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사회학 - 음주 공동체의 일상 문화
박재환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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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꽃나모 가지 꺾어 수(數) 놓고 마시고 북두성 기울여 창해수를 부어내어 도도한 취흥에 티끌 세상을 잊고 백구야 훨훨 날지 말아라 내가 너의 벗인 줄 어찌 알겠는가, 나와 너의 경계를 잊는 물심일여의 흥타령을 불렀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술의 강도도 높아진다. 쌓이는 만큼 풀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요구가 술에 반영된다고 할까. 단조로운 일상은 탈일상의 욕망을 자극하는 법. 카피라이터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이용한다. 퇴근 후의 한잔, 그 속에 피어나는 여유와 웃음꽃, 이라는 컨셉트로 잔뜩 피곤한 근로자들을 유혹한다.

음주산업은 산업화의 정도가 심화될수록 그리고 산업화가 자본주의로 발현되면 될수록 눈에 띄게 성장한다는 통계가 있다.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1865년과 1885년 사이에 음주산업의 자본화가 거의 10배나 늘어났고 기업의 수는 4배, 그 종업원 수는 3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술의 사회학』, 한울아카데미, 25P 재인용)

넥타이를 풀고 기름때를 씻고 무슨 세례의식이라도 치르듯 마시라는 거다. 그리고 불쾌했던 기억, 씻으라는 거다. 당신이 실수했으면 내가 봐줄 테니, 내 실수도 좀 너그럽게 눈감아 달라는 거다.

김과장, 그 작자는 안돼. 밴댕이 콧구녕 같은 자식. 좁쌀할아범 뺨칠 녀석. 무수한 상사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 이렇게 해서 상사에 대한 예우라는 의무조항이 깨진다. 욕망은 제 분수를 모르고 금기의 벽을 슬금슬금 넘기 시작한다. 서글픈 카니발이랄 수밖에. 객기가 술자리에 끼어 들고, 호기가 능청스럽게 술 한 잔을 건네 받는다. 이렇게 되면 논리는 물 건너 간다. 바람직한 토론문화를 이런 자리에서 기대해 본다는 것 자체가 애시당초 무리이다. 횡설이 수설이 되고 수설은 엇박자로 스텝이 꼬인다. 가볍게 한 잔 더하자는 2차는 어느덧 3차의 육향(肉香)을 찾아 하이에나의 길을 간다. 금기는 허물어지고 함께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을 은밀한 기쁨으로 둔갑시켜 나누어 갖는다. 이렇게 해서 공유된 죄의식은 우정이란 이름으로 탈바꿈되고 추억이란 이름으로 갈무리된다. 죄를 묻는 것은 풍류남아로서 할 짓이 못되고 한 번의 실수쯤은 눈을 감아줘야 두주불사, 무골호인의대범한 사내가 된다. 속이 쓰려도 대범한 사내가 되기 위해 마신다. 골이 패도 쪼잔한 사내가 되지 않기 위해 마신다. 제 자신을 영웅으로 착각하는 가련하고 불쌍한 사내들.

그러나 아침이면 막강한 두통과 함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햇살만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죄의식도 돌아온다. 뭔가가 께름직하다. 에라, 내가 뭐 사람이라도 죽였냐,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자신을 용서해 보지만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축제로부터 일상으로의 복귀를 서두르자니 죽을 맛이다. 갖가지 해법이 동원되지만 혈관의 알콜 농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불안이 슬글슬금 숙취의 오전을 갉아대기 시작한다. 우우우우!

대체 이런 건 아닌데, 이런 식이어선 곤란한데, 뭔가가 잔뜩 꼬이기 시작한다.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나를 벗어버리고 훌훌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을 때, 그러나 늘 제 자리일 때, 마신다. 마셔서 나를 옷 벗어 버리듯 벗어버리는 거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더 많은 나를 잔뜩 껴입을 뿐, 나는 나로부터 한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다. 술은 잠시 나를 잊게 하였지만 술의 후유증은 엄청나게 나의 의식을 나에게집중시킨다. 고통은 육체를 자각하게 한다. 술로 해서 내 몸의 곳곳이 보인다. 나를 잊자고 마신 술이 오히려 나를 분명하게 일깨우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랴.

약(drug)이나 술 속에서 어떤 초월적 존재, 영성적 존재와 만났던 때도 있었나 보다. 세계의 문지방을 넘어가 우주의 숨소리를 들었던 때도 있었나 보다. 정말 그러긴 했었나 보다. 술 속에서 말이다. 그 속에서 하나가 되고, 그 속에서 흑암으로부터 일어서는 권능과 천상의 쾌락을 얻었던 적도 있었나 보다. 그러나 생맥주집에서, 나이트클럽에서,스텐드바에서 우리가 그것을 구할 꿈이라도 꾸어볼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의 술은 우리가 지극히 지상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두통과 함께 깨닫게 한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엎어놓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이곳이 결국 지상임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래, 술이 지상과 천상, 속계(俗界)와 성계"(聖界)를 이어주던 때가 있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술이 이어주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선배와 후배, 사용자와 근로자, 세일즈맨과 거래처, 평론가와 작가, 장인과 사위, 교사와 학부모. 술은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술은 금기를 깨니 서로에게 다리가 생긴다. 후배가 선배에게 한 마디 대든다. 형, 썅 그게 아니잖아.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뇌까린다. 사장님, 대체 우리들을 뭘로 보는 겁니까. 술은 이렇게 일상의 위계를 전복시킨다. 윗분들께서는 그럴 때 자신의 관용성을 과시할 수 있으니 술자리가 그만이다. 아랫사람들도 나에게 윗사람에게 대들 수 있는 이 정도의 호기가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도 아니다. 업자와 거래처와의 술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과장님 제가 끝내주는 여자 있는데로 안내할 테니 과장님은 잠자코 있으세요>라고 하는 한 마디에서 공적인 관

계에 배제된 사적인 욕망이 어떻게 공적인 관계와 야합을 하며 나름대로의 영업을 개시했는지를 엿보게 된다. 공식적이고 일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목적성을 벗어버린 인간관계를 지향하고자 술을 대동시켜 본다. 그러나 쉽게 벗어버릴 일상이 아니다. 벗겨질 일상이 아니다. 이런 일상이 없다면 자본주의의 기둥이 뽑히고 서까래가 주저앉을 판이니 모든 과음은 자본주의의 적이 아니겠는가. 지나친 음주자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公敵)인 만큼 특별관리 대상이 된다. 그들은 라스베가스를 떠나야 마땅하다.

'피같은 술'을 마시니 나의 피와 너의 피가 같아진다. 음주는 문화적으로 '동일한 혈액형'(P.51)을 가진 배타적인 집단을 키운다. 그들은 끼리끼리 논다. 끼리끼리 놀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담화>를 만들어 낸다.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는 이렇게 해서 <공주>를 살해할 적개심을 키우게 된다. 초대받지 못한 슬픔과 초대받고 싶다는 욕망이 뒤범벅인 채 마녀들의 가슴에는 살해의 욕망, 전복의 욕망이 싹튼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키운 것은 살해의 욕망이 아니었다. 그들의 식탁에서 같이 마시고 떠들고 싶다는 욕망, 바로 나눔의 욕망이었다. 같이 마시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같이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모든 회식의 자리에도 배타의 원리가 작동한다. 아무나 끼일 수가 없는 법
이다. 축제의 자리가 모든 이를 위한 자리였다면 회식의 자리는 어떤 이들을 위한 잔치일 뿐이다.

<술의 공동체는 근대의 합리적 정신이 추구하는 정신 바짝 차린 목적의식적이고 도구적인 관계들과는 차별성을 가지며 오히려 제 정신을 잃는 그 순간, 소위 전형적인 원시의 합일과 공감을 통해 반드시 공동체의 양상을 띤다. P.78> 그랬던 적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오늘날의 술자리는 여전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여전히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인사기록 카드에 무엇이 적히더라도 나는 상관할 바 없어, 라고 한다면 당신은 분명 자유로운 사람이다. 백에 아흔 아홉은 여전히 감시의 눈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이 빠듯한 체계, 이 옥죄는 듯한 현실로부터 어떻게 판타지의 세계, 몽환의 세계, 어떤 논리로도 닿을 수 없는 피안의 감성으로 어찌하면 닿을 수 있을까. 가련하게 그는 술이라고 답한다.

입사식이다. 신고식이다. 환영식이다. 후배들은 선배의 술을 받아 마셔라. 신참은 고참들의 술을 마셔라. 남김없이 마셔라. 이제 너희들은 새로운 세계의 일원이다. 더 이상 구태의연한 과거의 세계 속에 있지 않다. 마셔라. 너는 이 술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 술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우리들은 강하며 어떤 위험도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술의 권능이 우리와 늘 함께 할 것이다. 부수어라. 일탈하라.춤추어라, 소모하라, 탕진하라, 꿈꾸어라. 창조하라. 그러나, 술에서 솟는 것은 창조가 아니다. 마이클 피기스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극도의 피로이다. 광기도 없다. 패기도 없다. 그저 흐느적거린다. 피로할 뿐이다. 그저 잠들고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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