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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가시나무의 기억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28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5월
평점 :
이성복의 낮은 숨결
스무살에는 무엇에든 빠지게 된다. 내가 빠진 곳의 한 기슭에는 이성복이 있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남해금산』,『그 여름의 끝』, 나는 그 시집들의 리듬이 내 속에 들어와 나의 호흡의 일부가 되길 원했다. 선배들은 완강하게 세계관을 주장했지만, 시를 배운다는 것은 세계관을 배운다는 것이기 이전에 분명 어떤 호흡과 리듬을 익히는 일이었다. 호흡과 리듬에 관한 한 이성복은 스승이었다. 나는 지나치게 그를 읽었다. 이성복은 내 시선 끝에서 낡아갔다. 문득 이제 그를 졸업해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이성복의 새로운 시를 읽게 된다.
새벽에 잠이 깨어 담배 한 대 피워물고 부엌 환풍구 창을 열면 아주 작은 바퀴 밀리는 소리 들린다 동그랗고 까끌까끌한 소리 무엇엔가 저촉되면서도 기분이 좋은 소 리 유리창은 지금까지 그 바퀴 때문에 무리없이 열릴 수 있었던 거다 낮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 아주 조그맣고 동 글동글하고 칭얼거리는 소리 -「소리」
거의 울음에 가까웠던 이성복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져 있었다. 그는 이 시에서 세상에 바짝 귀를 대고 미세한 세상의 음향과 느낌을 잡아내고 있었다. 그 느낌과 음향은 80년대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무엇엔가 저촉되면서 기분이 좋'을 수 있는 세상, 그 금기와 매혹의 땅은 어디였을까. 내 나이가 그것을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