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을 한다는 얘기는 언젠가 들었는데
오늘이 마지막날인데다가 때마침 외출 시간이 맞어서 '즐거운 지식'을 보게 되었다.
원제는 Le Gai Savoir/Joyful Wisdom/Die froehliche Wissenschaft .
예전에 청하판으로 나온 니체의 책을 읽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사실 니체랑은 별 상관없었다-_-;;
사이트에 실린 영화소개를 옮겨보면 이렇다
<에밀 루소와 파트리샤 루뭄바는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 그것들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소리와 이미지 분석은 자연스럽게 텔레비전과 영화, 언론과 정치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텔레비전에서 제작을 의뢰했으나 1968년 5월을 겪은 후 방영을 거부당한 이 영화는 <중국 여인>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집단’ 영화의 모태가 된다.>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라... 1968년 5월 혁명을 겪은 고다르가 당시 유력한 학생운동 지도자와 함께
만든 영화집단의 이름이란다. 이 집단은 혁명 영화의 생산과 제작, 배급을 선언하며 자본에 대항하는
급진적 영화 만들기를 모색했다 하는데, 과연 온갖 이미지(와 그 위의 문자들)와 소리가 정말
전위적으로 난무하는 가운데 맑스-레닌, 마오, 문화혁명 등의 말들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영화는 시종일관 에밀 루소라는 남자와 파트리시아 루뭄바라는 여자가 계속 온갖 종류의 이미지와
소리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진행된다. 혁명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그 무렵의 시위 구호가
아무런 이미지없는 화면에서 소리만으로 울려퍼지거나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이는 단어들을 연속해서
들려주기도 하고, 아무 소리없이 제3세계의 참상을 다룬 사진들, 마오의 초상, 또는 만화의 한 컷,
데리다나 기 드보르의 책 표지(스펙타클의 사회) 등등이 휙휙 지나가기도 한다.
초반에 사물과 현상 그리고 그 둘의 내적 관계로서의 이미지 어쩌구 하는 얘기가 나오다가 이미지와
소리 간의 관계, 그 각각의 특성들, 그리고 막간의 인터뷰 등을 통해 언뜻 흥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하는데, 무분별하고 무질서해보이는 나열과 병치 속에 의미와 비의미의 경계는 아슬아슬하다.
일단 영화가 워낙 정신없이 훌훌 지나가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자막 따라가기도 벅차서
막상 영상에 관심을 많이 못 쏟기도 했고... 확실히 느리고 완만한 성찰의 여지보다는 이미지와 음향의
즉각적인 물질성이 영화에서는 주도적으로 나타난 듯 하다.
정신없이 90여분을 보고 난뒤 든 첫생각은 아.. 영화를 이렇게 찍을 수도 있구나 하는 멍한 생각 정도.
왜 근데 제목이 즐거운 지식인가? 에밀 루소라는 다소 작위적인;; 이름이 뒤로 들여오는 계몽의 뉘앙스,
또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문화혁명의 토대(대학을 학생에게! 아니 대학을 노동자에게!),
아님 이미지와 소리들을 모으기/그것들을 비평하기/이미지와 소리의 두어가지 모델을 설정하기
라는 순서로 이어지는 그들의 (영화)학교와 관련되기 때문일까?
그건 그렇고 그 뒤에 다시 상업영화로 복귀한 고다르가 영화와 혁명 사이에서 생각했던 것은 뭐였을까?
기술복제시대 속에서 사진이나 영화를 혁명적 역량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본 벤야민 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비슷한 시대에 극장에 앉아서 똑같은 영화를 보고있는 대중들을 보고 도롱뇽 같다고
무시한 아도르노도 있었으니... 상식과 관습을 깨부순 이미지-소리의 극단적 실험과 자본주의(및 자본
주의적 배급망)에 대한 거부 속에서 그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일지...
뜬금없게도 "우리는 제로(0)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등장인물의 대사, "빗자루로 쓸지 않으면
먼지는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왠지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