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호수 - 이시영 시집
이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움의 다양한 표정들

 


어제 낮의 나의 패배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왔던 그것을
이제는 아무 두려움 없이 솔직히 인정하자
뉘우침 속에서 이렇게 밤의 고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랜만의 나의 참모습 아니냐

그래,나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것은 건너뛸 수 없는 사실이다
밤이여, 커다란 밤이여
네가 나를 밟고서 가라
어둠은 나의 오랜 친구였다
그 속의 쓰라린 빛도!
-이시영,「나의 패배」

대체로 文明은 고통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흘러 갑니다. 나날이 우리의 삶은 산뜻해져 가고 모든 퀴퀴한 것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문명의 광택제는 모든 낡은 것들을 코팅시켜가고 있습니다. 여름이면 악취를 풍겨대던 쓰레기의 땅 난지도에도 얼마 있으면 첨단의 인텔리전트 빌딩들이 들어선다고들 하더군요. 따개비 같이 덕지덕지하던 봉천동의 하꼬방 동네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지는 이미 오랩니다. 아, 낡은 것들도 이렇게 근사하게 一家를 이루어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했던 황학동 벼룩시장도 조만간 개발의 바람에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군요. 머지않아 도시는 깨끗하게 위생처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살균등처럼 가로등이 환하게 밤의 도시를 비추고 있을 테지요. 그러나 이렇게 의기양양한 도시의 어딘가에도 조명이 닿지 않는 곳은 있습니다.

어떤 싸움에서 패배는 반드시 치욕만은 아닙니다. 떳떳하지 못한 승리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패배가 아름답다는 것은 구차한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듯합니다. 하나의 승리가 한 인간의 분투와 각고의 산물일진대 우린 그 사람의 승리에 응당 박수를 보내야 하겠지요. 그러나 공정하지 못한 게임의 승리자에게까지 우리가 환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명이란 일종의 싸움이었습니다. 거대한 해일과 폭풍우와의 싸움이기도 했고, 죽음, 질병, 어둠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던 시절, 인간은 자연과의 싸움에서 오늘처럼 늘 의기양양한 승리자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목전에 앞둔 오늘, 사정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인간 복제의 가능성이 운위되기도 하고, 불치의 병을 정복하고 노화 억제물질을 개발해낼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고들 합니다. 불로초의 꿈이 이제 현실화되기에 이른 것이지요. 과학기술을 등에 업은 인간의 막강한 힘은 지구를 향하는 혜성의 돌진을 무산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에서의 일이긴 합니다만 영화에서의 일이라고 해서 이제 헛된 망상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만도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신촌과 강남역 부근의 자정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습니다. 나날이 그 기종을 고급화시켜가는 첨단 통신기기를 동원해 타인들과 쉼없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자정 무렵, 신촌과 강남역의 얼굴들은 그렇게 화평해보이지 않습니다. 토악질을 해대는 한 여자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한 청년은 연신 상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 이제 마악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법한 소녀가 제 또래의 사내아이들과 담배를 물고 있는 광경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심야의 폭주족에 그리 크게 놀라지 않게 된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고막을 찢는 기타와 드럼의 굉음 속에서 연신 치렁치렁한 머리를 흔드는 청년들, 땀으로 범벅을 한 그들의 얼굴에서 이 시대의 문명의 승리를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승리자의 얼굴이 아닙니다. 문명은 그러나 이런 풍경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칙칙하기만 했던 건물들도 이제는 칼라풀하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의상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순대국집에도 이젠 화장이 필요한 시대이니까요. 한 사내가 버스에 올라, 이게 그 유명한 나이롱 양말이다면서 송곳니로 물어뜯으며 나이롱 양말의 견고성과 제 이빨의 튼튼함을 동시에 자랑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실체와 내용보다는 포장과 형식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오늘날의 패배는 실체와 내용의 패배이기 전에 포장과 형식의 패배입니다. 어떠한 분위기나 상표로 자신을 포장하고 감싸는 데에 실패하면 실체와 내용은 제 목소리를 가지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
사정이 이쯤 되면 우린 두 가지의 패배자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 아무리 열심히 스스로를 포장해도 제가 가진 능력으로는 포장 실력이 뒤쳐질 수밖에 없는 자, 둘, 아예 스스로를 포장하길 거부하는 자. 만약 시(詩)에도 절망과 패배가 있다면 포장하길 거부하는 자의 패배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인이 베스트드레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근사한 서재(書齋)로 남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멋진 차와 품위 있는 주택으로서 히야, 하는 탄성을 유발할 수도 있겠습니다. 굳이 시인들이라고 해서 우중충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위의와 품격은 어떠한 포장이나 화장술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성직자들의 위의와 품격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비단의 승려복이나 사제복으로 하늘나라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는 없겠습니다.

우수에 찬 눈빛, 폭발적 에네르기를 간직한 듯한 표정의 스타들처럼 시인들도 실체야 어쨌든 어떤 상품적 이미지를 자꾸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내용이야 어쨌든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보자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이든지, 그럴싸한 포장으로 자신을 감싸야 하는 것인지요. 외국에서 수입된 논리를 충분히 자신의 심장으로 녹여내지도 못하고 단지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을 메꾸지 위한 소품으로 도배를 해야 하는 것인지요?

모든 시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결핍의 땅입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무언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 도시의 문명이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인간의 편익을 증진시켜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어떠한 결핍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인 이상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자정 무렵의 신촌이나 강남역의 자정 무렵에 젊은이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그리움은 아닐는지요. 어떠한 물질적 풍요도 마음 한 구석에 있는 공허를 메꿔줄 수 없다면 우리는 그 결핍을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시가, 음악이, 더 나아가 모든 예술이 그 그리움의 다양한 표정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시로 글을 접겠습니다.

가질 수 없는 건 다 상처랬죠?
닿지 않는 하늘 닿지 않는 바다
돈이 없어 닿지 않는 외투
빌릴 수 없는 방 두 칸짜리 집
닿지 않는 사랑

절망의 아들인 포기가 가장 편하겠죠
아니, 그냥 흘러가는 거죠
뼈처럼 흰구름이 되는 거죠

가다보면 흰구름이 진흙더미가 되기도 하고
흰구름이 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고
흰구름 외투를 입고
길가에 쓰러진 나를 발견하겠죠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하냐>구요
-신현림,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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