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이던가. 서울대에서 대입 논술 시험을 시행하겠노라면서 발표했던 고전 목록이 있었다. 장장 200권에 달하는 꽤 규모가 되는 목록이었다. (물론 순서가 한참 뒤바뀌었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고전 교육을 통해 논술 능력부터 기르고서 대입 시험을 쳐야 할 것 아닌가.)
당시 국내에 제대로 된 번역본도 없었던 책들까지 마구잡이(?)로 넣어놓았던 어이없는 목록이었고... 고등학생 대상이라기 보다는 대학교 및 대학원 과정 정도에서 소화해야 할 내용들이었으나 단지 서울대에서 발표한 목록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당연하게 이를 얄팍하게 정리한 해제집들이 다급한 수험생들의 당장의 필요에 부응해 나왔었다. 그 중 그래도 잘 짜여졌던 책은 이런 정도?
시간이 흘러 2005년, 서울대에서는 다시 권장도서를 100권으로 추리고 직접 해제집을 펴내기도 했다. 진작 이런 책부터 먼저 내면서 선정의 이유와 의의를 밝히는 것이 순서 아니었을까. 목록 하나 덜렁 내고 십년이나 지나서 책이 나오면 너무 늦쟎은가.
그리고...
출판사 중에서는 아마 최초로, 서울대 선정 인문 고전 50권을 한 권 한 권 새로 재구성한 시리즈물이 나왔다. 바로 김영사에서. 김영사 정도의 규모 있는 출판사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운 기획이지 싶다. 1993년에 나왔던 최초의 권장도서 200선에서 추리고 추려 50권을 선정했다. (마지막에 슬며시 끼어 있는 [명심보감]은 1993년 및 2005년 권장도서 어디에도 없는 정체불명의 선정도서이다. 너 거기서 뭐하니?)
만화라는 형식으로 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 고등학생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서울대 선정 고전, 특히나 1993년도 목록의 책들이 상당한 난이도를 가진, 기실 대학 교양과정 내지 전공과정 수준의 책들이 많다는 것.
[간디자서전]이나 [삼국유사], [사기열전] [백범일지] 같은 책들이야 그럭저럭 한다 치더라도 대체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같은 책들은 어떻게 한 권의 만화책 안에 우겨넣을 수 있었을까. 제목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만화로 재구성한 필진의 고심이 역력히 느껴지는 기획이다. 굳이 서울대 선정 고전이라는 타이틀에 묶이다 보니 나온 결과이겠지만, 200권 중에서 청소년들에게 읽힐 수준의 책들이 그렇게도 없었나 싶기도 하고(뭐 위에서 예를 든 책들이 무슨 불온도서라거나 해서는 결코 아니다!), 에둘러 가지 않는 정공법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김영사, 하면 한 때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약간 노골적인 타이틀을 단, 하지만 그 빛나는 타이틀에 비해 큰 재미는 못 봤던- 수험생 대상의 논술 서적을 펴내기도 했었으니 수험서 시장을 향해 꾸준한 입질은 계속 했었던 셈이다. 오히려, 이런 50권 시리즈 같은 아동-청소년 교양물이 좀더 김영사의 정체성에 걸맞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남을 수 있는 기획이 아닐까 싶으니 당시의 실패는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해도 될까?
참, 출판사 중에서 최초라고 했는데, 기실 서울대출판부에서도 자신들이 제시한 고전 목록들의 정본 완역 작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얼마나 추진력 있게 진행하는지, 언제 완성될지는 알 수 없는 기획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