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 세계화와 나쁜 먹거리에 맞선 농부들
조제 보베 외 지음, 홍세화 옮김 / 울력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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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8월 12일 프랑스 미요 시(市)에서 건설 중이던 맥도날드 매장의 일부가 시민과 농민들에 의해 해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농민연맹' 소속 조합원인 조제 보베는 반 세계화의 상징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울력)는 유전자 변형 농산물 파괴 활동을 주도하고 미국의 일방적인 세계화에 맞서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열린 WTO 회담을 무산시킨 프랑스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 프랑스와 뒤푸르의 생생한 목소리를 대담형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생산주의 농업(기업형 농업)이 불러온 폐해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어떻게 세계의 농업을 황폐화시키고 있는가를 고발하고 있다.

    보베는 자기 나라의 식량안보를 지킬 수 있고 제3세계의 가난과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농산물 교역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미국과, 거대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개방 흐름을 제한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WTO 시민통제위원회를 상설화하자고 제안한다.

    조제 보베는 농학 분야의 공공연구 기관들이 오직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어떤 식물의 질병에 관해, 유전자에 관해 연구할 뿐, 전체적인 관점에서 농업의 위치나 농업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역할에 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농업에 관한 공공 연구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연구원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관해, 사회 안에서의 그 직업의 위치에 관해 그리고 생명에 관해 전반적인 성찰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일찍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문예출판사)의 저자 슈마허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구두뿐만이 아니라 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과학자들은 기술만능주의의 함정에 빠져 그 기술의 사회적 파장에 관한 성찰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긴 성찰은 돈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 돈이 되는 것은 오직 기술이며 끝없는 확장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세계화는 자본이 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길이다. 이에 저항하는 길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구축이라고 조제 보베는 말한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구축을 위해서는 중국혁명의 붉은 깃발도, 체 게바라의 초상도 필요 없다고 그는 단언한다. “그런 것은 이젠 끝났고 그렇기에 희망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영역(건강, 식량, 교육, 수자원, 생명체 보호 등)을 통해서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에서 세계화로 상징되는 자본의 무한확장을 제지할 섬세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미국과, 거대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개방 흐름을 제한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WTO 시민통제위원회를 상설화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주장은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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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푸드 - 느리고 맛잇는 음식 이야기
카를로 페트리니 엮음, 김종덕.이경남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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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고추장, 남원 추어탕, 풍천 장어, 마포 주물럭, 이동 갈비, 포천 막걸리, 병천 순대, 목포 세발 낙지, 평양 냉면, 섬진강 재첩국, 춘천 막국수, 평창 올챙이국수, 진도 홍주, 경주 법주, 영광 굴비, 전주 비빔밥, 천안 호두과자, 서산 어리굴젓, 인천 쫄면, 장충동 족발, 신당동 떡볶이, 신림동 순대, 명동 칼국수, 동래 파전, 예로부터 어떤 고장은 ‘맛’으로 기억된다.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시스템이 문화와 생물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듯, 버거킹, KFC, 맥도날드 등의 대규모 프렌차이즈는 맛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미각의 획일화에 저항하자는 것이 슬로푸드 운동이다. 패스트푸드의 선두주자인 맥도널드가 1989년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 들어섰을 때 시작된 것이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이다. 슬로푸드란 말 그대로 패스트푸드(fast food)의 반대. 미국의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이탈리아 로마에 진출하자, 현재 슬로푸드의 회장인 카를로스와 그의 친구들이 맛을 표준화하고 전통음식을 소멸시키는 패스트푸드의 진출에 대항하여, 식사, 미각의 즐거움, 전통음식의 보존 등의 기치를 내걸고 이 운동을 시작했다.

    1989년 11월 9일 프랑스 파리의 코믹오페라에서 채택했다는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업 문명의 이름 아래 전개된 우리의 세기에 처음으로 기계의 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기계는 생활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속도의 노예가 되었고, 우리 습관을 망가뜨리며, 우리 가정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우리로 하여금 패스트푸드를 먹도록 하는 빠른 생활, 곧 음흉한 바이러스에 굴복해가고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에 상응하기 위해서 사람은 종이 소멸되는 위험에 처하기 전에 속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보편적인 어리석음인 빠른 생활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질적 추구를 자제하는 것입니다. 이미 확인된 감각적 즐거움과 느리며 오래 가는 기쁨을 적절하게 누리는 것은 효율성에 대한 흥분에 의해 잘못 이끌린 군중에게서 우리가 감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방어는 슬로푸드 식탁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역 요리의 맛과 향을 다시 발견하고, 품위를 낮추는 패스트푸드를 추방해야 합니다. 생산성 향상의 이름으로, 빠른 생활이 우리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과 경관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일하면서도 진정한, 용기 있는 해답은 슬로푸드입니다.

    진정한 문화는 미각을 낮추기보다는 미각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데는 경험, 지식, 국제적인 교환 프로젝트가 필요합니다. 슬로푸드는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합니다. 슬로푸드의 상징은 작은 달팽이이며, 이 운동이 국제 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함께 할 능력이 있는 많은 지지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슬로푸드 운동의 기본 취지는 '맛을 표준화하고 전통 음식을 소멸시키는 패스트푸드를 먹지말고, 식사와 미각의 즐거움을 보존하자'라는 데 국한됐다. 그러나 1990년대 광우병 파동과 함께 슬로푸드 운동은 단지 ‘먹는 문제’에서 벗어나 유기농 문제 등으로 관심의 폭이 넓혀졌고, 나아가 생활 속에서 여유를 찾자는 느리게 살기 즉, '슬로 라이프(slow life)'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이후로 슬로푸드 운동은 채소, 동물, 문화의 다양성 수호를 위한 조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페트리니의 『슬로푸드』(나무심는사람, 김종덕 역)는 슬로푸드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전한다. 이름도 생소한 각국의 다양한 음식들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소개한다는 흠이 있긴 하지만, 유전자조작으로 탄생한 이른바 '프랑켄 푸드'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이 소개하는 1996년 12월 2일에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개최된 미각박람회의 내용은 흥미를 끈다. 만약 지구에 대홍수가 나서 방주에 음식을 태워야 한다면 어떤 음식을 승선시켜야 할 것인가, 당연히 햄버거와 같은 정크 푸드(쓰레기 음식)는 제외될 것이다. 원료가 변형된 음식이나. 종자 자체에 외부 유전자가 이식된 동물이나 식물은 방주에 들어올 수가 없단다. 음식문화는 절대로 전국적이 되거나, 세계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슬로푸드 멤버들의 주장이다. 슬로푸드 미국방주위원회에서는 미국 방주에 탑승할 자격 요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독특하고 품질이 뛰어나고 맛이 좋아야 한다.
    ․멸종 위기에 처한 식품이어야 한다. 음식이 표준화되는 세상에서 설자리를 잃은 식품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뚜렷한 지역성을 가져야 한다.
    ․지역의 고유음식으로 상징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


    페트리니의 책은 독일의 유럽의회 농업위원장 헤르만 셰어의 발언을 빌어 패스트푸드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헤르만 셰어는 지적한다. “소규모 생산으로는 이윤을 빠르게 회수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와 경쟁할 수 없다. 결국 패스트푸드는 소규모 생산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더욱이 이러한 추세 때문에 비료와 농약의 사용이 증가하고, 물과 토양이 오염되며, 농업의 미래는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그 결과 채소의 종류는 감소하고,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유산이 특정기업에 의해 사유화되며, 농산물과 음식은 다양성을 잃고 단순화된다.” 산업의 논리로 농산물 시장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농산물은 지리적 조건이나 토양의 조건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생산지역이 일정하게 정해지기 마련인데, 자동차는 단 10개의 나라에서 전 세계가 타는 차량을 생산할 수 있다. 헤르만 셰어는 말한다. “슬로푸드가 만들고 있는 방주는 농산물이 빠르게 유통되는 상황을 막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생산과 소비라는 과정에서 생물의 다양성을 보호하려면 투쟁을 해서라도 생명공학 특허를 막아야 한다. 와인과 음식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농업경제를 지역화해야 한다. 음식의 질적 생산을 소중히 여긴다면 양적 생산을 중시하는 현재의 영농방식에 지원하는 보조금을 폐지하도록 투쟁해야 한다.”

    페트리니는 음식에 대한 쇼비니즘을 경계한다. 이스라엘의 팔라펠, 일본의 다코야키(낙지구이), 멕시코의 타코스, 치앙라이의 카오소이, 영국의 피시앤드칩스, 그리스의 수블라키, 모로코 훈제시장의 먹을거리 등 세계 여러 지역의 고유음식을 소개한다. 독일 맥주의 종류도 5천 여종에 이른다고 이 책은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잘 먹자’는 것이 슬로푸드 운동이다. 먹되 제대로 먹자는 운동이다. 먹되 신선하게, 내 식으로, 네 몸에 맞게 먹자는 운동이다. 아울러 패스트푸드의 패권주의를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운동이다.

    어른들이 할 일은 아이들의 입맛을 일깨워 주는 일이다. 햄버거, 피자, 치킨과 같은 패스트푸드가 그들의 입맛을 점령하기 전에.

    『슬로푸드』를 번역한 김종덕 경남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저서 『슬로푸드 슬로라이프 』(한문화)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김종덕은 우리나라에 슬로푸드 운동(www.slowfoodkorea.com)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먹을거리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정작 먹을거리가 없는 세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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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 나무에게서 배운 인생의 소금같은 지혜들
우종영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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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 깔밋하고 담백한 울림


  『장자』는 우화의 형식을 빌어 참나무 한 그루를 보여준다. 그 내용의 대강은 이렇다.

  이름을 석이라고 하는 목공이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에 이르러 그곳의 토신묘 주위에 서 있는 커다란 참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 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무 둘레에는 구경꾼들이 저자거리처럼 몰려 있었으나 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제자가 석을 뒤쫓아와 물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 다닌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그대로 지나쳐 버리셨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석이 대답했다. "그만, 그런 소리 말아라.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무야. 그걸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곧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곧 깨져 버리며,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르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긴다. 그러니 저건 재목이 못 될 나무야. 쓸만한 곳이 없으니 저렇게 오랫동안 살아 남을 수 있는 게지."

  석이 집에 돌아온 뒤 문제의 참나무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대체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그 열매가 익으면 잡아뜯기고, 뜯기면 가지가 부러지고 말지. 그러다 보면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휘어지게 되네. 그것들은 자신의 유용함 때문에 자신의 생이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타고난 목숨을 끝까지 부지하지 못하고 중간에 일찍 죽게 되는 게야. 스스로 세속으로부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지. 어떤 물건이든 이것과 다를 게 없다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라 온 지가 오래 되었네.“

  토신묘의 참나무를 쓸모 없는 나무라고 생각한 것을 보면 ‘유용성’이라는 기준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토신묘의 참나무는 여름이면 무성한 그늘을 드리우고, 온갖 새와 벌레들의 둥지가 되어주고, 신선한 공기의 공장이 되어주지 않던가. 그것을 어찌 유용성이라는 잣대로 잴 수만 있으랴.

  환금성(換金性) 가치로만 평가한다면 예술도 토신묘의 참나무와 같이 무용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짜르트가 전해주는 따스한 느낌, 샤갈이 만들어내는 몽환적 세계가 없는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모짜르트이든 샤갈이든, 예술은 쓸모를 뛰어넘는 또 다른 쓸모임에 틀림이 없다. 톨스토이의 소설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꾸기도 하고, 한편의 영화가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도 하는 것이다. 예술, 왜 그것이 눈앞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어야 하겠는가. 예술은 현실을 초월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축복한다.

  ‘나무’라는 발음에는 깔밋하고 담백한 울림이 있다. 한국어에 이만하게 편안한 호흡을 가진 단어도 드물지 않을까. 나무,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벌린 채 좋다, 싫다, 아무 말이 없다. 나무는 침묵의 대가, 고독의 달인이다. 나무들을 거룩한 성자로 보고 인간을 비소하고 비루한 존재로 여기는 건 문학가들의 한결같은 버릇이었다. 먼저 고등학교 때 배운 이양하의 「신록 예찬」이 그랬다. 이양하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라는 토를 달고 있다. 박용하의 세 번째 시집 『영혼의 북쪽』도 대부분 나무를 찬양하는 데 바쳐진다. 그의 시집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무리 볼품 없고 하찮은 한 그루 나무일지라도 어떤 위대한 인간보다 낫다.’

  따지고 보면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인 셈이다. 자신의 성장 이외엔 관심이 없다. 결코 다른 쪽으로 한눈 팔지 않는다. 열심히 개체의 보존과 향상을 위해서만 분주하다. 게다가 이 녀석은 철저히 수동적이고 철저히 보수적이다. 한 자리에 완강하게 뿌리를 박고 거주이전의 자유를 누릴 줄 모른다. 나무의 관심은 오직 수직적 상승에만 있어서 한국전력직원들을 무던히 괴롭히기도 한다. 나무들은 결코 비껴가지 않는다. 한번 진로가 정해지면 양보란 없다. 전선줄이 제 머리 위에 있건 없건 관심이 없다. 오직 하늘을 향해 키자람을 계속한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싶다.』(중앙 M&B)의 저자 우종영, 그는 나무의사다. 그는 이 책에서 자살을 철회했던 과거의 에피소드를 전한다. 자살을 말린 것은 나무였다. 그는 말한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그러나 결코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나무가 말이다. 순간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어리석음을 깨우친다. 우리는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우종영은 나무를 통해서 우리네 삶을 말한다. 나무를 잘 키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나무를 관심 있게 지켜보되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 사람의 손을 많이 탄 분재는 주인이 어느 순간 잠시 손을 놓으면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는 사실에서 그는 사람살이의 지혜를 이끌어 낸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감싸고돌거나 지나치게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무에서 삶의 지혜를 이끌어내는 우종영의 예지는 나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관찰의 결과다. 그는 말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꼭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상처주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서로간에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너무나 절실하다. 나무 두 그루가 너무 가깝게 붙어 있으면 그 나무들은 서로 경쟁하며 위로만 치닫게 된다. 조금이라도 높이 자라 햇볕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런 경쟁은 서로를 망치는 길밖에 되지 않는다. 가지를 뻗고 잎을 내어 몸체 구석구석을 튼튼히 다져야 할 시기에, 위로만 자라다 보니 비정상적으로 가느다란 몸통만 갖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로부터 삶을 이끌어 내는 그의 유추는 적절하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종영이 전해주는 감나무 이야기는 흥미롭다. 그 대강은 이렇다. 감나무도 어느 해가 되면 갑자기 열매 맺기를 중단한다고 한다. 병충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토양이 나빠진 것도 아닌데 꼭 삐친 사람들처럼 꽃도 제대로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열매 하나를 맺는 데에는 최소한 수십 개의 잎사귀에 해당하는 영양분이 필요하고, 광합성등 나무의 모든 생명활동이 잎사귀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잎을 희생한 열매의 가치는 다른 것과 비교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무의 열매는 나무에게 있어서 최고의 재산이랄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열매 맺는 데만 온힘을 다 쏟으면 결국 나무 안의 자생력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무의 상태가 나빠지면 나무는 과감히 열매맺기를 포기함으로써 오로지 재충전에만 전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우종영이 감나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눈치채셨으리라. 쉬라는 것이다. 진정한 휴식은 삶에 대한 반성과 도약의 시간이니 휴식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무를 혹독하게 몰아세우는 비평가는 일찍이 없었다. 한결같이 나무는 칭송의 대상이 되어왔다. 『나무처럼 산처럼』(산처럼)의 저자 이오덕은 지구가 아름다운 것은 나무가 있어서라고 말한다. 감나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아주 각별한 것이어서 이오덕은 감나무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기 위해 특별한 페이지를 마련했을 정도다. ‘감나무 가지를 살펴보면 쭉 곧게만 뻗어 있는 가지가 없다. 죄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해서 뻗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답게 하늘을 채우고 있는 나무가 또 있겠는가. 감나무를 가만히 쳐다보면 나무의 성자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감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나무는 추억이 깃드는 장소가 된다. 시인 고은은 어느 책에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할 일을 시시콜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커다란 나무를 보여주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여주고, 장엄한 일몰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말고 묵묵히 침묵으로만 그것들을 보여주어라. 그러면 그 나무와 강과 황혼은 그 아이의 마음 속에 살아남아서 언젠가 훗날 그 아이가 성장해서 힘든 일을 겪게 될 때 그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고 고은은 말하고 있었다. 영혼의 깊숙한 곳에 심어진 한 그루 나무는 한 사람의 인격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리라.

  나무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책이 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그것. 지오노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사막에 나무를 심는 알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나무를 심은 사람>(성 베네딕도 수도원 출시)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주었던가. 인상파 화가 모네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은 그 환상적 분위기, 식목일날 우연히 보았던 그 애니메이션에 흠뻑 빠져 결국 원작을 찾아서 읽게 되었던 『나무를 심은 사람』, 책은 가벼웠지만 그 감동은 묵직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던가, 한 사람의 침묵과 고독이 파스텔 빛 낙원을 만들 수도 있다는 작은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식목일날 나는 내 아이들에게 <나무를 심은 사람>을 보여주리라. 아이들이 알제아르 부피에의 침묵과 고독의 의미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지나친 것이리라. 그러나 나의 벗들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과욕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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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의 지속
헬렌 니어링.스코트 니어링 지음, 윤구병 외 옮김 / 보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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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밥을 먹는다. 좋은 날, 궂은 날,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끼니 찾아 밥을 먹는다. 생명을 부지하겠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좇아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다. 식사(食事)란 무엇인가. 생명의 불쏘시개가 될 만한 질료들을 내 안에 집어넣는 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과연 그럴까. 방부제가 섞인 햄소시지를 먹는 것도 생명의 불쏘시개를 공급하기 위함인가. 수은이 섞인 푸성귀를 몸 안에 넣는 것도 생명을 위함인가.

  먹는 것은 일상적이고 사적인 행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도 하다. 종교가 먹는 행위를 의례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먹는 행위는 분명 생존, 그 이상의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긴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만큼 신성한 노동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먹거리는 태양과 물과 토양의 은혜가 결합되어 주어지는 축복이다. 음식을 먹음으로써 인간은 우주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스턴트 식품에서 우리는 그런 신성함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강력한 맛으로 인간의 혀를 유혹한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책 『조화로운 삶』은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을거리의 어떤 부분을 없애고, 어떤 부분은 남길지 결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은 이윤을 남길 가능성이다. 이윤을 얻으려면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하고 사람들의 입맛을 당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거리를 많이 팔 수 없다. 또한 팔려는 제품은 좋은 품질을 간직한 채로 시장에 나가야 되고, 시장에서 손님이 고를 때까지 가장 보기 좋은 모양으로 무한정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요리된 음식이 소비자들의 밥상에 오르기까지는 단순히 몇 시간이나 며칠이 아니라, 몇 주, 몇 달이 걸려야 한다. 농산물이 이리저리 돌다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가는 동안, 이 농산물을 보존하려면 엄청나게 높거나 낮은 온도가 필요하다. 특히 썩거나 상하기 쉬운, 그래서 상품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성분은 마땅히 제거된다. 비록 그 성분이 건강에 중요하더라도 말이다. 식료품을 만드는 기준은 시장에서 갖는 상품성이지,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식료품을 만드는 업자들은 소비자의 건강보다 먼저 이익을 생각한다. 농업의 최종 귀착지, 바로 ‘먹음의 주체’인 인간을 잊어버린 것이다. 정제된 밀가루가 그 예다. 기름, 단백질, 무기질과 같은 영양분은 낟알의 씨눈과 껍질에 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러나 제분업자들은 이런 상식을 간단히 무시한다. 조금만 씹어도 삼킬 수 있는 더 가벼운 빵과 과자를 만들게 하기 위해 제분업자들은 곡식의 낟알에서 씨눈과 껍질을 없앴다. 제분업자들은 밀가루가 희게 보일수록 더 깨끗하거나 고급이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밀가루를 표백한다. 이 과정에서 밀가루 안에 있는 영양소들이 파괴된단다. 이쯤 되고 보면 농업이 먹거리를 제공하는 원래의 기능에서 멀어져 돈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난도 근거없는 비난만은 아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버몬트 숲 속에 살았던 스코트 니어링은 어디에서 그 많은 자료를 얻었는지 정부 보고서까지 인용한다.‘많은 밀가루와 빵에는 인, 불소, 규소, 백반, 니코틴산. 브롬산 칼슘과 그밖에도 스무 가지가 넘는 다른 독성 약품이 들어 있다. 빵집에서 만드는 빵도 다른 많은 가공 식품들과 똑같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돈뿐 아니라 건강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화학약품과 그 대체물질을 만들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제분은 식품가공의 끔찍한 예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스코트 니어링은 말한다. 그가 살았던 당시 뉴욕시로 들어오는, 비타민이 제거된 밀가루 제품은 사람들이 먹는 전체 음식의 55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오신채(五辛菜)라 하여 불가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 음식물이 있다. 마늘과 파, 부추, 달래, 흥거의 다섯 가지가 그것이다. 자극이 강하고 냄새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음식을 공양하면 평정심을 떨어뜨리고, 몸에 냄새를 나게 만들어 청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런 음식물을 금하게 한 이유다. 그러나 속간(俗間)에서는 식욕을 돋우고 정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는 강장제로 알려져 있는 음식물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혀끝을 녹이는 데, 강력한 맛을 내는 갖은 종류의 화학조미료를 동원한다. 대부분의 식당이 몸에 좋지 않은 화학조미료와 설탕을 듬뿍 넣음으로써 고객의 건강을 망치고 자신의 자본을 북돋운다.

  2002년 불교환경운동의 선구자였던 불교환경교육원 사무국장 유정길씨가 ‘공양주직’을 자청했다고 해서 작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음식은 단순히 음식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즉 정성이나 사랑 등도 함께 먹는 것입니다. 따라서 급하게 만든 음식을 먹으면 마음도 급해지고 인내심도 없고 산만해진답니다. 오늘날 음식문화의 문제는 모든 먹을거리를 사서먹는 매식(買食)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음식점에서 맛이 없으면 손님이 오지 않기 때문에 온갖 조미료를 넣을 수 있을 만큼 넣습니다. 장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싼 가격으로 원료를 구입해서 비싸게 팔아야 하기 때문에 유기농으로 재배된 것을 구입할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건강한 먹거리를 기대할 수는 없지요.’ 소비자들의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살찌우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온갖 가짜들을 기억할 것이다. 가짜 참기름, 가짜 해파리, 가짜 해삼…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방부제가 듬뿍 섞인 수입농산물, 그 안정성이 입증되지 않은 온갖 유전자 조작식품들, 그러나 우리의 식욕은 위험을 모른다. 이런 와중에 건강한 먹거리를 생각하는 유정길씨의 자비심이 고맙다.

  곡식은 땅에서 자란다. 땅이 죽으면 곡식도 죽고, 그 곡식을 먹고 자란 몸도 죽는다. 그러므로 몸을 살리는 길은 땅을 살리는 길이고, 땅을 살리는 길은 그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일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지렁이의 예를 들어보자. 지렁이 배설물에는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또 지렁이는 겨울철에 지하 3m 60cm까지 내려가 동면을 하고, 배설할 때는 지표 위에 배설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렁이가 움직이는 자리에는 작은 터널이 형성되는데, 이 터널은 공기와 수분의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여러 미생물 등과 식물에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통로가 된다고 한다. 이런 고마운 생물을 ‘大地의 腸’으로 표현하는 이도 있다. 지렁이는 일년에 1천배 이상 증식하는 등 증식률이 매우 뛰어나 1~2년 간만 퇴비를 주면 산성화된 토양이 살아있는 토양으로 변하게 된다고 하니 기특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기특한 동물들에게 인간은 몹쓸 짓으로 보은(報恩)을 대신한다. 지독한 화학비료와 각종 폐기물로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야 만다. 배은망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지렁이의 이로움을 일찍이 알아본 사람은 『조화로운 삶』의 스코트 니어링이었다. 그 방면에 권위 있는 사람들의 견해를 인용해가며 그는 화학비료의 해로움과 유기농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떨어진 잎사귀를 지렁이가 먹고, 지렁이의 똥을 다시 곡물이 먹고, 그 곡물을 다시 인간이 먹는다. 똥과 인간이 섞이는 이 관계의 인드라망 속에서만 인간은 건강할 수 있다. 스코트 니어링은 건강하게 살다 깨끗하게 죽었다. 100세, 자발적으로 곡기를 끊고 천수를 다했다. 고승대덕(高僧大德)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헬렌 니어링 또한 92살로 천수를 다하고 땅으로 돌아갔다.

  먹을거리에 관한 한 니어링 부부는 매우 꼼꼼하게 챙겼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디자인하우스)은 온통 먹을거리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헬렌 니어링의 요리 원칙은 되도록 날 것으로, 조리할 때는 낮은 온도에서, 최대한 단순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간단히 준비하자.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리.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는 데 쓰자. 자연과 만나고 테니스를 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고 그녀는 말한다. 고기, 생선, 흰 설탕, 흰 밀가루, 달걀, 우유, 베이킹 파우더가 없는 음식 채식 위주의 식단을 그녀는 만들었다. 그 음식들은 니어링 부부의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지켜주었다. 

  니어링 부부가 타임머신을 타고 오늘의 시점으로 초대되었다면 구역질을 느껴야 했을 곳이 있다. 바로 뷔페 식당. 엄청난 먹을거리가 식욕을 자극한다. 이런 뷔페식당을 좋아하는 식도락가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책이 있다. 1995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지금까지 100만부 이상 판매됐다는 『초라한 밥상』(마쿠우치 히데오, 참솔) 이란 책이 그것. 책 제목대로 초라하게 먹으라는 것이다. 조촐한 식사를 하면 성인병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고도 명료하다. 동양인이 기준치 이상의 육식을 섭취하면 몸이 적응하지 못해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알레르기성 피부질환 등 각종 생활 습관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암, 당뇨, 고혈압, 비만, 변비, 빈혈, 충치, 고르지 못한 치열, 급하고 공격적인 성격까지 모두 잘못된 식생활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그는 간단하게 말한다. ‘부식은 적게, 밥을 많이’ 먹는 예전의 식생활로 돌아가자고.

  뭐, 골치 아프게 먹는 데 이거저거 따지냐는 ‘속 편한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런 책들이리라. 헬렌 니어링이 ‘속 편한 사람들’의 불만에 이렇게 대꾸하지 않았을까. ‘소박하게 먹자는 거지, 골치 아프게 먹자는 게 아닙니다. 이거저거 가리지 않고 먹는 데서 병은 생기고, 병은 곧 고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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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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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어링의 책과 우리네 살림살이
      - 주거문화를 생각함


  
울을 빠져나가 외곽도로를 달리다보면 뭉텅뭉텅 잘려나간 산자락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 군락이 여간 흉물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다. 한 평의 땅이라도 더 확보해 건물을 들어 앉히기 위해 공유면적을 최소화하다 보니 다닥다닥 밀집해 있는 건물들은 보는 눈을 짜증나게 한다. 오직 개발의 효율성과 수익의 극대화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건축물들은 자연을 압도한다. 배경의 산야와 근사하게 어울려 조화로운 풍경을 연출해내는 건축물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돌집은 제가 서 있는 땅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또한 둘레 풍경과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는 데 모자람이 없다.’라고 말한 이는『조화로운 삶』(보리)의 저자 스코트 니어링이다. 나는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는 데’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으면서 서산 개심사의 심검당(尋劍堂)을 떠올렸다. 자연 속에 도드라지지 않게 삶의 공간을 살짝 들어 앉히는 동양의 지혜와 미학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을 주는 곳이 심검당이었다. 뒤틀린 나무는 뒤틀린 대로,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대로 천연덕스럽게 구조물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어느 하나 내치거나 버리지 않겠다는 투였다. 성과 속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코트 니어링은 집을 지을 때 지켜야 할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모양과 기능을 모두 다져서 집의 구조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 집의 안정감과 조화는 겉모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집의 가장 깊은 본질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 니어링의 생각이었다. 집은 꼼꼼히 설계를 해서 쓸모에 맞도록 해야 하고, 필요 없는 재료와 노동을 들이지 않고서도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졌던 니어링이 서울의 건축물들을 둘러보고 소감을 피력했다면 어땠을까. “Terrible!(끔찍하다.)” 정도는 아니었을까.

  둘째, 집은 둘레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주변의 일부가 되는 겸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의 일부로서 마치 자연 속에서 자라난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저택들은 이런 미덕을 거부한다. 오직 저의 위용을 뽐내는 데 골몰한다. 심지어 겸손의 미덕을 몸소 보여주어야 할 종교 건물이 실제로는 이런 미덕을 앞장서서 거부한다. 이름 있는 교회들을 보라. 그것들은 하늘을 찌른다. 바벨탑의 교훈을 잊은 지 오래다.

  
‘빈 자(貧者)의 미학’을 역설하는 건축가 승효상은 말한다. “종교적 건축은 많지만 종교 건축은 없습니다. 첨탑만 있다고 교회는 아닙니다.” 마산성당, 경동교회, 청주박물관, 수졸당, 영동제일병원, 대학로 문화공간 등 선비 정신과 청빈의 전통을 건축물에 구현하려고 하는 승효상은 그의 저서 『빈자의 미학』에서 ‘가짐보다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갖은 건축적 장광설로 부의 위용을 과시하는 건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라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까치)의 한 구절이 섬뜩하게 상기된다.

  셋째, 집은 되도록 그 고장에서 나는 재료들을 써서 짓는 것이 좋다는 것. 집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둘레의 일부분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다른 곳에서 가져오기보다는 그 고장에서 나는 재료를 쓰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건물의 외벽을 값비싼 수입산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있는 압구정 로데오 거리, 어디에도 집의 본질을 숙고했던 흔적은 없다.

  넷째, 집의 생김새는 거기에 사는 사람을 표현해야 하고, 그 집으로 집 주인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한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집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내 지론이라면 지론이다. 동물의 박제로 장식된 집의 주인이 동물애호가일 수는 없고, 일본도로 장식된 집의 주인이 인문주의자일 수는 없다. 요란한 장식물이 없이 소박하게 꾸며진 방에 들어서 이 방의 주인이 노장(老莊)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아닌가 상상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자연과 어울려 마치 자연 속에서 성장해온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전통사찰을 보노라면 화엄의 정신, 상생(相生)의 원리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것은 경전이 아니라 오히려 사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런 전통 사찰의 미덕도 점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대리석으로 외벽을 꾸민 수덕사의 건축물 어디에서도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정신, 화엄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사찰이나 선방(禪房)에 필요한 것은 침묵이지 장식이 아니다. 절은 침묵의 공장이고 선(禪)은 면벽(面壁)의 정진이 아니던가.

  『조화로운 삶』이 소개하고 있는 농부 작가, 미첼(D.G Mitchell)의 한 마디는 두고두고 음미해볼 만하다. “어떤 돌도 망치로 다듬어서는 안 되며, 되도록 이끼가 끼고 비바람에 시달린 모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극히 교묘한 것은 졸렬하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가 서양인의 지혜를 빌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이 지혜로운 서양인들이 노자와 장자의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니어링은 말한다. “우리는 방에 있는 판자마다 다른 빛깔을 내도록 했다. 벽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운 느낌이 더해갔고, 빛깔들이 어우러지면서 몇 백권이나 되는 책에 훌륭한 배경이 돼 주었다“ 집의 연륜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 일찍이 이어령이 그의 수필 「삶의 광택」에서 간파했듯이, 광택은 포마이카 책상의 인공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없는 문지름의 결과, 소재의 밑바닥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그 은은한 빛남이 아닐까. 역사가 결여된 빛남은 공허한 반짝임에 불과한 것, 음악이든, 건축이든, 회화이든 하나의 빛남을 위해서 역사는 필요한 것이다.

  『조화로운 삶』은 또 한 명의 현자를 소개한다. 라이트(Frank Lloyd Wright),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이루려는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모든 장식물을 없애고, 고가구나 카펫이나 공중에 매다는 것 따위의 거의 모든 장식품을 거부했다. 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쓸모 없거나 허울뿐인 장식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날렵하게 내달리는 분명한 선과 어느 모로 보나 깨끗한 벽은, 장식 달린 커튼, 그림이 있는 벽지, 기계로 조각한 가구, 공들여 만든 그림 액자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훨씬 더 좋은 배경이다.”

  『작가수첩』(책세상)이 전하는 까뮈는 스스로 번잡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며칠이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여관방에서 쉬었다고 한다. 우리를 쉬게 하는 것은 여백이고 침묵이다. 집이 그런 여백과 침묵의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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