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책을 처음 들고 나왔을 때의 이 아자씨는 아전인수와 독설에 찬 글들을 쏟아내는 삼류 학자였다(당시의 내가 보기에). 그 뒤 [나는 오랑캐가 좋다]를 읽으면서는 '뭐, 이 정도면 괜찮은데?'가 되었고.
대한교과서에서 한번 나왔던 책을 손 본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갑골문 연구에 바탕을 둔 "原典主義" 번역을 읽는 맛이 쏠쏠하다. 수천년 동안 쓰이며 진시황의 저 유명한 분서갱유나, 한대의 금고문 논쟁, 송학의 이데올로기 등을 거치며 갖은 수난을 당한 결과물이 현재의 사서삼경,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체계이다. 여기에 씌워진 때 하나하나를 벗겨내고 처음 구성되었을 때의 원의에 다가가기 위해 갑골문에 의거한 해석을 펼치는 저자의 원전주의(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原字主義"?)는 상당하 유의미한 작업이다.
그 결과, 논어에서는 거의 (역시 기존 주석가들에 얽매이지 않는 역사학자 출신)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거침없는 번역에 버금가는 창발적인 작업이 나왔고, 대학, 중용등도 발랄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재구성되었다.
반면 시경부분에서는 십여전 전에 나왔던 원형갑의 [시경과 성]과 비슷비슷한 논의가 나올 뿐이고(그럴 수 밖에 없나, 하긴?!) 주역 부분에서는 뭔가 현재 통용되는 경문의 오류를 匡正한, 아주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듯 하다가는 그렇고그런 점술 비판으로 끝나고 말아 버린 점이 아쉽다. 왠지 저자가 말을 아끼는 것이 주역에 대한 독자적인 저술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인상(혹은 희망사항)을 받긴 했지만.
아시다시피, 갑골문이란 것이 원래 왕들이 점을 치는데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갑골문 연구는 곧 고대의 점술을 연구하는 것. 야심찬 갑골문 연구자라면 큰 꿈을 품어볼 만도 하다.
(일본 동양학계의 대석학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저서들이 최근들어 많이 소개되고 있다. 헌데 고만고만한 개설서만 나오고 있는 느낌이다. [문자강화]는 언제쯤 완역되려나? 김경일 선생의 저서도 볼만 하다.)
이 책, 아주 좋다. 얼마전 블로그 및 싸이 열풍을 다룬 어느 신문기사에서 신문사 서평에서는 떴는데 블로그 서평에서 별 인기가 없어서 "조용히 사라진" 책의 하나로 이 책을 꼽았던데, 이 점에서는 블로그 서평객들이 약간 게으르지 않았나... 라고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뱀발 : 한자 훈독에 뻔질나게 나오는 오자는 쩜 그러터라... '저'로 읽는 諸는 모조리 '제'로 읽었고.
2004-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