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대생 ‘의식화’ 필독서

                     새내기, 이 책만은 읽어라


조용히 은둔 생활을 즐기던 필자에게, 도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원고 청탁: bad! 원고료 지급 전망 없음: too bad!!). 즉슨, 새내기들이 읽을 만한 책을 좀 추천해 달라는 것. 새터 자료집에 싣는다고 하니 술에 취해 비몽사몽 하는 와중에 스윽 훑어보고 “에이, 지겨운 책 얘기잖아!” 하면서 던져버리기 십상이렷다. 솔직히, 필자라도 그런 심정일 것이다.

亂麻와 같이 뒤얽힌 입시의 관문을 갓 통과한 채, 아직 창백함이 가시지도 않은 이들에게 책을 들이민다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범죄이자 책에 대한 결례가 될 것. 먼저 약이 되는 좋은 술(酒: 性大熱, 味苦甘辛)로써 든든히 보양하여 발그레하니 혈색이 돌고 뜻이 펴지게 하여 (通血脈, 潤皮膚, 消憂發怒, 宣言暢意) 世會에 나아가 어울리거나, 바람과 달을 벗삼아 노닌다면 그 또한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그런 뜻에서, 이 글에서는 분야별로 한 권, 오직 한 권만을 고르고 골라 선정 사유와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각각의 분야에서 만만찮은 책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 굳건히 살아남아 최후의 한 권으로 뽑힐 정도의 책이라면 구질구질한 설명 따위는 오히려 군더더기가 될 터.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필시 술기운이 지나쳐 정신이 혼미한 지경일테니 그저 건성으로  제목이나 기억해 두었다가, 술과 장미의 나날들도 무덤덤하고 지루해질 즈음이 되어서 한 번쯤 뒤적여봄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0. 교양, 지성, 대학
1. 삶과 죽음
2. 우리 학문의 길
3. 철학하기, 생각하기
4. 동양철학의 유혹
5.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6. 밤하늘의 별들
7. 한자의 바다
8. 중국인의 마음
9. 길을 찾아서
10. 그리고, 한의학 


0. 교양, 지성, 대학 :『뇌를 단련하다』(立花隆, 청어람미디어, 2004) 

 

 

 

 

소위 수재들의 집합소라는 도쿄대생마저 안심할 수 없을 지경이 되버린 학력저하, 교양교육 붕괴 현상을 폭로하여 화제가 되었던 책,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의 자매편. 『도쿄대생』이 사회적 측면에서 통시적으로 문제점을 해부한 책이라면 이 책은 저자가 실제로 도쿄대생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현대의 교양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생한 강의록이다.

고교 이수과목의 축소(정확히 말하면 수능시험 반영과목의 축소)로 인해 경악스러울 정도로 기초 지식이 결여된 채로 대학에 들어오고, 다양한 지적 자극과는 거리가 먼 회색빛 세계를 잠깐 방황하다가 반쯤은 체념한 채 좁은 전공의 터널을 통과하는 것,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의대생의 모습이다. 가끔은 오지선다형 질문으로 평가된 수능 성적을 지성의 동의어로 착각한 채 “우쭐해서 나도 이제 한 인물이 되었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산중턱에 한의대만 고고히 서 있는 캠퍼스 환경이 상징하듯 다른 전공 집단과의 교류나 비교가 거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이런 유아독존적 사고를 더욱 심하게 만드는 듯 하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 교양 부재 시대의 희생자인 젊은이들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운다. “대학 담장 너머는 곧 전선과 같습니다. 전장에 비유하자면 참호 속을 기어다니며 24시간 내내 총을 쏴야 하는 현장입니다. 매일 전사자가 나오는 현장입니다.” 라는 대목에서는 마치 무서운 군대 교관 같을 정도다. 욕설 대신 각종 사회 변화 전망, 인지과학의 자료 등을 들이대는 점이 다를 뿐. 이렇게 닦달해대는 데도 감흥이 없다면 어쩔 수 없겠고, 스스로의 정신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싶은 이라면 “여러분은 아직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노바디입니다.”라 일갈하며 ‘노바디(nobody)’를 ‘섬바디(somebody)’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교양, 드넓은 인간 지식의 전체상을 연주하는 지성의 향연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온 힘을 다해 이야기하는, 이 사람을 보라. 

더 읽을 책 :『21세기 지의 도전』 (다치바나 다카시, 청어람미디어, 2003)


 

 


1. 삶과 죽음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영한대역판, 미치 앨봄, 세종서적, 2004) 
  

 

 

 


삶과 죽음은 항상 말해져서는 안 될 것으로 회피되는 주제이지만 실은 우리 모두의 실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언제나. 지은이는 불치의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거부하고 은폐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주위 사람들까지 바꾸어 가는 스승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고뇌해야 할 모든 의대생에게 권한다. 

더 읽을 책 : 『죽음, 그 마지막 성장』 (부위훈, 청계, 2001) 

 

 

2. 우리 학문의 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김용옥, 통나무, 1985)  

 

 

 



출간되자마자 ‘동양학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한국 지식인 사회에 파장을 던진 문제작. 그가 제기한 번역의 문제, 한문해석학의 방법론은 이후 소장 학자들의 동양 고전 번역 작업에 거의 패러다임 변화 수준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연히, 한의학도로서는 반드시 숙지하여야 할 내용이다. 더구나 아직도 가당찮은 사이비 학문들이 ‘신비한 동양 사상’이니 어쩌니 하는 修辭 뒤에 숨어 기생하는 한의대의 풍토에서라면 ‘동양적’인 것의 의미 또한 곱씹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두 번은 읽어라. 

더 읽을 책 : 『우리 학문의 길』(조동일, 지식산업사, 1995) 

 

 

3. 철학하기, 생각하기 :『철학풀이 철학살이』 (이왕주, 민음사, 1995)   

 

 

 

 

철학자들의 사상을 시대순으로 얄팍하게 간추려 나열하는 수준의 개론서가 판치던 시절(지금이라고 별반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사유 과정을 유려한 필치로 그려내어 많은 호응을 받았던 입문서이다. 철학은 끊임없는 철학하기(philosophieren)의 과정일 뿐이라는 칸트의 말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참고도서 목록도 매우 유용하다. 철학이 재미있어지는 책. 

더 읽을 책 : 『개념-뿌리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2004) - 철학적 개념의 분석을 통해 차근히 접근해 나가는 괜찮은 입문서. 두 번은 읽어라. 
 

『국가∙정체』 (플라톤, 서광사, 1997) - 위 두 권의 입문서로 어느 정도 철학하기의 맛을 보았다면, 이천오백년 동안 서양 사상사를 규정지었던 거인과 직접 대결을 벌이는 것은 어떨지?  
 

 

 

 

   

 



4. 『동양철학의 유혹』 (신정근, 이학사, 2003)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풍우란 선생의 『중국철학사』(1934)가 영어로 번역된 것이 1952년의 일이니, 근 70여 년 만에 완역본(박성규, 까치, 1999)이 나오면서 체면치레를 한 우리 동양철학계에서 역시나 거의 처음으로 가져 보는 ‘제대로 된’ 동양철학 입문서이다. 이 책은 동양철학의 주요 개념들이 처음 만들어질 때의 사정과 의미에서부터 시작하여 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짚어줌으로써 동양철학의 기본적인 개념들에 익숙치 않은 초보자들이 확실한 개념설정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지은이의 강력한 내공을 느낄 수 있는 책. 세 번은 읽어라.

더 읽을 책 : 『도의 논쟁자들』 (A. C. Graham, 새물결, 2003) - 서구 동양학의 치밀한 학문 방법을 맛 볼 수 있는 ‘거대한 벽’.  

 
  

 

5.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만화로 보는 주역』 (이기동 최영진, 동아출판사, 1994) 


초학자가 가장 쉽고, 재미있고, 확실하게 주역의 무궁한 세계를 흘끗 볼 수 있게 하는 책.

고대의 先哲들이 하늘과 땅의 원리를 찾아서 64괘로 펼쳐 놓은 주역이라는 책에는 동서양의 수많은 천재들이 갖가지 말들을 덕지덕지 붙여 두었다. 이 말들의 숲에서 헤매는 후학들은 역이 우주 변전의 모습을 象(symbol)이라고 하는 수단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려운 고전으로만 여겨지던 주역을 만화로 엮은 저자들의 기획은 단순히 쉽고 재미있게 고전을 접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말 이전의 상징체계를 문자 언어 이외의 수단으로 나타낸다는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비록 그 가능성이 온전히 발현되었다고 보기에는 약간 미진한 부분들이 있지만.

더 읽을 책 : 『우주변화의 원리』(한동석, 대원출판, 2003) - !  


 


 

 

 

 

6. 밤하늘의 별들 :『음양오행으로 가는 길』 (어윤형 전창선, 세기, 1999)  

 

 

 



『음양이 뭐지』시리즈는 워낙 이곳저곳에서 추천해주는 책이고, 신입생 시절에 많이들 보지만 이 마지막 권까지는 보는 사람도 적고, 보더라도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중간에 책을 덮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3부작의 완결편이자 하이라이트인 이 책을 놓쳐서는 앞의 두 권이 헛될진저. 다섯 번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더 읽을 책 : 밤하늘의 별들 (조물주, 하늘, 태초)

 


7. 한자의 바다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3)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천개의 글자로 지은 한편의 시 천자문. “하늘 천 따 지 가믈 현 누를 황”하는 정도는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백여년 전만 해도 온 백성의 교과서였건만, 이제 천자문을 돌돌 외는 이는 참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한문 꽤나 한다는 이들 조차도 말이다.

이 책의 미덕, 그 하나 : 갑골문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한자의 의미와 그 역사적 변천에 대한 생동감 있고 자세한 풀이.

그 둘 : 천자문에 깔린 혹은 천자문을 매개로 학습되어진 근대 이전 동아시아 사회의 가치관, 자연관에 대한 분석.

그 셋, 결정적인 :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 동아시아인의 사고방식을 은연중에 지배하는 천자문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적 인식.

세 번은 읽어라. 


더 읽을 책 : 『한자정석』 (최동표 안종남, 문이재, 2002) 
 

『한학연구입문』 (심경호, 이회, 2003)  

 

 

 

  

흔히 漢學이라 일컫는 고전중국어학의 전분야를 아우르는 배경지식을 다루고 있는 종합입문서. 한자의 구성, 한문 문법, 공구서 등의 小學 분야에서부터 경학, 제자백가, 시∙산문 등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까지, 한학을 배우는 학인이 꼭 알아야 할 필수사항들을 각종 도판과 사진을 곁들여 강의식으로 쉽게 풀어 설명해 놓았다. 몇 종 되지 않는 국내 서적을 이것저것 뒤적이거나, 중국이나 일본 서적을 찾아보아야 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박탈감이 들 정도이다. 특히 ‘문헌학의 상식’ 부분에 나오는 고인쇄본의 변천과 감별법은 웬만한 기초서적에는 잘 나오지 않는 사항으로, 여러 도판을 통한 친절한 설명이 돋보인다. 

 
 


8. 중국인의 마음 :『열국지』 (풍몽룡 지음, 김구용 옮김, 솔, 2001) 

 

 

 

 

 


당신이 이 열 두 권 짜리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하나 : 재미있다. 삼국지보다 훨씬.

둘 : 고대 중국의 역사는 거저먹기로 파악하게 된다.

셋 :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통찰이 덤으로 얻어진다.

그러려면 역시 세 번 정도는 읽어야 되지 않겠는가. 참고로 지인 중에 이 책을 열 번 이상 읽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 걸어다니는 중국사로 불린다. 

 
더 읽을 책? 당신도 걸어다니는 중국사가 되어보라.

 


9. 길을 찾아서 :『단』 (김정빈, 정신세계사, 1984) 
  

한의대에 들어와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이 책의 이름조차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적이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 책이 나올 때 아직 생명체로서의 최소 단위조차 이루지 못했을 신입생들이 이 책을 알기를 기대한다는 것도 너무 과분한 일일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지난 80년대에 출간되자마자 ‘단 열풍’을 일으키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명상 수행의 대중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이정표가 된 책이다. 물론 각종 수행 체계를 섭렵한 뒤 깨달음의 경지의 절대성마저 문제삼은 박석 교수의 논의나, 아예 명상이니 수행이니 하는 ‘행태’에 대한 조소를 날리는 무묘앙에오의 독설까지 국내 명상계에 소개된 지 오래인 지금, 이 고색창연한 책의 약발은 많이 바랜  면도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군사정권 아래서 억눌린 민족적 에너지가 신비주의적인 탈출구로 폭발한 측면이나, 한편으로 우파 민족주의와 결합된 한계 등이 지적되어야 하겠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국민적 신드롬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조선 仙道의 흐름과 우리 수행 체계의 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우리 민족 고유의 수행 체계에는 몸에 대한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한의학도들은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 얼치기 도사 노릇 하느라 본분을 소홀히 하진 말기를. 

더 읽을 책 :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 (박현, 바나리, 1999) - 우리 민족 고유의 수행관과 인체관의 본격적인 전개

 

 

 

10.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학인으로서 언제나 고민되는 화두이다. 따지고 보면 위의 수많은 ‘포스트’들도 결국 이 화두를 향해 귀결되는 것일 테고. 최근 필자의 번뇌와 방황을 종식시킨 한 권의 책이 있는지라 이 자리에 소개를 하여야 마땅할 것이나, 아쉽게도 원고의 마감시간을 훌쩍 넘긴지라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이 책에서 받은 필자의 감동과 각성을 다 전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그렇다고 이 훌륭한 책을 제목만 달랑 적어서 던져놓고 만다는 것은 너무나 보배스러운 책과 독자 양쪽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고……. 뭐, 어쩌겠는가. 그대들도 조금만 더 번뇌하고 방황하는 수밖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방황 역시 그대들의 노력의 징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대들의 가련한 영혼이라고 연옥에서 영원히 기다리며 있으란 법은 없을 테니, 언젠가는 구원의 손이 뻗치기를.

 


                                                                        - coup d'esp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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