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보스는 나랑 정치며 시사 얘기 하기를 즐긴다. 뭐 대화라기보다는, 보스가 일방적으로 떠들고 내가 맞장구치는 형식이지만, 어쨌든, 시시때때로 넌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말을 걸어 온다. 회사 일은 대개 널널하므로 보스 얘기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1시간은 금방이니까. 다만 가끔 바쁠 때나, 요즘처럼 내가 뉴스 보기를 싫어할 때는 좀 성가시다. 그렇지만 어쩌랴, 내가 시작한 일인 것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되기 전이었나 보다. 요즘 동아일보 좀 너무하는 것 같아. 라는 보스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렇죠? 것도 신문인가요. 요즘 경향신문 괜찮은데? 인터넷 신문은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댔더랬다. 십 수 년 째 오로지 동아일보만 구독하던 울 보스, 그 때부터 인터넷으로 경향,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등을 보기 시작했다. 후에도 나는 심심할 때마다, 생각날 때마다, 아직도 신문 안 바꾸셨어요? 라든가, 웬만하면 바꾸시죠? 따위의 버르장머리 없는 멘트를 날려보냈고, 드디어 보스 입에서 동아일보 끊고 경향신문 신청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ㅋㅋ 이렇게 동아일보 구독자 하나 줄이는구만, 하면서 혼자 웃었다.

 

울 보스, 공무원 아버지를 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대학 다닐 때 그 흔한 데모 한 번 안 해본 사람이다. 좋은 대학 나왔고, 직장에서 인정 받으며 착실히 승진했고, 지금은 일산에 사는, 40대 후반의 평범한 중산층 정도 되나 보다. 확실치는 않지만 선거 때마다 여당에 표를 던졌던 것 같고,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고 했다. 스스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중도 보수, 라고 말했다.

 

그러던 사람이, 여러 신문을 보면서 조금씩 말하는 내용이 틀려지기 시작했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될 때 누가 될 것 같냐고 묻길래, 노무현이요. 대답했더니, 그건 니 바람이겠지. 그리고 노무현이 대통령감이냐. 했는데, 막상 경선이 끝나갈 무렵에는 노무현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노무현 개인에 대한 지지자라기 보다, 이제는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횡포에 누구보다 분개하면서 개혁을 주장했다.

 

하여간, 그렇게 시작된 보스와 나의 대화는 대선 기간을 거치면서, 탄핵 정국을 맞으면서 한껏 무르익었고, 덕분에 다른 직원들은 우리가 얘기를 시작하면 다들 입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울 보스 상당한 달변에 열변이거든. 그나마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괜찮았지만, 한나라당 지지자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보스의 주장에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웠으니까.

 

울 보스, 지금도 보수적이긴 마찬가지다. 얘기하다 보면 나랑 차이점이 엄청 많고, 그 간극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제는 민주노동당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호주제나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고, 언론 개혁과 사회 개혁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 정도가 중도 보수, 라고 생각한다. 그런 보스가, 비슷한 연배의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 빨갱이 내지는 노빠 라는 소리를 듣는단다. 겨우 40대 후반의 사람들 인식이 그런 수준이다. 

 

보스를 보면서, 역시 언론이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보스가 계속 동아일보만 보고 있었다면, 아마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의견을 냈을 거다. 그랬다면 나는 직장에서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겠지. 이러니, 이제 와서, 보스랑 얘기하는 거 귀찮아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여전히 보스는 넌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냐? 라고 묻는다. 뉴스 안 봤는데요. 친절히 어느 신문 어느 기사를 보라고 알려주는 보스. -_-; 조용히 읽는 나. 정신이 있는 놈들이냐? 그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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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8-1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아무리 현실을 알려줘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매일 신문을 철하면서 신문 1면을 보고 있노라면...착잡하기까지 하다니까요. 항상 일착으로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앉는 곳은 조,중,동 세곳 중 하나...

urblue 2004-08-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렇죠.
예전에 들은 얘긴데, 코카콜라가 그렇게 광고를 해대는 이유가, 광고를 중단하면 바로 매출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군요. 모두들 콜라를 마신다, 라고 끊임없이 알려줘야 한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조중동은, 콜라를 팔아야 하니까 광고를 하는거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역시 다들 그런거야, 하고 위안 받는다는. 다른 생각하는 거 귀찮잖아요.
하여간, 전 또 한 명 중앙일보 끊게 하는데 성공했답니다. ^^V

로드무비 2004-08-1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장하십니다!
저도 님처럼(?) 노회한 부분이 있다죠?
누가 조중동 얘기 하면 "아아, 거기 기자들 불쌍하다!
그딴 곳에서 충성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니! 쯧쯧" 이런 식으로...
우린 통하는 게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협박)

하얀마녀 2004-08-1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지십니다. 고향집도 동아일보좀 끊었으면 좋겠구만. ㅠㅠ

urblue 2004-08-19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그럼요.. 우린 통해요, 통하는 거 맞아요.
마녀님, 저도 집에서는 실패했다는..ㅠ.ㅠ

어디에도 2004-08-19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갱이' 맞네요.ㅋㅋ. 그러한 대다수 40대 후반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님과 대화도 나누고 수렴하시는 님의 보스는, 조금은 열려있는 분인가봐요.
저는 저랑 동갑내기 한테서도 그런 소리 들어봤어요. 너 '빨갱이'냐.;;

2004-08-19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4-08-1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든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저 역시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얘기할 때 느끼는 갑갑함이 더 크기는 합니다.
그런데, 님 오늘 일찍 오셨네요?

mira95 2004-08-19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2,30대가 더 보수적인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세상엔 여러 생각들이 있고 그 생각들이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제각가 몫을 차지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언론에서 조중동은 쓸데없는 몫을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조선일보는 싫다구요~~

urblue 2004-08-19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라님, 지금 님 서재 다녀오는 길인데.. ^^

미완성 2004-08-1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들과는 아예 이야기 자체가 먹히질 않아요.
'됐어, 관심없어'
로 말문이 막히고, 그리곤 새롭게 등장한 꽃미남 K, 10년째 꽃미남계의 선두주자를 지키고 있는 J, 키가 작아 불만인 L, 이야기로 넘어가버리지요.
그럴 땐 커피잔이 얹어진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요.

정말 유아블루님과 보스되시는 분은 멋지군요.

urblue 2004-08-19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만나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곁에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저랑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에 대화는 쉽죠. 다른 의견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게 또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런데 님도 한 과격 하시는 듯.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다니...^^; 님 앞에서 조심해야 겠어요. ㅎㅎ

가을산 2004-08-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친정과 시댁은 '조손일보'에요 ㅡ,ㅡ;;
'경향'은 말도 못꺼내고 ...... '저,,, 중앙일보라도 보심 안될까요?' 하는게 고작입니다.

조중동이 그래도 '탄핵'을 이끌어낸 공은 있어요. 한나라와 민주당은 조중동만 보고 탄핵을 하면 탄핵이 될 줄 알았으니까요.

서울 가면 늘 '노무현 찍은 것 후회 안해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선택은 늘 상대적인 거지요.'라고 얌전히 대답합니다.
정말 시댁에서의 저의 가면은 참 두껍기도 하지....

urblue 2004-08-2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바뀌긴 했어요. 옛날 같았으면 아마도 탄핵이 성공했을지도 모르죠.
하여간,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악랄하게, 이 넘들을 못살게 굴고 쫓아내야 한다니까요.
 

참가만 했다.

한 문제도 못 맞혔다. ㅠ.ㅠ

아는 게 많지 않으면 손이라도 빨라야 할 것을...흑...

저녁에는 구경만 해야겠다, 참가는 말고.

아침에 이어 소굼님 또 한 문제 맞히신 것 같은데 축하드려요. (에구, 배아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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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8-19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 저랑 같이 썰렁리플 달기 해요, 저녁때두요...

어디에도 2004-08-19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봤어요. 님이 한 문제도 못 맞춘 것! ^^
(저는 참여도 못했는걸요, 뭘. 뭐 아는게 있어야 말이죠;)

mira95 2004-08-1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포기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너무 빠르신것 같아요 ㅜ.ㅜ 저의 무능력을 한탄하면서 포기합니다. urblue님이라도 힘내세요.. 화이팅!!

▶◀소굼 2004-08-19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urblue님 한문제 아깝게 된 것 있었던 것 같은데....10시에 다시 해보셔요! 화이팅!

urblue 2004-08-19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맞아요. 저도 썰렁 리플 달기, 이런거 하고 놀래요. 저녁 때 뵈어요. ^^
어디에도님, 창피하게... 그런 버벅대는 모습 보면서 우스워라, 하신 건, 설마, 맞나... (지금 충격으로 제정신 아님다.)
미라님, 응원 고마운데, 저도 포기할래요. 어엉...
소굼님, 네, 연도 계산하는 문제, 다 알고 있었는데, 게다가 답은 1등으로 달았는데, 보니 계산이 틀렸지 뭐에요. 저 바보에요. ㅠ.ㅠ

2004-08-19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8-19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굼 2004-08-19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 답이 맞는 줄 알았어요;;

urblue 2004-08-1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소굼님, 뭔가 착각을 하셨던 모양... ^^;

로드무비 2004-08-19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퀴즈 올림픽이 뭐예요?
저도 참가하게 빨랑 가르쳐주세요.

urblue 2004-08-19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 이따가 9시 넘으면 서재 달력 밑에 퀴즈 올림픽 이라고 뜰거에요. 거기 가서 코멘트로 답 쓰면 된답니다. 그런데 한 명만 정답이니까, 힘들어요. ㅠ.ㅠ
 

 

서재에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남의 서재에서 코멘트만 달고 있으면 저절로 익스플로러가 닫힌다.

아, 입닥치고 조용히 살라는 오묘한 뜻인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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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8-1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이군요. 이래가지고선 urblue님 올림픽도 참가 못하시잖아요;

서재지기 2004-08-1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 큰일이로군요.
그런데.. 알라딘 서재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pc와 코멘트 달기가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은데요.. 일단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보세요. 그래도 안되면.. 안되면.. ㅠ.ㅠ

urblue 2004-08-19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기님, 직접 방문하실 줄은 몰랐네요. 그럴 줄 알았으면 말 좀 곱게 쓸 것을... ^^; 컴터 재부팅 했더니, 안 닫히네요. 고맙습니다. (__)
sa1t님 서재에 금방 연습하고 왔습니다. 소굼님도 감사 (__)

▶◀소굼 2004-08-1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행다행~

어디에도 2004-08-19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부팅하고 잘 된다믄서 제 질문에는 왜 답변 안해주세요?
ㅠ.ㅠ (살펴보니 올림픽에 참가중이시군요. 화이팅!)

hanicare 2004-08-20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님의 컴퓨터는 너무나 깊고 오묘하십니다.가끔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저에게는...

urblue 2004-08-2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역시 저에게 조용히 살라 하는 걸까요?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깊이는 나락과도 같다. 우리는 행복도 모르고, 고향도 잃은, 이별마저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청춘은 젊지 않다. 우리에게는 국경이 없고, 아무런 한계도, 어떠한 보호도 없다 ─ 어린이 놀이터에서 이쪽으로 쫓겨난 탓인지, 이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건네 주고 있다.

그들은 그러나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진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의지할 수 있는 신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우리는 신이 없는 세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감사할 아무런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진 바람은 우리의 발, 우리의 가슴을 따가운 길거리, 그리고 한 길이 넘게 눈이 쌓인 길거리에서 헤매게 하였으며, 우리로 하여금 이별을 모르는 세대가 되도록 하였다.

우리는 이별이 없는 세대다. 우리는 이별을 체험할 수도 없고, 또 체험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자칫 발길을 잘못 두면 거리를 헤매는 우리의 가슴에는 영원한 이별이 못박아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아침에 이별을 보게 될 하룻밤을 위해서 우리의 가슴은 조마조마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이별을 극복할 것인가? 그대들, 우리와는 다른 그대들처럼 이별을 겪으면서, 그대들과 같은 이별을 그때마다 우리가 맛보려고 한다면, 우리의 눈물은 어떠한 둑도, 그 둑이 설령 우리 조상이 쌓은 것이라 해도 결코 막을 수 없는 홍수로 흘러 넘치게 할 것이다.

그대들 체험한 것처럼, 1킬로미터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별을 일일이 체험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의 가슴이 침묵한다고 해서 우리 가슴이 말할 소리가 없다고 하여 그대들, 말하지 말라. 그럴 것이 우리의 가슴은 서로서로의 만남, 이별과 같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가슴이 우리가 당하게 될 모든 이별에 다정하게 슬픔을 나누고 위안을 나누면서 다시 힘을 찾을 수 있다면, 그때엔 참된 이별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별은 그대들의 그것에 비해 쉴새없이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때마다 우리의 민감한 가슴에서 일어나는 외침이 크게 자라나, 그 결과 그대들은 매일 밤 그대들 침대에서 우리를 위한 신을 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별을 부인하며, 우리가 떠날 때엔 아침마다 이별을 잠들게 한다. 이별을 막고 이별을 아낀다. ─ 우리들을 위해서, 또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을 아낀다.

마치 도둑처럼 이별 앞에서 몸을 숨기며 사랑은 가진 채 이별을 남긴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우리는 무수히 만나지만, 만나도 그것은 짧고, 진정한 이별은 없다. 하늘의 별들은 서로 가까이 와서 잠시 자리를 함께 하지만, 다시 멀어진다. 흔적도 없고, 연결도 되지 않으며, 이별도 모르는 채 멀어진다.

우리는 스몰렌스크의 성당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한 쌍의 부부가 된다 ─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그로부터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노르만디에서 만난다. 부모와 자식처럼 만난다. 그리고 난 다음 그로부터 우리는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만나서 하룻밤 사랑을 속삭인다. ─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베스트팔렌에 있는 농장에서 만난다. 서로 즐기다가 애를 낳는다. ─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거리의 어느 지하실에서 만나 허기와 피로를 느낀다. 별로 하는 일 없이 편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한다. ─ 그리고 난 다음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 서로 함께 지낸다. ─ 그리고 난 다음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아무 만남도 없고, 오래 머물지도 않고, 이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별을 모르고, 제 가슴에서 나는 소리를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그 자리에서 몸을 숨기는 세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향이라고 할 만한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 줄 만한 사람이 우리에게는 없다. ─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가 되었고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가 있는 세대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생활, 별의 세계로 가는 세대일 것이다. 새로운 태양 아래에서 새로운 가스을 가지려고 하는 희망의 세대다. 아마도 우리는 새로운 사랑, 새로운 웃음, 새로운 신에 대해서 넘치는 희망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별이 없는 세대. 그러나 우리는 모든 미래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이별 없는 세대, 보르헤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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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2004-08-1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오오, 블루님.
알겠어요. 정말로 알겠어요. 이렇게 확실하게 알겠는 일은 흔치 않아요.
고맙습니다... 큰 절 넙죽.


urblue 2004-08-18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뭘 알겠다는 말씀이시온지? 혹시 그거..?

어디에도 2004-08-1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핫. 님 너무 웃겨요!
글을 읽으면서 뭔가 실은 뭔가 알겠는 느낌이 강하게 와 꽂혀서 저렇게 댓글을 쓴것인데
지금은... 제가 뭘 알겠다고 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님의 마음을 알겠다고 한 것이
아닐까요? 헤헤.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약간은 있었어요. 왜 이 글을 어디에도라는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인지, 말이여요.
근데 그거..? 가 도대체 뭡니까? 얼버무리지 말고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

urblue 2004-08-19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그거...는 저도 모르죠. 그냥 손가는 대로 쓴거니까..ㅎㅎ 님이 대뜸, 정말로 알겠어요, 하시니 제가 궁금해서.
이단, 스무 살 무렵에 이 책을 끼고 살았더랬죠. 며칠 전에 갑자기 생각나서 하나씩 다시 읽고 있어요. 그런데 문득, 님은 이걸 읽으셨을까, 해서 말이죠.
삼단, 님은 어딘가 불안정한 구석이 있는 듯 느껴져서 (아, 이건 그냥 제 느낌이니까 아님 말구요 뭐. - 막 나가는 블루 -_-; ) 보르헤르트랑 어울리지 싶다는 거죠.
더 궁금하신 거라도..? (ㅋㅋㅋ)

어디에도 2004-08-19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안정한 구석!!! 이렇게 절묘한 표현이라니! (찔린 옆구리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어디에도)
맞아요. 저 불안정해요. 어리디어린! 저도 님처럼 나이를 많이! 먹으면 좀 안정이 될랑가요.
(모르지만 일단 나이를 많이 먹이자!)
맞아요. 바로 그거였어요. 님의 서재를 처음 방문하고 이것저것 디벼볼때 느껴지던 건 바로,
그 안정감, 이었어요. (사실 당당당 자신감 넘치면서 간결한 님의 어투에 전 처음에 님이 남자인줄 알았다죠) 전 늘상 불안정하고 징징거려서 사람들이 절 귀찮아할까봐 늘상 전전긍긍하면서 살았는데... 이젠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살아요. 뭐 늙어죽을때까지 불안정하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또 어쩔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거니까요.
보르헤르트, 그 냥반이 궁금하군요. 흠흠. 님 덕분에 모르는 사람을 갑자기 많이 알게 될 듯 하네요. 게으름뱅이지만, 일단 좋아요.헤헤.
(제가 맨날 징징거리면 도망가실거죠? 흑흑)

로드무비 2004-08-19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각자 몸을 감춘다...

urblue 2004-08-1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 글쎄, 자신감이나 안정감이라기보다는, 전에 말했던, 앞뒤 안 보는 단순함이겠죠. 그리고 불안정한 구석, 이라고 표현한 거,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아시죠?
 

 

어디선가, 영화가 감독인지 시나리오 작가인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글을 읽었다. 그럴 법도 하다.

 

외삼촌과 이모 분과 고모 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이모 분과 고모 분은 미국인과 결혼을 했으니, 이민이라고 하기는 그렇다. 분의 아이들은, 혼혈이긴 하지만 완벽한 미국인이다. 커서 만난 사촌에게 나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낄 없었다. 다른 분의 자식들은 모두, 20 년을 미국에서 살았으면서도, 한국인과 결혼했다. 외삼촌네 언니의 경우에는, 혼기가 차도록 남자가 없자, 외삼촌이 신랑감 찾으러 한국에 보낸다는 말도 나왔었다. 어찌어찌 그곳에서 한국 남자를 만나는 바람에 한국에 들어올 일은 없어져버렸지만. 그런 얘기들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사촌들이 미국인과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하나같이 한국인과 결혼을 수가 있을까 궁금해 했더랬다.

 

미국으로 이민 그리스 가족. 수많은 삼촌과 고모와 이모와 삼십 명의 사촌들 속에서 자라고, 그리스 학교를 다니고,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일가 친척의 바람대로 성실한 그리스 남자를 만나 그리스 아이들을 잔뜩 낳고, 끊임없이 애들을 먹이는 , 이것이 그리스 여자 툴라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이다. 관객의 예상대로, 툴라는 이런 삶에 만족할 없다. 아버지를 설득해서 대학의 강의를 듣고, 이모의 여행사로 직장을 옮기고, 드디어 남자를 만난다. 그런데 남자가 그리스인이 아니라네. 당연히 아버지와의 갈등 시작.

 

툴라와 미국인 애인 이안이 아버지와 일가 친척들을 만나고, 관계를 다지고, 마음의 문을 열고, 드디어 결혼에 성공한다- 영화의 줄거리다. 외아들에 친척도 없는 이안은 툴라의 대가족을 좋아하고, 더군다나 툴라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없으니 갈등이 해결되지 않을 만무다. 대가족이란 것이 으레 그렇듯 여기저기서 말썽이 생기고, 서로의 일에 참견하고, 그러면서 서로간의 애정과 신뢰를 확인한다. 툴라도 자신에게 가족이란 든든한 버팀목이 있음을 깨닫는다. 확실한 해피엔딩.

 

그런데 말이지, 행복은 오로지 이안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툴라를 포함한 그리스 가족은,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모험을 감행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다. 이안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고, 툴라 부모님의 옆집에 살면서, 아이를 그리스 학교에 보낸다. 달라진 아무것도 없다. 30 넘게 살아온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꿀 있는, 이안 같은 남자가 아니라면, 이런 행복이 가능할까?

 

생각해 보니, 사촌들이 한국인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 이안 같은 남자 혹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외삼촌도, 이모도, 고모도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바꾸지는 못했고, 자식들에게도 그것을 어느 정도 강요했을 테니까. 게다가 사촌들조차 한국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다 건너간 이주민들이니까.

 

영화가 재미없었던 아니다. 시종일관 시끌벅적하고, 유쾌하고 경쾌하다. 다만, 낯설지 않은 풍경, 예상 가능한 사건, 익숙한 결말, 씁쓸한 뒷맛, 이라는 문제가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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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8-18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저 남자배우 무지 좋아해요. 그래서 보는 동안 참 즐거웠는데.. 윈덱스만 보면 이 영화 생각 나더군요. ^^

mira95 2004-08-1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결혼해도 맞추면서 살기 힘들다고 하잖아요.. 에고~~ 그러고 보면 전 결혼하신 분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urblue 2004-08-18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맞아요, 윈덱스..ㅋㅋ 남자배우 이름은 모르겠는데, 참 깔끔한 느낌이에요.

미라님, 제 생각에도 결혼하신 분들 대단하다니까요. 그치만 이런 남자만 만난다면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어요. ^^ 아, 그런데 이런 남자가 저 좋다고 해 줄라나...--a

IshaGreen 2004-08-19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 시기를 놓쳤죠...^^;

urblue 2004-08-1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극장에서 보려다 놓쳐서, 며칠 전에 케이블 방송으로 봤답니다.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