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 퍼 와도 되나 모르겠다. -_-
안병욱, 이름만 들어봤지 책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오히려 좀 궁금해지는군.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618.html ← 전문은 여기서 보세요.
안병욱의 '에쎄이': 대책없는 교양주의
1.
1997년 4월 26일 현재 교보문고 스테디셀러 진열대의 수필부문에는 약 30여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 중에서 다섯 권이 안병욱의 책이다. 그 책은 다음과 같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갑인출판사(1983년 5월 15일 초판, 26쇄)
<처음을 위하여 마지막을 위하여>, 자유문학사(1993년 4월 5일, 2판 3쇄)
<삶의 완성을 향하여>, 철학과 현실사(1995년 6월 15일, 1판 2쇄)
<인생론>, 철학과 현실사(1996년 1월 5일, 1판 13쇄)
<젊은이여 희망의 등불을 켜라>, 자유문학사(1996년 9월 10일, 2판 1쇄)
'에세이'하면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몇 명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10권 정도의 에세이를 가지고 있다. 웬만한 에세이스트 중에서도 안병욱은 단연 앞서 있다. pc통신 천리안에서 'go people' 하거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저작목록을 찾아보면 한국의 웬만한 인물의 저작 리스트가 나오는데 안병욱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위에 적혀 있는 그의 에세이들을 보면 한 두 권 팔린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하나만 보더라도 15년 가까이에 걸쳐 쇄를 거듭했다. 요즘에 베스트셀러를 써서 누가 얼마를 벌었다는 소문아닌 사실이 무성하지만 안병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안병욱의 에세이를 읽는 독자층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자료는, 내가 아는 한 없다. 그러나 이만한 판매량을 보면 거대한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독자들은 그냥 한 권 정도 읽은 사람 또는 한때 열심히 읽은 사람부터 열렬한 팬이어서 새 책이 나올때마다 읽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안병욱의 에세이를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예전에 한 두 권은 읽었다는 대답이 있다. 왜 읽었느냐고 물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주위에서 권하니까 읽었다는 대답이 있다. 가끔 신문에 글이 실리는 걸 보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또 읽어보니 나쁜 말은 쓰여있지 않더라는 대답이 있다. 뭔가 책을 읽긴 해야겠는데 막상 본격적으로 읽을만한 책은 없고 그렇다고 만화책 같은 걸 읽자니 쑥쓰럽다, 그럴 때 읽기 좋은 게 그런 에세이 아니냐는 반문도 있다. 자신은 읽어보진 않았지만 누구에게 책 선물할 때 제일 무난한게 에세이 같아서 선물한 적이 있다고도 한다.
그의 책의 독자들에 대한 나의 짐작과 주변 사람들의 대답을 정리해보면, 뭔가 독서를 하긴 해야겠는데 전문적인 책을 읽기에는 왠지 부담스럽고 일단 읽고나면 교양이 될만한 책이 바로 이런 에세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그의 에세이는 만만해 보인다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어중간한 독자층이라는 '틈새시장'을 파고들고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이 틈새시장에는 열렬한 팬이 포함되진 않을 것이다.
흔히 베스트셀러 보다는 스테디셀러가 더 훌륭한 책이라고들 한다. 안병욱의 에세이는 스테디셀러이면서 동시에 베스트셀러이다. 그렇다면 그의 에세이들이 몇 십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읽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 책들은 그렇게 훌륭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이유가 우리의 형편없는 독서수준이라면 그것을 극복할만한 방안은 없는걸까? 이 글은 이런 사소한 의문들에서 시작한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나는 안병욱의 에세이 4권을 검토해 보았다. 앞에 적은 5 권 중에서 세 권,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듯한 <뜻을 세우고 삽시다>, 이렇게 4 권이다.
2.
그의 신작 에세이 <인생론>의 <책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것은 나의 서른 아홉번째 책이다. 나는 5만여장의 원고를 쓰면서 70여년의 생애를 열심히 살았다."
필자는 5만여장의 원고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 많은 원고가 전부 새로운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 안병욱의 에세이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새로 만든 책이 드물다는 것이다. 내가 4권의 책을 읽고나서 거칠게 정리해 본 바에 따르면 4권의 책은 100페이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그 정도의 이야기를 가지고 우선 300페이지 짜리 책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들의 내용을 이러저리 짜맞춰서 다시 또 한 권의 책을 만든다. 이렇게 하여 몇 권의 책을 만든 다음 또다시 그 책들을 엮어 '신작 에세이집'을 만든다. 그런 책들에 들어 있는 내용을 가지고 신문에 연재를 한다. 그렇게 연재한 내용을 묶어서 다시 또 한 권의 책을 만든다. 바로 이것이 그의 다작의 비결일지도 모른다. 40여권에 이르는 그의 에세이들이 거의 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잘쓰는 말대로 '불가능처럼 보이는 가능성'인 것이다 이건 내가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과연 그러한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위에 적은 책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하 <지상>>으로 줄여 적음)이다. 책의 내용과 출판에 대한 간략한 사정을 적은 저자의 머리말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몇 해 전에 갑인출판사에서 출판한 수상집을 젊은 세대들을 위하여 새롭게 가로조판을 하면서 몇 편의 글을 추가하여 한 권의 책으로 내놓는다."
그러니까 이 책의 새로움은 가로조판을 했다는 데에만 있고 몇 편의 글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몇 년 전에 나온 책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그는 앞서 낸 책에서 이것저것을 뽑아서 '새' 책을 만든 것이다.
<처음을 위하여 마지막을 위하여>(이하 <처음>으로 줄여 적음)에 실린 33편의 글 중에서 <지상>에서 뽑아 놓은 게 7편이나 된다. 그럴만한 까닭은 필자가 쓴 <책 머리에>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나의 여러 책 가운데서 인생론에 관한 글을 뽑은 것이 이 책이다. 어떤 글을 고르느냐. 편집자에게 일임하였다." 새로 쓴 글이 없음을 아예 까놓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도 이미 다른 책에 실린 것을 편집자가 알아서 뽑아서 만든 것이다. 그러니 이미 앞서 나온 다른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을 살 까닭이 없다. 책의 편집 과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 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 내용은 어떠할까? '책머리에'라는 글은 저자가 자신의 책에 담긴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처음>의 <책머리에>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인생의 세가지 중요한 선택이 있다. 첫째는 직업이요, 둘째는 배우자의 선택이요, 셋째는 인생관과 가치관의 선택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엄한 생명을 가지고 오직 한번 뿐인 인생을 산다. 인생은 일회전으로 끝나는 엄숙한 시합이다. 산다는 것은 진지한 시합이다.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산다는 것은 보람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고귀한 것이다."
그가 "나의 많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권 고르라고 하면 이 책을 고르겠다"고 하는 <인생론>은 '직업의 선택', '배우자의 선택', '인생관의 선택'에 각각 한 장씩을 배당하고 있다. 그러니까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인생론>의 '제 1장 시작의 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생에는 세가지 중요한 선택이 있다. 첫째는 직업의 선택이요, 둘째는 배우자의 선택이요, 셋째는 인생관의 선택이다."(p. 11)
두 권의 책의 '첫머리에'와 '시작의 말'이 똑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하나는 '인생의'로 시작하는데 다른 책은 '인생에는'으로 시작하니까 다르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쨋든 내용이 똑같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처음>은 그가 쓴 글 중에서 "인생론에 관한 글"을 뽑아 놓은 것이고, <인생론>은 제목 그 자체가 아예 '인생론'이다. 일이년 사이에 그의 인생관이 크게 바뀌진 않았을테니까 내용이 달라졌음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작년에 영남일보에 연재한 글에는 얼마나 다른 내용이 실렸을까? 연재 글들을 묶은 <뜻을 세우고 삽시다>의 '머리말'을 보자: "유일명, 유일생,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요,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단어다. 우리는 천상천하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오직 한번 뿐인 인생을 산다. 인생은 두번 살 수 없다. 인생은 연습이 없는 진지한 시합이요, 일회전으로 끝나는 엄숙한 경기다."
<처음>의 '책머리에'를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 무슨 놈의 '시합'은 그리 좋아하는지? 이러한 반복은 '책머리에'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내용은 거기서 거긴데, 똑같지는 않지만 말만 조금씩 바꾼 글 제목에도 해당된다.
어머니의 눈동자, 어머니의 조건, 위대한 모상들(<지상>)
어머니(<뜻을 세우고 삽시다>)
인생의 안식처, 결혼은 결혼, 결혼행진곡, 행복한 결혼(<지상>)
결혼의 의미, 가정은 인생의 안식처, 인간 최초의 학교, 사랑은 행복의 조건(<인생론>)
가정은 도덕의 학교, 행복의 3대 요소(<뜻을 세우고 삽시다>)
생명의 의미, 오기인, 생명에 대한 4대 의무, 오애인, 생명은 아름다운 것(<인생론>)
생명의 탄생, 식은 인생의 대본, 장수의 비결, 정식, 신체관리(<뜻을 세우고 삽시다>)
이 정도면 앞에서 내가 그의 책들은 수없이 서로 겹친다고 한 말이 실감날 것이다. 이런 반복 앞에서 나는 그가 '상호텍스트성'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까지 가졌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걸까? 분명이 내용이 겹친다는 걸 저자나 출판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겹치면 팔리지 않으리라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도 저자나 출판사는 그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분명이 이건 종이낭비인데도 말이다. 그건 분명 이렇게 만들어도 책이 팔린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아닌가? 출판사는 책만 팔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랬다치자. 자신이 이미 쓴 글 중에서 편집자가 알아서 뽑아 또 책을 내게 하는 저자는 도대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가? 어디다 써도 말이 될만한 구절들을 모아서 글을 만들고 그걸 다시 조금 변형해서 책으로 만들어도 되는가? 그렇게 해서 저서목록에 한 권을 추가하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이건 출판사와 저자가 종이장사에 나섰다는 증거밖에 안된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 뿐이다. '지적인 불성실.' 이건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안병욱의 에세이 4 권을 놓고 책마다 내용이 중복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면 이제 그의 책 한권을 놓고, 그 책 안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음을 밝혀 보이려 한다. 내가 거론한 책중에서 가장 먼저 나온 <지상>을 살펴보자.
이 책의 제목은 책에 실린 글 한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이 새로 쓰여진 것이 아님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다른 세 권도 마찬가지지만 안병욱의 글의 특징중의 하나는 격언이 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도 많고 동시에 같은 말이 여러차례 반복되고 있다. 본래 격언이라는 건 앞 뒤 문맥을 딱 잘라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 붙여도 말이 통하고 그럴싸해 보인다. 안병욱의 글들은 이 특징을 잘 구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내용을 말할 때에도 똑같은 격언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격언을 통해서 <지상>에 등장한 인물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좀 지루하지만 적어본다.
괴테,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맹자, 링컨, 프랭클린, 공자, 펄벅, 졸라, 비스마르크, 나폴레옹, 쉴러, 피히테, 키에르케고르, 루소, 파스칼, 제롬, 바이런, 스탈, 샤미소, 바스타, 브라우닝, 플라톤, 스탕달, 하이네, 프루스트, 크세노폰, 우나무노, 몽테뉴, 스위프트, 로댕, 생텍쥐베리, 시세로(어떤 글에서는 키케로라고 하기도 한다), 보나르, 워싱턴, 데모크리토스, 세르반테스, 에머슨, 칸포아모르, 앙드레 모로와, 베르그송, 에리히 프롬, 스피노자, 발자크, 니체, 키츠, 쇼펜하우어, 빈켈만, 셰익스피어, 안창호, 소포클레스, 로맹 롤랑, 슈바이처, 간디, 에디슨, 한스 카롯사, 밀러, 불바리톤, 핀다로스, 힐라리(힐라리 클린턴이 아니라 히말라야 등산가이다), 베토벤, 이순신, 멘스필드, 바울, 칼라일, 위고, 러스킨, 하이데거, 노자, 장자, 석가, 에피쿠로스, 디즈레일리, 헬렌 켈러, 크로포트킨, 마키아벨리, 다빈치, 케네디, 오르테가, 올코트, 미켈란젤로, 김활란, 단테, 파스칼. 내가 빠뜨린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자그마치 84명이다.
이 많은 인물들의 격언이 3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에 나온다. 이 정도면 수필집이 아니라 격언집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공자나 맹자, 노자나 장자 등이 인용될때면 그들의 말이 길게 인용된다. 수도없이 많은 고사성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격언, 고사성어가 이 책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등장한 것과 똑같은 격언이 다른 책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 책에서는 '독일의 시인 괴테는 이렇게 노래했다'로 쓰였으면 다른 책에서는 '독일의 어느 시인은 이렇게 갈파했다'로 쓰인다. 같은 책에서도 그런 식의 문장이 반복되는 건 물론이다.
격언과 등장인물의 반복에 이어 내용의 반복을 살펴보자.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샘터에서는 샘물이 사방에 철철 넘쳐 흐른다.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사랑의 태양이 있고, 사랑의 샘터가 있다.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의 태양을 받고 성장했다.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사랑의 태양이 있고 사람의 샘터가 있다.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의 태양을 받고 성장했다.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 넘쳐 흐르는 맑은 샘물을 마시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자라왔다."(p. 21) 고작 6줄의 문장 속에서도 똑같은 말이 반복된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말이 다른 글에서도 그대로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샘터에 샘물이 넘쳐서 주위에 철철 흐르듯이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도 따뜻한 물이 한없이 솟는다. 우리는 이 사랑을 먹고 자랐다. 우리는 이 사랑의 힘으로 성장했다."(p. 36) 이 한권의 책에서, 제목을 달리한 글마다 반복되는 구절들을 몇 개 적어본다. "행복은 만인의 간절한 원이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게 부족하더라도 만족하라." "도산선생은... 저마다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가져 보자고 말했다." "결혼은 인생의 엄숙한 선택이다. 자의에 의한 선택이건, 타의에 의한 선택이건, 중대한 선택이다." "결혼식은 결혼식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자는 적당하게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여성은 사랑하는 남성 앞에서 수치의 표정이 풍부해진다. 말할 때나 웃을 때에는 몸가짐 전체에 수치가 감돈다. 이것이 남성의 사랑을 더욱 자극시킨다." "괴테의 시 가운데 <앉은뱅이꽃의 노래>라는 것이 있다." "행복이란 단어는 인생의 사전에서 가장 큰 캐피털 레터로 써야 할 말이다." "사랑은 인생의 사전에서 가장 큰 대문자로 써야 할 단어이다." "20여년 전에 배운 중학교 영어 교과서의 삽화 하나가 생각난다. 어떤 교회를 짓는데 세 사람의 석공이 와서 날마다 대리석에 조각을 한다. 뭣 때문에 이 일을 하느냐고 물은즉, 세 사람의 대답이 각각 다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밀레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남자는 사업에 살고 여자는 애정에 산다." "칸트는 행복을 원하는 것도 좋지만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공자님 말씀'이 되풀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을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고 한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말이 다른 책에 토씨만 바뀌어서 또 나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책을 펼쳐봐도 새로울 게 없다. 결혼식 주례에서 하는 이야기는 어디에나 나온다. 어머니의 눈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수십년 전의 독일 신문의 설문조사 결과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인용된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계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으며 고아는 언제나 못된 심성을 가진 자들이다. 그가 보기에는 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사업에 살고 여자는 애정에 산다. 아무리 아파트가 많아도 우리는 흙을 밟아야 하고 슈바이처의 박애정신은 시도때도없이 실천해야 한다.
그가 쓴 책에는 그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흔적이 없다. 그는 불변의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아무 것도 새로 배우지 않아도 되는걸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