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물질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그림자처럼 드리운 병인 비만, 그리고 이것이 여성의 상품화 및 외모지상주의와 결부되면서 벌어지는 신체 학대의 현장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그대의 차가운 손」이 있었지 아마. 내가 한국 문학계의 미래를 짊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 한강이 쓴 책(한강 선생으로서는 이런 가당찮은 소설과 같은 자리에서 언급된다는 것조차도 불쾌하실 수 있겠다. 널리 용서해주시길 바란다).  

반(反)한의학 진영에서 만든 찌라시 뒤꼭지에 참고도서 중의 하나로 나와 있길래 뭔가 싶어서 찾게 된 이 책, 「반인간」도 다이어트란 소재를 다루고 있으니 약간은 일맥상통한다고 할까. 물론 그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 똑같은 소재를 다루면서 어떻게 이렇게 격차가 날 수 있는지, 문창과 수업시간에 한 번 다루어봄직도 하다. 물론 반면교사로. 

'동양의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겠노라는 나름의 사명의식을 가지고 쓴 소설인만치, 군데군데 들어간 의학사의 뒷이야기들은 호사가들의 흥미를 자아낼 만 하고, 건강상식 수준의 잡설들은 들어두어 나쁘진 않은 수준. 게다가 장편이지만 나름대로 긴장감도 유지하는 것이, 행여 독자들이 흥미라도 잃을까봐 심어놓은-따라서 소설의 주제와는 상관 없는- 겉가지 이야기들이 틈틈이 튀어나와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에피소드들과 소재주의에 기대다 보니 주제의 깊이있는 추구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수억 원에 가까운 명품 다이어트의 실상이 반인간적인 엽기 행각의 소산이라는 식의 (무슨 사람고기 넣어 만든 만두 이야기가 단골로 나오던 무협소설도 아니고... 이게 뭐니!) 식상한 설정도 문제려니와, 이런 엽기적 행태는 굳이 한의학을 걸고 넘어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호소력을 잃은 어거지로 전락해 버린다.  

그리고, 소설의 수준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음에도 굳이 이 책을 찾아 보게 만든 전공자를 힘빠지게 할 만큼 동양의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란 것 또한 가소로운 수준이다. 진짜 한의학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비판보다는 누군가의 실수나, 학계의 잘못된 관행(허민 선생의 동의보감 번역본 문제 등)을 잡고 늘어지거나, 논리적 설득력이 없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한의학이 제대로 된 의학이라면 한의학이 발전한 한국의 평균 수명이 한의학을 폐지시킨 일본보다 낮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식의 주장이 그것인데(그런 식으로 따지면 서양의학이 제일 발전한 미국의 평균 수명이 일본보다 낮은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반론 따위는 굳이 할 필요도 없으리라 본다), 들을 때는 맞장구를 치게 되는데 돌아서면 말이 안 되는 이런 식의 독설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비판적 고찰'의 '조악한 실상'이렸다. 
 

저자는 '허다한 고의서들, 관련 저서들, 심지어 근래에 나온 동양의학 박사 학위 논문들까지 두루 구경하였다'며 작품을 위한 사전 작업에 상당한 공을 들였음을 과시하던데, 문학작품의 감동은 그 소재의 풍성함에 있지 않음은 상식 아닐까.  

딴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파사현정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무리수를 두게 한 듯 하거니와, 다음 작품에서는 이런 식의 선정적 소재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치밀한 문제의식을 보고 싶다. 진정 인간과 반인간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영혼의 형상화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보여달란 말이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서양의학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할 생각'이라 하니, 더더욱 기대가 크다! 

좋은 소설은 쓰기도, 찾아 읽기도 어려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준 책. 

(마지막으로 주의 드린다. 근래 찾아보기 힘든 괴작이다. 무려 등단 씩이나 해서 문단에 이름을 얹은 작가가 어쩌다 이런 지경으로까지 떨어졌을까. 그리고 정상적인 출판환경의 정상적인-곧, 자신의 출판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경영인이라면 감히 낼 엄두를 못냈을 조잡한 원고가 대체 어떤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버젓이 출판까지 되는 만용이 저질러졌을까. 더구나 수준 높은 세계문학 작품들을 소개해온 탄탄한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말이다. 불가사의다. 불순한 목적을 위한 특정세력의 숨은 의도가 끼었더라, 정도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힘들지 싶다. 허니 이 책을 꼭 봐야 할 불가피한 상황(그런 불행한 상황이 당신에게 닥치지 않기를!)이 아니시라면, 애써 찾아서 보지 않으셔도 좋겠다. 괜한 호기심에 이 책을 펴들었다가는 피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르니. 버린 시간이 아까워서... 혹시 구매씩이나 해서 본 거라면 돈이 아까워서...)

200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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