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라캉 읽기에 관하여
2002년 가을에 라캉 읽기에 대해서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놓는다. '라캉 읽기의 몇 가지 방식'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말투로 보아 라캉 입문서를 묻는 질의에 대한 응답이었던 듯하다. 그 사이에 변화된 사정에 대해서 얼마간 보충하도록 하겠다.
현재 라캉 읽기에 있어서 대표적인 선두 주자들이라면, 슬라보예 지젝과 브루스 핑크를 들 수 있을 겁니다. 국내 출판계에서도 프로이트 전집 발간 이후 차츰 라캉 읽기쪽으로 독서층의 관심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물론 그 독서층이라는 것이 몇 줌이나 되랴 싶지만, 푸코나 들뢰즈의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재연할 수만 있다면(그래봐야 1만부 미만일 거라는 제 짐작이지만) 그리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그것이 출판계의 요구/관심일 테고, 다른 한쪽에는 서구의 첨단 이론이나 철학을 수입/소개하는 데에 어떤 소명의식을 느끼는 일련의 지식인(지식분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플라톤이나 프로이트 등과 같은 '거장'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라캉은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난해한 저작(들 중의 하나)의 생산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문학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대학이란 제도 안에서 박사/교수들이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었듯이 라캉 또한 알 듯 모를 듯한 이론과 도식(수학소)들을 통해서 (라캉을 아는)지식인들과 (라캉을 모르는) 일반인들을 가르는 준거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것입니다.
물론 현재로선 라캉에 대한 앎이 우리 사회에서 대단한 상징적 권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의 이론이 대중화될수록, 그래서 대중에게 라캉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중요한 사상가로 각인될수록, 즉 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수록 라캉에 대한 지식은 곧 권력화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겠지요. 아시다시피 이미 프랑스 정신분석학과 라캉에 대해서는 셰리 터클의 <정신분석적 정치>(<라캉과 정신분석혁명>(민음사, 1995)으로 번역됨) 같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지젝과 핑크로 돌아옵시다. 혹자는 지젝에게서 임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데, 사실 그것이 지젝의 라캉 읽기/해석에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모든 라캉 읽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임상입니다. 임상은 임상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또 프랑스에서 라캉식 정신분석의 자격증을 따온다는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에서 법적으로 그러한 정신분석이 공인되어 있지 않는 한 말입니다. 국내의 일부 정신분석의들이 라캉식 치료법을 어깨너머로 응용/적용한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 해야 '흉내'이고 대개는 '사이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지젝은 라캉을 임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갔고, 그의 생산성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접근은 꽤나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향락의 전이>에서 지젝 자신이 고백하듯이 그가 대중문화 텍스트를 읽는 데 라캉을 이용한 것은 일차적으론 그 자신이 라캉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례를 찾듯이, 아니 사례를 통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되듯이, 지젝은 (자신이 읽기에도) 난해한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나 대중소설들을 동원한 것인데, 뜻밖에도 성공을 거둔 것이고, 그것은 라캉 이론을 더 풍부하게 확장시켜 나가는 데 기여합니다.
보다 정통적인 의미에서 라캉의 '주석가' 역할을 하는 핑크는 이러한 지젝의 작업을 상당 부분 보완해 주는 듯합니다(이들은 알렝 밀레르가 모는 라캉 정신분석학이란 쌍두마차의 두 마리 말과는 같아 보입니다). 핑크는 이미 국내에 번역된 <라캉과 정신의학>(원제는 <라캉식 정신분석에 대한 임상적 입문>)과 <라캉의 주체>를 통해서(*국역본이 근간예정이다), 그리고 세미나에 대한 주석서들의 편찬을 통해서 새로운 라캉 읽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곧 그가 새로 번역한 영역판 <에크리>도 다시 나온다고 하지요(*핑크의 완역본 <에크리>는 올해 출간됐다).
이 두 마리 말, 지젝과 핑크는 꽤 절친한 사이로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도 똑같이 밀레르의 세미나를 통해서, 즉 후기 라캉을 통해서 라캉에 접근해 나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라캉에 대해 다시 흥미를 갖게 된 것도 순전히 이들의 작업 때문이고, 이들에 의해서 소개받은 후기(70년대의) 라캉 이론이 갖는 파워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라캉 이론은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수십년간 몇 차례의 탈바꿈, 혹은 이론적 방점의 이동에 따라 진화해 온 것입니다. 단순화시키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 순으로 그 방점이 이동해 왔고, 밀레르 사단은 실재에 대한 라캉의 이론을 중심에 놓고 그 이전의 작업들은 재해석 혹은 '번역'(핑크 자신이 쓴 용어입니다)합니다. 그리고 이 후기의 라캉은 사실 <에크리>(1966) 이후의 라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에크리>가 국역된다고 해서 라캉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이해(구조주의자 라캉!)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고, 후기의 세미나들이 마저 번역돼야 할 듯합니다. 물론 그 세미나들에 대한 주석서들과 참고서들도 함께 소개돼야 하겠지요.
지젝과 핑크, 그리고 다리언 리더의 만화책(<라캉>)을 제외하면, 국내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라캉 연구서들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중심으로 라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서 라캉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진행합니다(<철학의 외부>에서 이진경도 그렇게 한정된 라캉의 상을 소개하고 그의 '구조주의'를 비판하더군요). 조금 과장되게 얘기하면,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은 어떤 동일한 라캉이 아니라 라캉'들'입니다(*지젝은 '라캉 대(對) 라캉'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라캉 이해에 가장 시급한 것은 그 라캉'들'을 윤곽지어줄 수 있는 교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왜냐하면 라캉 자신은 그러한 차이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해명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부분적인 라캉에 대한 소개로 이해를 대신하려는 시도들은 그간의 것으로 충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젝과 핑크의 책들이 보다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번역되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에서 비춰지는 라캉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유용할 거 같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용성에 비추어 볼 때, 몇몇 라캉 연구자들의 젠체하는 태도도 충분히 용인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마저 없다면, 무슨 보람으로 그 머리아픈(!) 일들을 해나간단 말입니까?...
02. 09. 30/ 06. 08. 22.
P.S. 다리언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에 기대어 국내에서 라캉 읽기의 지름길(?)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다리언 리더는 라캉의 법적 상속자인 자크 알랭 밀레르(밀러) 사단의 일원으로 보이는데, 런던에서 개업하고 있는 정신분석가라고 한다. 책의 말미에 더 읽기(Further Reading)로 라캉의 1차 문헌과 그에 관한 2차 문헌 해제를 싣고 있다.
라캉의 <에크리>(1966)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인데, 영어권에는 셰리단의 발췌 번역(1977)으로 소개돼 있고, 이 책은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리더에 의하면 그 번역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고 또 내용도 난삽하다(*지금은 핑크의 완역본이 나왔으니 셰리단의 영역에 의존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래서 권하는 것이 세미나인데, 밀레르에 의해 20권 가량(?)으로 편집되고 있는 불어본 세미나는 대학 도서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불어를 못 읽는 독자는(그의 책은 웬만큼 불어를 하는 사람들도 읽어내지 못한다) 영어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데, 1,2,3,7,11,20권까지 5-6권 정도가 영역돼 있고, 브루스 핑크가 주석서가 2-3권 나와 있다(1,2권, 11권). 참고로 러시아어로는 <에크리>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상태이며 세미나만 5권 정도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국어본에만 의존하려고 할 경우 사정은 더 안 좋은데, <욕망이론>(문예출판사, 1994)이라고 발췌 번역된 라캉의 책은 셰리단의 책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으로(그러니가 중역이다), 50년대 라캉의 중요한 글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부분적으로 지나치게 의역하고 있다).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문예출판사, 1994)은 구조주의 시절의 라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이 책엔 라캉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역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소쉬르 이후의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리더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라캉의 초기 논문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라쿠-라바르트와 낭시의 'The Title of the letter: a reading of Lacan'이 있다. 국내 도서관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라캉이 칭찬했다는 책이다). 하지만 전문적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핑크의 'Lacan to the Letter'가 가장 요긴하겠다.
다리언 리더가 적극 추천하고 있는 책은 벤베뉴토의 <자크 라캉의 저작>인데(하나의학사에서 김종주에 의해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역시 우리말 번역본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거의 절판된 책이다. 그리고 필수적인 참고서라 할 사전. 딜런 에반스의 <라캉 정신분석 사전>(인간사랑)이 번역돼 있는데, 국내 라캉학자들이나 호사가들이 번역진으로 망라돼 있지만, 편차가 심하고 용어도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가급적이면 원서와 같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요컨대 라캉에 대한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는 셈이다. 리스크가 필수적인 것.
그래도 라캉을 읽으려고 한다면, 그래도 번역이 괜찮은 지젝이나 핑크의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부분적인 오역과 불성실한 교정에도 불구하고(인간사랑에서 나온 모든 책에 공통적이다) 읽을 만하다. 하지만, 역시나 쉬운 책은 아니며, <삐딱하게 보기>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향락의 전이>인데, 아쉽게도 이 책은 지젝의 번역본 가운데 최악이다. <라캉과 정신의학>이라 번역된 브루스 핑크의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고, 다이언 리더도 적극 추천하고 있다. 그 책과 짝이 되는 것이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인데,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으며 두껍지 않은 분량이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만하다.
라캉의 전기서로는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이 가장 자세하다. 하지만, 다소 근거없는 사실들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나마 라캉 읽기에서 다행인 것은 적극 추천할 만한 2차 문헌이 많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한줌의(?) 책만 열심히 읽으면 된다.
02. 10.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