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이야기
장일순 지음 / 다산글방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다이어트와 함께 해준 책


몇 번이나 달리기를 시도하다 그만 두기를 서너 차례. 대개 운동이란 하루라도 거르면 그 효과가 반감되는 법, 몸이 파김치가 되더라도 일단 달리고 보겠다는 기염에 찬 초발심이 아니라면 운동에의 각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용두사미 격으로 제 무기력한 속내를 드러내고야 만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이 이름하여 요요현상, 애초에 그렸던 이상적 육체는 꿈이고, 불어난 뱃살이 현실이 되고 만다.


대체 무엇 때문에 다이어트인가, 라고 물으면 대개는 건강 때문에, 라고 대답하지만 스포츠 센터를 기웃거려 보면 멀쩡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물론 관절에 무리를 줄 수 있는 '과체중'들도 적지 않지만 대개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연세대 1학년 여대생 10명중 4명이 자신의 체격을 비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자 신입생 절반 이상이 운동으로 살을 빼고 있다고 한다. 이 학교 1학년 여학생 1천132명을 상대로 조사하여 발표한 '신입생의 건강에 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자 대학생들의 35.5%인 402명이 자신의 체격을 '비만'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대체 대한민국의 여대생으로 하여금 자신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정체는 무엇일까. 혹자는 그 혐의를 상업자본에 두고 있다. 패션산업, 광고산업, 언론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성이 없는 허구의 여성상이 이상적인 육체로 둔갑하면서 정상체중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너도 나도 깡마른 모델을 따라가기에 바쁜 것이 오늘날의 다이어트 열풍이라는 논리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혹자는 오늘날의 다이어트 열풍이 여성이 살아가는 데 가장 효용 이 있는 무기가 몸과 외모인 우리사회의 문제를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역시 일리 있는 통찰이다. 캐나다의 토론토에서는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지 않고, 성별을 기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야말로 바다 건너 먼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게 중에는 근사한 로맨스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룩한 아랫배와 로맨스는 어째 격이 맞지 않으니까. 잘 조율된 육체와 로맨스를 결합하는 것이 우리 대중문화의 어법이 아니던가.


그 동기야 어쨌든 도처에 달리기 열풍, 다이어트 열풍이다. 다이어트 시장이 이미 1조원을 넘어섰다고 하니 열풍이란 말이 전혀 과장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 나는 감량에 성공했다.(아, 성공이란 말의 조악함이여) 일미터 칠십도 되지 않는 단구에 74킬로그램의 몸무게는 누가 봐도 아니올시다였다. 무릎 관절의 입장에서도 결코 기분 좋지 않는 무게였다. 그러나 정작 혐오스러운 것은 내 아랫배가 아니었다. 꾸역꾸역 먹어대는 내 식욕이 문제였다 뭘 걱정해, 맘 편히 먹어,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야, 먹는 거 참는 거 보기 안 좋아, 먹고 싶으면 먹고, 졸리면 자고, 그래도 건강할 사람은 건강하다구. 다이어트, 그런 게 다 자연을 거스르는 거라구, 뭔가를 의도적으로 해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다 부질없는 인간의 작태야, 라고 말하는 ' 사이비 노장주의자 '의 견해에 열심히 동조해가면서 나는 꾸역꾸역 위장을 채웠다.

그러나 대체 자연 속의 어떤 동물이 있어 콜라와 이온음료를 마시고, 피자와 켄터키 치킨과 햄버거와 튀긴 감자를 먹는다는 말인가. 게다가 아이스크림과 폭탄주임에랴. 인위를 배격하고 자연을 끌어안는 삶이 의식의 간섭을 받지 않고 꾸역꾸역 먹어대는 삶은 아니었다. 뽕잎만 먹는 누에, 풀만을 뜯는 염소, 물과 공기와 햇빛이면 만사 오케인 식물들, 자연은 지극히 단순한 식욕을 가진 피조물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오직 인간의 식욕만이 이 피조물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인간은 배를 채우기보다는 마음을 채우려고 안달이다. 진수성찬은 말 그대로 배를 채우기보다 마음을 채우기 위해 차려진다. 과시적 식욕을 위해 고급 레스토랑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책장을 보면 울긋불긋 갖은 장르의 책들이 다 모여 있었다. 책장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장대한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책장에 꽂힌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야말로 내 욕망의 울긋불긋함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방하착(放下着), 마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기증이라는 명목으로 책장의 일정 부분을 비워낸 후(아직도 붙들고 있는 마음이 많다는 증거다.) 시작한 것이 달리기. 책들과 함께 내 욕망의 결과물인 살[肉]들도 함께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려 놓는다고 해서 털푸덕 바닥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마음. 마음은 '좋은 설득'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야 했다. '성공 다이어트'가 '좋은 설득'을 내게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채근담의 이런 구절이 내게 좋은 설득을 해주었다. 농비신감 비진미(膿肥辛甘 非眞味), 진미 지시담(眞味 只是淡)- 진한 술, 기름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요, 참맛은 오직 담백하다, 라는 홍자성의 채근담 구절이 내 식욕을 제지했다. '꽃은 반만 핀 것을 보고 술은 조금 취하도록 마시면 이 가운데 무한한 가취(佳趣)가 있다.'라는 구절도 왕성한 식욕을 제지했다.'차를 아주 좋은 것으로만 구하지 않으면 차 주전자가 항상 마르지 않을 것이요, 술도 훌륭 한 것만 찾지 않는다면 술독이 비지 않으리라.'라는 구절도 한몫을 했다.


스무살 무렵에 그 글을 읽었으면 어떠했을까. 어떤 글이 읽혀지기 위해선 우선 그 글을 읽을 마음이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대체 내 안에 들어와 그 글을 읽게 했던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글은 그 마음의 정체를 정치하게 분석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어쨌거나 무위당 장일순의 『
노자 이야기』를 읽었던 것도 이때, 틱낫한이란 베트남 승려의 이름을 알기 시작한 것도 이때, 이현주 목사의 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도 이때.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의 전우익 선생의 글이 심상찮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때,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사람이 뭔데』라는 글에도 이것 봐라, 시선이 머물기 시작했다. 윤오영의『방망이 깍던 노인』과 같이 담백한 글이나 이태준의 『무서록』과 같은 담백한 글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럴 때, 장일순 선생과 전우익, 이현주의 글들이 각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나의 삶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냉수마찰을 하고 책상 앞에 꿇어앉아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묵상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삶을 닮아갈 수는 없었다. 다석 유영모처럼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친근하게 여기는 내 마음이 탐식을 기꺼워 할 수는 없었다. 소박함에 대한 어떤 갈증.


다행히 식욕이 그런 요청에 응답해주었다. 내 혀도 담백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아주 서서히 체중이 내려갔다. 조금씩 달렸다. 힘들면 걷고, 걷는 게 힘들면 쉬었다. 기록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부실한 무릎이 그 욕심을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조금 속도를 내어 뛰거나 걸었다. 나는 그 속도 위에서 노자와 장자, 홍자성, 유영모, 장일순, 이현주, 전우익 그런 이름들을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개구착(開口錯)이라던가, 그런 이름들 앞에서 나는 지금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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