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생각은 성노동자를 희생자로 여기는 것은 그녀를 주체로 보지 못하게 만들며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주체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마 성노동 그 자체의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바로 성노동자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가로막는다는 생각도 이와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희생자의 파토스"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예컨대 발리바르는 '희생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곧바로 그/녀들의 주체화를 가로 막는 것은 아니다'라고 명시적으로 반박한다. 반대로 희생자는 자신이 부당하게 희생되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자신의 탈-희생자화가 만인의 해방의 조건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즉 스스로를 '인민의 인민'으로 제시함으로써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성노동자의 주체화를 위해 성노동자가 이 사회의 희생자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분명 오류다. 이러한 '부인'은 성매매를 정당화하려는 남성주의자들의 논리가 다시 슬며시 뒷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한국인권뉴스, 한국양성평등연대 등 "성거래" 영구존속론자가 끼어드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성노동자의 운동을 '계약'을 깨뜨리는 부당한 사용자(포주든 클라이언트든) 등에 대한 저항 내지 보다 나은 계약을 위한 운동으로 가두고(따라서 성노동 운동을 자신이 목소리 높여 비판하는 자유주의적 한계 내로 가두고) 성노동 그 자체는 즉시 문제 삼지 않거나 먼 미래의 과제로 무기한 연기시키는(즉 성매매의 폐지라는 목표의 실현시점만을 연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폐지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 자체를 연기시키는) 위험을 갖는다.
게다가 한 발 더 나아가서 성노동이 그 자체로 폭력이 아니며, 따라서 다른 노동과 다를 바도 없는 노동일 뿐이라고 본다면, 특정한 산업분야로서의 성산업을 폐지할 이유 자체가 모호해질 수 있고, 여기까지 논의가 이르게 되면 성매매 궁극적 폐지론과 영구존속론은 사실상 차별점을 상실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성노동을 (궁극적이든 즉각적이든) 어쨌든 폐지시켜야 되는 이유는 성노동 그 자체가 남성주의적 사회에 의한 (간접화된) 집단 강간이며, 따라서 명백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폭력의 희생자인 성노동자에게 행해지는 사회의 '이중낙인'을 제거하기 위해 성노동의 폭력성 자체를 부인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생각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이중낙인은 그 자체로 폭력의 폭력, 폭력에 대한 폭력의 과잉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력"이라는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중력에서 탈출하자고 말할 수 없다면, '성노동은 폭력이다'라는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남성에 의한 여성 유린으로서의 성노동의 폭력에서 탈출하자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러한 폭력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길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진보연대가 성노동자 운동에 굳건히 연대하고 있는 것을 누구 못지 않게 지지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사회진보연대 내에서 더 깊이 이루어지고 현재의 노선이 재고될 수 있기를 또한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미 올린 '논평'이라는 글에서 했던 말을 중언부언한 것을 용서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