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홍상희.박혜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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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연 노년은 지혜와 평정의 땅인가?


 인의 것이든 젊은이의 것이든 모든 육체를 하나의 그릇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육체라는 그릇은 욕망으로 하여 덜그덕거린다. 급기야는 뚜껑이 열리기까지 한다. ‘열 받기’ 쉬운 청춘의 육체는 해방과 분출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며 격렬하게 덜그덕거린다. 모든 욕망은 보상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욕망이 쉬 달성될 수 있을까. 현실의 금기 앞에서 청춘의 육체는 아프게 뇌까린다. 이런 덜거덕거림은 참을 수 없어. 차라리 식어버린 육체이었으면 좋겠어. 불꺼진 성기의 평화로움이면 좋겠어. “내게 황새기젓 같은 꽃을 다오/ 곤쟁이젓 같은, 꼴뚜기젓 같은/ 사랑을 다오/ 젊음은 필요 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 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윤후명의 시,「희망」)”라는 엘레지는 청춘의 도저한 에로스의 에너지가 출구를 찾지 못해 결국 죽음으로 물꼬를 트는 비극적 추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너’의 끝에 닿고자 하는 에로스의 욕망이란 이렇게 자학과 파괴의 비극적 플롯과 조우하기 십상이다.

노년 노년은 불꺼진 땅, 에로스의 열기가 식어버린, 지혜와 평정의 땅이라고 젊음은 지레 판단해버린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에서 이 점을 잘 간파하고 있다.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른 체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소비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팽팽한 육체와 젊음의 약동이다. 24시간 편의점, 대형할인매장 어디에도 늙음은 없다. 번쩍거리는 도시, 쿵쾅거리는 도시, 어디에도 노인들의 자리는 없다.

 
화 <죽어도 좋아>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보자. 담배판매대 앞에 노인이 앉아 있다. 수납구 밖으로 비죽이 나온 노인의 투박한 손. 거리엔 눈발이 흩날리고, 노인의 등 뒤에선 주전자의 물이 끓는다. 주전자는 조용히 더운 김을 내뿜는다. 늙은 육체 안에도 더운 열기가 남아 있음을 시위라도 하듯. 그렇다. 늙은 육체도 열을 받는다. 거친 호흡, 탄력을 잃은 육체의 삐걱거림, <죽어도 좋아>는 놀랍게도 늙음의 땅이 평정의 땅이 아님을 웅변한다. 다시 한번 보부아르에게 돌아가 보자.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계급으로 취급한다” 로마시대의 귀족들은 노예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성행위를 했다던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귀족의 욕망이었을 뿐, 노예들의 욕망이 아니었다. 보부아르가 『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노인들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자기중심적 시선이 아니었을까. 그 오만한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노인네들은 시종일관 부채질이다. 그것도 모자라 선풍기까지 동원한다. 주름진 육체에도 식지 않은 열기가 남아있음을 노인들의 부채질은 웅변한다. 깊은 육체의 고랑으로 땀이 흐른다. 땀, 살아서 열 받고 있음을 증거하는 액체.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죽어도 좋아>는 시끄러운 영화다. 거리엔 오토바이가 질주하고 시장은 인파로 북적댄다. 할아버지의 육체는 삐걱거리고, 할머니의 호흡은 가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툭하면 장고를 쳐대시며 걸쭉한 한 자락을 뽐내신다.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인생이 늙기는 바람결 같구나. 천금을 주어도 세월은 못 사네 못 사는 세월을 허송을 말아라” 둥기둥 얼쑤,소음(?)을 생산하는 것도 모자라 이번엔 말다툼이시다. 애들립이 가세했음이 분명한 이 부부싸움 장면은 가히 소음의 난장판이다. 이런 세상의 소음[世音]을 다 듣기 위해선 관세음(觀世音)보살의 큰 귀가 필요하겠다. 어쨌든 노년이건 청춘이건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해낸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늙음의 문화에서 욕망보다는 이성을, 소음보다는 평정을, 삐걱거림보다는 적멸을 필요 이상으로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박치규, 이순예, 이 두 노인들을 그런 기대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죽어도 좋아>는 마땅치 않은 영화다. 그러나 보부아르의 도움을 얻어 다시 말하자. 노년의 땅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만만한 평정과 적멸의 땅이 아니다. 노인들에게 평정의 땅에 있으라는 주문은 결국 욕망의 왕국은 이제는 우리 차지라는, 그러니 당신들은 이제 좀 빠져 달라는 무의식적 선포는 아닐까. 노래라는 것도 모르며 노래하는 새처럼 박치규, 이순예, 이 두 노인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의식도 없이 이 선포에 반기를 든다. 이 두 노인의 반기에 60살의 보부아르가 지원 사격을 한다. 가령 이런 식.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은 노인들을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결정할 때 보면, 사람들은 노인들을 이질적인 종류에 속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 안 되는 보잘것없는 적선을 하고는 스스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편리한 환상이다.”

 
상을 깨는 길은 한 가지. 몸을 가진 중생들이라면 박치규 할아버지나 당신이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 남녀노소 평등하게 고루고루 관세음보살의 긍휼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 평정을 얻어야 한다면 그것이 왜 늙은이뿐이겠는가. -조이씨네 www.joycin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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