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 예문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규칙적인 수영과 조깅으로 복부와 종아리에 여전히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40대 중반, 그것이 하루끼의 이미지다. 그의 모든 소설의 장정은 조깅복 상의를 입은 그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가 즐겨 신는다는 운동화와 조깅복은 하루끼의 단순한 기호물에서 그치질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정장은 그에게 불편하다. 그것은 무겁고, 무거운 만큼 보행을 늦춘다. 달리고 싶은 자에겐 조깅복과 운동화면 그만이다. 워크맨의 경쾌한 음악이 그로 하여금 구름의 보행을 닮게 할 것이다.

재즈에서 얼터너티브, 윌리엄 와일러에서 스필버그까지 아메리칸 문화의 뒷골목까지 하루끼는 빠삭하다. 그는 대단한 문화적 식욕을 가졌고 그런 문화적 식욕을 오늘날의 젊은 문인(문인뿐이겠는가. 오늘날의 재즈붐과 문화적 담론의 팽창을 보라. 개나 소나 재즈고 영화다.)
들은 열심히 쫓아가고 있는 눈치다. 마치 그런 문화적 식욕의 부진이 문화적 후진이라도 되는 양. 거리의 장식장과 그 안에 디스플레이가 그렇듯 가볍고 경쾌하고 산뜻한 하루끼의 보행. 하루가 멀다하고 버전업되는 자본주의적 속도에 전혀 주눅들지 않은 하루끼. 그는 그 자본주의적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매일 조깅을 하는 것일까.

하루끼와는 많이 다른 곳에 마루야마 겐지가 있다. 그는 좀 삐딱하다. 다소 거칠고 야생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소설 <달에 울다> 장정에 있는 그의 사진은 어떠한가. 검은 선글라스. 팔없는 검은 나시 티셔츠와 검은 바지와 검은 구두와 검은 양말. 의도적으로 근육을 강화시
키기 위해, 조깅이나 수영으로 만든 육체가 아니라 선천적인 꼬장꼬장함으로 인해서 만들어졌을 법한 다소 신경질적인 육체, 그것이 마루야마의 몸이다. 수틀리면 한방 내지를 기세의 육체. 이런 사내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점잖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점잖음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물의 가족>으로 나의 입을 반쯤 벌어지게 했던, 마루야마의 문장은 독보적이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뒤척이지도 않는다. 이불에 누운 채, 달빛에 의지해서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낡은 병풍의 묵화를 바라보고 있다. 벌써 오랫동안 그러고 있지만, 몸은 따뜻해지지 않는다. 특히 발가락이 시리다." 이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달에 울다>는 무엇보다 '괜광씬?문체'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내용이고 세계관이고 간에 소설은 무엇보다 문체가 아닐까'하는 비약을 자연스럽게 한다. 간결한 문장,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는 칼로 자른 듯하다. 극도로 투명하다. 그의 문장은 요란하지 않지만 그 맛이 오래 간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하루끼보다 훨씬 더 기교적인지 모른다. 밖으로 드러내는 기교가 아닌 감추는 기교. 에이, 난 그런 거 몰러, 하는 식의 능청스런 기교.

<달에 울다>의 첫 페이지의 문장들을 보자. "식수림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을은, 다시 한번 바닥없는 정적에 푹 잠기고, 여기저기에서 실개울 소리가 되살아나고 있다.안개처럼 조용하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것은 몇만이라는 누에가 뽕잎을 부지런히 뜯어먹는 소리이다. p.11" 실개울이 불어나는 소리를 듣는 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는 귀, 이것이 겐지의 귀다. 하루끼의 귀가 비틀스에게 열려 있다면 겐지의 귀는 실개울과 뽕잎에 열려 있다. 그의 귀는 불가능한 것을 듣는다. "법사는 여울을 건너는 발소리를 알아차린다.p.14" 들리지도 않는 것을 들린다고 하는 것이 선사들의 어법이다. 겨자씨 안에도 수미산이 있다고 그들은 곧잘 말한다. 그러나 선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고분고분하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어법도 그런 것이리라. (귀란 모름지기 들리는 것만을 들어야 한다는 규칙이 뭐 헌법에라도 있단 말인가? )

귀신의 귀를 빌렸는지 그의 귀는 때론 불가능 너머의 것까지를 듣는다. "" 강물 소리, 세 가지 종류의 개구리의 합창, 아버지의 짐승 같은 심음 소리. 예전에 누에방으로 사용하던 아랫층 마룻방은, 지금은 텅 비고, 고요하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 집에서 태어나고 죽은 사람들의,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기척이 넘실거리고 있다.p41" 그는 고백한다. "내 청력은 나이와 더불어 예리해 가고 있다. 예컨대, 사과나무가 땅 속의 물을 빨아먹는 소리까지도 들린다." 이런 과장된 청력은 어쩌면 겐지의 능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겐지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픽션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겐지의 매력은 투명한 노골성에도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그런 천진성(겐지를 너무 과찬하고 있는 건가? 하긴 계집이 이쁘면 방귀냄새까지 향기롭다지 않은가)이 겐지에겐 있다. "야에코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끄르고 씩웃더니 활짝 가슴게를 열어 보였다. 모양새 좋은, 소독액보다 더 하얀 유방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는다.p.40", "야에코의 모습은 전라나 같다. 사타구니 부분, 그 훨씬 안쪽까지도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몹시 혼란스럽다.p.46"

많은 사람들이 하루끼는 흉내내도 겐지는 흉내내지 않는다. 난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곳에 인파가 드글거릴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아주 적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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