고 있듯이, 시몽동이 ‘질 들뢰즈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특히 중요했다’고 하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들뢰즈는 1966년에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에 대한 서평9)을 발표했습니다만, 이 서평은 단순한 서평이 아니라 들뢰즈가 이로부터 3년 후에  쓴 󰡔차이와 반복󰡕에서 발전시켰던 ‘différent/ciation’이라는 개념―󰡔차이와 반복󰡕에서 특히 중심적인 개념―에 지극히 밀도 높은 형태로 완전히 스며든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 이후, 즉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가 간행되었던 해 이후에, 시몽동의 사유는 직간접적인 형태로 들뢰즈의 작업에 항상 끊임없이 반영되어 왔습니다. 중요하게는 시몽동의 사유의 재발견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들뢰즈의 작업에 있어서 시몽동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들뢰즈에게―따라서 펠릭스 가타리에게도―시몽동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중요했던 프랑스인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의 사유에 대한 최근의 재발견의 사례와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몽동의 사유에 대한 이러한 재발견에 관해 당신 자신이 기여한 것은 크게 나누어 다음과 같은, 상호보완적인 두 가지 지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흔히 ‘기술의 사상가’로 간주되곤 하는 이 철학자 시몽동의 저작 중에서도 당신은, 지금까지도 그다지 읽히지 않고 있는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중요성―그 중에서도 특히 그 정치적인 중요성―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로 이 책에서 인용된 시몽동의 사유를 맑스의 사유와 연관지우면서 당신 자신의 개념인 ‘포스트-포드주의적 다중’moltitudine postfordista 개념을 보다 엄밀하게 만들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예를 들어 뮤리엘 콩브는 앞에서 언급한 그녀의 입문서에서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것은 그 중에서도 특히 시몽동의 ‘초개체성’transindividualité이라는 개념 속에서 들뢰즈의 ‘주름’개념의 청사진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콩브가―그녀 역시 가지고 있던 노동의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조직화라는 현대적 물음을 놓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시몽동의 정치적 잠재력을 찾아내고, 이것을 특히 맑스의 사유에 접근시키고 있긴 합니다만, 그녀는 특히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바로 이 잠재력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 대상’objets techniques이라는 맥락에만 완전히 머물러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신은 시몽동의 사유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문장을 모두 세 번 정도 쓰고 있습니다. 우선 󰡔다중󰡕10)이 있고, 다음으로는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이탈리아어판(2001년 발행) 후기11)가 있으며, 그리고 가장 최신의 것으로는 프랑스의 「뮐티튀드」Multitudes의 최신호에 쓴 텍스트 「천사들과 ‘일반지성’―둔스 스코투스와 질베르 시몽동에게 있어서 개체화」12)가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거론한 출판물과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어떤 경우든 간에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선 첫 번째 질문입니다만, 당신은 처음에 어떻게 시몽동의 사유와 마주치게 되었습니까? 또, 시몽동을 거론할 때 당신이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집중적으로 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르노 : 제게는 개체화 원리principe d’individuation가 항상 계속적으로 근본적인 테마였습니다. 개체를 특이한singolare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제게 결정적인 문제인 까닭은, 이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개체individuo/individu가 이미 주어진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과정의 도착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체화 원리’라는 관념은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것(특이성)을 공통적인 것comune―즉 모두에게 분유되어 있는 것―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발표했던 졸저 󰡔관습과 유물론󰡕13)에는 특히 ‘Principium individuationis’라는 제목이 달린 한 장(章)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와 시몽동의 마주침의 계기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제가 (물리적, 심적, 집단적) 개체화를 그 중심축으로 삼았던 사상가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시몽동의 논의에서 제가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주체에 있어서도 개체화된 부분의 옆에는 항상 얼마간의 전개체적인 실재réalité pré-individuelle가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논의가 의미하는 바는 ‘주체’soggetto/sujet라는 관념 자체가 ‘공통적인 것’il Comune과 ‘특이한 것’il Singolare의 항상적인 상호연결로서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시몽동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논의는 집단il collettivo/le collectif에 관한 것입니다. 즉 집단은 개체를 억압하는 것도 개체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개체화를 세련되게 만들고 강화시키는 환경이라고 하는 논점입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모든 주체가 자기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의 부분 자체를 개체화한다는 것은, [개체를] 다수의 특이적 존재 사이의 관계 속에서 놓고 보는 것이자, 집단 속에 놓고 보는 것이며, 정치사회적인 협동 속에 놓고 보는 것입니다. 전개체적인 것은 바로 집단적 실천 속에서 초개체적인transindividuel 것으로 변형됩니다. 그러므로 또한 이 초개체적인 것이라는 범주는,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지구화라는 수준에서 볼 때, 이미 더 이상 국가적이지 않은 어떤 공적 영역, 비대의제적인 어떤 민주주의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시몽동의] 이러한 두 가지 논점이 진정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 속에서입니다. 시몽동의 논의는 널리 만연해 있는 다수의 견해, 정치적․철학적인 다수의 미신을 전복시킵니다.


제가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제외한 시몽동의 저작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는 그의 기술에 관한 저작(󰡔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을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1년 정도 전이던가요, 이 저작을 거론하면서 대학에서 세미나를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 텍스트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계속 출판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에 관한 시몽동의 사유는 기술을 재앙catastrophe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과 기술을 해방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20세기적인 사유의 대부분이 제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몽동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 미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 정치적 경험 등에 필적하는 것으로서의 위치를 기술에 다시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은 틀림없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것은, 기술이 초개체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 바꿔 말하면 기술이 개개인의 정신 속에서 개체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표현합니다. 기계는 인간의 사고 속에 존재하는 집단적인 것에, 즉 인간이라는 종에 특유한 어떤 것에 외재적인 면모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전개체적인 실재는 개체화된 의식의 표상들 안에서는 그에 적합한 대응물을 찾을 수 없기에, 보편적으로 사용가능한 기호, 객관화된 논리적 도식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로서 바깥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기술을 단순히 노동의 상관물로 간주하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잘못입니다. ‘기술’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 항term은 서로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것입니다. 기술은 개체적인 것인 반면, 노동은 개체적인interindividuel 것입니다. 즉 노동이 개체화된 개체들을 묶는 것인 반면, 기술은 모든 주체 속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 또는 확실히 전개체적인 것에 소리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술과 노동 사이에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대조contrast가 맑스에 의해 완전히 명확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고용노동, 비숙련노동, 임금노동을 ‘초라한 잔재’로 환원해 버리는 이런 위대한 공적이야말로 ‘general intellect’(일반지성), 즉 공적인 (또는 초개체적인) 자원으로서의 사유에 속한다는 맑스의 유명한 서술을 다시 떠올려 보기만 하더라도 이는 충분할 것입니다.






1)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 Aubier, 1989.

2)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3) Simondon,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Aubier, 1989.

4)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PUF, 1964.

5) 이 콜로키움의 논문집은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de L’Individuation et de la technique, Albin Michel, 1994로 출판되었다.

6) Gilbert Hottois, Simondon et la philosophie de la culture technique, Deboeck, 1993.

7) Muriel Combes, Gilbert Simondon. Individu et collectivité, PUF, 1999.

8)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opérative, Publications de Université de Saint-Etienne, 2002.

9) Gilles Deleuze,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étranger, vol. CLVI, no 1-3, janvier-mars 1966, p. 115-8, repris dans Deleuze, L’Ille dè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Éditions préarée par David Lapoujade, Les Éditions de Minuit, 2002, p. 120-4. [옮긴이―이번 󰡔자율평론󰡕 14호에 같은 섹션으로 실려 있다.]

10) 원제는 󰡔다중의 문법󰡕.

11) 이 서문은 「다중과 개체화 원리」Moltitudine é principio di individuazione라는 제목으로 비르노의 최근 저작인 Quando il verbo si fa courne. Linguaggio e natura umana, Billat Boringhier, 2003에 재수록됨. [이 글은 빠올로 비르노, 󰡔다중󰡕, 김상운 옮김, 갈무리, 2004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12) Virno, “Les Anges et le general intellect. L’Individuation chez Duns Scot et Gilbert Simondon,” Multitudes, n. 18. [옮긴이―이 글은 󰡔자율평론󰡕 14호의 같은 섹션에 양창렬의 번역으로 실려 있다.

13) Virno, Convenzione e materialismo, Theoria, Roma, 1986.




히로세 : 당신의 시몽동 독해 중에서 제가 특히 흥미 있다고 느끼는 것은[제가 특히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우선 ‘기술’의 물음에서 ‘일반지성’의 물음으로, 많든 적든 마치 돌연변이처럼 이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시몽동 자신은 일반지성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확실히 시몽동은 그가 ‘기술적 활동’activité technique이라고 부르는 것과 ‘노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고 있으며 (“기술적 활동을 단순한 노동과 구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 기술적 활동에는 기계의 사용만이 아니라 기술적 작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주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점이다. 즉 기술적 활동에는 개발․구축 활동의 연장 등과 같은 기계의 유지․조종․개량 등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몽동은]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을 ‘노동’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맑스적인 물음은 부차적인 것이며, 시몽동은 이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소외에 속해 있는 여러 양태들 중의 하나’, 즉 ‘경제적 소외’만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시몽동이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을 ‘노동’ 속에서 찾아내는 까닭은, ‘노동’―또는 오히려 ‘분업/노동의 분할’divisione del lavoro―이 묶는 노동자들은 어디까지나 ‘구성된 개체’individus constitués 또는 ‘개체화된 개체’로서의 노동자이며, 노동이 이처럼 간개체적인 관계이므로 ‘노동’에서 노동자들은 ‘하나의 ... 초개체적인 관계의 구성’, 즉 ‘전개체적인 실재라는 짐burden14)에 토대를 둔 집단적 개체화’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모든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또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분유되어 있는―이 ‘전개체적인 실재라고 하는 짐’ 또는 ‘아페이론’에 따라서만, 각각의 노동자들은 이제 ‘구성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체’(‘개체보다 큰 존재’)로서, ‘기술적 대상 속에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으며’,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술적 대상의 계속적인 발생’ 속에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시몽동은 ‘소외를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이 기술적 활동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에서는 ‘기계’ 또는 ‘기술적 대상’을 수단으로 한 물질적 생산만이 문제로 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주체=노동자가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의 짐’(‘아페이론’, ‘자연’ 등)을 논할 때에도, 주체=노동자들이 지니고 있는 ‘기술적 대상에 관한 지식’ 등에 관한 것만으로 문제가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시몽동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서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기술적 대상과 인간의 총체인 기업은 그 본질적인 기능, 즉 그 기술적인 작업에 토대를 두고 조직되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당신의 경우, 당신이 ‘일반지성’ 개념―맑스의 󰡔그륀트리세󰡕의 한 절(「기계에 관한 단장」)에서 당신이 도출해 내고 있는 개념―과 연관시키면서 ‘전개체적인 실재의 짐’을 논할 때에는, 시몽동처럼 기계에 관한 지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하고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Gattungswesen’(‘유적 존재’) 전체에 분유되어 있는 ‘지성일반’intelletto in generale이라는 문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에 따르면, 당신의 경우에는 주요한 생산수단으로서의 물질적 기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생산(이른바 ‘비물질적 노동’ 또는 ‘인지적 노동’) 문제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또한 ‘초개체성’이라는 개념을 당신 자신의 ‘현대의 삶 형태에 관한 분석’을 위한 하나의 무기로 삼는 것이 가능하게 되겠죠.


여하튼 당신은 󰡔다중󰡕에서, 특히 ‘일반지성’이라는 개념에 관한 맑스의 정식화가 지닌 불충분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당신은 맑스가 ‘일반지성’이라는 것을 대상화된 과학적 능력으로, 즉 기계 시스템으로 상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죠. 시몽동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맑스 역시 ‘일반지성’을 ‘기술적 대상’으로서만 구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언급했던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시몽동이 전제했던 논의들에 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지요? 확실히 󰡔그륀트리세󰡕의 맑스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시몽동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이 ‘불충분함’이야말로 맑스의 󰡔자본󰡕(특히 ‘인간의 신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육체적․정신적 모든 성향들의 총체’로서의 ‘노동력’ 개념을 논하고 있는 곳곳)에 대한 재독해, 그리고 이와 동시에 시몽동의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에 대한 재독해로 당신을 이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르노 : 당신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시몽동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의 윤곽을 그리기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다른 많은 (우리의) ‘친구’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시몽동 역시 쉬어야 하고, 그때부터는 우리 혼자 나아가야 하죠.  우리가 받았던 도움에 관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향수든 애석해하는 마음이든 간에 이런 것들에 빠져들지는 말아야겠죠. 확실히 시몽동은 기술의 초개체적인 성질과 집단의 초개체적인 성질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몽동이] 위의 두 가지 상이한 초개체성의 형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점, 아니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두 가지 형식이 서로 융합되는 (각각의 형식은 이 융합에 의해서 따로따로 흩어져 있을 때와는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합니다) 지점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시몽동이 이것을 해 낼 수 있었을까요?) 그 융합의 지점은 현대적인 산 노동, 즉 ‘대중지력’intellettualità di assa 또는 ‘인지적 노동’lavoro cognitivo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이란 정치사회적인 집단인 동시에 ‘일반지성’이기도 합니다. 노동력은 개발력으로 됩니다만, 이것은 기계의 작동에 관한 노하우를 가지고서 노동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와 언어활동이나 상상력 등을 토대로 하는 산 주체들 사이의 협동을 통해 기계를 넘어서서 기술을 발전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워하고 있는 것은 ‘일반지성’이 지닌 이중의 측면을 적합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일반지성’은 한편에서는 임금노동의 암흑시대를 넘어섰을 때 파악될 수 있는 사회적 협동의 기초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나 그 중앙집권적인 행정장치나 복종의무 등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다양한 정치적 제도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중의 측면 속에서야말로 ‘기술로서의 초개체적인 것’il transindividuale-tecnica과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il transindividuale-collettivo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지금은 세 번째 것이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 것은 위의 두 가지에서 파생되는 것입니다만, 그래도 어쨌든 이러한 두 가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 세 번째의 초개체적인 것, ‘기술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이기도 한 이 세 번째의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코뮤니즘이라고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서는 이것이 인간적 실천의 공통의 장소luogo comune15)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고 싶습니다.


시몽동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 봅시다. 정치에 관해 말할 때의 시몽동에게는 일종의 순진무구함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를 논할 때 시몽동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질보다도 낮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몽동에게 보다 많은 정치적 암시가 엿보이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가 정치를 논하지 않을 때입니다. 가장 좋은 예는 ‘집단적 개체화’나 기술 개발에 관한 그의 서술입니다.




히로세 : 이러한 ‘기계 너머의 기술’로서의 ‘일반지성’이야말로, 바로 당신이 맑스와 시몽동의 제반 논의 속에서, 하지만 동시에 이 두 사람의 사상가―맑스와 시몽동이 말했던 ‘노동’ 모델은, 채플린이 정확히 이 말에 부여했던 의미에서의 ‘근대적인’moderno 채로 존속하고 있습니다만―를 넘어서도록 이끌어냈던 결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당신이 말한 의미로 이해하게 되면, ‘일반지성’에는 기술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이라는 ‘이중의 측면’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거듭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듯이 어떤 ‘양의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해 당신은 예를 들어 󰡔다중󰡕 일본어판에 첨부되어 있는, 즉 ‘Colectivo Situaciones’와 행한 인터뷰인 「양의적인 조건」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16) ‘현대적인 산 노동’은 ‘일반지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바로 ‘노동’,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은, 순전한 ‘창의력’이 여기에서 동원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근대적’ 노동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생산적’ 노동이기도 하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을 바로 이런 의미에서 논할 때는 ‘기술’과 ‘노동’이라는 시몽동식 구별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기술’에 특유한 것인 ‘초개체성’이 바로 ‘노동’의 중심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이러한 의미에서 당신은 󰡔다중󰡕 제4장의 ‘테제 7’에서, ‘노동’을 ‘도구적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이것이 ‘소통적 행위’와 대립된 형태를 띤다고 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입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시몽동이 제기하고 있는 물음, 즉 ‘소외’에 관한 물음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근대적’ 생산에서는 노동의 ‘간개체성’이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므로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서는 ‘초개체성’―하버마스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소통적 행위’―이 ‘노동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포스트-포드주의의 맥락에서 ‘소외’를 논할 수 있을까요? 저는 시몽동식의 관점, 즉 노동의 분할(분업)에 따른 ‘간개체성’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맑스적인 관점, 즉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관점에서도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 관한 ‘소외’를 논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지는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서 생산수단은 ‘일반지성’에 다름 아니며, 이 ‘일반지성’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항상 이미 분유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만, ‘소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맥락에서도 유효한 것입니까? 만일 유효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유효한 것일까요? 만일 유효하지 않다면 왜 유효하지 않는 것일까요?


‘일반지성’의 ‘양의성’은 그러한 기술적인 측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측면, 즉 그 정치적인 측면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일반지성’에 근거를 둔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은 국가의 의회정치 시스템을 위기에 빠뜨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이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비대의제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당신이 󰡔다중󰡕 제2장 마지막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행정 기관들의 비대한 성장’ 역시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오늘날의 국제정세에서, 무엇보다 특히 이라크 문제를 둘러싸고서 미합중국 정부의 경우만이 아니라 일본 정부, 이탈리아 정부 등의 경우에서도, ‘법률에 대한 시행령decree의 우위’라는 상황이 전례 없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그러한 시행령decree에 [과연] 합법성이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시행령을 연발하는 그러한 주권에 정당성이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제게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말하자면 시몽동에 따르면 ‘간개체적인’ 관계가 ‘계약’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와는 반대로, 어떠한 ‘계약’에도 근거를 두고 있지 않는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의 경우에는 주권의 정당성이 아예 문제 자체가 되지 않으며, 또한 자기정당화의 이러한 불가능성 자체가 역설적으로는 정부들에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 시행령을 연발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르노 : 당신이 제기한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는 정말 많지만,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도 몇 가지에 한정하여 대답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에 관해 당신이 지적하고 있는 양의성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은 기술의 초개체성을 자기 안에 흡수해 버렸습니다. 즉 개개인의 노동이 타인의 노동에 덧붙여짐으로써 간개체적인 협동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개인의 노동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초개체적인 협동의 한 가지 특수한 모습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은 집단의 초개체성마저도 자신 속에 흡수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생산 작업은 정치적 행위와 유사한 것으로 되며, 타인의 현전presence을 필요로 하며, 가능적인 것이나 예측 불가능한 것을 통해 측정됩니다. 이 모든 점에서 생각해 볼 때, 노동은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노동이 아니었던(정념, 정서, 언어 게임 등)을 포함할 때까지 무한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 즉 ‘도구적 행위’와 ‘소통적 행위’라고 하는 그의 대립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것에서 유래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이 노동이 된다고 한다면, 더 이상 어떤 것도 노동이 아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노동이 [과거의] 그러한 특성을 상실하고, 노동을 다른 경험과 분리시켜 왔던 경계선이 [오늘날에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노동이 진정으로 잉여가치나 이윤의 측면에서 생산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비노동 속에서 전개되어 왔던 인간의 제반 능력에 대해 노동이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양의성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노동입니다만, 바로 이것에 의해서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계속 파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이라는 용어와 대립하는 형태로 초개체적 활동attività transindividuale이라는 것을 논해야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또한 당연한 것이지만, 다음의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오늘날 자본주의가 강력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이 초개체적 활동노동이라고 하는 속박 속에 완전히 가둬버리는 것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성 혹은 판단의 동요는 이러한 압박 속에 그 물질적 기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외에 관해서는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적 고찰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물상화’reificazione를 ‘소외’에 대한 해독제가 되는 한에서 유일하게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소외’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개체적인 실재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외재적인 ‘사물’cosa, 눈에 보이는 하나의 ‘res’, 하나의 명시적인 현상, 또는 다양한 공적 제도로부터 생겨난 총체로 되기 위한 매개적인 과정precoess을 ‘물상화’라고 불러봅시다. 반대로 전개체적인 것이 여전히 주체의 내적인 요소로 남아 있으며, 여전히 이 주체가 그것의 고용자로 될 수 없는 듯한 상태를 ‘소외’라고 불러 봅시다. 즉 소외당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조건지우면서도 우리들이 파악할 수 없는 듯한 전제조건으로서, 암시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란, 전개체적인 것이 사회적 생산의 실질적인 기초이면서도 ‘res publica’, 정치적 조직, 대의제적 민주주의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외 개념과 물상화 개념은 상호간에 서로를 함축하고 있기는커녕, 오히려 완전히 서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물상화는 소외를 발생시키는 수탈에 대한 유일한 대책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또한 완전히 물상화되지 않는 존재, 사고, 존재양태라고 하는 것은 소외된 것인 셈입니다.


 






14) [옮긴이] 원래 이 대담집에는 burden이라는 영어가 없고 대신 ‘負荷’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짊어짐, 떠맡음’, ‘책임감’, ‘하중’, ‘부하’, ‘부담’ 등의 의미를 지닌다. 

15) [옮긴이] 일본어판에는 '인간적 실천의 공유의 토포스'로 되어 있다.

16) [옮긴이] 이 인터뷰는 󰡔자율평론󰡕 제10호(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642&p_no=1)에 「일반지성, 엑소더스, 다중」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font>



히로세 : 전개체적인 실재의 초개체적인 ‘res’로의 변화로 재정의된 ‘물상화’reificazione/Verdinglichung. ‘물상화’ 개념에 대한 지극히 근본적인 재정의야말로, 실제로는 󰡔말이 살이 될 때󰡕Quando il verbo si tàcarne라는 제목이 달린 당신의 최신 저작에서 중심적인 테마가 되고 있습니다. 무릇 이 저작의 제목 자체가 바로 당신이 지금 말해 주었던 ‘물상화’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말이 ‘살’로 되는 것, 또는 모든 주체에 분유되어 있는 전개체적인 자연이 ‘res’로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이 살이 될 때󰡕에는 ‘물상화의 찬가’Elogio della reificazione라는 제목이 달린 장이 있습니다만, 그 장에서 당신은 ‘소외’에서만이 아니라 ‘사물화’fetishism으로부터도 ‘물상화’를 구별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물상화’는 ‘소외’뿐만 아니라 ‘사물화’에 대해서도 ‘해독제’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상화’와 ‘사물화’에 대한 이러한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신은 다시 아주 흥미로운 개념 하나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즉 맑스가 말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rapporto tra cose와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관계의 사물’cose del rapporto라고 하는 개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상화’의 경우, 바로 이 ‘물상화’에 의해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관계의 사물 속으로 체화’되는 반면, ‘사물화’의 경우 맑스가 󰡔자본󰡕에서 논했던 대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물상화는 관계 자체를 부여하는 것인 반면 사물화는 그[관계의] 상관항들에 작용한다’, 즉 모든 구성된 개체들에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물상화’는 초개체적인 것인 반면, ‘사물화’는 간개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로부터 당신이 끌어 들이고 있는 개념에 두 개의 커다란 선들이 그어지게 됩니다. 즉 ‘초개체성-기술적 활동-물상화’라고 하는 선과 ‘간개체성-노동-사물화’라고 하는 선입니다.


여기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라는 물음으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를 ‘전개체적인 실재가 res publica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있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가 ‘기술적 활동’을 자신 속에 포섭하고 있다면, 즉 전개체적인 실재의 초개체적인 ‘res’로의 변용을 포섭하고 있다면,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물상화된 초개체적인 ‘res’로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것은 소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라는 당신의 표현은 형용모순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만일 이 표현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한다면, 그 경우에는 ‘초개체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개념적 차이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초개체적인 것’과의 관계에 있어서 ‘공적인 것’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또한 이러한 저의 질문은 ‘다중 즉, 포스트-포드주의적 다중의 경험에 있어서 부정적인 측면’으로서의 ‘인격적 의존관계’dipendenza personale라는 당신의 논의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여기에서는 ‘사물에 의해 매개되지 않기 때문에 투명’하다고 하는 의미에서, 바로 이러한 ‘인격적 의존관계’ 속에서 ‘가장 큰 소외’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격적 의존관계’가 ‘res publica’(공적인 ‘res’)로는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여전히 초개체적인 ‘res’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당신은 ‘인격적 의존관계’에 관한 물음과 관련된 형태에서 ‘공적인 영역이 아닌 공공성’pubblicità senza sfera pubblica이라는 것을 논하고 있습니다. 시몽동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것을 ‘공적 영역이 아닌 초개체성’이라고 바꿔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비르노 : 우선 가장 먼저, ‘사물화’에 관해서, 또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물상화’, ‘소외’, 그리고 ‘사물화’라는 (유명하면서도 완전히 동의어로 보일 정도로까지 모든 것이 애매한) 세 가지 개념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두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당신의 질문 중 가장 중요한 것(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질문에는 ‘하찮은 것’이 하나도 없기는 하지만...), 즉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물음에 대답하고 싶습니다.


소외란 우선 이미 말했던 대로, 우리들의 삶, 사유, 실천의 한 측면이 다른 모습을 취하며, 자유롭게 사용될 수 없게 되며, 우리들에 대해 불명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철학적인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자아의식, 즉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는 모든 종류의 표상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자체에 관해서는 어떠한 표상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적인 ‘나’에 관한 어떠한 성찰도, 그 자체가 그것과 동일한 ‘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뒤를 향해 계속 역행해 나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결코 그 대상에 각도angle를 고정시킬 수 없습니다. 소외되어 있는 것은 ‘나’ 이전의 ‘나’Io prima dell’Io라는 이미지이며, 그 자신의 전제로 되어 있는 파악불가능한 ‘나’라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치적인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우리들 속에 존재하는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종 또는 인간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는 이것이 외재적이고 집단적이며 정치사회적인 표현을 찾아내는 한에서는 소외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물화란 내면생활, 즉 개체들 각각의 고립에서 생겨난 소외에 대응하기 위한 어떤―거짓된, 혹은 잘못되었던―경향입니다. 사물화는 인간 정신에 특유한 자질(사회성, 추상능력, 소통 능력 등)을 어떤 사물에―예를 들어 화폐에―적용하는 것에서 존재합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물상화란 소외를 배제하기 때문에 올바르고 유효한 방법입니다. 물상화는 사물화와는 달리 이미 부여되어 있는 사물을 뽑아 들고 이것에 물활론animism적인 가치를 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되고 내면적이며 파악불가능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것을 사물, 즉 ‘res’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상화는 소외된 ‘나’ 이전의 ‘나’에 대해서, ‘나’ 바깥의 ‘나’Io fuori dell’Io라고도 말할 수 있는 대립시킵니다. 자아의식, 그 형성, 따라서 그 구조가 눈에 보이는 실천 속에, 언어활동적인 사건 속에, 외재적인 사실 속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전개체적인 것의 소외에 대해서, 물상화는 개개인의 정신들을 결합하는 것, 즉 ‘인간들 사이의 관계’rapporto tra uomini라고 말할 때의 ‘사이’tra는, 틀림없이 공적인 제도로 되며, 눈에 보이는 사물성cosalit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립시켜 놓습니다. 사물화물상화는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두 가지 대안적인 수단,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두 개의 상반되는 수단인 것입니다. 진정한 대조contrast는 내면생활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이러한 두 개의 상반되는 수단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가 봅시다. 당신의 논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행 자본주의는 인간존재의 전개체적인 제반 특징들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이용함으로써 여기에 ‘res’라는 실질, 즉 외재적인 사실의 실질을 부여하고 있으면서도, 현행 자본주의는 이미 소외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인 수준에서도 정치적인 수준에서도 물상화의 은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당신이 말한 것은 반은 맞지만 반은 잘못되었습니다. 당신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맑스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까? ‘주식회사는 사유재산제 자체의 제반 규칙들에 기초한 사유재산제의 지양이다’라고 말한 구절 말입니다. 맑스가 여기에서 말했던 것은 주식회사가 현행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생산력의 발전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특유의 방법으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맑스의 한 구절을 우리들의 논의에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그렇게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포드주의란 소외에 기반을 두고, 소외의 특징들을 유효한 것으로 삼은 채로 소외를 지양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참된vero 것과 효력이 있는vigente 것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참된 것은 생산관계들의 초개체적인 성질입니다. 그렇지만 효력이 있는 것은 이것을 지배하고 있는 간개체적인 (따라서 독재적인!) 제반 규칙들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생산에 필요하게 된 것, 즉 정신적인 자원의 공통적이고 분유적이며 공적인 성질은 횡포이면서 정밀한 위계질서의 확대 속에서, 또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인격적 의존관계의 역설적인 재번영 속에서 전복되게 됩니다. 당신이 마지막 질문에서 제안한 정식, 즉 공적 영역이 아닌 초개체성참된 것(초개체성)과 효력이 있는 것(소외와 사물화) 사이의 대조를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적 영역 속에서 물상화되지 않는 초개체성은, 아주 많은 측면에 있어서 전개체성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한 번 더 반복하자면 이것은 참된 것이기는 하지만,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두 개의 형용사―‘vero’(참된)와 ‘vigente’(효력이 있는)―사이에서야 말로 정치적인 투쟁의 대양(大洋)이 열리게 됩니다.




히로세 : 실제로 󰡔다중󰡕 제4장의 ‘테제3’에서 당신은 ‘참된 것’과 ‘효력이 있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바에 따르면, 현대의 노동사회의 위기에서, 즉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노동시간은 효력이 있는 측정단위이지만, 참된 측정단위는 아니’게 됩니다. 이 ‘테제’는 같은 장의 ‘테제 5’에서의 당신의 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잉여가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특히 노동시간으로는 정산되지 않는 하나의 생산시간과 이른바 노동시간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결정된다.’17) 이 두 개의 테제를 함께 사고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동시간이 이제는 참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참된 것은 지금은 생산시간의 쪽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반대로 생산시간이 아직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효력이 있는 것은 항상 노동시간의 쪽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당신이 지금 말했던 ‘정치적 투쟁’의 한 가지 영역이 있는 셈입니다. 즉 어떻게 하여 생산시간을 효력이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가, 또는 다르게 말하자면 어떻게 하여 생산시간을 하나의 ‘res publica’ 속에서 물상화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측정단위’로서의 생산시간에 효력을 부여할 수 있는 한 가지 공적인 제도로서 ‘basic income’(시민소득)이라는 기획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은 이 제안이 많든 적든 간에 케인즈주의적인, 단순한 부의 재분배제도일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기획일 뿐이라면서 이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적어도 확실한 형태로서는, 이러한 ‘basic income’이라고 하는 제안을 논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당신 자신의 ‘물상화’에 관한 논의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제안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된 것효력이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은 또한 ‘다중’과 국가(또는 ‘인민’) 사이의, 보다 엄밀하게는, 다중의 초개체성과 국가적인 (또는 인민적인) 간개체성 사이의 정치적 선택 속에서도 엿보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몽동은 국가를, 이러한 국가를 구성했던 개체들 사이의 계약적인 그룹들이라고 하는 이유에서 간개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된 것은 다중의 초개체성이며 효력이 있는 것은 국가적인 간개체성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가 ‘res’로 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 즉 소외시키는 것은 임금노동의 간개체성만이 아니라 국가의 간개체성도 있다는 듯이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중󰡕 제2장에서 당신은 실제로는 소외의 과정process이 지닌 이러한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일반지성’이 자율적이고 공적인 영역으로서 그러한 모습을 부여받고 있지만, 여기에는 ‘일반지성’을 상품생산이나 임금노동과 결부시켰던 연계가 절단되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들의 전복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비국가적인 공적인 영역이, 즉 ‘일반지성’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는 듯한 정치적 공동체가 창설되지 않으면 안 된다”18)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두 개 정도의 질문을 던지고 싶은데요, 우선 첫째로 오늘날 임금노동과 국가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또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으로서의 ‘비대의제적인 민주주의’를 논할 때, 당신은 이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만일 가능하다면 전개체적인 것의 ‘물상화’라고 하는 물음과 관련지어, 의회 시스템과 국가행정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비르노 : 오늘날 정치 투쟁의 환경에 관한 당신의 정리는 확실히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시간은 이제 사회적인 부의 참된 단위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계속적으로 효력이 있는 단위입니다. 반대로 복합적인 생산시간(이 생산시간은 ‘삶’vita 자체―언어활동, 정서 등―와 일치합니다)이 참된 단위로 되고 있지만, 이것은 아직까지는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투쟁, 조직화 과정, 전술, 투쟁형식(파업, 사보타주, 불복종 등)과 같은 모든 것은, 이미 으로 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효력이 있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문제와 대치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의 정치적 행위는 다음과 같은 평가기준에 의해서 그 가치가 측정되어야만 합니다. 즉 어떤 정치적 행위는 그 자체로 올바르거나 틀린 것이 아니며, 국가와 임금노동의 시대를 넘어선 결과 찾아내게 된 어떤 시민성civilità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제가 ‘basic income’을 옹호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노동의 바깥에서 소득을 분배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생산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통로입니다. 말하자면 ‘basic income’은 초개체적인 협동에 대한 소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초개체적인 협동에 [돈을] 지불하는 것은 이 협동을 (참된 것이면서도) 효력이 있는 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저는 (당연하지만 개념적인 측면에 있어서) ‘basic income’을 도달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오히려 하나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보장소득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명령이 아니라 자유롭게, 타인의 협박이 아니라 자유롭게, 즉 좀 더 능동적으로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basic income’은 사회적인 개발력의 기폭제로서, 결국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황당한 짓거리가 아니라 ‘자기기업가정신’autoimprenditorialità을 위한 기초로 사고되어야만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60년대에 대공장의 포드주의적인 노동자들이 ‘생산성으로부터 분리된 임금상승’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전대미문의 목표야말로 ‘basic income’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서도, 어떤 경우든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은, 노동력 상품이라는 존재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그 시대, 즉 60년대에는 노동력 상품의 가격이 무한하게 상승했고 최종적으로는 이것이 ‘반경제적인 것’antieconomica으로 되는 것에 도달할 때까지, 노동력이라는 상품 가격의 상승을 목표로 삼고 이를 추구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간개체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휴(遊休) 노동으로 보일 때에도, 노동력 상품에 보복함으로써 노동력 상품이라는 존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basic income’이 신케인즈주의적인 처방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론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앞에서 제가 말했던 것처럼 이미 참된 것을 효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어떤 목표의 가치를 측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또한 제게는 보장소득이라는 목표가 유물론적으로도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프랑스 혁명의 세 가지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Egalité, Fraternité가 머리에 떠오르는 군요.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세 가지 슬로건에는 그리스도교 부르주아들의 어떤 토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신 앞에서 ‘평등’하며, 또한 법적인 주체로서, 또한 상품교환의 주역으로서 ‘평등’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은 (인격적 종속 시스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자유’입니다. 동시에 국민nation에 속해 있다는 자격에서도 사람들은 ‘형제’입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우리들에게 ‘basic income’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의 감성적 신체이기 때문이며, 이 신체는 고용자 하에서의 활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기생적인 사회적 비용으로 되었던 한 시대 속에서, 살아 있는 기쁨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은 유물론자의 전통 전체를 이어받은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비대의제적 민주주의’도 제게는 같은 것입니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당신은 제게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premessa’(전제)입니다.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다중이 ‘인민’이라는 허울을 계속 걸치고 있는 한, 그 존재양태(생산의, 소통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것의 양태)의 가장 높은 것에 대응했던 정치적 형식을 개발하지 못하는 한, 우리들은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실행만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세요. 베를루스코니와 신우익New Right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공동화(空洞化)하고 있고, 어떠한 현실적인 기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업정당partito-azienda로 계속 바꿔치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권자’가 아니라 ‘일반지성’genenral intellect에 있어서 중심화된 새로운 공적 영역이 부재하게 되면, 다중 그 자체가 모든 종류의 유독함, 모든 종류의 파괴활동, 따라서 자기파괴활동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적이고 냉소주의적이며, 부패한 전쟁을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적한 다음에, 지금 여기에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보고 싶습니다.


사회포럼19)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 하나와 가장 근사치입니다. 사회포럼에는 실제로 소통 능력, 기술적 능력, 직업적 능력이라는 다양한 능력이 모여듭니다. 사회포럼은 초개체적인 생산적 협동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생산적 협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사회포럼이 아직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에는 완전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굉장한 선례라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은 오늘날 국가의 행정기구 속에 응축되어 있는 제반 앎/권력saperi/poteri을 점진적으로 흡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앎/권력은 의회가 아니라 행정권력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앎/권력을 다시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필시 일련의 국지적인 실험에 착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지역은 새로운 정치적 형식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적인 생산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은 가운데, 이러한 실험을 하나의 지점에서 중심적으로 행하는 거죠. 이러한 국지적인 실험이 완전히 진전을 이루게 되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재생산가능한으로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문제는 ‘국가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권력을 해체하는 것, 국가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주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의 제반 특징들을 특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빈약하고 볼썽사나운 것이라고 하는 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전복적인 정치논리라는 것에는, 실천적인 이니셔티브initiative만이 메울 수 있는 는 듯한 공백의 공간space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이름에 걸맞는 어떠한 정치이론도 예측 불가능한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7) [옮긴이]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잉여가치는 무엇보다도 노동시간으로 계산되지 않는 생산시간과 적합한 의미에서의 노동시간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결정된다.”(비르노, 󰡔다중󰡕, 179쪽).

18) [옮긴이] “한편으로 일반지성은 상품생산 및 임금노동의 생산에 결부되어 있는 연결고리를 절단했을 때에만 자율적인 공적 영역으로 확실히 드러난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전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의 제도화와 더불어, 일반지성을 중심축으로 삼는 정치적 공동체의 제도화와 더불어 표방될 수 있다.”(같은 책, 118쪽).

19) [옮긴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회포럼’은 ‘세계사회포럼’과 ‘유럽사회포럼’만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건설될 수 있는 모든 ‘사회포럼들’을 지칭한다.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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