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페리먼트
올리버 히르쉬비겔 감독,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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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are strange - Doors

 
 
    환경의 억압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초월성
 
 
  배고픔과 포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모든 동물은 후자를 선택한다. 동물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물론 대개의 인간들도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독립을 위해 간디는 수십 차례나 단식을 감행한다.

  “죽음을 선택할래, 사망을 선택할래‘”라는 말은 유머의 영역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말이다. 두 개 이상의 선택 사항이 있을 때만이 선택은 유의미한 행위가 된다. 오직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돼지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해보자. ’배고픔과 포만 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 아마도 모든 돼지들은 한결같이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돼지는 배고픔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본능의 명령에 따를 뿐이지 이성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본능의 명령에 거역할 자유, 이성과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자유는 오직 인간밖에 없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바로 그 자유에 있다.  자유는 바로 환경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환경을 뛰어넘어 행동할 수 있는 ‘초월적 힘’이다.

  하루 한끼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절도를 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몸을 팔 수밖에 없었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환경이 인간성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환경결정론’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좋은 환경은 좋은 인간성을 만들고 나쁜 환경은 나쁜 인간성을 만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사는 환경을 보다 풍족하고 공평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 그러나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됨의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망각할 수는 없다.

  1971년, 스탠포드 대학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박사의 지휘 아래 <환경조작에 따른 심리변화 실험>이 실시되었다. 그 목적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인간은 극한 환경을 선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의문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것. 이를 위해 거대한 가상 감옥이 설치되고 대대적인 신문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했다. 그러나 실험은 예정된 기간은 2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5일만에 끝나고 만다.

  영화 <엑스페리먼트>. '실험'이란 뜻의 이 영화는 1971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시행한 감옥 실험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첫 날만 해도 이들에게 죄수와 간수란 역할은 낯설었다. 이들은 단지 실험에 참여해 돈을 받으려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하루가 지날수록 감옥 안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고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에게 맞서려 한다. 결국 5일째 되는 날 살인이 일어난다. 이쯤 되자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정체성을 잃고 각자 자신을 죄수와 간수로 인식하게 된다.

  환경이나 조건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성이 인간의 위대성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감독 : 올리버히르쉬비겔 
출연 : 모리츠블라입트로이, 크리스찬버켈, 유스투스본도나니.
제작 :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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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 [초특가판] 아웃케이스 없음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미후네 도시로 외 출연 / 기타 (DVD)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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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상대성을 말해주는 <라쇼몽>
 

흔히 과학은 객관적이라고 한다. 물을 전기분해하면 언제어디서든 수소와 산소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수소와 산소가 물을 구성한다는 사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타당한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세상에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물이 섭씨 영도 이하에선 얼음이 된다는 사실은 객관적이라고 하자. 그러나 얼음이 언다는 사실은 스케이트장을 운영하는 자에겐 축복이지만 수영장을 운영하는 자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사실이 아니다.
 
현대물리학자들은 시간마저도 절대적이 아니라고들 한다. 예를 들면 지구중력장의 영향은 고도차 1 km에 대하여 시간차가 3×10 -13 초에 이른다고 한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말지만 싫어하는 사람과의 한 시간은 열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똑같은 길이를 가진 물리적 시간도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영화 <라쇼몽>, 녹음이 우거진 숲 속. 사무라이 타케히로(모리 마사유키)가 말을 타고 자신의 아내 마사코(교 마치꼬)와 함께 오전의 숲 속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늘 속에서 낮잠을 자던 산적 타조마루(미후네 도시로)는 슬쩍 마사코의 예쁜 얼굴을 보고는 그녀를 차지할 속셈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속임수를 써서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타조마루는 마사코를 겁탈한다. 오후에 그 숲 속에 들어선 나무꾼은 사무라이 타케히로의 가슴에 칼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곧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불려와 관청에서 심문이 벌어진다.
 
먼저 산적 타조마루는 자신이 속임수를 썼고, 마사코를 겁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무라이와는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떠벌린다. 하지만 마사코의 진술은 다르다. 자신이 겁탈 당한 후, 남편을 보니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초리였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초리에 제정신이 나간 그녀는 혼란 속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무당의 힘을 빌어 강신한 죽은 사무라이 타케히로는 또 다른 진술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지만, 오히려 산적 타조마루가 자신을 옹호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엇갈리는 진술 속에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담겨있다. 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념 체계는 나의 생각이 옳고 타인의 생각이 그르다는 자기중심주의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핏줄, 같은 학교, 같은 고향에 끌리는 것이 자연스런 우리의 감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관적인 견해를 지지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이해관계를 포기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중의 누가 자신의 이익을 깨끗이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쇼몽>의 영상은 객관적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준다.
 
감독 : 구로자와 아키라
출연 : 미후네도시로, 교마치꼬, 마사유키모리.
제작 :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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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unaway Jury (Mass Market Paperback)
존 그리샴 지음 / Island Books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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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대중주의의 문제점을 생각한다
 

의견이 엇갈릴 때, 우리는 흔히 '다수결'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다수결은 손쉬운 해결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수결은 손쉬운 문제 해결 방법이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따른다.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의 병을 진단한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위염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장염이라고 할 때, 어떤 쪽의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가에 따라서 환자의 병을 판가름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그러나 이런 우스운 일이 우리의 일상에서는 종종 벌어지곤 한다. 물론 음식을 하나로 통일해서 주문해야 하는 문제는 다수결로 해결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운이 달린 문제를 대중들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위험한 발상임에 틀림이 없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냉정한 판단력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곧잘 감정에 동요되기 마련이다. 정치인들은 흔히 미디어를 이용해 자신의 이미지를 조작하기도 한다. 여론 조사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비친 자신의 이미지가 냉정하다고 판단되면 미디어를 통해 얼마든지 자신의 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다. 가령 고아원을 방문해서 아이들을 품어주고, 노인정에 물품을 기증하며 노인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이를 TV를 통해 연속적으로 방영한다면 유권자들의 견해는 달리질 수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이미지 조작이 가능한 현실에서 대중은 합리적 이성에 따라 사태를 결정하기보다는 조작된 이미지에 휘둘리기 쉽다.
 
합리적 판단은 가능한 한 충분한 정보가 주어질 때 가능한 것이므로 정보가 일부에게 독점될 때도 군중들에게서 합리적 판단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다수의 생각이 제일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 더구나 유권자들로부터 많은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들은 더욱 다수의 견해에 동조한다. 이를 흔히 '대중주의'라고 이름한다. 대중들의 견해를 정책 결정에 반영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대중들의 견해가 만능은 아니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은 무기회사를 상대로 소송으로 제기한다, 그러나 이는 무모한 싸움이다. 무기회사는 랜킨 피츠(진 핵크만)를 위시한 법률전문가들에게 천문학적 금액을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랜킨 피츠는 재판의 승부를 조작한다. 배심원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들을 매수하는 작전에 나선다는 것이 영화 <런어웨이>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한 지방자치단체는 '음식물 자원화 시설' 건립 여부를 배심원제를 통해 결정하기로 주민들과 합의했다고 한다. 주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자신의 이익을 강화하는 쪽으로 판단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행정 정책은 독단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복잡성과 심각성이 있다.
 
법률에 대한 지식이 전문가에 비해 떨어지는 일반인들이 감정에 의거해 즉흥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 배심원 제도의 문제점이다. 반면에 판사 한 명의 독단과 편견을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 배심원 제도의 장점이기도 하다. 배심원제도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려나갈 수는 없을까,  영화 <런어웨이>를 보며 고민해볼 일이다.
 
감독 : 게리 플레더
주연 : 존 쿠삭, 진 핵크만, 더스틴 호프만.
제작 :  2004년
 
      Dire  Straits        Why  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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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바람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5
박재삼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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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만이 능사(能事)는 아니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 위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천년의 바람」


시인은 이 시에서  항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은 천 년 전의 일을 지치지 않고 하는데 왜 인간은 쓸데없는 일에 눈을  돌리냐는 거다. 여울의 물은 천년 전처럼 흐르고, 꽃은 천만 년 전처럼 피고 지는데 어찌 해서 인간은 다르냐는 거다.  하긴 인간은 자연이 하지 않는 얼마나 많은 '짓거리'들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문명이란  것이  죄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다. 그저 들판을 달리면 될 것을 굳이  인간들은 그것을 '육상'이란  이름으로 라인을 긋고 기록을 재면서 호들갑을 떨고,  그저 소리 지르면서 맘껏 감정을 발산하면 될 것을 '노래'란 이름으로 음정, 박자, 화음을 운운해가면서 법석을 떤다. 이렇게 보면 인간들이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면서 법석을 떠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사정을 한 번 거꾸로 돌려 생각해보자. 하지 않아도 될 짓거리들을 열심히 하는  데에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어여쁨이 있는 것은 아닌가.

동물은 우표를 수집하지도 않고 명왕성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스쿠버다이빙이나 번지점프를 하지도 않으며 나비를 수집하거나 제2외국어를  배우지도 않으며 칸트나 헤겔을 읽지도 않는다. 동물은 어떤가. 동물들에게 있어서 행동의 동기는 <필요>이다. <쓸모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동물들의 행동의 모토라면 모토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동물들의 행동은 반드시 일정한 보상을 기대한다. 잠은 수면욕을 보상해주고 짝짓기는 번식의 욕구를 보상해준다. 어떠한 생물학적 욕구도 보상해주지 않는 우표 수집이나 번지점프에 동물들이 관심을 가질 리 없다. 명왕성에 관심을 갖거나 삼각함수와 같은 "쓸데없는 짓'을 하느니 차라리 체력  비축의 필요를 위해서 낮잠을 자두는 편이 낫다고 영리한(?) 동물들은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배고픔이 시켜서만 먹지 않는다. 추위가 시켜서만 입지 않는다. 짝짓기나 생식을 위해서 교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은 구체적인 필요를 초월해 있다. 생물학적 필요와 충동으로 인간의 행동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어떤 체계보다도 완벽할 것만 같은 과학도 언제나 인간에게만 오면 제 성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인과율은 어째 인간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自由)란  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음'이 아닌가. 어쨌든 특별한 보상(報償)을 기대하지 않는 행위는 인간의 행위에서만 비로소 찾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취미'라고 부르는 그 '쓸데없는 짓거리'들도 어떤 점에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는 증표는 아닌가.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무보상의 행위란 있을 수 없다는 항변에는 답변이 궁색해진다. 종교적 희생과 같이 고귀한 행동도 어떤 점에서는 도덕적으로 자신을 고양시킴으로써 어떤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는 행위, 다시 말해서 보상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따지고 든다면 반론의 답변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 무보상적 행위의 심리적 배후엔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무의식적 동기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니오, 라고 답하기는 (하루끼라는 일본의 소설가가 어떤 수필에서 말하고 있듯) 떨어지는 별똥을 테니스라켓으로 받아치는 것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문제는 그렇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의 행동은 그 행동의 계기가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데 있지만, 인간의 행동의 계기는 인과론적인 단순한 도식으론 설명될 수 없다는 것. 바로  그런 복잡성에 인간의 인간됨이 있다는 것. 인간의 행동도 인과론적인 설명이 가능하지만 인간의 행동은  동물의 그것과는 달리 보다 심층적이고 복합적이라는 것.

동물들은 심미적  만족이나 도덕적  만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미추(美醜), 선악(善惡), 성속(聖俗), 시비(是非)의 분별이 없다. 자연은 선이요, 인간은 악이라는 등식은 그런 점에서 소박하고 유치한 인식론이다.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는 명제는 자연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자연이 그러하다고 해서 인간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요 적자생존의 세계이니만큼 인간의 세계도 자연의 세계에서와 같이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는  강자의 억압과  폭력을 비호해주는 파시스트의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데에 그  위험성이 있지는 않을까. 자연적 사실과  도덕적 요청은 엄격히 서로 다른 범주의 논리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볼 떄 결코 평등하지 않다. 지능면에서나 육체적  권능면에서나 '나'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고  나보다 못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엄연한 자연적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명제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도덕적 요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도덕적 요청'은 인간의 세계에서만 유의미하다. 물은  흘러야 하기 때문에 흐르지 않는다.

자연은 당위의 세계가 아니다. 물은 그저 흐를 뿐이다. 동성애가 유전적 요인이다, 아니 후전척이고 환경적인 요인이다 하는 시시비비의  엇갈림만 해도 그렇다. 동성애가 선천적이기  때문에 정당하고 후전척이거나 문화적이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면, 인간에게는 폭력적 본능이 선천적으로  있기 때문에 인간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논리를 변호해주는  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몇 일 전의 신문은 모성애를 규정하는 유전물질이 발견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만약 그 기사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아동을 학대한 어머니의 유전자를 조사하여 '모성애 발현 유전자'가 없다는 이유로 그 여성의 아동 학대를 도덕적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인가.

문제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시대적·도덕적 요청에 우리가 얼마나 합당한  합의를 도출해내는 데에 있지 않을까. 인간은 결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은 자연에게서 배울  수는 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할 텍스트가 아니다. 자연이 '하는 짓'을 인간이 함으로써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지만, 자연이 '하지 않는 짓'도 인간이 함으로써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자연적인  것'을 이상적(理想的)인 것으로  규정하고 자연적이지 않은  것을 이상(異常)으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을 포괄하고 아우를 수 있는 '인간적인 것'을 새롭게 상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박재삼의 「천년의 바람」을 읽는 데엔 보다 주의깊은 독법(讀法)이 필요하지는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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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호수 - 이시영 시집
이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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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다양한 표정들

 


어제 낮의 나의 패배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왔던 그것을
이제는 아무 두려움 없이 솔직히 인정하자
뉘우침 속에서 이렇게 밤의 고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랜만의 나의 참모습 아니냐

그래,나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것은 건너뛸 수 없는 사실이다
밤이여, 커다란 밤이여
네가 나를 밟고서 가라
어둠은 나의 오랜 친구였다
그 속의 쓰라린 빛도!
-이시영,「나의 패배」

대체로 文明은 고통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흘러 갑니다. 나날이 우리의 삶은 산뜻해져 가고 모든 퀴퀴한 것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문명의 광택제는 모든 낡은 것들을 코팅시켜가고 있습니다. 여름이면 악취를 풍겨대던 쓰레기의 땅 난지도에도 얼마 있으면 첨단의 인텔리전트 빌딩들이 들어선다고들 하더군요. 따개비 같이 덕지덕지하던 봉천동의 하꼬방 동네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지는 이미 오랩니다. 아, 낡은 것들도 이렇게 근사하게 一家를 이루어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했던 황학동 벼룩시장도 조만간 개발의 바람에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군요. 머지않아 도시는 깨끗하게 위생처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살균등처럼 가로등이 환하게 밤의 도시를 비추고 있을 테지요. 그러나 이렇게 의기양양한 도시의 어딘가에도 조명이 닿지 않는 곳은 있습니다.

어떤 싸움에서 패배는 반드시 치욕만은 아닙니다. 떳떳하지 못한 승리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패배가 아름답다는 것은 구차한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듯합니다. 하나의 승리가 한 인간의 분투와 각고의 산물일진대 우린 그 사람의 승리에 응당 박수를 보내야 하겠지요. 그러나 공정하지 못한 게임의 승리자에게까지 우리가 환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명이란 일종의 싸움이었습니다. 거대한 해일과 폭풍우와의 싸움이기도 했고, 죽음, 질병, 어둠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던 시절, 인간은 자연과의 싸움에서 오늘처럼 늘 의기양양한 승리자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목전에 앞둔 오늘, 사정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인간 복제의 가능성이 운위되기도 하고, 불치의 병을 정복하고 노화 억제물질을 개발해낼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고들 합니다. 불로초의 꿈이 이제 현실화되기에 이른 것이지요. 과학기술을 등에 업은 인간의 막강한 힘은 지구를 향하는 혜성의 돌진을 무산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에서의 일이긴 합니다만 영화에서의 일이라고 해서 이제 헛된 망상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만도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신촌과 강남역 부근의 자정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습니다. 나날이 그 기종을 고급화시켜가는 첨단 통신기기를 동원해 타인들과 쉼없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자정 무렵, 신촌과 강남역의 얼굴들은 그렇게 화평해보이지 않습니다. 토악질을 해대는 한 여자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한 청년은 연신 상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 이제 마악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법한 소녀가 제 또래의 사내아이들과 담배를 물고 있는 광경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심야의 폭주족에 그리 크게 놀라지 않게 된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고막을 찢는 기타와 드럼의 굉음 속에서 연신 치렁치렁한 머리를 흔드는 청년들, 땀으로 범벅을 한 그들의 얼굴에서 이 시대의 문명의 승리를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승리자의 얼굴이 아닙니다. 문명은 그러나 이런 풍경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칙칙하기만 했던 건물들도 이제는 칼라풀하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의상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순대국집에도 이젠 화장이 필요한 시대이니까요. 한 사내가 버스에 올라, 이게 그 유명한 나이롱 양말이다면서 송곳니로 물어뜯으며 나이롱 양말의 견고성과 제 이빨의 튼튼함을 동시에 자랑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실체와 내용보다는 포장과 형식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오늘날의 패배는 실체와 내용의 패배이기 전에 포장과 형식의 패배입니다. 어떠한 분위기나 상표로 자신을 포장하고 감싸는 데에 실패하면 실체와 내용은 제 목소리를 가지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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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쯤 되면 우린 두 가지의 패배자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 아무리 열심히 스스로를 포장해도 제가 가진 능력으로는 포장 실력이 뒤쳐질 수밖에 없는 자, 둘, 아예 스스로를 포장하길 거부하는 자. 만약 시(詩)에도 절망과 패배가 있다면 포장하길 거부하는 자의 패배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인이 베스트드레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근사한 서재(書齋)로 남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멋진 차와 품위 있는 주택으로서 히야, 하는 탄성을 유발할 수도 있겠습니다. 굳이 시인들이라고 해서 우중충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위의와 품격은 어떠한 포장이나 화장술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성직자들의 위의와 품격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비단의 승려복이나 사제복으로 하늘나라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는 없겠습니다.

우수에 찬 눈빛, 폭발적 에네르기를 간직한 듯한 표정의 스타들처럼 시인들도 실체야 어쨌든 어떤 상품적 이미지를 자꾸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내용이야 어쨌든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보자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이든지, 그럴싸한 포장으로 자신을 감싸야 하는 것인지요. 외국에서 수입된 논리를 충분히 자신의 심장으로 녹여내지도 못하고 단지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을 메꾸지 위한 소품으로 도배를 해야 하는 것인지요?

모든 시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결핍의 땅입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무언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 도시의 문명이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인간의 편익을 증진시켜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어떠한 결핍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인 이상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자정 무렵의 신촌이나 강남역의 자정 무렵에 젊은이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그리움은 아닐는지요. 어떠한 물질적 풍요도 마음 한 구석에 있는 공허를 메꿔줄 수 없다면 우리는 그 결핍을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시가, 음악이, 더 나아가 모든 예술이 그 그리움의 다양한 표정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시로 글을 접겠습니다.

가질 수 없는 건 다 상처랬죠?
닿지 않는 하늘 닿지 않는 바다
돈이 없어 닿지 않는 외투
빌릴 수 없는 방 두 칸짜리 집
닿지 않는 사랑

절망의 아들인 포기가 가장 편하겠죠
아니, 그냥 흘러가는 거죠
뼈처럼 흰구름이 되는 거죠

가다보면 흰구름이 진흙더미가 되기도 하고
흰구름이 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고
흰구름 외투를 입고
길가에 쓰러진 나를 발견하겠죠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하냐>구요
-신현림,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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