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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항쟁’에서 대안세계화 사회운동으로! IMF 신자유주의 10년을 끝장내자!
87 항쟁 20주년, IMF 10년을 맞이한 사회운동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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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2007년은 87 항쟁 20주년이고, IMF 위기 10년이 되는 해이다. 또 대선이 있다. 민주주의와 선진화, 전망과 대안이 새해 벽두의 화두다. 그러나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은 너무나 참혹하다. IMF 위기 이후 계속된 장기 불황과 민생 파탄은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민주와 진보의 실패로 오인하는 대중의 정치적 환멸과 증오를 등에 업고 보수화의 검은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정작 이러한 현실을 앞서 타개해 가야 할 노동자 민중운동은 거듭된 패배와 혁신의 지체로 생기를 잃고 있다.
87년 20년, IMF 10년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부르주아 선거 싸이클과 우연이 만들어낸 숫자놀음일지도 모른다. 집권 세력과 타락한 386들의 허황된 신화화로 87년의 의미 또한 크게 훼손된 지 오래다. 그러나 민중 항쟁의 단절과 복원의 역사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우리에게 87 항쟁 20주년의 의미는 여전히 현재적이다. 6월 항쟁 자체는 6.29로 마무리된 듯 했지만, 예상치 못한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다시 살아났고, 이로부터 조직된 변혁적 대중운동들은 그 후 90년 보수대연합분쇄투쟁, 91년 5월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이어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IMF 10년은 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의 10년을 새로이 결산하고 전진해야 한다는 면에서, 그 의미와 각오가 새롭다. 뿐만 아니라, 10년 전의 외환위기는 오늘에도 부동산파동과 장기불황, 한미 FTA로 그 모습을 바꿔 계속되고 있다.
87 항쟁 20년이 되는 오늘,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87 항쟁의 역사적 유산을 오늘에 되살려 계승하는 사회운동의 과제는 무엇인가.


민주화 20년? 386의 그릇된 신화는 집어치워라 !

87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른바 ‘87년 체제’라는 정체불명의 용어로 표현된다. ‘87년 체제’란 보통 87년 항쟁으로 인한 정치적 결과(혹은 보다 좁은 의미로 직선제 개헌을 한 6공화국 헌정체제), 즉 군사 정권의 퇴장과 문민 정권의 등장으로 정착된 현재의 정치 체제를 이전의 군부 독재 체제에 대비되는 민주화 체제로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87년 체제의 근간은 민중 항쟁이 아니라 노태우가 주도한 6. 29 타협에 있다. 그 결과 87년 항쟁의 정치적 성과는 선거를 통한 군사 정권의 재등장으로 소실됐고, 이후 90년 민자당 합당을 통한 보수대연합의 결성, 93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로 변질됐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 즉 군사 정권의 퇴장과 문민 정권의 등장이 민주화의 진전이 아닌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의 정치적 조건, 신자유주의적 정치 재편이라는 사실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우리보다 10년 일찍 이러한 정치 변동과 경제 위기, 신자유주의화를 경험한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개발독재국가들의 경험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논자들이 이러한 결과를 두고,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의 달성과 실질적 민주주의의 미완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형식과 실질, 또는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은 문민정권의 기본성격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며, 나아가 변화된 현실의 계급대립을 외면한다. 그 결과 반신자유주의 운동은 정치적 민주화와 구별되는, 혹은 그에 미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부차적인 운동이거나 부문운동으로 축소 배제된다.
민주변혁운동과 결합된 민중 항쟁은 분명 존재했으나, 결국 권력과 제도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남았다. 문민화는 절차적 민주화의 진전이나 공고화이기는커녕 민중 항쟁을 통한 민주화를 저지하기 위한 시도이고, 항쟁의 정치적 성과를 독식한 자유주의 지배분파의 타락과 배반일 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체제로서의 ‘87년 체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항쟁 이후 정치사회적 변화를 굳이 87체제라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87체제는 민주화체제와는 전혀 다른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고쳐 말해야 할 것이다.


무능과 기만의 10년, 누가 보수반동화의 기초를 놓았는가

그러나 막상 그렇게 민중 항쟁의 맥을 자르고, 그 정치적 과실을 찬탈해 간 신자유주의 정권들은 모두 하나같이 실패했다. 특히 IMF 이후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진 이른바 ‘진보정권 10년’은 신자유주의적 인민주의 정치가 꽃피운 시절이었다. 이들 정권은 개혁과 참여, 민주를 참칭했지만,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무능과 기만을 숨길 수는 없었다. 감격스러운 선거 캠페인의 환호는 채 반년을 넘기지 못했고, 반민중적이고 폭력적인 신자유주의 통치의 본성은 연이은 노동자민중의 희생과 피를 부르고야 말았다. 그 결과 대중의 정치적 불신과 환멸이 극에 달하고, 민주주의와 진보는 하나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정권의 반민중적인 신자유주의 정책과 폭력성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참칭한 민주와 진보가 비웃음과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아가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진보정권’ 스스로가 선도하는 왜곡된 형태의 전사회적인 보수화로 이어지고 있다. 오랜 경제 위기로 수동화된 대중은 인민주의적인 네거티브 정치 캠페인에 쉽게 휩쓸리고, 캠페인을 주도한 세력이 실패하는 사태가 반복되면서, 점점 더 크게 실망한 대중의 정치적 불신과 연대파괴가 한층 심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비단 정권과 386의 배신만이 87 항쟁의 정치적 성과를 유실시킨 것은 아니다. 추가로 노동자 민중 운동 측의 두 가지 원인을 짚어야 한다. 87~91년 계급투쟁의 국내외적 패배로 인한 변혁 이념과 운동/조직의 해체가 그 하나이고, 남은 민중운동 역량이 90년대 중후반 이후 코퍼러티즘적 노동조합과 당으로 수렴된 일이 두 번째 원인이다. 보통 이 같은 일이 벌어진 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90년대의 변화와 해체를 거쳐, 이후 2000년대 민중운동은 몰아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방어적이고 코퍼러티즘적인 동원과 계급분할/연대파괴의 효과 안을 맴도는 동일성의 정치에 갇혀 왔다. 운동의 위기와 혁신이 이야기됐지만, 대부분 현상적인 진단과 대증 요법에 그친 가운데 근원적인 혁신은 지체된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87항쟁에서 대안세계화로 !
: 대안세계화 사회운동의 연대연합과 시민교육운동 프로세스의 창출을 향하여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훼손당한 87항쟁과 그 뜻을 되살린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민주주의의 전진을 가로막는 위협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자화자찬하는 386의 기만을 제거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말뜻 그대로 인민이 주인 되는 것이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절차가 내용을 규정할뿐더러, 내용 없는 절차적 완성이란 하나의 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에 관한 분명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관련하여 우리는 특히 대안세계화 운동이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오늘날 무한 착취와 약탈로써 세계 인민의 생존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파괴할뿐더러, WTO나 IMF, FTA 등 개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초민족적 제도에 개별 국가를 종속시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인민의 정치적 통제권을 무력화하는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야말로 민주주의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대안세계화 운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개별 집단은 물론 심지어 개별 국가 수준에서조차 해결될 수 없는 운동의 객관적 조건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함께 토론하고 대안을 실행할 수 있는 다양한 국제주의적 공간과 주체를 형성하려 노력함으로써 특정 제도와 동일성을 넘어 민주주의의 경계를 확대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존의 코퍼러티즘적인 조직 틀에 갇혀 기득권 방어에 머무는 보수적인 반세계화 동원을 지양하고, 열린 틀과 소통 구조를 바탕으로 (상층 재편이 아니라) 대안적인 이념과 운동 체계를 형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조건에 적합한 형태로 기존의 운동 이념과 조직이 쇄신되어야 한다는 지향을 실천하고 확산한다. 이렇듯 대안세계화 운동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민주적으로 맞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deMOREcracy)의 가장 유력한 사례 중 하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안세계화 운동이 별도의 ‘부문운동’이 아니라 정치의 새로운 전망, 그리고 특히 주체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부활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다. 정치적 주체 예컨대 시민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도 결국 앞서 지적한 여러 가지 변화에 맞설 수 있는 주체 형성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성적․민족적․계급적 동일성이 가지는 배타성을 악화시켜 인민의 단결과 연대를 파괴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동일성들 간의 분할을 극복하고 연대를 확장하는 시민들의 공동체를 구성해 내는 것이 관건이다.
바로 이 때문에 대안세계화 사회운동은 노동자통제와 자기통치를 실행할 수 있는 대안적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을 가장 긴급한 운동 의제로 부활시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시민교육운동’이다. 본래 시민교육은 정치적 운동의 보조적 부분이 아니라, 정치와 양립하는 변혁운동의 독자적인 운동과정이었다. 그러나 자기교육운동은 대안세계를 건설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독자적인 운동과정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특정한 정치적 동일성을 주입함으로써 정치 운동을 보조하는 운동으로 그 위상이 축소 변경되면서 사실상 소멸했다. 동원과 동일성의 정치를 극복해야 하는 이 때, 우리에게는 일회적인 집회동원이나 형식적인 선전교육이 아닌 대안적인 정치활동양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또한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고, 특정한 동일성과 입장에 갇히지 않는 연대의 공간을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자기교육운동으로서의 시민교육운동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중요한 방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무능과 거짓, 전쟁과 빈곤의 시대에 맞서, 노동자 민중이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대안세계화, ‘더 많은 민주주의’로 새로운 세계를 재건하는 것. 이를 위한 새로운 해방적 변혁적 사회운동과 주체를 형성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87 항쟁을 오늘에 되살리는 유일한 길이며, ‘잃어버린 10년’과 2000년대 초입의 패배를 넘어서는 우리의 대안이다.

2007년01월17일 17: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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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7-01-1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이 생각해보니까 그런 해로군. 87년이래봤자 난 초딩조차도 아니어서;; 아무 기억도 없지만... 사회진보연대에서 생각하는 시민교육운동이라는 것의 구체적인 상이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전출처 : 로쟈 > 라캉 읽기에 관하여

2002년 가을에 라캉 읽기에 대해서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놓는다. '라캉 읽기의 몇 가지 방식'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말투로 보아 라캉 입문서를 묻는 질의에 대한 응답이었던 듯하다. 그 사이에 변화된 사정에 대해서 얼마간 보충하도록 하겠다.

 

 

 

 

현재 라캉 읽기에 있어서 대표적인 선두 주자들이라면, 슬라보예 지젝과 브루스 핑크를 들 수 있을 겁니다. 국내 출판계에서도 프로이트 전집 발간 이후 차츰 라캉 읽기쪽으로 독서층의 관심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물론 그 독서층이라는 것이 몇 줌이나 되랴 싶지만, 푸코나 들뢰즈의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재연할 수만 있다면(그래봐야 1만부 미만일 거라는 제 짐작이지만) 그리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그것이 출판계의 요구/관심일 테고, 다른 한쪽에는 서구의 첨단 이론이나 철학을 수입/소개하는 데에 어떤 소명의식을 느끼는 일련의 지식인(지식분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플라톤이나 프로이트 등과 같은 '거장'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라캉은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난해한 저작(들 중의 하나)의 생산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문학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대학이란 제도 안에서 박사/교수들이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었듯이 라캉 또한 알 듯 모를 듯한 이론과 도식(수학소)들을 통해서 (라캉을 아는)지식인들과 (라캉을 모르는) 일반인들을 가르는 준거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것입니다.

물론 현재로선 라캉에 대한 앎이 우리 사회에서 대단한 상징적 권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의 이론이 대중화될수록, 그래서 대중에게 라캉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중요한 사상가로 각인될수록, 즉 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수록 라캉에 대한 지식은 곧 권력화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겠지요. 아시다시피 이미 프랑스 정신분석학과 라캉에 대해서는 셰리 터클의 <정신분석적 정치>(<라캉과 정신분석혁명>(민음사, 1995)으로 번역됨) 같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지젝과 핑크로 돌아옵시다. 혹자는 지젝에게서 임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데, 사실 그것이 지젝의 라캉 읽기/해석에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모든 라캉 읽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임상입니다. 임상은 임상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또 프랑스에서 라캉식 정신분석의 자격증을 따온다는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에서 법적으로 그러한 정신분석이 공인되어 있지 않는 한 말입니다. 국내의 일부 정신분석의들이 라캉식 치료법을 어깨너머로 응용/적용한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 해야 '흉내'이고 대개는 '사이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지젝은 라캉을 임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갔고, 그의 생산성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접근은 꽤나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향락의 전이>에서 지젝 자신이 고백하듯이 그가 대중문화 텍스트를 읽는 데 라캉을 이용한 것은 일차적으론 그 자신이 라캉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례를 찾듯이, 아니 사례를 통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되듯이, 지젝은 (자신이 읽기에도) 난해한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나 대중소설들을 동원한 것인데, 뜻밖에도 성공을 거둔 것이고, 그것은 라캉 이론을 더 풍부하게 확장시켜 나가는 데 기여합니다.



보다 정통적인 의미에서 라캉의 '주석가' 역할을 하는 핑크는 이러한 지젝의 작업을 상당 부분 보완해 주는 듯합니다(이들은 알렝 밀레르가 모는 라캉 정신분석학이란 쌍두마차의 두 마리 말과는 같아 보입니다). 핑크는 이미 국내에 번역된 <라캉과 정신의학>(원제는 <라캉식 정신분석에 대한 임상적 입문>)과 <라캉의 주체>를 통해서(*국역본이 근간예정이다), 그리고 세미나에 대한 주석서들의 편찬을 통해서 새로운 라캉 읽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곧 그가 새로 번역한 영역판 <에크리>도 다시 나온다고 하지요(*핑크의 완역본 <에크리>는 올해 출간됐다).

이 두 마리 말, 지젝과 핑크는 꽤 절친한 사이로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도 똑같이 밀레르의 세미나를 통해서, 즉 후기 라캉을 통해서 라캉에 접근해 나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라캉에 대해 다시 흥미를 갖게 된 것도 순전히 이들의 작업 때문이고, 이들에 의해서 소개받은 후기(70년대의) 라캉 이론이 갖는 파워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라캉 이론은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수십년간 몇 차례의 탈바꿈, 혹은 이론적 방점의 이동에 따라 진화해 온 것입니다. 단순화시키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 순으로 그 방점이 이동해 왔고, 밀레르 사단은 실재에 대한 라캉의 이론을 중심에 놓고 그 이전의 작업들은 재해석 혹은 '번역'(핑크 자신이 쓴 용어입니다)합니다. 그리고 이 후기의 라캉은 사실 <에크리>(1966) 이후의 라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에크리>가 국역된다고 해서 라캉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이해(구조주의자 라캉!)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고, 후기의 세미나들이 마저 번역돼야 할 듯합니다. 물론 그 세미나들에 대한 주석서들과 참고서들도 함께 소개돼야 하겠지요.

 

 

 


지젝과 핑크, 그리고 다리언 리더의 만화책(<라캉>)을 제외하면, 국내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라캉 연구서들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중심으로 라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서 라캉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진행합니다(<철학의 외부>에서 이진경도 그렇게 한정된 라캉의 상을 소개하고 그의 '구조주의'를 비판하더군요). 조금 과장되게 얘기하면,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은 어떤 동일한 라캉이 아니라 라캉'들'입니다(*지젝은 '라캉 대(對) 라캉'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라캉 이해에 가장 시급한 것은 그 라캉'들'을 윤곽지어줄 수 있는 교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왜냐하면 라캉 자신은 그러한 차이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해명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부분적인 라캉에 대한 소개로 이해를 대신하려는 시도들은 그간의 것으로 충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젝과 핑크의 책들이 보다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번역되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에서 비춰지는 라캉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유용할 거 같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용성에 비추어 볼 때, 몇몇 라캉 연구자들의 젠체하는 태도도 충분히 용인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마저 없다면, 무슨 보람으로 그 머리아픈(!) 일들을 해나간단 말입니까?...

02. 09. 30/ 06. 08. 22.

P.S. 다리언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에 기대어 국내에서 라캉 읽기의 지름길(?)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다리언 리더는 라캉의 법적 상속자인 자크 알랭 밀레르(밀러) 사단의 일원으로 보이는데, 런던에서 개업하고 있는 정신분석가라고 한다. 책의 말미에 더 읽기(Further Reading)로 라캉의 1차 문헌과 그에 관한 2차 문헌 해제를 싣고 있다.

라캉의 <에크리>(1966)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인데, 영어권에는 셰리단의 발췌 번역(1977)으로 소개돼 있고, 이 책은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리더에 의하면 그 번역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고 또 내용도 난삽하다(*지금은 핑크의 완역본이 나왔으니 셰리단의 영역에 의존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래서 권하는 것이 세미나인데, 밀레르에 의해 20권 가량(?)으로 편집되고 있는 불어본 세미나는 대학 도서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불어를 못 읽는 독자는(그의 책은 웬만큼 불어를 하는 사람들도 읽어내지 못한다) 영어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데, 1,2,3,7,11,20권까지 5-6권 정도가 영역돼 있고, 브루스 핑크가 주석서가 2-3권 나와 있다(1,2권, 11권). 참고로 러시아어로는 <에크리>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상태이며 세미나만 5권 정도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국어본에만 의존하려고 할 경우 사정은 더 안 좋은데, <욕망이론>(문예출판사, 1994)이라고 발췌 번역된 라캉의 책은 셰리단의 책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으로(그러니가 중역이다), 50년대 라캉의 중요한 글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부분적으로 지나치게 의역하고 있다).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문예출판사, 1994)은 구조주의 시절의 라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이 책엔 라캉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역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소쉬르 이후의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리더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라캉의 초기 논문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라쿠-라바르트와 낭시의 'The Title of the letter: a reading of Lacan'이 있다. 국내 도서관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라캉이 칭찬했다는 책이다). 하지만 전문적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핑크의 'Lacan to the Letter'가 가장 요긴하겠다.  

다리언 리더가 적극 추천하고 있는 책은 벤베뉴토의 <자크 라캉의 저작>인데(하나의학사에서 김종주에 의해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역시 우리말 번역본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거의 절판된 책이다. 그리고 필수적인 참고서라 할 사전. 딜런 에반스의 <라캉 정신분석 사전>(인간사랑)이 번역돼 있는데, 국내 라캉학자들이나 호사가들이 번역진으로 망라돼 있지만, 편차가 심하고 용어도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가급적이면 원서와 같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요컨대 라캉에 대한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는 셈이다. 리스크가 필수적인 것.

 

 

 



그래도 라캉을 읽으려고 한다면, 그래도 번역이 괜찮은 지젝이나 핑크의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부분적인 오역과 불성실한 교정에도 불구하고(인간사랑에서 나온 모든 책에 공통적이다) 읽을 만하다. 하지만, 역시나 쉬운 책은 아니며, <삐딱하게 보기>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향락의 전이>인데, 아쉽게도 이 책은 지젝의 번역본 가운데 최악이다. <라캉과 정신의학>이라 번역된 브루스 핑크의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고, 다이언 리더도 적극 추천하고 있다. 그 책과 짝이 되는 것이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인데,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으며 두껍지 않은 분량이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만하다.

라캉의 전기서로는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이 가장 자세하다. 하지만, 다소 근거없는 사실들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나마 라캉 읽기에서 다행인 것은 적극 추천할 만한 2차 문헌이 많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한줌의(?) 책만 열심히 읽으면 된다.

02.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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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을 한다는 얘기는 언젠가 들었는데

오늘이 마지막날인데다가 때마침 외출 시간이 맞어서 '즐거운 지식'을 보게 되었다.

원제는 Le Gai Savoir/Joyful Wisdom/Die froehliche Wissenschaft .

예전에 청하판으로 나온 니체의 책을 읽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사실 니체랑은 별 상관없었다-_-;;

사이트에 실린 영화소개를 옮겨보면 이렇다

<에밀 루소와 파트리샤 루뭄바는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 그것들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소리와 이미지 분석은 자연스럽게 텔레비전과 영화, 언론과 정치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텔레비전에서 제작을 의뢰했으나 1968년 5월을 겪은 후 방영을 거부당한 이 영화는 <중국 여인>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집단’ 영화의 모태가 된다.>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라... 1968년 5월 혁명을 겪은 고다르가  당시 유력한 학생운동 지도자와 함께

만든 영화집단의 이름이란다.  이 집단은 혁명 영화의 생산과 제작, 배급을 선언하며 자본에 대항하는

급진적 영화 만들기를 모색했다 하는데, 과연 온갖 이미지(와 그 위의 문자들)와 소리가 정말

전위적으로 난무하는 가운데 맑스-레닌, 마오, 문화혁명 등의 말들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영화는 시종일관 에밀 루소라는 남자와 파트리시아 루뭄바라는 여자가 계속 온갖 종류의 이미지와

소리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진행된다.  혁명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그 무렵의 시위 구호가

아무런 이미지없는 화면에서 소리만으로 울려퍼지거나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이는 단어들을 연속해서

들려주기도 하고, 아무 소리없이 제3세계의 참상을 다룬 사진들, 마오의 초상, 또는 만화의 한 컷,

데리다나 기 드보르의 책 표지(스펙타클의 사회) 등등이 휙휙 지나가기도 한다.

초반에 사물과 현상 그리고 그 둘의 내적 관계로서의 이미지 어쩌구 하는 얘기가 나오다가 이미지와

소리 간의 관계, 그 각각의 특성들, 그리고 막간의 인터뷰 등을 통해 언뜻 흥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하는데, 무분별하고 무질서해보이는 나열과 병치 속에  의미와 비의미의 경계는 아슬아슬하다.

일단 영화가 워낙 정신없이 훌훌 지나가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자막 따라가기도 벅차서

막상 영상에 관심을 많이 못 쏟기도 했고...  확실히 느리고 완만한 성찰의 여지보다는 이미지와 음향의

즉각적인 물질성이 영화에서는 주도적으로 나타난 듯 하다.

정신없이 90여분을 보고 난뒤 든 첫생각은 아..  영화를 이렇게 찍을 수도 있구나 하는 멍한 생각 정도.

왜 근데 제목이 즐거운 지식인가? 에밀 루소라는 다소 작위적인;; 이름이 뒤로 들여오는 계몽의 뉘앙스,

또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문화혁명의 토대(대학을 학생에게! 아니 대학을 노동자에게!),

아님 이미지와 소리들을 모으기/그것들을 비평하기/이미지와 소리의 두어가지 모델을 설정하기

라는 순서로 이어지는 그들의 (영화)학교와 관련되기 때문일까?

그건 그렇고 그 뒤에 다시 상업영화로 복귀한 고다르가 영화와 혁명 사이에서 생각했던 것은 뭐였을까?

기술복제시대 속에서 사진이나 영화를 혁명적 역량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본 벤야민 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비슷한 시대에 극장에 앉아서 똑같은 영화를 보고있는 대중들을 보고 도롱뇽 같다고

무시한 아도르노도 있었으니...  상식과 관습을 깨부순 이미지-소리의 극단적 실험과 자본주의(및 자본

주의적 배급망)에 대한 거부 속에서 그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일지...

뜬금없게도  "우리는 제로(0)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등장인물의 대사, "빗자루로 쓸지 않으면

먼지는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왠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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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 사회운동에서 펌. 

 

 

백승욱, 『자본주의 역사 강의』, 그린비(2006)


정 희 찬 | 회원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자본주의의 기원과 미래

21세기 첫번째 10년의 중반을 넘어선 지금 두드러지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위기다. 외채상환을 빌미로 강제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실업과 빈곤 속에서 점증하는 대중적 분노와 원한의 정치, 만성화된 종족간․인종간 갈등과 내전 등은 남반부 대부분의 지역에서 대부분의 인구를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케인즈주의적 사회-복지국가 모델의 폐기와 금융시장 부양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라는 중심부 국가에서의 신자유주의 반혁명은 극소수 금융자산자들에 의한 부의 독점을 조장하고 있다. 또한 2003년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본격화된 미국의 예방전쟁․선제공격이라는 독트린은 오히려 더 큰 폭력과 무질서의 혼란을 야기하며 미국의 무능력을 노출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강의』(백승욱, 그린비, 2006)는 바로 이러한 정세 속에서 “세계체계 분석과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시각”을 택하면서 “우리가 통념으로 가지고 있었던 많은 사고들을 재검토”(p.8)하고자 한다.

세계체계 분석(world-system analysis)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기되는 것은 남한에서 1980년대 사회성격논쟁의 한계와 기존 사회주의관이 현시점에서 지니는 난점이다. 사회성격논쟁의 경우,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기반을 두고있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20세기 이후 새롭게 나타난 미국 자본주의 변화를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19세기 말 이후 영국 자본주의 모델이 위기에 처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독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모델, 즉 금융과 산업자본 카르텔 등 수평적 통합을 통해 결합한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가 등장한다. 한편 이와 경합하는 다른 자본주의 모델, 즉 법인기업을 중심으로 수직적 통합을 통해 거래비용을 내부화하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동시에 출현했던 것인데 레닌의 제국주의론에는 결국 승리한 미국 자본주의가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평가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국유화를 내세우며 결국 소비에트나 평의회 등 대중운동을 부차화 내지 억압하게 된 역사적 경험이나 최근 중국의 급격한 자본주의 발전을 살펴보면,  16~17세기 영국과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따라잡기 위해서 구사한 일종의 중상주의적 전략과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노선이 매우 다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효과의 차원에서 보자면 굳이 다르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1) 왜냐하면 중상주의란 자국의 생산구조를 고도화하여 세계경제에 더 나은 조건으로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중국이나 소련의 사회주의는 결국 반주변부로 진입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종결된 것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들을 자본주의 역사의 ‘외부’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세계체계 분석은 이처럼 20세기 새로운 자본주의의 등장을 둘러싸고 혼란을 노정 했던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보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세계체계 분석이 정립되기까지는 브로델(F. Braudel), 폴라니(K. Polany), 월러스틴(I. Wallerstein), 아리기(G. Arrighi)의 기여를 우회할 수 없다.


세계체계 분석의 전사: 브로델과 폴라니

세계체계 분석은 다른 누구보다 브로델의 연구성과를 상당 부분 계승한다. 브로델은 주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국역: 까치, 1997)에서 자본주의를 장기지속의 시간대에 위치 짓고, 삼층도식의 최상층에 자리잡은 독점의 영역으로 파악한다.

장기지속은 “구조의 시간”, 즉 “구조가 지속되는 시간”으로서, ‘먼지’에 불과한 사건의 단기 시간대 및 지속기간이 너무 길어 시간의 의미가 사라지는 초장기지속과 구분된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다루는 시간대는 바로 이 장기지속의 시간대이며, 장기지속은 다시 복수의 콩종크튀르(conjoncture)와 맞물려 복합적인 시간대를 형성한다. 브로델에게 장기지속의 시간대는 13세기 북부 이탈리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더불어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삼층도식으로 파악하는데 1층은 물질문명, 2층은 시장경제, 3층은 자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상호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는 투명한 완전경쟁시장으로서 C-M-C'의 원리, 즉 자본이 축적되지 않는 교환의 영역이다. 자본주의는 바로 경쟁을 배제하고 독점을 통해 이윤을 축적하는데, 레닌이 경쟁의 상부구조로서 독점을 언급했듯이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독점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독점의 사례는 원거리 무역을 독점한 유럽의 대상인인데, 바로 이들이 초기 자본주의 역사의 주역들이다. 독점을 향한 경쟁은 반드시 국가의 지원을 조건으로 하고 있으며 그 공간적 범위는 세계시장으로 확대된다. 브로델의 자본주의관은 국가 없는 독점(자본주의)의 불가능성, 세계경제(world-economy)로서의 자본주의의에 대한 이해, 자본운동의 범위로서 생산 뿐 아니라 금융과 유통의 영역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함의를 지닌다. 하지만 브로델에게 자본주의가 생산의 영역에 자리잡고, 상부구조에 자리잡게 된 19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변화에 대한 분석은 공백으로 남는다. 이와 관련하여 시장경제의 자기조정적 변화와 이에 대한 사회의 ‘자기보호’ 기제의 작동을 분석하는 폴라니의 작업이 주목된다.

19세기 영국이 자본주의를 선도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주된 특징은 자본이 생산의 영역으로 진출했다는 것, 즉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는 유럽에 한정된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비로소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시기이기도 하다.2)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국역: 민음사, 1997)이 다루는 것이 바로 19세기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한 분석이다. 폴라니의 분석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시작된다. 19세기 말 영국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하자 그동안 헤게모니를 지탱해왔던 금본위제는 내부로부터 사회를 붕괴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 금 1온스당 1파운드라는 가치를 유지하고 파운드를 국제적인 건전화폐로 유지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은 불가능한데, 이러한 금본위제를 정당화한 것이 이른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였다.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에 대한 신앙은 전국시장의 형성과 동시적인 과정이다. 전국시장은 16~17세기 네덜란드를 따라잡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중상주의적 국가전략에 의해 추동되는데, 전국시장이 형성되려면 국가간섭과 더불어 값싼 생필품의 대량공급을 뒷받침하는 생산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자본의 생산영역으로의 진출이 시작되며 그 과정에서 토지, 노동력, 화폐 등의 허구적 상품이 등장한다. 바로 이 허구적 상품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자기보호 기제가 작동하는데(이중운동) 그 대표적인 것이 초기에 농촌 공동체를 수호하고 빈곤과 기아의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를 구제하려는 스핀햄랜드법이다. 그러나 이는 보조금에 의존하는 빈민을 창출했을 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후 등장한 신구빈법은 빈민들에게 극악한 구빈원 생활과 공장노동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면서 ‘기아의 규율’을 통해 오히려 노동력의 상품화를 촉진하였다. 또한 경제의 파국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등장하지만 이 역시 19세기 말 점차 괴리되어 가는 자유무역과 금본위제의 안정에는 실패한다.

그 결과 20세기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의 자기보호 기제는 파시즘, 사회주의, 뉴딜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등장한다. 시장경제의 위기에 대한 사회의 자기보호는 사회주의처럼 급진적 대안의 형태일 수도 있고 파시즘과 같이 반동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중운동, 즉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의 자기보호 기제의 작동이라는 분석틀은 노동력의 상품화과정에서 국가의 억압적 역할을 조명하고, 전지구적 차원에서 19세기 및 20세기로 넘어가는 과정 중 나타나는 전반적인 변화를 파악하는 데는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월러스틴과 아리기의 세계체계 분석

1970년대 등장한 세계체계 분석은 앞선 시기부터 제기된 지적운동의 연장선상에 자리잡고 있다. 세계체계 분석의 이론적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종속이론과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다.

종속이론은 제3세계의 저발전과 후진성을 근대화의 ‘과소’가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불균등 발전의 결과로 파악하고 핵심적으로 ‘종속’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로부터 중심과 주변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종속이론은 점차 근대화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를 비교하는 요소론으로 경도되면서 국가중심적 사고로 회귀한다. 종속이론의 또 다른 판본인 생산양식 접합론에서는 제3세계를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전(前)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접합이라는 틀로 분석하는데 여기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서구 자본주의와 동일시되고 근대화론의 기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중심과 주변의 자본주의 발전이 상이한 경로로 분기한다는 종속이론의 문제의식는 이후 세계체계 분석을 통해 심화․발전된다.

돕(M. Dobb)과 스위지(P. Sweezy) 사이에 벌어진 자본주의 이행논쟁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로의 이행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요한 논쟁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원동력을 둘러싼 돕과 스위지의 논쟁은 ‘내인론’과 ‘외인론’이라는 구도를 형성한다. 돕은 영국을 분석하면서 농민층의 분해와 여기서 비롯된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에서 이행의 동인을 참고자 하였고(내재적 발전론), 스위지는 전 유럽을 분석하면서 북유럽과 여타 유럽을 잇는 원거리 무역에서 나타나는 독점을 중시한다. 스위지는 여전히 자본주의를 19세기 근대 공업체계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불충분한 측면이 있었지만 일국적 차원에서 생산양식의 교체가 일어난다는 돕의 논지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세계체계론의 문제의식과 친화적이다.

월러스틴과 아리기는 일국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분석하는 기존의 지배적인 인식을 비판하며 세계체계로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재과정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둘 사이에는 근대세계체계로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중요한 쟁점이 자리잡고 있으며 특히 아리기의 작업은 미국 헤게모니하의 현대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자본주의 기원: 16세기 농업 자본주의 vs 13세기 상업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기원과 팽창을 분석하면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진화적이고 목적론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일단 자본주의 등장에 대한 월러스틴의 설명은 “정세론”이다. 즉 근대자본주의의 기원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영주제의 위기․국가의 위기․교회의 위기․몽골의 몰락이라는 정세적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가 세계체계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억압하던 영주․국가․교회가 위기에 처하면서 자본주의의 거점이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 흐름을 장악할 만큼 강한 집단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권력의 공백 상황에서 세계 각지를 정복해가던 몽골의 돌연한 유럽정복 중단이 유럽에서 자본주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기가 보기에 자본주의 출현에 대한 월러스틴의 ‘정세론’은 단지 조건에 불과할 뿐이며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속에서 해명되지 않기 때문에 불충분하다. 아리기는 또한 월러스틴이 자본주의 기원을 16세기로 설정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는 농업 내부의 기축적 분업에 의한 분화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장소만 바뀌었을 뿐 돕이 영국을 대상으로 ‘내재적 발전’을 도출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아리기는 자본주의 등장을 경쟁과 혁신이라는 틀로 설명한다. 여기서 자본주의 기원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동방과의 원거리 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당시 치열하게 벌어지던 국가들 간의 경합에서 금융자본을 지원하고 비로소 북부 이탈리아와 북부 유럽의 세계경제가 유럽의 세계경제로 통합되면서 자본주의 역사가 시작된다.


2) 근대세계체계의 구조: 중심-주변의 기축적 분업구조 vs 체계적 축적순환으로서 헤게모니 순환

『근대세계체계론』(국역: 까치, 2000)에 나타나는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분석에서 핵심적인 것은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기축적 분업(axial division of labor) 구조다. 이러한 분업구조 속에서 노동력은 임노동자나 노예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인종주의와 성차별구조에 따른 위계구조가 중첩되면서 세계 노동계급 내부에 성적․인종적 분할을 각인한다. 또한 국가간체계는 이 기축적 분업의 구조 속에서 제도화되며 영토주의적 논리에 따라 팽창하는 세계제국의 등장을 봉쇄함으로써 자본축적을 보호한다. 기축적 분업구조 속에서 재생산되는 계급적 불평등, 중심-주변의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근대세계체계가 재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체계를 합리화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 덕분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의의에 대해 월러스틴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계급투쟁으로 파악하거나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계기로서 이해해왔던 기존의 이해방식을 부인하고 20세기까지 서로 수렴․경합해왔던 세 가지 근대정치이데올로기(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급진주의)의 발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자유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내세우며 능력주의/성과주의(meritocracy)를 통해 불평등한 위계구조가 부정되지 않도록 기능한다. 또한 전문가에 의한 점진적인 개혁, 즉 엘리트에 의해 통제되는 국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진보를 선호함으로써 보수주의의 반동을 제어하는 한편 도시 프롤레타리아, 식민지 인민 등의 ‘위험계급’에 대한 포섭을 시도한다. 그 포섭의 기제는 국내적으로는 보통선거권과 민족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복지국가, 국제적으로는 민족자결권의 수용과 발전주의다. 이 포섭의 기제가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했고 자유주의 이외의 이데올로기, 특히 사회주의마저 수렴될 정도였다.

반체계운동이 처한 모순은 다름 아닌 정당형태를 매개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후 혁명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한 불만이 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제3세계 신생독립국 등 전 세계에서 동시에 터져나온 것이 1968년이다. 1968년 기존의 반체계운동에 대한 공격이 가장 격렬하게 이루어진 것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이었으며 이조차도 인민해방군의 무력진압과 지식인에 대한 공격이라는 비극적인 형태로 막을 내린다.3) 월러스틴의 반체계운동에 대한 분석은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와 한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측면이 있지만 기존 반체계운동의 실패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라는 차원에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아리기는 주저 『장기 20세기』4)에서, ‘체계적 축적순환’을 중심으로 헤게모니 순환의 역사를 설명한다. 아리기는 콩종크튀르를 콘드라티에프 곡선을 통해 설명하는 브로델과 월러스틴을 비판하며, 콘드라티에프 곡선은 장기적 가격변동의 경험적 산물일 뿐 그 자체로 이론적 함의는 없으며 자본의 이윤과 가격의 등락이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근대세계체계 설명의 유용한 도구가 되기에는 한계적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아리기는 중심-주변의 구도를 배제하고 국가를 매개로 한 거대 자본들 사이의 헤게모니를 향한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아리기의 시도는 계급분석의 결여, 정치경제학 문제의식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중심-주변이라는 구도를 중심으로 모든 정세를 체계 전체의 문제로 환원하는 월러스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주저의 제목 “장기 20세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리기의 세계체계분석에서 분석의 주된 대상은 20세기 자본주의다. 이러한 점에서 아리기의 작업은 1840년대 이후 근대세계체계 이후 분석이 중단된 월러스틴에 비해 현대자본주의 분석이 훨씬 정교할 뿐 아니라 19세기 말 수정주의 논쟁 이후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자본주의 위기를 둘러싼 논쟁들의 한계를 보완한다.5)

아리기의 작업은 체계적 축적순환과 국가간체계의 모순적 결합으로서 역사적 자본주의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헤게모니 국가는 전지구적인 체계적 축적순환을 선도하는데 수익성과 이윤율의 하락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선도하는 새로운 체계적 축적순환으로 대체된다. 역사적으로 네덜란드, 영국, 미국은 세계헤게모니로서 체계적 축적순환을 선도하였던 국가들인데 이들은 각각 보호비용의 내부화(internalization), 생산비용의 내부화, 거래비용의 내부화를 통해 ‘조직혁명’을 달성하고 상대적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세계적 축적구조를 혁신하게 된다. 하지만 축적체계의 세계적 확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간체계라는 매개를 거쳐야한다. 국가간체계는 세계적 축적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상부구조로 볼 수 있는데 일례로 영국의 경우에는 영토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국가간체계, 미국의 경우에는 냉전으로 표상 되는 국가간체계의 수립이 세계헤게모니로 부상하는 데 관건적이다. 세계헤게모니를 효율성의 상대적 우위로 규정하는 월러스틴과 달리 아리기의 세계헤게모니는 다른 국가들에게 ‘발전의 길’을 제시하고 이를 따르게 하는 능력, 즉 보편성의 이상이라는 점에서 체계 전반을 재구성하는 지도력을 의미한다. 각각의 체계적 축적순환은 세계경제에서 투자와 고용의 영역에서 확대가 일어나는 실물적(물질적) 팽창국면과 이윤율이 하락하는 가운데 실믈적 팽창이 중단되고 급속한 금융화가 진행되고 기존의 세계헤게모니가 쇠퇴하면서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를 둘러싼 국가간 경쟁이 이루어지는 금융적 팽창 국면으로 구성된다. 금융적 팽창국면은 벨 에포크(belle époque: 불어로 ‘좋은 시절’이라는 의미) 시기로서 고도금융이 성장하면서 실물적 팽창의 중단에 따른 징후적 위기(signal crisis)를 극복하고 이윤율을 회복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기존의 축적순환과 국가간체계가 붕괴하는 최종적 위기(terminal crisis), 즉 체계의 카오스가 발생한다. 새로운 축적양식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는 세계체계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20세기 자본주의의 성립과 위기: 미국 헤게모니의 등장과 금융세계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사실상의 ‘30년 전쟁’)을 통해 미국은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놓고 경쟁하던 독일을 물리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로서 새로운 체계적 축적순환을 이끌어가게 된다. 지정학적으로 유럽대륙과 떨어진 해양국가라는 점, 유럽 열강들과의 충돌을 야기하는 외부의 식민지 개척이 아니라 프런티어(frontier)라는 사고방식 속에서 내부의 식민지 개척을 추진할 수 있었던 점, 라틴 아메리카를 배후지로 둔 점 등은 독일에 비해 미국이 지닌 이점이었다.

미국 자본주의 내적 특징은 이종산업의 통합, 즉 연관 부문의 수직적 통합을 통한 법인기업(corporation)이다. 법인자본주의의 등장으로 미국 자본주의는 거래비용을 내부화함으로써 수익성을 제고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본회전 속도의 가속화, 대량생산과 대량유통의 결합에 따른 규모의 경제 출현, 소유자와 경영자의 분리에 따른 전문경영인의 등장과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 즉 노동에 대한 실질적 포섭 등의 변화를 겪게 된다. 법인기업은 식민지의 독립 이후에도 투자의 자유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모색하면서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다.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 전후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했던 것이, 첫째 1929년 대공황의 교훈으로서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 둘째 복지국가와 소비주의6)를 매개로 한 노동계급의 체계 내 포섭, 셋째 발전주의를 매개로 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국가의 포섭이라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건적인 것은 미국의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의지의 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에서 미국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에 대한 정치적인 합의가 아직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본격화된 ‘냉전의 발명’은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국가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사회주의적 발전주의와 자본주의적 발전주의로 경합하는 국가간체계로 정착된다. 그러나 1967/73년부터 미국 헤게모니는 정점에 도달하고 금융적 팽창국면이 시작되는데 오늘날 금융세계화가 전개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을 기점으로 쌍둥이 적자(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에 의해 금-달러 가치를 고정하던 브레턴우즈 체제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걸쳐 무너지고, 이후 변동환율제 시행, 자본이동 자유화, 공공채무의 증권화 등의 조치가 뒤따른다. 이로부터 금융화 국면이 시작된다. 그런데 20세기 말 금융화는 영국 헤게모니가 몰락하던 19세기 말 금융화와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국채시장이 팽창하면서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채무상태에 놓여 채권자(기관투자자)로부터 정책적 자율성을 갖기 어렵다는 점, 둘째 노동에 대한 포섭이라는 정치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자본주의 위기의 양상이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난다는 점, 셋째, 자본과 군사력이 미국으로 집중된다는 점, 넷째, 외향적이지 않는 미국경제의 특성상 제3세계에서 배제된 지역(제4세계)이 늘어난다는 것, 다섯째 과거의 민족해방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에 비견될만한 조직화된 (대중적) 저항이 부재하다는 점, 여섯째 동아시아의 비중이 커지면서 헤게모니의 지위를 넘보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외양적으로는 헤게모니의 쇠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자본과 군사력이 미국으로 집중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미국은 엄청난 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외부로부터의 엄청난 자본이 유입되어 부족분을 상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이라크전쟁 비용의 증가, 외국인의 미국 내 자산보유, 달러에 대한 동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의 발언권 증가, 경상수지 적자 등의 요인으로 인해 굉장히 불투명하다. 또한 국가간체계를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미국의 정치․군사적 전략은 오히려 이라크에서 볼 수 있듯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제국’의 지배를 불안정하게 할 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미래,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어느 때보다 더욱 증폭되고 있다.


앞으로의 쟁점

『자본주의 역사강의』는 세계체계 분석을 통해 앞서 언급한 것말고도 상당히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중에서 몇 가지 눈에 띠는 쟁점을 간단히 정리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1) 동아시아 자본주의

세계체계 분석에서 동아시아는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매우 독특한 함의를 지닌다. 동아시아는 유럽연합(EU)과는 달리 여전히 100여 년 전에 존재했던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대랍하고 있으며, 1950년대 이후 냉전 시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과 최전선에서 대립하고 있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와는 달리 일본의 부흥과 신흥공업경제(NIEs)의 고도성장으로 나타나는 발전국가의 모델이 등장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권이 세계경제에 편입되어 성장하면서 일본의 다층적 하청구도가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냉전 시기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조건은 남미가 “경제의 과잉”이라고 한다면 “정치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탈냉전 시기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갈등은 미국과 중국, 미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의 상호 관계와 맞물리며 복잡한 대립과 협력의 계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동아시의 지정학적 조건은, 특히 최근 북한 핵실험에 대한 운동진영의 이른바 ‘용인론’과 관련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역내 국가들간의 복잡한 함수 관계와 구분되는(혹은 단절하는) 사회운동의 역할은 무엇이며, 활동영역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아리기는 중국의 부상을 염두에 두고, 금융중심지인 제노바가 제국적 팽창의 군사적 중심인 이베리아 제국과 결합했던 역사적 경험이 반복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데, 본서에 언급된 대로 양자 사이에 융합(fusion)이 아니라 분기(fission)가 일어날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동아시아를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판단하여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한국과 일본의 이라크 파병단행․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지지 등 한미동맹 및 미일동맹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그에 비례하여 각 지역의 반전평화 운동의 대응이 거세지는 만큼 융합이든 분기이든 그 과정은 상당한 갈등과 진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국면에서 동아시아 자본주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산과 금융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지만 이를 과연 새로운 체계적 축적순환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7) 오히려 한국의 주식시장이 초민족적 자본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상당히 취약한 토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8)


2) 자기비판된 사회구성체론의 복권과 노동자운동의 전망

저자는 곳곳에서 사회구성체론의 복권을 언급한다. 이는 한국 사회성격 논쟁으로부터 강의를 시작하는 것이나(pp.20~28), 세계체계 분석이 자본의 재생산과 관련된다면 사회구성체론은 지배관계의 재생산, 노동의 구체성이라는 차원에서 연관성이 있다는 지적(pp.40~3), 그리고 아리기의 세계체계 분석을 다루는 부분에서 사회구성체론의 복권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pp258~64). 여기서 저자가 언급하는 사회구성체는 자기비판된 것으로서 반드시 기존의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단위일 수도 있고 더 작은 단위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세계경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의 재생산과는 달리 더 낮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가리키며 그 기본단위는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은 알튀세르도 지적했듯이9)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결정적인 노동력의 재생산과 직결되는 문제다.

관련하여 본서에서는 근대적 주체의 생성이라는 차원에서 폴라니의 문제의식이 강조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근대적 노동자의 재생산에서 발생한 단절점은 ‘기아의 규율’을 통한 작업장으로의 강제동원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근대 자유주의 국가에서의 파편화된 정치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근대 이후 보통선거권을 획득하기는 했지만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역설적으로 아무런 정치적 의사를 형성할 수 없는 존재들로 전락한다. 이처럼 노동의 상품화는 사회로부터 뿌리뽑힌/탈구된(disembedded) 노동자를 구성하는데 이는 상품화 초기스핀햄랜드법이나 신구빈원법에서 드러나듯이 전반적인 삶의 파괴과정이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스미스적 기획은 시장에서 발생하는 적대를 분배의 문제로 협소하게 인식하며, 그 결과 노동자운동에서 노동조합의 결성은 오히려 노동력의 상품화를 촉진하는 방향에서 임금인상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후에도 운동의 주류적 흐름은 임금제도를 철폐하는 운동의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또한 20세기 들어 대표적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경우 작업장에 기반한 교섭력이 커지면서 19세기 공동체의 여러 조직들을 매개로 발휘되었던 연대와 연합적 힘을 대체하고 오히려 노동자운동이 사회로부터 격리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 위기와 금융세계화의 영향으로 작업장 교섭력에 기반한 조직노동자운동이 약화되고 기존의 조직으로 포괄되지 않는 여러 비정규적 형태의 노동력이 출현하면서 19세기 연합적 힘에 기반한 노동자운동의 전통이 복원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자기비판된 사회구성체론의 문제의식은 무엇보다 국제주의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조건들에 대한 탐색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주체의 재생산과 대응양상은 저자의 지적처럼 단지 세계경제로 환원할 수 없는 국지적 차별성, 즉 정세의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차별성 속에서 지난 1세기 동안 세계혁명을 꿈꾸던 혁명가들에게 강력한 양심으로 남아있으면서 결국 무기력하게 좌초한 국제주의의 재개를 위한 조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0) 19세기 연합적 힘에 기반한 노동자운동을 20세기의 노동자운동과 비교하면 무엇보다 전자가 민족주의가 대중화되기 이전의 시기, 즉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호기롭게 외치면서 전유럽적 차원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20세기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세계의 반체계운동을 포섭하는 매개가 민족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국제주의라는 쟁점은 운동이 기존의 반체계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노동자운동의 주류가 의존해왔던 사회복지국가와 (반)주변부의 발전주의는 신자유주의적으로 변모하거나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이러한 정세적 조건에서 노동자운동의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경향은 자칫 미국의 AFL-CIO가 중국의 WTO 가입을 반대하면서 보였던 국수주의적이거나 인종주의적 논리로 빠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세계 각지에서 종교적․종족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는 극단적인 저항폭력의 형태로 수렴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요컨대 1세기 전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질문이 오늘날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1) 이러한 세계체계 분석의 사회주의 평가를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이루어진 국가자본주의 논쟁의 맥락에서 독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소련을 둘러싼 국가자본주의 논쟁에 대해서는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공감, 2002 참조.


2) 홉스봄(E. Hobsbawm)은 『자본의 시대』(국역: 김동택, 한길사, 1997)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팽창과 자유주의 및 부르주아의 성장을 분석하면서 1848~75년 사이 시기를 ‘자본의 시대’로 명명한다.


3) 당과 국가를 관통하는 대중노선의 모순, 즉 스탈린주의를 극한적으로 작동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스탈린주의의 한계를 실천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오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마오 : 스탈린주의의 내재적 비판?」; 윤소영 편역,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2 참조.


4) Giovanni Arrighi, The Long Twentieth Century - Money, Power and the Origins of Our Times, Verso, 1994.


5) 이와 관련하여 박상현,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와 서구 마르크스주의 위기이론」; 김석진 외,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공감, 2001. 김숙경, 「마르크스주의 위기이론과 이윤율의 경제학」; 같은 책 참조.


6)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 노동운동의 급진적인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뉴딜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소비’를 획득하는 것으로 귀결되면서 결국 체계 내로 포섭된다. 관련하여 안정옥, 「소비적 근대성과 사회적 권리 : 미국 헤게모니의 사회적 기원과 한계」; 백승욱 외,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 그린비, 2005 참조.


7) ‘체계적 카오스’를 지난 500년 간 유지된 자본주의 체계 전반의 위기라는 맥락에서 사용하는 월러스틴은 일본 및 동아시아가 미국 이후 세계 헤게모니로 등장할지 여부에 대해 부정적이다. 동이사아 자본주의의 미래 역시 현재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동아시아의 부상, 21세기의 세계체계」 및 「이른바 아시아의 위기 - 장기지속 내의 지정학」,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 21세기를 위한 사회과학』(백승욱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1) 참조.


8) 2004년 12월 현재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의 42%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익률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국제투자대조표에서 드러나는 바, 지분성 직접투자와 증권투자를 포함하면 한국의 순국제투자는 2004년 말 903억 달러 적자(GDP 대비 13.3%)로서 이는 자본이 탈에 의한 경제위기가 상존함을 의미한다. 박하순,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전망, 그리고 불안정노동」; 박하순․장귀연 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노동운동 - 불안정노동 철폐를 위하여』, 도서출판 사회운동, 2005.


9)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국역: 『아미앵에서의 주장』, 솔, 2000)


10) 이와 관련하여 앞서 소개했던 세계체계 분석에서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이례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분석이 지니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본서에서는 「8강 동아시아와 세계체계」에서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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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최인석 / 창비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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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석은「안에서 바깥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짧은 다리와 긴 다리로 절룩거리며, 기우뚱거리며, 절망과 희망 사이, 지금-여기와 언젠가 저기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할 것이다."  이것만큼이나 그의 소설 세계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 상상력과 동시에 현실 그 이상의 무엇, 유토피아에 대한 강렬한 지향성을 보여준다. 현실의 추악한 모습, 고개돌리고만 싶은 끔찍한 비인간성. 그것은 현실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분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사실적이고, 독자들에게 일상적인 현실 그 이면의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악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의 핵심을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이다.
 그는 여러 작품들에서 알레고리적 형상화를 사용하는데, "내 영혼의 우물"이나 "세상의 다리 밑"같은 단편에서는 각각 감옥과 군대가 현실의 축도, 온갖 모략과 폭력과 고통, 상처가 끓어오르는 복마전의 공간으로써 그려진다.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더」에 수록된 작품에서도 삼청교육대(노래에 관하여), 고아원(평화의 집)이 역시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심해에서"같은 작품은 이러한 알레고리 수법에 있어 절정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작가는 대담하게도 이 세계 자체를 심해로 규정한다. 등장인물 동화와 선영의 대화는 이 세계가 바로 심해이며 먹이가 부족하기에 서로 잡아먹고, 너무나 높은 수압과 적은 빛에 적응하기 위해 시력은 퇴화하고 폭력에는 익숙해진 인간들은 곧 심해어임을 보여준다. 매음굴에서 탈출하려는 중학생 선영은 결국 심해에서 벗어날 길을 모른다. 그러나 끝까지 작가는 결코 섣부르고 과장된 희망의 제스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절망과 폭력이 끔찍이도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세상, 등장인물들이 거기서 탈출하려 해도 탈출할 수 없는 원환구조가-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인물들은 결국에 가서 좌절의 정서 또는 실질적 파멸에 이른다- 바로 작가가 파악하는 세상의 본질인 것이다. "심해에서"에 등장하는 담임선생의 말을 빌리면 "이 골목만 심해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 심해"이며 "어차피 사람이란 심해에서 짐승처럼 사는 수 밖에 없다"는 섬뜩한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절망적 인식과 비관적 스케치가 단지 불편함을 위한 데카당한 과장이나 개인의 내면성 속에 침잠하는 그럴듯한 미학주의(이런 말을 붙일 수 있다면)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안온한 일상의 이면, 이 지독한 현실을 외면하는 나태는 그 약한 고리가 끄집어올려지면서 조금씩 그 고유한 균열을 의식하게 된다. 작가는 탐욕과 야만, 폭력과 광기로 가득찬 현실을 집요하게 독자에게 들이대며, 이러한 불편함은 단순한 사실적 재현너머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으로 이행하도록 강요한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부정적 사유의 크기만큼 "세계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행위는 죽음이 아니"므로 그것은 현실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희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삶에 대한 단순한 생존본능만큼이나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하나의 존재조건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인간들은 살아간다. 또 인간들은 생각한다.)
 여기서 또한번 발휘되는 최인석의 미덕이란 세상의 밖으로서의, 다시 말해 초월적 외부로서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실의 부정성을 인식하는 것은 현실의 밖, 인간으로서는 가닿을 수 없는 부질없는 피안을 상상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토피아가 말 그대로 불가능함을 고백하는 일과 같은 것으로 일종의 '노예의 도덕'의 시작이다. 우리의 초월은 '내재적 초월'이어야 하며 문단 초반에 인용한 최인석의 말처럼 언젠가-저기는 (심히 기우뚱댈지라도) 지금-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과의 두려운 대면, 그리고 '적합한 인식'은 유토피아로 가기 위한, 현실을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전화시키기 위한 첫 걸음이다. 유토피아적 가치로서 자유라는 것이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적, 제도적, 문화적, 자연적 연관과 분리될 수 없음을 상기시키며 현실의 가혹한 중립성이 우리 삶의 기본 조건이라고 역설하며 사람 이상의 이념이란 없다고 말하는 작가는 '인간애'를 절망의 악무한적 회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숨은 길' 로 제시한다. 심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발광기관을 만들어 내고 시력을 회복시켜 심해어들 사이의 연대와 교통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중요한데, 작가는「숨은 길」에서 노동운동과 지식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생성과 외부로부터의 규율 양 편향을 모두 물리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비민주성과 변절을 보여주는 김정자, 그리고 노동자에서 조직폭력배로 변한 '나'의 모순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모든 관계에 있어 항상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는 폭력이라는 질료에 대한 반성,  그리고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들, 그 자체로는 완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은 다종다양한 인간 조건과 윤리적 책임을 인식하도록 이끈다. 더 나아가 폭력 일반에 대한 경향적 폐지로서 반폭력의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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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12-3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인석,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이름인데 생각해보니 읽은 건 하나도 없네요.
바라님 덕분에 그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새삼 들여다봤어요.
리뷰를 빌어 바라님이 바라는 이야기를 하신 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
새해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