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우맘 > 심리검사 최초, 커플 결과표 - urblue님과 앤님^^

블루님 CP-10 NP-12 A-10 FC-11 AC-2
애인님 CP-11 NP-11 A-13 FC-10 AC-13

심리검사 최초....는 아니구나. 예전에 깡통로봇(지금은 닉네임을 딴 걸로 바꾸셨지만^^)님도 남편의 검사를 의뢰하신 적이 있죠. 하지만, 여하간, 한 페이퍼 안에 커플을 갈무리하는 시도는 최초입니다. ㅎㅎ
(그나저나....시집가신지가 언젠데 아직도 애인이람, 얼레꼴레리~)

시작하기 전에, 전반적으로 스윽, 훑어보면, 블루님이랑 앤님이랑 무슨 "유사품" 같네요.^^;;
하긴, 식스센스에 버금가는 반전이 AC에서 일어나긴 하지만요. 극과극을 달리는 AC의 결과는 말미에서 알려드립죠. (뭐, 그동안의 심리검사 결과를 참조하셨다면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계실 듯. ㅋ)

먼저 블루님, CP 10점. 적당히 지배적이십니다. 과도한 비난이나 지나친 관용 없이 적절한 선의 카리스마를 유지하실 수 있는 점수지요. 여기에 NP 12점 역시, 적당히 헌신적...이라고 표현해야 겠네요. CP와 NP점수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어떠한 '성향'을 나타내기 마련이건만.... 부성 자아와 모성 자아가 이렇게 중용을 지키는 건 또 참 오랜만에 보네요.^^

그리고 A 10점. 성인자아 역시 이상적인 점수에 가까운 평균치입니다. 딱, 현실에 근거한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수준이지요. 비인간적으로 일에 매진하는 성향도 아니고, 만사 때려치고 내키는대로 떠나~!를 외치는 성향도 아니구요.^^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에 있어서 큰 어려움 없이 원만할 수 있는, 그런 분이세요.

FC는 11점. ㅎㅎㅎ 갑자기 수상해지는데....이거이거, 우유부단 중용파 아녜요? 혹시 몽땅 세모만 선택하신 건 아니겠죠? ^^ 자유로운 어린이 자아 점수도 좋습니다. 개방적인 분. 적절한 수준에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그런 분인거죠. 노래방 가면 테이블 위로 올라가진 못할지언정 18번 레파토리 몇 개는 가지고 있을 법 한.^^

자...그런데 AC2점. ㅡ,,ㅡ;;;; AC는 아시다시피 적응된 어린이 자아,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자기표현을 억압하도록 훈련된...뭐 그런 지수를 보여주지요. AC2점이라면 말이죠, 아/주/아/주/ 독/단/적이신 분인겁니다. 혹시말이죠...앤님이 "넌 뭐 여자가 애교가 없냐~" 그런 소리 했다가 블루님에게 두들겨 맞은 적 없나요? ^^;;;;
블루님은 한 번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고 결정한 일은 왠만해선 바꾸지 않을 성향이십니다. 그 결정의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도 좀체 반영하지 않으시구요.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앤님의 점수.

CP 11, NP 11점에서는 블루님의 결과를 그대로 복사해다 붙여도 무리가 없겠네요. ㅎㅎ 그래도, 심리검사 경험상 남녀간의 차이는 약간 있답니다. 아무래도 여자분들은 CP보다는 NP가 더 발달하기 나름이고, 남자분들, 특히 우리 한국 사회에서의 남자분들은 거의 CP는 육성되고 NP의 발달은 매도되는 분위기이거든요.
결론, 비슷한 점수대이긴 해도 성별을 고려하자면 블루님은 여자치고는 지배적인 편이고, 앤님은 남자치고는 관용적인 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A 13,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분입니다. 업무나 기타 생활에 있어 철없고 즉흥적인 결단 같은 건 거의 안 하실 분이네요. 직장에서 명석하고 유능하다는 평을 듣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밥은 안 굶기겠어요....^^;;;)

FC 10점, 역시, 개방적. 극단의 열혈남아도, 내성적인 소심파도 적절히 교류할만한 원만한 표현력의 소유자이십니다. 자아감 역시 적당하구요.(뭐야, 이 커플은....결과에 '적절'과 '적당'이 이렇게 많이 들어가다니.^^;;;)

자, 마지막, 문제의 AC 13점.
그냥, 앤님에게 말해주세요. "나랑 싸움 같은 거 하려고 생각도 하지마. 무조건 당신이 진대." 라구요.ㅡㅡ;;;
13점의 앤님은 상당히 의존적인 성향, 가끔 주변으로부터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듣고,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는(나쁘게 말하면 귀가 얇은^^;) 경향이 있으십니다. 좀만 더 올라가면 자신감 상실, 자기비하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구요! 뭐, 13점이라면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AC 2점과 13점의 타이틀매치요? 보나마나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블루님, 앤님은 겸손이 약간 지나치고 순응적인 성격이라 블루님의 견해에 따르는거지, 결코 정말 못나거나 어리광쟁이라서 블루님이 끌고나가야만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어라, 상상력이 과대발달되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블루님을 매도하고 있는 분위기^^)
앤님은 정말이지, 심리검사 결과로만 보면 일등 신랑감이라구요.^^
싸움 같은 거 하지 마시고(보나마나 승패가 뻔하니...ㅡㅡ;;) 가끔은 닭살돋더라도 의도적으로 어리광도 피우시면서, 그렇게 알콩달콩 이~쁘게 사십쇼!!!

정말 잘 어울리는, 두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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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황해리포트 - 카우보이가 파괴하는 바빌론

(3년전 글)


황해리포트 - 카우보이가 파괴하는 바빌론


딸기


바그다드 시내, 알 만수르 거리. 프라이드치킨과 아메리칸 커피를 팔던 서구식 레스토랑 '알 사아‘ 건물은 깊이 패인 폐허로 변했다. 부서진 건물 잔해 위에서 미군들은 후세인의 흔적을 찾고, 바그다드 시민들은 쓸만한 물건들을 뒤진다. 바그다드 강변의 정보부 건물에 진치고 있던 위성안테나들도 미사일을 피하진 못한다. 공보부도, 근처의 만수르 호텔도 폭격을 당했다. 팔 잘린 어린 아이, 머리 윗부분이 날아가버린 소녀의 주검, 시신을 가린 천을 들춰보는 사람들. 바그다드에 쏟아지는 폭탄, 솟아오르는 불길, 검은 연기, 무자비한 폭격음.


6개월 전에 이라크를 방문했었다. 이라크. 나는 그 곳에 가는 것을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꿈꿨었다. 국제부에서 중동지역에 대한 기사를 쓴지 꽤 오래됐다. ‘현장’에 가보지 못하는 기자는 존재 의미가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항상 ‘텅 빈 기사’를 쓴다는 자괴감에 시달렸고, 바그다드를 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 집착하다시피 했다.

아주 드문 기회가 와서 이라크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 현장을 취재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10월 요르단의 암만을 거쳐 바그다드에 들어갔다. 시속 160km로 차를 몰면서도 태연히 운전대를 놓고 샤이(차)를 타주는 천하태평 운전사와 함께 950km의 사막을 건너면서 나는 이라크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나는 참 신이 나 있었다. 요르단 국경에서부터 바그다드까지 6차선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끝 간 곳을 모르게 펼쳐진 지평선과 사막의 어둠을 보았고, 티그리스를 만났다.

상상 속의 바벨탑을 사마라에서 보았고, 그 탑 위에서 이라크인 사멜과 노래를 불렀다. 바벨(바빌론)의 무너진 신전과 방공호, 조야한 함무라비의 동상. 그 화려한 모자이크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던 희뿌연 모래바람 속의 사원들, 나자프와 카르발라의 모스크에서 만난 가난한 소녀들, 베두인의 사랑의 전설이 숨겨진 알 마쇼우크의 오래된 성곽. 바그다드 인민경기장의 ‘사담 찬양 집체극’, 독재체제의 몰인정함에 가슴을 치게 만들었던 ‘세뇌’된 어린이들의 함성.


올해 3월 전쟁 직전 바그다드의 표정을 스케치하기 위해 다시 이라크로 향하면서, 몇달 전 보았던 이라크의 모습을 계속 머리 속에 떠올렸다. 950km는 역시 멀었다. 검은 돌과 듬성듬성한 풀밭이 이어진 요르단쪽 사막을 지나, 케라메의 국경을 통과해서 바그다드로 가는 길. 사막은 예전과 비슷했다. 사방이 모두 지평선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지구는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돌았기에 이렇게 둥글어졌을까. 소실점이 사라져버리면 근대적 세계관에 익숙한 두 눈은 방향을 잃고 만다. 백미러로 보이는 것은 까마득한 도로와 햇빛. 깜깜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서 바그다드로 들어갔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 있었다. 서울에서는 아랍인 운전기사와 둘이서만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 좀 걱정스럽게 생각됐었는데, 정작 달려가는 동안에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었다. 운전기사 왈리드는 줄창 아랍 가요테잎을 틀었다.

이 때만 해도 바그다드는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다가올 포연의 그늘이 드리워있었지만, 3월 중순의 바그다드는 봄을 지나 초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바그다드국립박물관 앞에 있는 중앙시장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모처럼 나타난 외국인을 붙들기 위해 분주히 호객을 하고 있었고, 시장통 노점상들은 유명한 디즐라(티그리스강의 현지 이름) 잉어를 손수레에 얹어놓고 팔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바그다드는 평화로워 보였다.

정작 ‘현장’에서는 바깥에서 생각하는 긴장감이 그닥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서울에서는 늘 외신 보도를 접하다보니 오히려 이라크를 둘러싼 상황이 긴박하게 다가오지만, 바그다드에서 고립 아닌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되자 ‘정말 전쟁이 일어나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은 살게 마련임을 알려주듯 바그다드의 분위기는 평온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일 바그다드.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 셰헤라자드가 살던 곳. 바그다드는 아주 좋은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오래된 도시가 주는 안도감이랄까. 12년간의 경제제재로 관공서가 아닌 민간 건물들은 거의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구시가지의 뒷골목은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여 징검다리 건너듯 종종걸음을 해야 하지만 대로변의 큰 건물들은 조형미가 대단하다. 사회주의적 건축미학을 드러내주는 공공건물들은 위압적이면서도 웅장하다. 어느 도시나 그렇겠지만 바그다드 역시 이라크 경제의 저력과 제재가 가져다준 빈곤을 동시에 보여주는 모자이크 같았다. 전반적으로 낡고 낙후된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다드는 아름다웠다. 대추야자 가로수가 늘어선 시내에 들어서는 순간 “바그다드는 바그다드로구나!”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전쟁 전 이라크는 외국인이 혼자 돌아다닐 수 없는 나라였다. 관광비자로 들어갔건 취재비자로 들어갔건 최소한 2명의 가이드와 같이 다녀야 하는데, 말이 ‘가이드’이지 사실은 외국인을 감시하는 정부 직원이다. 지난해 취재 경험을 믿고서, 이번 방문에서는 ‘행운을 시험한다’는 생각으로 혼자 돌아다녔다. 가이드들과 함께 다니면 ‘절대로’ 취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원들과 같이 있으면 시민들은 기자에게 ‘사담을 사랑한다’는 말만 반복할 뿐 결코 자기 생각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지난해 취재 왔을 때 이라크의 체제가 주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혼자 다녔는데, 고생도 많았지만 이라크인들과 훨씬 생생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호텔 앞에 늘어선 ‘관광객용 택시’가 아닌 ‘길거리 택시’를 타면 별별 일이 다 생긴다. 잘 달리고 있나보다 하는데, 둘러보면 자동차에 사이드 미러가 한 개도 없다. 이 곳의 길거리 택시들은 타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을 할 수 없는 고물차들이다. 이라크에는 대중교통수단이 별로 없다. 버스와 철도가 있기는 하지만 시민생활의 기본은 자가용 승용차와 택시다.

사회시스템이 발전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석유가 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휘발유가 1리터에 1달러”라고 말하면 이라크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리기 일쑤다. 바그다드에서건 지방에서건 운전기사들은 상호(商號)도 없는 길거리 주유소에서 손수 차에 기름을 넣고 250디나르(당시 환율로 약 120원) 지폐 몇 장 내는 것으로 지불을 마친다. 도로 인프라는 너무나 잘 되어 있다. 70년대와 80년대 초반 오일달러가 쏟아져오던 시절에 외국기업들을 불러 전국에 사통팔달 고속도로를 깔았다.

도로가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출시된지 3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고물차를 타고 가다보면 아찔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길거리 택시기사들에게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바그다드에서 둘째날 운전을 해줬던 하미드씨. 아미리야의 방공호(shelter)로 가자고 했더니 쉐라톤 호텔로 가려한다. 내 발음에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는 셸터가 아니라 ‘셸따르’라고 한다. ‘달러’라 하면 못 알아듣고, ‘딸라르’라 해야 알아듣는다. 너무나 친절한 하미드, 시내로 가자고 했는데도 다른 곳에 내려준다. 아름다운 티그리스 강변의 유원지. “여기 경치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손짓으로 설명하는 그에게 어떻게 화를 낸단 말인가.

헤어질 때 하미드는 내게 이슬람식 염주를 주었다. 파란색 플라스틱 구슬들이 엮여 있어 그렇게 조악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손목에 감았다. 하미드는 내가 자기의 선물로 무슨 짓을 하는지, 신기해하는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식물을 말린 천연 이쑤시개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이쑤시개를 선물로 받아넣었고, 하미드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조수석에 있던 작은 돌 조각도 몰래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재래식 시장을 안내해줬던 대학생 에삼 바그다드의 알 무스탄시리야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다. 대학원에 가야 하는데 학비를 모으느라 잠시 쉬고 있다. 영어를 잘 했고, 공부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젊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에삼은 솔직했다.

"이 곳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는 말을 안 하죠. 오픈 마인드가 있는 사람들만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요" "사람들이 왜 ‘we love saddam’ 이라고 입을 모으냐구요? 두려우니까요."

"내 남동생은 뚱뚱해요. 이라크 사람들이 왜 뚱뚱한지 알아요? 희망이 없기 때문이예요."


바그다드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만남을 꼽으라면, 아마도 유씨프 신부님과의 인터뷰가 될 것 같다.

마침 그날은 아슈라 모하람(이슬람력 1월 15일)이었다. 최근 이라크에서 시아파들이 득세를 하면서 남부 카르발라의 성지에 모여 이맘 후세인의 초상화를 들고 집회를 하는 모습을 담은 외신사진들이 연일 신문에 나오고 있는데, 아슈라 모하람은 바로 8세기에 카르발라에서 예언자 무하마드의 손자 이맘 후세인이 반대파들에게 처형당한 날을 가리킨다. 시아파들은 이 날을 최대 추모일로 치고, 순니파들도 이 날을 기린다. 국경일이어서 거리는 한산했다.

거리를 안내해주었던 에삼이 “우연히 생각났다”면서 자기가 이 곳 기독교 교회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데 가보지 않겠냐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 중이었던 내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이었다. 중산층들이 사는 와흐다 거리에 갔더니 도미니크수도회 성당과 학교, 사제관을 겸한 수도원 건물이 있었다.

인구의 97%가 무슬림인 이슬람국가에서 카톨릭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0만명에 이르는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이라크의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유씨프 신부님의 지도 아래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다. 늦은 저녁 사제관에서 만난 신부님은 여전히 평상복이 아닌 사제복 차림이었다. 이라크 지도를 배경으로 한 성 도미니크의 그림이 신부님 방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기독교도인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이 당신의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신부님은 “부시의 신앙에 대해서는 부시에게 물어보라”며 웃으시더니 잠시 뒤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정말로 신앙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전쟁을 하지 말아야지요. 교회에서 신도들은 하느님 앞에 ‘내 탓이오’,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미국은 스스로를 선(善)의 축(Axis of Good)'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스스로를 ‘선’이라고 감히 선언할 수 있습니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언론에서 우리는 날마다 버추얼 워(virtual war)를 경험합니다. 미디어전쟁의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문명의 충돌’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신부님의 말이 더욱 단호해졌다.

“새뮤얼 헌팅턴은 책 제목을 ‘경제의 충돌(Clash of Economies)’이라고 바꿔야 할 겁니다. 우리가 자원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죠. 석유는 우리에게 저주입니다. 전세계에서 천만명이 반전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번 전쟁이 석유전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국제부에서 외신보도들을 접하면서 나는 자원, 특히 석유가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는 사례들을 많이 보았다. 중남미 다른 국가들이 70-80년대 겪었던 혼란과 고통을 이제서야 경험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막대한 잠재력을 갖고도 여전히 독재와 혼돈의 그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이 모두 그 ‘저주받을’ 자원 부국들 아닌가.

어쨌건 취재를 왔으니 나는 성자(聖者) 같은 이미지의 신부님을 계속 ‘추궁’해야 했다. 신부님의 마음을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속내를 조금이라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라크 사람들이 외부인에게 솔직하게 자신들의 문제를 털어놓는 일은 너무나 드물다. 오랜 공포정치 때문에 입에 자물쇠를 잠그고 사는 것이 습관화됐고, 뒤에 그것은 결국 사담 후세인의 동상을 미군의 힘을 빌어 쓰러뜨리는 모습으로 표출됐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물었던 것은 “사담 후세인 정권은 어쨌든 독재정권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실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고 싶었다. 바그다드 시내 무스탄시리야 대학에서 만난 두 명의 대학생은 후세인 정권을 싫어하는 티를 역력히 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이라 지칭하지는 못했다. 그들을 이해하는 만큼, 나는 나의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이승만 정권이 독재를 했고, 박정희 정권도 독재를 했고, 뒤이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독재를 했다. 우리도 50년 가까이 독재를 거쳤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했던 어느 서양사람의 말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내 어린 시절에 우리나라가 독재국가라는 이유로 미국이 폭탄을 쏟아부었으면 지금 우리나라가 이 정도라도 살고 있겠는가. 독재정권에 붙어 싸워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망명한 사람 감옥간 사람 죽은 사람도 있고, 그러면서 또 월드컵도 하고 올림픽도 치르고, 세상이 바뀌다보니 대통령 선거도 우리 손으로 해보고, 세계화인지 뭔지도 하고, 회사 다니고 결혼하고 애 낳고, 다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발전이라면 발전이고, 진보라면 진보 아닌가. 이라크인들에게서만 그럴 기회를 빼앗을 권리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부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신부님은 내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라크가 세계에서 유일한, 혹은 가장 심각한 독재국가인가요?”

신부님은 북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에 대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했죠. 그들은 당신의 형제입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좋겠습니까?”

이라크 사람들이 북한 문제를 거론하면 나는 항상 대답할 말이 없었다.

“중국도 독재국가이지만 지금 자신들의 손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소련이나 유고처럼 스스로 붕괴한 나라들도 있고요.”

신부님은 “총과 폭탄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독재를 민주주의로 바꾸고 싶다면 대화나 외교 같은 정당한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도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폭탄에 의한 변화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100만명, 200만명을 죽이고서 '이라크인들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신부님은 책장을 열고 걸프전 때 사제관에 떨어졌던 폭탄 파편을 꺼내 보여줬다. 바그다드 시민의 60%가 도시를 벗어났던 그 때, 지붕 위로 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에도 신부님은 사제관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 전쟁이 일어나도 역시 사제관을 지킬 생각이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이 메이는 것 같았다.

신부님은 '변화'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 “유럽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지만, 옛 유고연방은 무려 10개 나라로 갈라졌죠. 옛 소련 공화국들과 동유럽 국가들을 보십시오. 갑작스런 변화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 하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뤄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신부님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50년전 한국전쟁은 외부에서부터 닥쳐온 이데올로기의 충돌이었죠. 그 때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체제를 선택했습니다. 남한은 대단히 잘 해온 것 같습니다. 30년전에 한국은 매우 가난했지만, 지금은 '젊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인도의 ‘늙은 문명’에 비해 훨씬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 곳의 사정은 복잡합니다. 사회 전체를 바꾸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전쟁과 폭력 없이 그 일을 하고 싶은 겁니다. 갑작스런 변화는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신부님은 중국과 인도만큼이나 '늙은 나라' 이라크가 또다시 피를 흘리는 것을 못 견뎌하셨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신부님은 ‘이웃’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나누는 방법 밖에 없다고 강조했지만 무력하게 들렸다.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는 것 외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잡지를 내는 일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매달 발간하는 ‘알 피크르’라는 잡지는 40만명의 독자를 갖고 있다고 했다(알 피크르가 무슨 뜻이었는지 여쭤보는 걸 잊어서 기사 쓰면서 머리를 쥐어박았는데, 나중에 암만에서 만난 건국대 히브리학과 최창모 교수님이 ‘사상’이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셨다. 다시 한번 머리를 쳤다). 30만부는 카톨릭신도들에게, 10만부는 무슬림들에게 배달된다. “무슬림들이 우리 잡지를 보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바깥 세계의 소식들, 도덕적인 문제들 같은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죠. 생각을 나누는 유일한 방법은 창(窓)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열어놓은 창에 미국은 크루즈미사일을 던져넣었다. 지금 신부님이 무사히 살아계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내가 신부님을 만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나는 신부님께 신앙심만으로 공포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지 물었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의 대답도 다른 이라크인들과 똑같았다.

“미국이 이라크인들 머리 위로 핵폭탄을 떨어뜨린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이라크인들은 다 죽고 난 뒤일 것이니까요.”(결국 미군은 이번 전쟁에서 집속탄과 열화우라늄탄, 지금까지 개발된 재래식폭탄 중 최대의 파괴력을 가진 모아브폭탄을 모두 쏟아부었다).

신부님은 이라크 어린이들의 상황을 얘기했다. “매우 안 좋습니다. 해마다 10만명씩 죽어갑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이라크 어린이들의 희생은 이라크가 치러야할 ‘대가(price)’라고 말했었죠. 석유를 위한 대가인가요, 아니면 ‘세계화’의 대가인가요? 무엇을 위한 대가인지는 모르지만, 어른들이 저지른 짓의 대가인 것은 분명합니다.”

신부님은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내게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님께 이라크인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전해달라”며 “이라크인들 모두가 고맙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나는 뒤에 서울에 돌아와서 김추기경의 파병 지지 발언에 대해 들었다. 놀랍고, 당혹스러웠다).


이라크에 있는 동안 내내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호텔 방에 돌아와 혼자 앉아서 그날 만났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릴 때였다. 유씨프 신부님을 만났던 날도 나는 호텔에 돌아와서 신부님이 오래오래 사시도록 빌었다. 신부님이 이번 전쟁에서도 살아남으셔서 이라크가 새롭게 변하는 모습을 보셔야 할텐데. 대학생 에삼을 만나고 온 날은 호텔에서 티그리스강을 바라보면서 엉엉 울었다.

내가 묵었던 팔레스틴 호텔 방 베란다에 서면 티그리스강과 갈대밭, 둔치가 보였다. 다듬지 않은 호텔 정원, 물 빠진 풀장, 멀리 사담 타워와 강 건너 고층아파트 숲, 대통령궁과 저 멀리 후세인 모스크. 바그다드 사람들의 작은 친절에 감동하고, 그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전달되어 올 때마다 같이 숨죽였던 시간들. 그들이 죽을까 걱정되고 마음 아파 못 견디도록 슬펐던 일주일. 이방인인 나는 좋은 추억과 가슴 아픈 기억 몇 개를 가지고 돌아왔지만 하미드와 에삼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살아 있을까.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돌아서면서 그가 살아남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나의 감상과 상관 없이 바그다드에 체류하는 일주일 동안 긴장은 하루가 다르게 고조되어갔다. 시내에서 가장 큰 모스크인 카디미야의 황금돔 사원 앞 시장에는 사람들이 넘쳤고 생필품 공급도 원활한 듯이 보였지만 물가가 매일매일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중산층 거주지역인 만수르 거리의 고급 상점가에는 통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요르단으로 빠져나가는 차량을 구하지 못할까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공습이 시작될 때까지 바그다드를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번 전쟁은 91년 걸프전과 달리 미군 지상군까지 투입되는 전면전이 될 것으로 예상됐고, 바그다드 시내 곳곳에서 이라크 군인들이 방공호를 쌓고 있었다.

요르단에 있는 한국대사관의 박웅철 서기관이 이라크에 체류중인 취재진과 반전평화팀 멤버들에게 철수를 설득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왔는데 다행히 3월17일 박서기관 차를 얻어 타고 바그다드를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아침도 못 챙겨먹고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호텔에서 나오는데, 주유소에 기름을 잔뜩 넣어두려는 차량들이 줄을 이어 서있는 모습이 시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풍요로운 것이라고는 석유 밖에 없는 이라크에서 시민들이 석유를 사기 위해 늘어서 있다니. 중산층 주민들은 전쟁과 함께 빈민들의 폭동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재산을 타지로 옮기고 있고 상점들도 상품을 창고에 집어넣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국경택시 운임은 일주일전보다 5-7배 올라 있었다.

요르단으로 넘어오니 미군 C130 수송기가 하늘을 날아다녔다. 국경 부근 루웨이셰드에는 서방 취재진들이 미군의 이라크 진입과 이라크 난민 행렬을 취재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고, 유엔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 난민촌이 건설되고 있었다.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의 최후통첩이 있고 48시간 뒤, 3월20일 새벽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 있는 동안 CNN 방송은 ‘불타는 바그다드’의 모습을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방문했던 바그다드가 폭격음과 화염에 휩싸여 있는 것을 TV 화면을 통해 지켜보고 있을 때, 그 때 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코트라 바그다드무역관의 정종래 관장은 올초에 이미 가족들을 서울에 보내놓고 혼자 암만에 나와 있었는데, 딸들이 서울에서 바그다드 폭격 화면을 보면서 날마다 울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바그다드를 저렇게 파괴하는가.

바그다드가 어떤 도시인가. 지구상에서 몇 안되는, 수천년의 문명을 간직해온 도시 아닌가. 바그다드는 사담 후세인만의 도시가 아니라 셰헤라자드와 알리바바의 도시, 카디미야의 황금돔과 알 주베이다의 탑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바그다드 시내에는 도시를 만들었다는 위대한 칼리프 아부 자파르 만수르의 거대한 두상(頭像)이 있다. 만수르는 자신의 도시가 저렇게 파괴되는 것을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까.

미군의 바그다드 본격 공습이 시작된 날, 암만에서 만난 외국 기자들 사이에서 단연 화두는 ‘바그다드’였다. 폴란드 기자, 말레이시아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그다드를 저렇게 파괴하는 것은 전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얘기가 나왔고, 동질의 분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루웨이셰드의 난민촌에서 입촌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요르단의 여기자 아이다가 내게 와서 이것저것 묻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의 프레지던트는 미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당신의 왕도 미국을 지원하고 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맞받아치기는 했지만, 마음 편치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CNN은 바로 그 전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전쟁지지 선언을 하는 장면을 하루 종일 되풀이해서 내보냈었다. 기자들은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요르단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암만에서 난민촌까지 나를 태워줬던 택시기사인 하산이 물었다.

“미국은 북한이 이라크 다음 차례라고 한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길 원하는가.”

원치 않는다고 대답하니 하산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에는 이스라엘이 없으니까.”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힘이 없으면 미국에 맞서지 못한다.”

난민촌에 갔던 날은 추웠다. 얇은 점퍼로 버티기에는 모래바람이 거셌다. 물탱크 앞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옆에 와 앉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에 바그다드에서 만났던 도쿄신문 카이로특파원 시마다 요시유키였다.

“어제 우리 대통령과 당신네 총리가 계속 TV에 나오더군요.”

“그랬죠. 그런데 한국의 새 대통령은 젊은이들이 뽑아준 개혁적인 사람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젊은 사람들이 뽑아줬죠. 저도 그 사람을 찍었어요.”

“일본 총리는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atmosphere’(분위기)의 문제라나요.”

시마다는 그 말을 하면서 웃었다. 나도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국적이 곧 도덕성을 상징하는 땅에 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 암만을 70km 앞둔 곳에 6-8세기에 지어진 우마위야 시대의 건축물이 있었다. 사막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차창 정면에 지평선 위로 넘어가는 빨간 해가 보였다. 차를 몰던 하산은 “저 해는 다른 나라들을 위한 것”이라면서 “한국을 위해”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날 난민촌으로 가는데,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쌩쌩 다리던 자동차에 갑자기 급제동이 걸렸다. 낙타 두 마리가 고속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둘러보니 도로 양옆에 낙타무리가 서성이고 있다. 새끼를 낳았는지 어린 놈들도 몇몇 보였다. 암만과 바그다드를 잇는 고속도로변에는 베두인들이 양떼를 몰고 다니고, 원유를 실은 탱크로리가 질주하는 곁에 낙타들이 쉬거나 지나고 있다. 사막지대 뿐 아니라 바그다드 시내에서도 옛시가지에서는 종종 말이 끄는 수레를 볼 수가 있다. 교외로 벗어나면 말할 것도 없다.

대도시인 바그다드에서 마차가 다니는 모습을 보면 컨템포러리(동시대성)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송두율 교수는 예전에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말을 사용했었는데, 그 말이 모순의 중첩을 가리킨 것이었다면 사막에서 제기되는 동시대성의 문제는 문명의 중첩과 관계가 있다.

이라크 곳곳에서 만나는 비동시성은 그 땅에 얼마나 오랫동안 문명들이 명멸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바그다드의 시민들과 베두인들은 서로 다른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 바그다드에서는 일당독재가 판을 치는데 북쪽에서는 예수 시대의 언어인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사막에서는 베두인들이 양을 몰고 다닌다. 한 쪽에는 바트당의 사회주의가, 한 쪽에는 쿠르드의 부족문화가 지배한다. 그 땅에는 문명들이 겹쳐 있고 지나온 경로도 다양하다.

반면 한국은 얼마나 획일적인 경로를 걸어왔는지, 그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모순의 동시성은 일상의 곳곳에서 부딪쳐올지언정 문명의 중첩은 경험하려해야 경험할 수가 없다. 역사가 켜켜이 쌓여서 나타나는 것이 그것일텐데, 우리는 쌓이고 쌓인 역사를 모두 깔아뭉개고 ‘동시적 발전’을 추구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유씨프 신부님의 말처럼 한국은 ‘젊은 나라’다. 새로 태어나서 젊은 것이 아니라, 옛날 것들을 없애버려서 젊어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고통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또 개발독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젊게 만드는’ 과정을 평가절하하려는 생각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들이 갖지 못한 다이내믹 코리아(역동성), 효율적인 개발 과정이 있었다. 개발이라는 잣대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의 발전경로가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들은 분명 우리보다 ‘낙후’돼 있다. 많은 희생이 뒤따르긴 했지만 나름대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가면서 고속성장을 해온 한국과, 역사의 먼지들을 전혀 털어내지 않고 겹겹이 쌓아두고 있는 나라.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너무나 상이한 평가가 나올 것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좋다고 단언하기는 힘들 것이다.


요르단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공일주 교수와 그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공교수를 만나 ‘아랍의 한국인’이 바라보는 이라크전쟁에 대해 들어봤는데 ‘아랍문화의 이해', ’중동의 기독교와 이슬람'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는 공교수는 이 전쟁을 ‘아랍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서방의 공격’으로 바라보면서 전쟁 이후 벌어질 혼란을 우려하고 있었다.

“서방에서는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지만 이곳은 이제 모더니티에 진입하는 시기입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 지역에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추진한다면 엄청난 혼란을 불러올 겁니다.”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중동에 신(新)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구상에 대해 그는 “아랍의 특성을 무시한채 강압적으로 서구식 정치․경제체제를 이식하려 한다면 큰 충돌을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분석을 빌면 아랍세계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의 자체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이슬람 성법(聖法)을 고수하려는 이슬람 세력과 아랍국 정부 간의 마찰, 즉 무슬림의 신앙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존재하는 동시에 이슬람과 별개로 유목민족 시절부터 내려오는 부족문화의 문제가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방이나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른바 ‘명예살인’(부정한 죄를 저지른 여성을 가족들이 살해하는 것)이나 여성들에게 겉옷을 뒤집어씌우는 것 등은 이슬람의 전통이라기보다는 부족문화의 잔재들이다.

"이슬람문화가 종교적 측면이라면 실제 이 지역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가문․부족 문화의 유산들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지난해에야 여성들의 주민등록이 생겼을 정도로, 부족 시절의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변화는 사회 전체의 지지가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세계화의 고통을 겪었지만, 급작스런 변화가 이 곳에 가져올 고통은 훨씬 클 수밖에 없죠."

미국은 이미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공습이 시작되면서 아랍 각국에서는 격렬한 반전․반미시위가 벌어졌고, 특히 이집트의 상황은 정권반대 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교수는 “반미 정서의 저변에는 광범위한 아랍민족주의가 깔려 있다”고 진단했다. 20세기 초중반 서구의 식민주의에 맞서 아랍 전역을 휩쓸었던 아랍민족주의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민족주의는 냉전 이후 미국의 중동질서 재편 구상에 대한 반작용이다.


나는 바그다드와 사막에서 맞닥뜨렸던 비동시성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었다. 공교수는 자신이 보고 느낀 아랍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가 느끼는 아랍은 ‘다양한 문화와 시대(時代)들이 혼재하는 곳’이다. 개발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낙후돼 있지만 ‘느림의 문화’와 ‘이야기’의 전통, 베두인의 환대(歡待) 문화가 남아 있는 곳. 암만은 현대적인 도시지만 시내의 운전자들은 맞은편에서 아는 사람이 오면 차를 세워놓고 수다를 떤다. 그들의 이야기가 10분 이상 계속되어도 뒤쪽에서 클랙션 울리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아랍의 느리디 느린 문화다.

“여기는 아직도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는 곳입니다. 이라크의 바그다드 대학에는 고대의 기록들이 가득차 있고 모술의 도서관에는 서기 2세기의 문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이라크의 석유만 봅니다. 말 그대로 ‘카우보이 문화’가 바빌론의 문명을 부수고 있는 거지요.”

공교수는 이라크의 반정부 세력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미국의 계획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예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견제하려고 무장단체 하마스를 지원했습니다.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원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련에 맞서 이슬람 무자헤딘(전사)들을 밀어줬습니다. 결과가 어땠나요? 아랍은 아랍입니다. 미국이 이라크에 다시 똑같은 분열책과 대리전을 쓴다면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게 될 겁니다.”

실제로 미국은 현재 이라크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들의 독자적 세력화라는 암초를 만나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앞으로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에 따라 시아파 집권 가능성도 가늠해볼 수 있겠지만, 어떻든 전쟁 이후의 상황이 미국의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공교수는 “서구식 효율성의 잣대로만 재단하지 말고 아랍 문화의 풍요로움을 봐야한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인들도 이라크 전쟁을 석유확보 전쟁 차원에만 국한시켜 보지 말고 시야를 더 넓혀야 이번 전쟁이 향후 중동과 세계에 미칠 영향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앞서 말했던 발전경로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여러 갈래의 발전경로를 갖고 있는 곳에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시켜서 오직 하나의 경로만을 남겨두겠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의 오만’이다. 프랑스를 업신여기고 러시아를 우습게 알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무력화하는 것도 미국의 오만이지만, 정말로 미국이 두려운 것은 바로 세계를 획일화하려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들의 사고체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공교수의 말을 빌자면 “문화는 나누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어느 한 지역에서 오랜 문화를 단절시키고,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미국의 이른바 ‘중동 민주화 구상’이 그 땅에 가져올 충격은 대체 얼마나 클 것인가.


바그다드와 암만에서, 나는 “‘죄없는 시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9.11 테러로 미국에서 숨져간 수천명의 사람들이 죄없는 시민이었다고? 아니다, 그들은 절대로 ‘무고한 사람들’이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죄다. 이라크인들이 ‘이라크 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팔다리가 잘리고 숨져갔던 것처럼, 재작년 아프가니스탄의 순박한 사람들이 미군의 폭격에서 죽어갔던 것처럼. 이라크인들은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을 몰아내지 못한, 인간으로서 국민으로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대가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치러야 할 것이다. 피폐해진 땅, 죽어가는 어린이들, 화염에 휩싸인 바그다드, 전후의 혼란과 만일의 유혈사태. 그것이 이라크가 후세인이라는 지도자를 지난 20여년 동안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죄의 대가다.

뉴욕에서 숨진 수천명 또한 죄없이 죽은 것이 아닐 터이다. 미국이라는 강대국 정부가 멋대로 전세계를 유린하도록 내버려둔 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다.

역사는 교훈을 얻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대가를 불과 2년여 전에 그토록 혹독하게 경험해놓고서도 똑같은 죄를 다시 저질렀다. 이라크 땅에 사는 사람들을 마구 죽인데 대한 보복으로 미국에서는 또다시 테러가 일어날 것이고, 일어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역사의 ‘정의’라고 한다면 죽은 이들에 대한 모욕이 될까.

피는 피를 부른다는 단순한 진리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고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무의식과 무지, 무책임, 역사의식 부재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들이 이라크에 핵무기를 떨어뜨려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을 겁니다. 이라크인들은 다 죽은 뒤일 테니까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우리 손으로 고치게 해달라. 왜 미국이 우리를 공격하는가.”

“저기 보이는 게 미국 대사관이예요. 미 제국주의자들의 성 말입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첫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두 번째는 석유를 위한 거예요.”

“미국이 당신네 형제인 북한사람들을 죽이려 하는데 왜 그들을 지지합니까?”

 

한국은 50여년 전에 역시 처참한 전쟁을 경험했다. 그러고도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세기 동안 남북이 서로 미워했고, 베트남에 군인들을 보내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을 죽이고서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았다”면서 환호했다. 베트남에서 학살당한 이들은 물론, 자신들의 핏줄인 라이따이한들에게조차 지독하게 잔인한 나라.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이라크에 군인들을 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다행히 파병이 이뤄지는 지금은 전투가 끝난 시점이기는 하지만, 나는 암만에서 파병 결정을 듣고 받았던 당혹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다. 나의 기준은 나의 양심이다. 그래서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내게 필요한 물건을 저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면? 한국의 이해관계? 그런 것은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해관계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것이 '국익'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이라크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좀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일시적 우울증이라 하면 좀 과장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바그다드와 암만에서 3주를 보내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서 돌아왔다. 서울에 와서 외상성증후군처럼 후유증이 나를 따라다녔다. 미군이 후세인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건물에 폭격을 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해 방문 때 가이드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곳, 이번 방문에서 터키식 커피를 마셨던 만수르 거리 알 사아 레스토랑, 바로 그 건물이다. 이야, 정말로 ‘바그다드 카페’로구나, 하고 감탄했던 그 곳은 지금 완전히 폐허로 변해 땅속 깊이 몇m 씩 구덩이가 패였다. 대학생 에삼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광장의 후세인 동상은 미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물처럼 길거리에 끌어내려져 시민들의 발길질을 당했다. 나자프와 카르발라가 전장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시골 읍내보다도 작은 그 경건한 소읍들의 어디에서 전투를 한다는 말인가. 모스크에서 만났던 이쁘고 가난한 소녀들의 눈망울들이 떠올랐다.

바그다드국립박물관 약탈장면도 가슴아팠지만 그보다 더 나를 괴롭혔던 것은 이라크전쟁을 보는 주위 사람들의 태도였다. 주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때, ‘국익’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속으로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른다. 짐바브웨와 콩고민주공화국, 네팔의 분쟁을 얘기하고 기사로 쓸 때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이 이야기를 했으면서. 분노하고 속 끓이다가 돌아서면 마음 속으로 방향을 바꿔본다. 내가 무슨 반전운동가라고 남의 나라 전쟁에 속상해하나. 그러다가 다시 방향이 돌아간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사고하라. 그리고 뇌세포들이 또 부딪치기 시작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아니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 주제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고민한다는 것인가.

이른바 386 세대라는, 스스로 진보세력임을 자처하는 이들의 입에서 “노대통령은 개혁을 하기 위해 파병을 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논리가 술술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놀랐다. 수구세력에 덜미잡혀 5년 내내 고생하지 않으려면 ‘일보 후퇴 이보 전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무엇이 개혁이고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미국이 나쁘다고 말하는 나에게 “후세인도 나쁘잖아”라면서 ‘이중잣대’라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모두 풀어놓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짓눌려 있었다.

바그다드를 빠져나오는 길에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았다. 시리아 출신의 소설가 라픽 사미의 소설 <1001개의 거짓말>에서 주인공 사딕은 “아라비아에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은 것은 그곳이 사막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새하얀 눈과 푸른 바다는 아주 아름답지만, 사막의 신기루처럼 ‘진실 혹은 거짓말'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 않느냐고, 사막의 신기루가 아랍 사람들에게 그런 아름다운 환상들을 불어넣어 준 것이라고.

예전 아라비아 사람들의 이야기는 진기한 보물과 인간군상들, 기묘한 마법과 인간의 욕망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랍이 미국의 뜻대로 ‘민주화’된 뒤에 그들에게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새로 생겨날까.


<계간 황해문화, 2003년 여름호, 통권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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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지나고보니

그때 생각했던 것보다 이라크 상황은 훨씬 더 나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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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스타브로긴의 마지막 편지

가끔은 내가 써놓고도 까맣고 잊고 있었던 글들을 만나게 된다. 수년 전에 씌어진 걸로 보이는 아래의 글도 마찬가지인데, 말투로 보아 무슨 '댓글'로 씌어진 게 아닌가 싶다.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1872)의 주인공이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 대해서 몇 마디 주석을 붙이고 있는데,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악령>은 무엇보다도 주인공 스타브로긴에 대한 연구입니다. 젊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은 수수께끼라고 했을 때, 그 수수께끼성을 가장 매력적으로(악마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스타브로긴이죠. <악령> 속에서 그가 자신에 대해서 직접 털어놓고 있는 부분들은 그래서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요긴합니다. 원래는 삭제됐었지만, 작가의 사후에 포함된 '스타브로긴의 고백'(<찌혼의 암자에서>)을 제외하면 <악령>을 마감하는 그의 편지는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참조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편지는 다리야 파블로브나를 수신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위스의 '우리'란 곳에 도피처 겸 거처를 마련해 두고 그리로 갈까 합니다(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자살입니다). 하지만, 무슨 대단한 걸 기대해서는 아니죠.

"나는 우리의 생활에서 무엇 하나 기대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가볼 뿐이죠. 내가 일부러 음울한 장소를 택한 건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내가 구속받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낯설 뿐이지요. 사실 러시아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어느 장소에서 산다는 일보다 제일 싫은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낯설음"이라는 것은 스타브로긴을 대표해줄 수 있는 정서입니다. 그에게 세계(특히 러시아)는 낯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지주의자인 샤토프(그리고 작가)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관념에 들려 있는 인물이죠. 다만, 어느 한 가지 관념(=사상)도 그를 만족시키질 못합니다. 그의 내면은 너무 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넓이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가 말하는 "미학적'의 넓이가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입니다(*아래는 카뮈 각본, 안제이 바이다 연출의 연극 <악령>에 등장하는 스타브로긴. 모스크바의 '동시대인' 극장의 레퍼토리이다).

"나는 가는 곳마다 내 힘을 시험적으로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권했던 일입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위해, 또 남한테 보여 주기 위해 실험하면서도, 내 힘이 한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선행과 악행을 구별없이 행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그 자신에게도 그는 수수께끼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추악하고 엽기적인 행동도 그의 한계를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의 힘과 내면은 무한하거나 무한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인식론적 자아의 무한성'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라스콜니코프의 경우는 소박하기 짝이 없죠. 도끼로 한 노파를 살해하자 마자 자신의 한계가 막바로 드러난 경우니까(앓아눕지 않습니까?).

하지만 스타브로긴의 경우는 12살 소녀 마트료샤가 자살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력을 잃지 않습니다. 샤토프가 따귀를 때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겐 반응(reaction)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무관심한 존재인 것이죠. 그는 타자의 어떤 목소리에도 응답할 줄 모르는 윤리적 백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식론적 무한은 윤리학적 무한의 결핍을 전제로 합니다. 그에겐 윤리학적 자아가 부재합니다. 무관심이 그 증표입니다. 윤리학적 자아란,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타자의 무한성과 대면하는 자아입니다. 인식론적 자아가 오딧세이의 귀향처럼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자아라면,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자아라면, 윤리학적 자아는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결코 고향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지 않는 자아입니다. 즉 타자의 무한 속에서 실종되거나 몸둘 바를 모르는 자아인 것이죠. 제 생각에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대지는 그러한 무한성의 표상입니다. 스타브로긴의 경우는 자신의 인식론적 무한에 포박당한 채, 윤리학적 무한에는 끝내 눈뜨지 못하는 불행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불행은 사소한 것이지만, 삶을 더이상 지탱하기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죠.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말입니다. 더러운 곤충처럼 지구의 표면에서 근절해 버려야 함을... 그러나 나는 자살을 두려워 합니다. 그것은 아량을 보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나는 잘 알고 있소, 그것이 허위임을. 무한한 허위의 연속 속에 있는 최후의 허위임을..."

인식론적 무한은 동시에 허위의 무한(=무한한 가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차연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식론적 의미나 진실에 대면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은 한 걸음씩 물러나지요. 왜냐하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체계이며, 타자와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적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악무한인 것이죠. 그러한 사정에 눈뜨기 위해서는 타자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론적 무한의 맹목성과 비참(=가난)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것은 분노와 수치와 절망을 동반하겠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스타브로긴에겐 결여되어 있으며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자살은 구원없는 필연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나는 이곳을 떠난 다음부터 여섯번째 역의 역장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나이의 앞으로 회답을 써 주십시오. 주소는 따로 동봉합니다."

그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싶지만, 불행히도 우린 그의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군요!...

06. 11. 03.

 

 

 

 

P.S. 참고로, 최근에 권철근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연구>(한국외대출판부, 2006)가 출간됐다.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단행본 연구서로는 (놀랍지만) 국내 최초의 것이다. 이제까지 국내 연구자들이 펴낸 관련서로는 포괄적인 해설서와 사전, 그리고 논문모음집 등이 있었다. 새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간행된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다. 번역이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의 과제였다면, 이제는 새로운 시각과 축적된 연구역량을 과시할 만한 업적들이 나올 때도 되었다. 그러는 너는? 자고로 '주마가편'이라고 했다. 이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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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2006. 10.12 - 2006.11.12

장-미셸 바스키아는 1960년 브룩클린에서 아이티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했다. 회계사였던 아버지보다는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세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브룩클린 미술관 및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을 두루 다니며 미술에 대한 감식안을 높였다. 어머니는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제 형성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바스키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골 형태의 인물과 신체 부위들은 작가가 여덟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교과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작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신체 드로잉에도 매료되어 그의 드로잉 책을 독학하기도 했다.

1978년 고등학교 졸업을 일년 남짓 앞둔 작가는 학교에 다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자퇴하고 본격적으로 맨하튼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는 맨하튼의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를 이용해 그래피티 성격의 슬로건을 적고 세이모(SAMO)—“Same Old Shit"을 줄인 말—라고 서명하면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런 방식을 버리고 본격적인 작가로서 탈바꿈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20세기의 주요 작가들, 특히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사이 톰블리 그리고 앤디 워홀 등의 회화 스타일과 테크닉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중 그래피티 형식을 보여주는 톰블리의 작품은 바스키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톰블리의 작품에서 바스키아는 드로잉, 낙서, 쓰기, 콜라주, 또 그리는 법을 동시에 배울 수 있었다. 1982년 바스키아는 당대 팝 미술계의 가장 중요한 딜러이자 그 자신의 딜러가 된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의 소개로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되며, 이후 이들은 함께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서로의 예술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바스키아의 첫 개인전은 1981년 미국의 뉴욕이 아닌 이태리의 갤러리아 아르테 에밀리오 마촐리(Galleria d’Arte Emilio Mazzoli)에서 열렸다. 이후 바스키아는 1982년 뉴욕의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Annina Nosei Gallery)에서의 첫 미국 개인전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개인전을 열고 주요 그룹전에 초대된다. 또 그는 1982년 초대 받은 작가 176명중 최연소 작가로 독일 카셀에서 열리는 <도큐멘타 7>에 초대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1990년 현 삼성 리움 미술관, 1991년 선재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바스키아와 워홀을 함께 소개한 바 있다.

■ 작품 세계
바스키아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주로 길거리 문화, 카툰 캐릭터, 만화책의 주인공들 그리고 백인 중심 사회에서의 흑인의 지위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이러한 주제들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수많은 이미지와 다양한 재료들을 통해 표현되었다. 작가는 특히 흑인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음악가 찰리 파커, 야구선수 행크 아론 등을 존경했는데, 이들은 그의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로 자주 나타난다. 바스키아는 이들이 고결한 영웅이자 현대 문화의 중요한 공헌자라 여겼고 그들의 생활, 업적, 그리고 시련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정보를 이미지, 기호, 그리고 단어를 사용하여 작품에 표현하였으며 왕관을 그려서 그들의 중요성과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표현했다.

1983년쯤 바스키아는 캔버스 크기를 극적으로 확대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전체 구성과 내용을 위해 캔버스를 2개에서 8개까지 이어서 사용했다. 작가는 1982년 작 에서 볼 수 있듯 나무 막대와 경첩으로 연결해 거칠게 만든 틀로 이어진 다수의 캔버스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정통에서 벗어난 재료와 테크닉을 사용했다. 그의 화면은 찢어진 종이를 겹쳐 구김이 가게 붙인 콜라주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작품 화면에 바스키아는 주제를 암시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단어와 기호를 가미함으로써 깊은 정치적 의미를 담은 작업들을 만들어냈다.

6개의 캔버스를 연결한 <바니 힐의 아들의 인생처럼Life Like Son of Barney Hill>(1983)은 화면이 길게 이어진 작품으로, 작가는 서로 공통점은 없지만 깊은 의미를 지닌 이미지와 단어들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 작품의 제목은 바스키아가 태어난 지 일 년 후인 1961년에 일어난 모호한 사건을 참조한 것이다. 바니 힐은 백인 사회 사업가인 베티와 결혼한 흑인 우편 공무원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뉴잉글랜드 주에서 휴가 중 외계인에게 납치됐었다고 주장했다. 힐 부부는 아들이 없었지만 바스키아는 그림에 “바니 힐의 아들?(Son of Barney Hill?)"이라고 적어 넣고, 그들의 자식이 혼혈임을 나타내기 위해 어두운 갈색과 밝은 갈색의 두 가지 색을 함께 사용하여 눈이 하나밖에 없는(마치 외계인처럼) 얼굴을 그렸다. 다른 캔버스에는 역삼각형 안에 빨간색으로 ‘S’자가 그려져 있는데, 짐작하다시피 이는 바스키아가 가장 좋아했던 만화책의 주인공인 슈퍼맨을 의미한다. 또한 만화책의 맨 뒤쪽에 실린 광고에서 따온 ‘스킨헤드 가발(Skin Head Wig)’이란 문구도 적혀 있다. 맨 오른쪽 캔버스에는 거친 스케치로 니켈 동전이 ‘5센트(Five Cent)’와 ‘자유(Liberty)’란 단어와 함께 그려져 있다. 동전에 그려진 얼굴이 백인임은 명백히 알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바스키아는 미국의 동전에는 흑인의 얼굴이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고 자유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바스키아는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킬만한 참조들이나 의미를 지시하는 단어들과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에 포함시켰다. 사회와 인종간의 평등에 대한 바스키아의 깊은 관심과 흑인 영웅들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현대미술에 있어 찾아보기 흔치 않은 독특한 인식세계를 보여준다. 바스키아는 수많은 스타일, 테크닉 그리고 주제들을 섭렵했으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감을 넘어서는 생명력과 에너지를 그의 그림에 가득 채웠다. 1988년 마약중독으로 10여 년 남짓한 짧은 작가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바스키아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통해 일견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을 담은, 결코 가볍지 않은 정치적인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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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11-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水巖 2006-11-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 갑니다.
 

http://blog.naver.com/hiid98/70006971723 colle*t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시선 집중! 지난달 1탄에 이어 이색문화탐방 2탄에서는 발칙한 상상력과 재미가 돋보이는 복합문화카페 6곳을
준비했다.

365일 날마다 다양한 퍼포먼스가 선보이고, 흥미로운 전시가 줄을 잇는다.
모래방이 있는 동양풍 라운지 카페에서 맨발로 춤을 추고, 풀장의 따뜻한 물에 족욕을 하며 피로를 푼다.
인디 밴드들의 공연과 전시는 인디 카페에서 해결한다.
지금부터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열고 '알아서' 즐기는 것뿐이다.

홍대 인근의 숨은 명소 '복합문화카페 2탄'이다.






무지개가 떠있는 간판을 지나 지하로 내려갔다.
은은한 조명 아래 맥주잔 부딪치는 소리, 유쾌한 웃음과 록음악의 기타 선율이 귀를 울린다.

이곳이 최근 홍대 놀이꾼들의 아지트로 급부상 중인 '안녕 바다'다.
기자가 안녕 바다를 처음 찾은 것도 무지개가 그려진 예쁜 간판에 막연한 호기심이 생겨서다.





안녕 바다라니, 이름 역시 범상치 않다. '바다'는 김승재 사장(31)이 카페 이름을 구상할 때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안녕 내 맘속의 바다'였는데 카페 이름치고는 너무 길어 큰 마음 먹고 줄인 거란다.

이곳은 복합카페 중에서도 드물게 '인디 카페'를 표방하면서 상업성에 밀려 실종돼버린 홍대 앞 인디 문화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대안공간으로 사랑 받고 있다.





홍대 인근 라이브클럽에서 포크록 뮤지션으로 활약했던 김사장이 손가는대로 국내외 인디 음악을 틀어댄다.
주말에는 인디 밴드의 공연을 무료로 연다. 인디 작가들의 미술 전시도 마련한다.

인디 정신에 맞게 인테리어 역시 김사장이 독립적인 마인드로 완성시켰다.
미리 말해두는데 카페 내부 인테리어는 일정한 형식이 없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 까놓고 말하면 중구난방이다.



벽돌과 노랑, 남색 벽이 어우러진 벽에는 델리스파이스 등의
공연 포스터, 주인장의 어릴 적 사진, 미술 엽서와 각종 플라워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자세히 보니 연습장에 대충 끄적거린 그림도 있다.
비뚤비뚤 붙어 있는 눈, 코, 입이 피카소 저리 가라다.

책상 위에 먼지 쌓인 장기판은 먼저 집는 사람이 임자다.
분위기가 제 각각인 투박한 나무 탁자와 의자는 주인장이
솜씨를 발휘해 만들었다.

카페 안은 세련이나 럭셔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건 보면 볼수록, 오면 올수록 이런 공간이 편하고 익숙하게 다가온다는 거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음악과 3,000원으로 저렴한 맥주 값도
손님을 모은다. 그래서인지 주말 저녁에는 빈 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끝으로 안녕 바다에 왔을 때 반드시 둘러봐야 할 곳이 있다. 화장실이다.



* 화장실 입구를 열면 나타나는 계단. 계단을 다 오르면 화장실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화장실 입구로 추정되는 철문을 열면 가파른 계단이 버티고 있다.
보라색과 푸른색이 번갈아 칠해진 계단을 올라가자 꼭대기에 세면대와 변기가 나타났다. 다소 황당한 구조다.
한술 더 떠 주변은 낙서천국이다. 오픈 당시 주인장이 낙서를 적극 권장했다고 하니, 볼일 보랴 낙서 보랴 심심할
틈이 없다.


남자 변기는 상큼한 물방울 무늬 커튼으로 가려져 있디. 바로 옆에 붙은 여자 화장실은 다행히도 별도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계단 위에 개마고원처럼 자리한 생소한 모습의 화장실이지만, 손님들은 알아서 예의를 갖춘다.
간혹 화장실 색깔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안녕 바다가 인디 문화 집합소로 자리잡으면서
대학생, 홍대 문화를 사랑하는 직장인은 물론,
젊은 예술가들과 문화 종사자들이 단골이 됐다.


* 김승재 사장


김사장은 국내 인디 문화를 안녕 바다를 통해 신나게 이어가고 있다. 얼터너티브 컨설턴트인 셈이다.

다른 카페에서는 귀찮다고 거절하는 각종 동호회 모임이나 음악 감상을 위한 장소로 카페를 대여해주기도 한다.
'서울 뉴미디어 페스티벌',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에서는 독창적인 행사 공간으로 활용됐다.

붕어빵식 카페에 신물이 났다면 인디 문화가 살아 숨쉬는 홍대 앞 복합문화카페 '안녕 바다'에 놀러가자.










복합문화공간 레이디 피쉬 팝홀(LadyFish PopHall)은 365일 새롭게 태어난다.
공연, 문학, 영화, 파티가 한 솥에 비벼진 '아방가르드(avant-garde) 퍼포먼스 카페'로 날마다 다양한 놀거리로
넘쳐난다.



먼저 레이디 피쉬의 변화무쌍한 프로그램을 소개하자면,
월요일 : 일반인 누구나 참여해 무대에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Free Music Stage',
화요일 : 인디 뮤지션들이 즉흥연주를 펼치는 후위의 밤잠(Jam),
목요일 : 시낭송과 함께 하는 문학의 밤,
금요일 : 인디 밴드들의 합동 공연이 있는 인디 쥬이쌍스,
토요일 : 인디 밴드가 단독 콘서트를 여는 인트로스펙티브 등으로 꾸며져 있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렉트로닉 파티와 아마추어 단편영화제 등이 열린다.
조만간 공연 외에 유머 넘치는 콩트 프로그램도 넣을 계획이라니 레이디 피쉬의 욕심은 끝이 없다.


* 무대 뒤에는 자개가, 자투리 벽에는 꽃을 모태로 한 기하학적인 무늬가 화려하게 피어 있다.



* 벽을 자개로 꾸민 좌식공간이 무척 고풍스러우면서
  안락해 보인다 .




금상첨화로 맥주 값이 3,000원으로 매우 저렴하고, 첫인상도 쿨하다.
분홍과 회색으로 소용돌이치는 꽃무늬 벽은 취할 만큼 몽환적이다. 인테리어는 바와 라이브클럽, 카페를 혼합했는데 라이브를 하는 무대는 자개로 우아하게 수놓아져 있다.
술을 즐기는 바와 테이블은 느낌이 편한 목재다. 좌식 카페처럼 신발을 벗고 양탄자나 작은 평상에 앉는 공간도 있다. 벽에는 신화에나 나올 법한 붉은 꽃이 만개해 있다.




지금껏 몇 명이나 무대에 올라봤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젖는 한받 매니저.
잠시 후 "레이디 피쉬가 문을 연 게 2004년 12월이니 400여명 정도요?"라고 말한다. 대단한 숫자다.
최근 돈 되는 문화만 기형적으로 발전한 홍대 거리에 레이디 피쉬는 홍대꾼들의 문화적인 갈증을 채워주고 있었다.



레이디 피쉬의 사장 원지연씨는 동명 인디 밴드 레이디 피쉬를 이끄는 여성 뮤지션이다. 홍대 문화를 사랑하는 그녀의 고집이 복합문화공간 레이디 피쉬를 만들어냈다.
지난해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는 인디 밴드들의 라이브 공연장으로 인기를 모았다.

사장과 마찬가지로 매니저 한받씨 역시 홍대 바닥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디 뮤지션이다. 2003년부터 원맨밴드 '아마추어 증폭기'로 활동하며 크고 작은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무대에서는 가발과 치마를 입고 공연하는 엽기행각으로 악명이 높다.
넘치는 창작열로 이미 2장의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 한받 매니저


레이디 피쉬의 5월 역시 흥미진진한 시간들이 즐비하다.
매니저가 직접 꾸몄다는 황당 발랄한 홈페이지에 가면 사진과 함께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카페에 혼자 가면 심심할 거라는 편견은 버리자. 매일 다양한 공연이 있는데다 한받 매니저가 유쾌한 말벗이 돼준다.








* 지베 전경. 족욕을 즐기는 풀장은 이곳의 트레이드 마크다.



* 침대인가, 소파인가? 보기만해도 편안해지는 다양한 분위기의 침대석.
동창회나 동아리 모임 등 단체 손님에게 인기다.



복합문화카페가 저마다 특별한 의미와 즐거움이 있겠지만, 지베는 홍대 놀이꾼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2005년 8월 문을 연 지베는 홍대 터줏대감 고씨 3형제가 주인이다. 그 중 둘째인 고흥관씨(43)는 자타공인 홍대 클럽 문화의 산증인이자 공헌자다.



* 카페 입구에는 크리스털볼이 화려하게 돌아간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국내에 클럽 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90년대 초중반 홍대 언더그라운드신을 이끈 양대 산맥이 있었으니, 골수 클러버라면 이름만 들어도 무릎을 치는 '발전소'와 '명월관'이다.
발전소와 명월관은 당시 '좌전소, 우월관'으로 불리며 날고 긴다는 예술쟁이와 젊은이들을 끌어 모았다.



고흥관씨는 홍대 클럽 1세대로 명월관과 발전소를 만든 장본인이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클러버들의 기억 속에는 지울 수
없는 전설로 남아있다.

복합문화카페 지베는 매혹적인 분위기와 내용면에서 발전소의 업그레이드판을 보는 듯 하다.


원래 지베의 이름은 '불난 집'이었다.
3형제가 홍대에서

10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불이 났던 2층 가정집에 공간별 맞춤 개조를 시도했다고 한다.



지베에는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놓치기 아까운 놀거리와 쉴거리가 많다.
우선 입구에는 무도회장의 둥근 크리스털 볼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인다.
매 순간 바뀌는 불빛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맛이 흥미롭다. 투명한 유리 막은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어 마치 거대한 온실을 방불케 한다. 여름에는 바람이
통하게 정원의 유리를 거둬낸다고 한다.

1층은 풀장과 편한 소파석으로 꾸며져 있다. 넉넉한 공간에는 전시품이 놓이고 전문 클럽 DJ가 그루브한 일렉트로닉 음악을 튼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풀장에 발을 담그고 와인을 마셔보자.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진다. 족욕을 끝내면 친절한 직원이 수건을 갖다 준다. 풀장 위로 살포시 솟은 구름 다리도 건너보자.

화장실도 압권이다. 생뚱 맞게 샤워실이 있다. 바빠서 씻지 못하고 나온 사람을 위한 배려란다. 족욕을 한 뒤 발을 헹궈도 된다. 화장실 옆 수건 보관함에는 항상 깨끗한 수건이 비치돼있다. 파우더룸에는 헤어드라이어와 로션이 있다.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보자. 원색 휘장으로 멋을 부린 침대석에서 친구와 뒹굴거리며 수다를 떨기에
안성맞춤이다.
앞서 1탄에서 소개한 침대카페의 원조 '360알파'를 처음 만든 사람도 원래는 고흥관씨다.
고씨는 침대카페의 인기를 지베에서 재현시키고 있었다. 단체 손님도 걱정 없는 침대석은 매일 예약이 밀려있다.





맏형인 고흥제씨에게 지베의 콘셉트를 물었다. "파티와 전시, 홍대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 행사가 함께 하는
'집처럼 편한 공간'이 주제"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름도 지베(Zibe)로 지었단다. 그런데 간혹 깡기자처럼 자이브라고 잘못 발음하는 손님도 있다.

지베는 전시는 물론, 각종 문화행사의 장소 대여도 무료로 제공한다. 지난해에는 종합 책문화 축제인 '와우북 페스티벌'의 행사장으로 각광받았다.

고흥제씨는 이곳을 "문화적 교류와 풍족함이 있는 복합문화카페에서 한발 나아가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는 '로하스(LOHAS::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공간'으로 만들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얼마 전 3형제는 재오픈을 위해 터만 남은 명월관을 인수했다. 10년 전 그러했듯, 홍대스러운 마인드로 중무장한 3형제가
꾸려갈 공간이 홍대 놀이 문화의 새로운 산실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해본다.








 





진한 향 냄새에 정신이 혼미하다. 어스름한 촛불 사이로 웅장한 기둥과 작은 연못이 보이고, 카펫이 깔린 모래방에 드러누워 물담배를 피우는 사치도 부려 본다.
일상의 속박을 벗고 맨발로 춤을 추는 곳, 복합문화카페 '나비도 꽃이었다. 꽃을 떠나기 전에는(이하 나비)'.

동양적인 사상과 춤이 복합된 '나비'는 인도 타지마할을 축소한 듯한 인테리어로 입 소문을 타며 매스컴에 자주 소개됐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붐비는 게 단점 아닌 단점. 나비는 세간에 알려진 인도풍 라운지 카페라기 보다는 '동양풍 라운지 카페'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전체적인 느낌은 타지마할이나 인도의 석굴사원을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교묘히 섞어놨다. 카페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반상 위에는 한국의 촛대가 불을 밝힌다.
자투리 공간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동양의 악기들이 놓여 있다.
백자로 만든 찻잔에 차를 마시고, 천장에는 에스닉한 중동풍 전등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1,5톤짜리 트럭으로 고운 모래를 퍼왔다는 모래방에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튀어나온 듯한 천막과 카펫이 고풍스럽다.
그 옆에는 그물침대인 해먹이 흔들린다. 과일향이 나는 터키 물담배는 길다란 파이프가 인상적이다.



* 모래방 전경. 카펫 아래 모래가 깔려 있어 푹신한 게 색다르다.
발가락 사이에 모래가 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카페와 어울리게 주인장 역시 느낌이 기묘하다. 그는 홍대 클럽에서 10년간 테크노 음악을 전문으로 튼 DJ로 본명보다 '비눌'이라는 예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 차린 게 이곳 나비라고 한다.

"요즘 편하고 넓은 휴식 공간에 세련된 음악이 흐르는 라운지 카페가 유행인데, 사장님은 라운지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깡기자가 사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운지? 그 딴 게 별건가요? 농약 치지 않은 풀 많이 먹고, 자기 입에 들어갈 거 자연에서 키워 자급자족하던
우리 선조들의 삶이 웰빙이듯, 라운지도 알고 보면 조상들이 예부터 즐겼던 문화에요." 이건 또 웬 궤변인가?

"시원하게 탁 트인 산세를 배경으로 오두막이나 정자 위에 앉아 풍월 읊고, 폭포 소리 들으며 느긋하게 술 마시고…
그런 게 곧 라운지 문화요, 라운지 카페 아니겠어요?" 처음엔 수상했는데 듣고 보니 제법 설득력이 있다.





나비의 주술적인 분위기를 완성하는데 음악은 큰 역할을 한다.
전문 클럽 DJ 4명이 나른한 인도의 전통음악, 민속적인 제3세계 월드 뮤직, 그루브한 라운지, 일렉트로닉과 하우스
음악을 튼다.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북을 치는 잘생긴 사나이가 있어 말을 걸었다.
나비에 이틀에 한번 꼴로 들른다는 외국어대학교 3학년생 우시오 마사카씨였다. 얼마 전 구입했다는 악기를 다소 두서없이 치고 있었는데, 주변인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역시나 나비의 분위기는 무척 자유롭다.

흥에 겨우면 자리에서 일어나 연못 주위를 돌며 춤을 추는 재미도 놓치지 말자.
단, 맨발을 헛디디면 물에 빠지는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주의. 파티는 한 달에 한 두 번 주말 밤에 열린다.
누구나 어울려 북치고 장구치며 춤추고 노는 시간이다. 파티 입장료는 없다.









이번에 깡기자가 탐험한 곳은 아틀리에 같은 분위기의 복합문화카페 '로베르네 집(chez robert)'이다.
입구에 쓰여진 '아티스트 바'라는 간판이 색다르다. 무료 전시를 주로 하는 복합문화카페인데 홍대 앞 젊은 미술인
사이에서 꽤 알려진 곳이다.

아티스트 바라는 이름처럼 조소과를 졸업한 두 명의 동갑내기 친구 오윤주(30), 허소정씨(30)가 주인장이다.
명성(?)에 비해 공간은 대단히 아담하다. 카페 이름은 프랑스 파리의 예술가들이 집단으로 모여 작업실 겸 무료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 '로베르네 집'에서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프랑스의 로베르네 집은 유럽 불법 점거 아틀리에의 대표격이다. 1999년 가난한 미술가들이 비어있는 정부 건물을 무단
점거해 작업실로 쓰면서 로베르네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도심 한복판의 버려진 공간은 가난한 예술가들에 의해
예술이 숨쉬는 문화적인 공간으로 재탄생 했다.





"유쾌한 파리 무법자들의 아틀리에를 서울 홍대에 옮겨 놓고 싶었다"는 게 오윤주씨의 설명.
2003년 7월 문을 연 8평 남짓한 공간은 작업실 겸 예술가들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매년 빠지지 않고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등의 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너 명의 손님만으로 꽉 차 보이는 카페에서는 놀랍게도 전시 외에 매달 소규모 공연이 열리고 있다. 전시는 한달 단위로 주제가 바뀐다. 회화 작품을 비롯해 사진, 영상, 설치 미술 등 성격에는 제한이 없다. 단지 만든 이의 혼이 깃들어 있으면 오케이. 공연의 경우 가야금이나 통기타 공연 등 어쿠스틱한 감성의 미니 콘서트로 잔잔한 감동을 준다.

허소정씨에게 지금까지의 전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를 묻자 대뜸 "음…저희들의 개인전이요."라고 말하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깡기자가 찾았을 때 마침 '불나방스타쏘세지크럽'이라는 미술전시가 한창이었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풍자한 제목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불나방~'은 조문기 작가의 <아날로그 드로잉전>으로 성(性)을 주제로 그린 만화적 기법의
작품들은 완성도 보다 자유로운 사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다른 복합문화카페와 마찬가지로 로베르네
역시 주인의 손맛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간판 한쪽에는 보라색 바탕에 빨간색 구두가, 반대편에는 여자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사장의 공동 작품이란다.

구두가 그려진 간판 때문에 간혹 구둣방으로 오인하는 손님도 있다.



카페 안은 흰색 타일로 덮여 있어 목욕탕을 방불케 한다. 인수 전 건축 설계 사무소로 쓰였다는데 이전 주인의 사고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테이블도 흰색 타일을 붙여 제작했다.

"알고 보면 혼자 와도 부담 없는 아늑한 곳인데, 처음 온 사람 중에는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흰색 타일에 놀라 그대로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오윤주씨가 말한다.
이런 반응과 대조적으로 깨트리지만 않으면 오히려 하얀 타일이 청소하기에 편하고 전시했을 때 작품이 살아 보이지 않느냐는 게 단골들의 주장.






흰색에 반해 음료를 주문하는 바와 의자, 입구로 통하는 좁다란 계단은 빨간색으로 통일해 포인트를 줬다.
이 모든 인테리어는 주인장의 자유로운 손끝에서 탄생됐다. 바 뒤의 선반에는 양주와 칵테일 원료, 이국적인 분위기의 외국 담배갑, 러시아 인형 등이 진열돼 있는데 생전 청소를 하지 않아 보이는 게 수더분한 사장의 취향이리라.

로베르네 집은 항상 사람들로 활기차다.
작고 소박한 공간이지만 삶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화공간으로 사랑 받고 있다는 증거다.








투명한 물을 닮은 블루톤의 라운지 카페에는 감각적인 하우스 음악이 흐른다.
전시와 파티가 있는 복합라운지카페 리퀴드. 넘치는 감성으로 2004년 6월 오픈 이후 젊은이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리퀴드는 다른 복합문화카페에 비해 초행길에 찾아 가기가 무척 힘들다. 3.5층에 위치한 애매한 조건 탓에 바로
코앞에 두고 헤매기 쉽다. 건물 외부에만 카페 이름이 써진 파란색 간판이 달려 있을 뿐, 건물 내부에는 대체 몇 층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작은 이정표 조차 없다.


* 너무 앙증맞아 그다지 실용성이 없어 보이는 의자. 하지만 모양은 예쁘다. 오른쪽 사진은 바 전경



그렇게 어렵게 발견한 카페 문을 열고 들어 서면, 예상치 못한 세상이 펼쳐진다.
깊고 푸른 바다가 연상되는 초록색 공간이 눈 앞에 몰려 온다.
공중에 가지런히 매달린 동그란 장신구는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하늘 춤을 추고, 흥미로운 모양의 가구는 유쾌하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 양반 다리를 하고 앉는 좌식 공간에는 원색의 꽃들이 피어있다.
구석에 박힌 DJ박스의 턴테이블에서는 기분 좋은 라운지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 나온다.




리퀴드의 사장 양성민씨(32)는 홍대 테크노 클럽에서 10년간 음악을 틀었던 뮤지션이다.
도회적인 카페이면서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것도 홍대 언더그라운드의 물을 오랫동안 먹은 이유에서다.

사장은 바에서 칵테일을 만들면서 직접 음악을 튼다. 운이 좋으면 사장이 리믹스한 음반을 들을 수도 있다.
한 달에 한번씩 술과 음악이 있는 게릴라 파티를 열기도 한다. 리퀴드는 홍대 미대 출신들이 모여 만든 칠(chill)전시회 등을 연례 행사로 기획한다.
하지만 꼭 미술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이라도 전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사장은 귀뜸한다.





리퀴드의 인테리어는 사장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키아(IKEA) 등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외국 대형가구할인매장에서 가구를 주문하기도 하고,
내부 배치나 장식을 바꾸기도 한다.

"물은 웬만해서는 적이 없죠. 어떤 물질과도 잘 융화가 되니까요. 그렇게 편하고 자연친화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어
이름을 리퀴드라고 지었어요." 사장의 말처럼 리퀴드는 누구나 찾아와 부담 없이 쉬어갈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임에는 틀림없다.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예술가 출신 사장이 대부분인 복합문화카페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문화는
아니다.

이미 80년대 후반 미미하나마 전시, 공연, 춤, 퍼포먼스가 혼합된 복합문화공간이 존재했다.
홍대 미대 안상수 교수가 운영하던 전자카페 '일렉트릭', 설치미술가 최정화씨가 만든 '올로올로', 작가 이불의 동생이 주인인 신촌 '플라스틱 서전' 등이다.




이후 90년대에는 작업실 형태의 바(bar)로 댄스 클럽의 원형이 된 발전소, 2000년대부터는 열반화, 몽환 등이 클럽과 공연, 영화, 파티 문화를 주도하는 대안공안으로 각광받았다.




복합문화카페는 이렇듯 훌륭한 홍대 문화의 양분을 이어받았다.
수많은 아이콘들이 모여 있는 홍대에서 복합문화카페가 진정 놀이꾼들에게 일상의 권태로움을 날려버리고 젊음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각성제로 자리잡기를 기대해본다. 더 나아가 가난한 아티스트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반자이길 바란다.

 

실험적인 놀이공간이자 휴식 공간으로 문화를 즐기고 삶을 즐기는 곳, 상업적인 의도로 문화의 질이 하향 조정되는 게 아닌, 창조자의 개성에 따라 상향 조정되는 곳. 한국의 음식 비빔밥처럼 신나는 어울림과 잡탕의 미학이 존재하는 홍대 복합문화카페는 젊음의 해방구다.

<2006년 5월 굿타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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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10-30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힛. 보고 할라고 했죠. 근데 아직 여유가 없어요. 쫌만 기둘려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