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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최인석 / 창비 / 1997년 1월
평점 :
최인석은「안에서 바깥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짧은 다리와 긴 다리로 절룩거리며, 기우뚱거리며, 절망과 희망 사이, 지금-여기와 언젠가 저기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할 것이다." 이것만큼이나 그의 소설 세계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 상상력과 동시에 현실 그 이상의 무엇, 유토피아에 대한 강렬한 지향성을 보여준다. 현실의 추악한 모습, 고개돌리고만 싶은 끔찍한 비인간성. 그것은 현실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분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사실적이고, 독자들에게 일상적인 현실 그 이면의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악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의 핵심을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이다.
그는 여러 작품들에서 알레고리적 형상화를 사용하는데, "내 영혼의 우물"이나 "세상의 다리 밑"같은 단편에서는 각각 감옥과 군대가 현실의 축도, 온갖 모략과 폭력과 고통, 상처가 끓어오르는 복마전의 공간으로써 그려진다.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더」에 수록된 작품에서도 삼청교육대(노래에 관하여), 고아원(평화의 집)이 역시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심해에서"같은 작품은 이러한 알레고리 수법에 있어 절정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작가는 대담하게도 이 세계 자체를 심해로 규정한다. 등장인물 동화와 선영의 대화는 이 세계가 바로 심해이며 먹이가 부족하기에 서로 잡아먹고, 너무나 높은 수압과 적은 빛에 적응하기 위해 시력은 퇴화하고 폭력에는 익숙해진 인간들은 곧 심해어임을 보여준다. 매음굴에서 탈출하려는 중학생 선영은 결국 심해에서 벗어날 길을 모른다. 그러나 끝까지 작가는 결코 섣부르고 과장된 희망의 제스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절망과 폭력이 끔찍이도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세상, 등장인물들이 거기서 탈출하려 해도 탈출할 수 없는 원환구조가-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인물들은 결국에 가서 좌절의 정서 또는 실질적 파멸에 이른다- 바로 작가가 파악하는 세상의 본질인 것이다. "심해에서"에 등장하는 담임선생의 말을 빌리면 "이 골목만 심해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 심해"이며 "어차피 사람이란 심해에서 짐승처럼 사는 수 밖에 없다"는 섬뜩한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절망적 인식과 비관적 스케치가 단지 불편함을 위한 데카당한 과장이나 개인의 내면성 속에 침잠하는 그럴듯한 미학주의(이런 말을 붙일 수 있다면)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안온한 일상의 이면, 이 지독한 현실을 외면하는 나태는 그 약한 고리가 끄집어올려지면서 조금씩 그 고유한 균열을 의식하게 된다. 작가는 탐욕과 야만, 폭력과 광기로 가득찬 현실을 집요하게 독자에게 들이대며, 이러한 불편함은 단순한 사실적 재현너머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으로 이행하도록 강요한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부정적 사유의 크기만큼 "세계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행위는 죽음이 아니"므로 그것은 현실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희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삶에 대한 단순한 생존본능만큼이나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하나의 존재조건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인간들은 살아간다. 또 인간들은 생각한다.)
여기서 또한번 발휘되는 최인석의 미덕이란 세상의 밖으로서의, 다시 말해 초월적 외부로서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실의 부정성을 인식하는 것은 현실의 밖, 인간으로서는 가닿을 수 없는 부질없는 피안을 상상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토피아가 말 그대로 불가능함을 고백하는 일과 같은 것으로 일종의 '노예의 도덕'의 시작이다. 우리의 초월은 '내재적 초월'이어야 하며 문단 초반에 인용한 최인석의 말처럼 언젠가-저기는 (심히 기우뚱댈지라도) 지금-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과의 두려운 대면, 그리고 '적합한 인식'은 유토피아로 가기 위한, 현실을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전화시키기 위한 첫 걸음이다. 유토피아적 가치로서 자유라는 것이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적, 제도적, 문화적, 자연적 연관과 분리될 수 없음을 상기시키며 현실의 가혹한 중립성이 우리 삶의 기본 조건이라고 역설하며 사람 이상의 이념이란 없다고 말하는 작가는 '인간애'를 절망의 악무한적 회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숨은 길' 로 제시한다. 심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발광기관을 만들어 내고 시력을 회복시켜 심해어들 사이의 연대와 교통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중요한데, 작가는「숨은 길」에서 노동운동과 지식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생성과 외부로부터의 규율 양 편향을 모두 물리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비민주성과 변절을 보여주는 김정자, 그리고 노동자에서 조직폭력배로 변한 '나'의 모순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모든 관계에 있어 항상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는 폭력이라는 질료에 대한 반성, 그리고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들, 그 자체로는 완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은 다종다양한 인간 조건과 윤리적 책임을 인식하도록 이끈다. 더 나아가 폭력 일반에 대한 경향적 폐지로서 반폭력의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