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7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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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순한 몽상의 작은 책에서 우리들은 어떤 지식의 무거운 짐을 질 것도 없고 일관된 탐구의 방법에 얽매일 것도 없이 일련의 짧은 章들 속에 한 사람의 몽상가가 고독한 불꽃을 응시하는 가운데 몽상의 어떤 갱신을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촛불 한 자루가 이끄는 이미지의 중심 속으로 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헐렁한 셔츠다. 여행을 떠날 때 목까지 단추를 꿰고 근엄한 표정으로 떠나지 않는다. 촛불의 몽상 또한 캐주얼한 차림을 요구한다. 이완시켜야 한다. 너무 굳어 있었다.

 불꽃은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싸우면서 세세하고 연약한 것으로 그곳에 있고, 한편의 몽상가는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채 다른 쪽으로 꿈꾸기 위해 떠나간다. 크게, 너무나 크게 꿈꾸면서, 세계에 대하여 꿈꾸면서.

불꽃은 흔들린다. 불꽃의 몸은 그 흔들림 자체이다. 그 흔들림을 유지하려고 불꽃은 제 전신으로 흔들린다. 흔들리는 불꽃 옆에서 부는 바람, 그는 불꽃의 적대자인가? 한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도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삻아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정현종  <상처> 전문                         

작은 빛에 대한 몽상은 우리들을 친밀함의 오막살이로 끌고 갈 것이다. 우리들은 가물거리는 빛밖에 받을 수 없는 컴컴한 구석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느끼기 쉬운 마음은 깨어지기 쉬운 가치를 좋아하는 것이다.

 빛을 제 몸에 허락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어둡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식의 환한 형광등을 끄고 우리는 어떤 초막으로 간다. 그곳에서 한자루의 촛불이 불러들이는 기억들의 초혼제. 과거는 단순하게 흘러 간 것만은 아니다. 촛불 속으로 날아드는 하루살이 떼. 모든 외곽은 희미하고 일렁이고 부풀고 비틀린다.이 촛불의 非寫實主義.


 철학자의 책상 위, 스스로의 형태 속에 사로잡혀 있는 물건들, 천천히 가르쳐 주는 책들 옆에서 촛불의 불꽃은 끝없는 사상을 불러일으켰고 끝없는 이마쥬를 발생시켰다.

 존재는 갇힘이다. 아무리 열려도 그들은 갇혀있다. 몸은, 그리고 질료는 굳은 자물통이다. 죽음으로 해서 세계는 존재로 침투한다. 스스로의 형태에 갇혀 있는 물건들. 그러나 바슐라르의 사물은 존재의 감옥에 유폐되어 있지만은 않은 듯하다. 단지 그들은 스스로에게 <사로잡혀> 있다. 몽상은 <사로잡힘>이 아닌가. 그들은 단지 자신을 건설하기에 열심일뿐이다. 눈치 보지 않는다.

 촛불의 불꽃은 혼의 靜謐性을 재는 예민한 압력계, 섬세한  조용함, 생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는 조용함--편안한 몽상의 흐름을 쫓아가는 持續에 부드러운 연속성을 주는--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당신들도 조용하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침착하게 빛의 일을 하고 있는 경쾌한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쉬어 보라

 조용한 타오름, 서서히 진행되는 소멸, 그 부드러운 탕진, 그아름다운 쇠잔, 누군들 그런 죽음을 감히 꿈꾸지 않을까?

타는 액체가 위쪽을 향해서, 하늘을 향해서 수직의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것을 볼 것이다......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 부서져 내리는 모래보다 가벼운 불꽃은 마치 시간 자체가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할 것처럼 그 형태를 쌓고 있다. 불꽃과 모래시계는 편안한 몽상 속에서 가벼운 시간과 무거운 시간과의 일치를 나타내고 있다.

 불꽃의 시간은 가벼운 여성성(아니마,anima)의 시간이고, 모래시계는 무거운 남성성(아니무스, animus)의 시간이다. 불꽃의 시간은 확산의 시간이고, 모래시계의 시간은 집중의 시간이다. 삶은 그 두 개의 반죽된 시간이다. 어떤 이는 수직적 초월을 꿈꾸기도 하지만, 또 어떤이는 어둠으로의 맹렬한 자기헌신을 통해 역설적인 초월을 꿈꾸기도 한다. 그 두 가지 상반된 충동을 나무는 통일한다. 그 뿌리로는 어둠을 헤메이며 그 잎으로는 하늘을 꿈꾸는 나무.

 그렇다. 불꽃 앞에서 밤샘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을 생각한다.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불꽃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며 꿋꿋하다. 이 빛은 조금만 불어도 꺼진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의 불씨로써 다시 켜진다.

 몽상은 요구한다.책을 덮기를. 책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음악을, 하나의 음악보다는 하나의 바람소리를 몽상은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의미가 약화될 때 이미지는 강화된다. 분명하지 않음으로 해서 풍부해지는 이 비밀. 그건 단순한 티미함이 아니다. 어정쩡함이 아니다.

 인간이 보다 좋은 인간의 싹이며 노랗고 무거운 불꽃이 희고 가벼움 불꽃의 싹인 것과 같이 세계는 보다 나은 세계의 싹이다...아리스토텔리스적 철학을 따라가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물리적인 여러 현상을 관할하는 모든가치보다도 더 커다란 가치가 정복된다.

바슐라르, 이 노인의 낙관주의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몽상 속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제 땅을 회복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신념일까? 과연 세계는 더 좋은 세계의 싹일까. 이 세계의 엔트로피는 종말을 향해 간다는 슬픔 신념은 섣부른 비관주의일까. 그러나 비관은 논리적 사유의 산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적어도 꿈꾸는 자는 찡그리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선천적으로 낙관주의자다. 태양의 후손들, 그들은 밝음으로만 꽃피지 않는다.

불꽃은 혼자이고,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이고, 또 그것은 혼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적어도 불꽃은 몽상가에게 있어서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존재의 상징인 것이다! 불꽃은 생성으로서의 존재, 존재로서의 생성이다. 스스로를 고독한 불꽃으로 느끼는 것, 생성으로서의 존재의 드라마 그 자체 속에 있는 불꽃으로 느끼는 것, 스스로를 밝히면서 켜지는 것, 이러한 것들이 위대한 시인의 이마쥬 밑에 솟아나는 사상들 인것이다.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 뺏긴 촛불. 그러나 생각해보자.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 뺏기지  않은 自然이 있을까? 흐름에만 열중하는 시냇물, 꽃피는 데만 열심인 연산홍의 그 붉은 꽃잎, 하나의 집을 짓기 위해 제 부리를 몇천번이고 땅에 입맞추는 까치. 노는 데 정신이 팔린 아이들의 이마에 맺힌 구슬땀, 행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런데 그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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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5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5-10-0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 제 스타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