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우리 독서계에 불어닥쳤던 그리스 로마 신화 열풍은 이제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정신적 시원을 찾자는 의미에서 무속 신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신화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너도나도 뛰어들어 책 한 두 권씩은 내었던 그리스 신화 붐의 학술적 기반은 너무도 허약했던 것이 숨겨진 현실이었다. 이 글을 쓰는 이 또한 학부 시절에 초급(!) 라틴어를 배웠단 이유로 고대 그리스-최소한 그리스어를 알아야 하는- 관련 서적의 교정을 맡아 보았던 황당한 경험이 있으니 말이다.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번역자의 엄청난 오역에서 진을 빼다가, 하는 수 없이 (나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신) 어느 잔혹한 독서가를 찾아가 많은 지도를 받아가며 겨우 겨우 교정을 마무리했었는데, 참으로 고백하기 부끄러운 이 정도의 손질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사계의 현실이었다.
이 잔혹하리만치 꼼꼼한 독서가께서 드디어 사고를 한 건 치셨다. 서양 고대 문명을 다룬 각종 번역서의 오류와 오역을 세밀하게 지적하고, 원전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교정한 「잔혹한 책읽기」가 그것인데, 책을 읽다가 오자가 나오면 그걸 꼭 표시해 두거나, 심한 경우는 꼭 출판사에 전화해서 애꿎은 편집부 직원(그들이야말로 각종 사연을 가지고 출판사에 몸 담아, 박봉을 감수하며 출판 문화의 진작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문화의 파수꾼들이니, 너무 그들을 몰아세우지는 말자)을 붙잡고 세밀하게 일러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책이다. 책 한 권이 온통 오역에 대한, 점잖지만 뼈아픈 지적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여담이지만 저자의 문체는, 조용조용히 상대의 허를 찌르는 유럽식 위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한국어 문장의 한 가능성을 선보인다 하겠다. 절도 있지만 격렬함을 감춘 일합 속에 승부가 갈리는 펜싱 경기를 관점하는 느낌이랄까.
(이 책의 저자가 대표적인 부류이겠다.)
우리의 잔혹한 고전학자의 첫 저작은 서양 고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번역자들에 의해 반복 재생산 되는 각종 사항들을 지적하는 동시에, 옆에서 구경하는 독자들을 위해 그리스 신화와 문화의 기초 지식을 차근차근 말해 주고 있어, 그 자체로 그리스 문화에 대한 -오류의 염려가 없는-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직업으로서의 번역가를 꿈꾸는 이는 이 비정한 오역 사례집을 샅샅이 읽어 타산지석으로 삼는 동시에, 서양 고대 문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여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서적들의 개정 작업이 이루어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며,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번역서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 로마 문명에 관련된 책은 손을 안 대면 되지 않냐고? 심지어 기초 과학 및 의학 서적 등까지 포함해서, 그대가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이해 없이 제대로 번역이 가능한 서양 작품은 별로 없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 일이란 것이 어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아직은 엉성한 우리네 출판계에서, 라틴어 좀 배웠다고 그리스 관련 서적을 출판해야 하는 일이 당신에게 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캄캄한 황야를 헤매는 번역자들에게 아테네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200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