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5
박재삼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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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만이 능사(能事)는 아니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 위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천년의 바람」


시인은 이 시에서  항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은 천 년 전의 일을 지치지 않고 하는데 왜 인간은 쓸데없는 일에 눈을  돌리냐는 거다. 여울의 물은 천년 전처럼 흐르고, 꽃은 천만 년 전처럼 피고 지는데 어찌 해서 인간은 다르냐는 거다.  하긴 인간은 자연이 하지 않는 얼마나 많은 '짓거리'들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문명이란  것이  죄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다. 그저 들판을 달리면 될 것을 굳이  인간들은 그것을 '육상'이란  이름으로 라인을 긋고 기록을 재면서 호들갑을 떨고,  그저 소리 지르면서 맘껏 감정을 발산하면 될 것을 '노래'란 이름으로 음정, 박자, 화음을 운운해가면서 법석을 떤다. 이렇게 보면 인간들이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면서 법석을 떠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사정을 한 번 거꾸로 돌려 생각해보자. 하지 않아도 될 짓거리들을 열심히 하는  데에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어여쁨이 있는 것은 아닌가.

동물은 우표를 수집하지도 않고 명왕성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스쿠버다이빙이나 번지점프를 하지도 않으며 나비를 수집하거나 제2외국어를  배우지도 않으며 칸트나 헤겔을 읽지도 않는다. 동물은 어떤가. 동물들에게 있어서 행동의 동기는 <필요>이다. <쓸모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동물들의 행동의 모토라면 모토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동물들의 행동은 반드시 일정한 보상을 기대한다. 잠은 수면욕을 보상해주고 짝짓기는 번식의 욕구를 보상해준다. 어떠한 생물학적 욕구도 보상해주지 않는 우표 수집이나 번지점프에 동물들이 관심을 가질 리 없다. 명왕성에 관심을 갖거나 삼각함수와 같은 "쓸데없는 짓'을 하느니 차라리 체력  비축의 필요를 위해서 낮잠을 자두는 편이 낫다고 영리한(?) 동물들은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배고픔이 시켜서만 먹지 않는다. 추위가 시켜서만 입지 않는다. 짝짓기나 생식을 위해서 교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은 구체적인 필요를 초월해 있다. 생물학적 필요와 충동으로 인간의 행동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어떤 체계보다도 완벽할 것만 같은 과학도 언제나 인간에게만 오면 제 성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인과율은 어째 인간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自由)란  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음'이 아닌가. 어쨌든 특별한 보상(報償)을 기대하지 않는 행위는 인간의 행위에서만 비로소 찾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취미'라고 부르는 그 '쓸데없는 짓거리'들도 어떤 점에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는 증표는 아닌가.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무보상의 행위란 있을 수 없다는 항변에는 답변이 궁색해진다. 종교적 희생과 같이 고귀한 행동도 어떤 점에서는 도덕적으로 자신을 고양시킴으로써 어떤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는 행위, 다시 말해서 보상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따지고 든다면 반론의 답변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 무보상적 행위의 심리적 배후엔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무의식적 동기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니오, 라고 답하기는 (하루끼라는 일본의 소설가가 어떤 수필에서 말하고 있듯) 떨어지는 별똥을 테니스라켓으로 받아치는 것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문제는 그렇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의 행동은 그 행동의 계기가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데 있지만, 인간의 행동의 계기는 인과론적인 단순한 도식으론 설명될 수 없다는 것. 바로  그런 복잡성에 인간의 인간됨이 있다는 것. 인간의 행동도 인과론적인 설명이 가능하지만 인간의 행동은  동물의 그것과는 달리 보다 심층적이고 복합적이라는 것.

동물들은 심미적  만족이나 도덕적  만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미추(美醜), 선악(善惡), 성속(聖俗), 시비(是非)의 분별이 없다. 자연은 선이요, 인간은 악이라는 등식은 그런 점에서 소박하고 유치한 인식론이다.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는 명제는 자연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자연이 그러하다고 해서 인간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요 적자생존의 세계이니만큼 인간의 세계도 자연의 세계에서와 같이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는  강자의 억압과  폭력을 비호해주는 파시스트의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데에 그  위험성이 있지는 않을까. 자연적 사실과  도덕적 요청은 엄격히 서로 다른 범주의 논리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볼 떄 결코 평등하지 않다. 지능면에서나 육체적  권능면에서나 '나'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고  나보다 못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엄연한 자연적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명제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도덕적 요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도덕적 요청'은 인간의 세계에서만 유의미하다. 물은  흘러야 하기 때문에 흐르지 않는다.

자연은 당위의 세계가 아니다. 물은 그저 흐를 뿐이다. 동성애가 유전적 요인이다, 아니 후전척이고 환경적인 요인이다 하는 시시비비의  엇갈림만 해도 그렇다. 동성애가 선천적이기  때문에 정당하고 후전척이거나 문화적이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면, 인간에게는 폭력적 본능이 선천적으로  있기 때문에 인간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논리를 변호해주는  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몇 일 전의 신문은 모성애를 규정하는 유전물질이 발견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만약 그 기사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아동을 학대한 어머니의 유전자를 조사하여 '모성애 발현 유전자'가 없다는 이유로 그 여성의 아동 학대를 도덕적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인가.

문제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시대적·도덕적 요청에 우리가 얼마나 합당한  합의를 도출해내는 데에 있지 않을까. 인간은 결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은 자연에게서 배울  수는 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할 텍스트가 아니다. 자연이 '하는 짓'을 인간이 함으로써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지만, 자연이 '하지 않는 짓'도 인간이 함으로써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자연적인  것'을 이상적(理想的)인 것으로  규정하고 자연적이지 않은  것을 이상(異常)으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을 포괄하고 아우를 수 있는 '인간적인 것'을 새롭게 상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박재삼의 「천년의 바람」을 읽는 데엔 보다 주의깊은 독법(讀法)이 필요하지는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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