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보스는 나랑 정치며 시사 얘기 하기를 즐긴다. 뭐 대화라기보다는, 보스가 일방적으로 떠들고 내가 맞장구치는 형식이지만, 어쨌든, 시시때때로 넌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말을 걸어 온다. 회사 일은 대개 널널하므로 보스 얘기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1시간은 금방이니까. 다만 가끔 바쁠 때나, 요즘처럼 내가 뉴스 보기를 싫어할 때는 좀 성가시다. 그렇지만 어쩌랴, 내가 시작한 일인 것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되기 전이었나 보다. 요즘 동아일보 좀 너무하는 것 같아. 라는 보스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렇죠? 것도 신문인가요. 요즘 경향신문 괜찮은데? 인터넷 신문은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댔더랬다. 십 수 년 째 오로지 동아일보만 구독하던 울 보스, 그 때부터 인터넷으로 경향,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등을 보기 시작했다. 후에도 나는 심심할 때마다, 생각날 때마다, 아직도 신문 안 바꾸셨어요? 라든가, 웬만하면 바꾸시죠? 따위의 버르장머리 없는 멘트를 날려보냈고, 드디어 보스 입에서 동아일보 끊고 경향신문 신청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ㅋㅋ 이렇게 동아일보 구독자 하나 줄이는구만, 하면서 혼자 웃었다.

 

울 보스, 공무원 아버지를 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대학 다닐 때 그 흔한 데모 한 번 안 해본 사람이다. 좋은 대학 나왔고, 직장에서 인정 받으며 착실히 승진했고, 지금은 일산에 사는, 40대 후반의 평범한 중산층 정도 되나 보다. 확실치는 않지만 선거 때마다 여당에 표를 던졌던 것 같고,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고 했다. 스스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중도 보수, 라고 말했다.

 

그러던 사람이, 여러 신문을 보면서 조금씩 말하는 내용이 틀려지기 시작했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될 때 누가 될 것 같냐고 묻길래, 노무현이요. 대답했더니, 그건 니 바람이겠지. 그리고 노무현이 대통령감이냐. 했는데, 막상 경선이 끝나갈 무렵에는 노무현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노무현 개인에 대한 지지자라기 보다, 이제는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횡포에 누구보다 분개하면서 개혁을 주장했다.

 

하여간, 그렇게 시작된 보스와 나의 대화는 대선 기간을 거치면서, 탄핵 정국을 맞으면서 한껏 무르익었고, 덕분에 다른 직원들은 우리가 얘기를 시작하면 다들 입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울 보스 상당한 달변에 열변이거든. 그나마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괜찮았지만, 한나라당 지지자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보스의 주장에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웠으니까.

 

울 보스, 지금도 보수적이긴 마찬가지다. 얘기하다 보면 나랑 차이점이 엄청 많고, 그 간극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제는 민주노동당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호주제나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고, 언론 개혁과 사회 개혁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 정도가 중도 보수, 라고 생각한다. 그런 보스가, 비슷한 연배의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 빨갱이 내지는 노빠 라는 소리를 듣는단다. 겨우 40대 후반의 사람들 인식이 그런 수준이다. 

 

보스를 보면서, 역시 언론이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보스가 계속 동아일보만 보고 있었다면, 아마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의견을 냈을 거다. 그랬다면 나는 직장에서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겠지. 이러니, 이제 와서, 보스랑 얘기하는 거 귀찮아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여전히 보스는 넌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냐? 라고 묻는다. 뉴스 안 봤는데요. 친절히 어느 신문 어느 기사를 보라고 알려주는 보스. -_-; 조용히 읽는 나. 정신이 있는 놈들이냐? 그러게요.’…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굼 2004-08-1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아무리 현실을 알려줘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매일 신문을 철하면서 신문 1면을 보고 있노라면...착잡하기까지 하다니까요. 항상 일착으로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앉는 곳은 조,중,동 세곳 중 하나...

urblue 2004-08-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렇죠.
예전에 들은 얘긴데, 코카콜라가 그렇게 광고를 해대는 이유가, 광고를 중단하면 바로 매출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군요. 모두들 콜라를 마신다, 라고 끊임없이 알려줘야 한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조중동은, 콜라를 팔아야 하니까 광고를 하는거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역시 다들 그런거야, 하고 위안 받는다는. 다른 생각하는 거 귀찮잖아요.
하여간, 전 또 한 명 중앙일보 끊게 하는데 성공했답니다. ^^V

로드무비 2004-08-1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장하십니다!
저도 님처럼(?) 노회한 부분이 있다죠?
누가 조중동 얘기 하면 "아아, 거기 기자들 불쌍하다!
그딴 곳에서 충성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니! 쯧쯧" 이런 식으로...
우린 통하는 게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협박)

하얀마녀 2004-08-1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지십니다. 고향집도 동아일보좀 끊었으면 좋겠구만. ㅠㅠ

urblue 2004-08-19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그럼요.. 우린 통해요, 통하는 거 맞아요.
마녀님, 저도 집에서는 실패했다는..ㅠ.ㅠ

어디에도 2004-08-19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갱이' 맞네요.ㅋㅋ. 그러한 대다수 40대 후반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님과 대화도 나누고 수렴하시는 님의 보스는, 조금은 열려있는 분인가봐요.
저는 저랑 동갑내기 한테서도 그런 소리 들어봤어요. 너 '빨갱이'냐.;;

2004-08-19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4-08-1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든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저 역시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얘기할 때 느끼는 갑갑함이 더 크기는 합니다.
그런데, 님 오늘 일찍 오셨네요?

mira95 2004-08-19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2,30대가 더 보수적인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세상엔 여러 생각들이 있고 그 생각들이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제각가 몫을 차지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언론에서 조중동은 쓸데없는 몫을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조선일보는 싫다구요~~

urblue 2004-08-19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라님, 지금 님 서재 다녀오는 길인데.. ^^

미완성 2004-08-1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들과는 아예 이야기 자체가 먹히질 않아요.
'됐어, 관심없어'
로 말문이 막히고, 그리곤 새롭게 등장한 꽃미남 K, 10년째 꽃미남계의 선두주자를 지키고 있는 J, 키가 작아 불만인 L, 이야기로 넘어가버리지요.
그럴 땐 커피잔이 얹어진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요.

정말 유아블루님과 보스되시는 분은 멋지군요.

urblue 2004-08-19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만나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곁에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저랑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에 대화는 쉽죠. 다른 의견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게 또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런데 님도 한 과격 하시는 듯.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다니...^^; 님 앞에서 조심해야 겠어요. ㅎㅎ

가을산 2004-08-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친정과 시댁은 '조손일보'에요 ㅡ,ㅡ;;
'경향'은 말도 못꺼내고 ...... '저,,, 중앙일보라도 보심 안될까요?' 하는게 고작입니다.

조중동이 그래도 '탄핵'을 이끌어낸 공은 있어요. 한나라와 민주당은 조중동만 보고 탄핵을 하면 탄핵이 될 줄 알았으니까요.

서울 가면 늘 '노무현 찍은 것 후회 안해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선택은 늘 상대적인 거지요.'라고 얌전히 대답합니다.
정말 시댁에서의 저의 가면은 참 두껍기도 하지....

urblue 2004-08-2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바뀌긴 했어요. 옛날 같았으면 아마도 탄핵이 성공했을지도 모르죠.
하여간,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악랄하게, 이 넘들을 못살게 굴고 쫓아내야 한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