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일이지만,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집에서 받는 건 설날 아침의 세뱃돈밖에 없다. 차례상 차리는데 쓰시라고 나와 동생이 돈을 드리는 것과는 별개로 세뱃돈은 부모님의 기분 문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동생과 나는 엄마의 생활비를 드리고 있고, 엄마는 세뱃돈과 생일에 맛난 거 사 먹으라고 용돈을 주신다. (그러고 보니 김치며 반찬 등등도 보내주시는구나.)

 

그렇게 살아 왔으니 결혼을 한다고 해서 집에 손 벌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래 전부터 집을 옮기려고 했지만 전세가 빠지지 않다가 갑자기 집이 나가는 바람에 새 집을 구하게 되었고, 그 참에 아예 살림을 합치겠다고, 그러니까 신혼집을 꾸미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도 모든 준비는 당연히 나와 애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엄마한테는 이리저리 되었으니 이리저리 하겠다라고, 거의 통보에 가까운 보고를 드렸을 뿐이다. 물론 동생 결혼 때 말이 많았던 걸 감안해서 최대한 엄마 마음 상하지 않게 예쁘게 얘기했다. 엄마는 혼수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난 괜찮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께요. 나중에 이사 다 하고 나면 놀러나 오셔요. 라고 대답했다. 내쪽만이 아니라 애인의 부모님께도 마찬가지다. 처음 뵙는 자리에서(라고 해봤자 여태 그 한 번 외에 뵌 적도 없지만) 부모님께 어떤 도움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맏딸, 맏아들 결혼시키는 건데, 부모님들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안하는게 오히려 좀 섭섭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건 처음부터 확실하게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뉴스에서 결혼하는데 들어가는 평균 비용이 1억 3천이라는 통계를 봤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집을 얻어 살려면 그 정도 예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모든 비용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신혼 부부는 얼마나 될까. 지난 달 결혼한 친구는 일산에 32평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는데 당연히 남자 부모님이 해 주신 거였다. 내년에는 아예 집을 사 주신단다. 친구 쪽에서는 어머니가 나서서 모든 혼수를 꾸려 주셨다.(친구는 그 동안 번 돈을 몽땅 어머니께 드리긴 했다.)

 

주말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친구에게서 소식을 듣고 연락한 것인데, 애인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준다고, 소식을 전한 친구가 날 걱정하더란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려고 그러나 보지, 라고 대답했는데,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하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내가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뻔히 아는 것이 그딴 소리를 하다니. 하기야 저도 사는 게 힘드니 그렇게 기반 없이 시작해서 어쩌겠냐고 나름 나를 염려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32평 아파트에서 번듯한 살림 갖춰 놓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거, 부러운 일인가?

글쎄. 가진 게 많아 한꺼번에 다 하면 좋을 수도 있겠지만, 32평 아파트에서 시작하든 18평 연립에서 시작하든 내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내가 가진만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살면 되지 뭘 얼마나 욕심을 부릴까. 워낙 재테크니 뭐니 하는 것들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나랑 애인이랑 둘이 버는 돈도 적은 건 아니다. 곧 아파트를 사거나 부자가 되거나 하지는 못하겠지만, 책 사고 영화 보고 하고 싶은 거 할 만큼은 되는데 그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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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6-03-2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7평에서 시작했어요.
둘이서 좋기만 하다면 집 평수가 중요한것은 아니죠?
30평대에 살아도 부부싸움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예요.
축하드려요~~~~~~~~~~~~~~~~~~~~~


Koni 2006-03-20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께서 서운하시기도 하겠지만, urblue님 굉장히 멋지세요! 결혼은 부모님에게도 인생의 큰 이벤트라, 어른들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하시기도 하겠지만... 저도 urblue님처럼 결혼하고 싶어요.

blowup 2006-03-2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렇지 않다가도 주변 사람들의 걱정에 가끔 '내가 이상한 걸까' 싶기도 해요. 아이가 생기면 다른 의미의 경제 관념이 생길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죄책감 들지 않을 정도의 소비와 나눔을 중심으로 생각해요.

sudan 2006-03-2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깜짝. 대체 누가 뭐란다고 저런 제목을. -_-
그 정도면 훌륭하다 마다요. 보기에도 좋아 보여요. 말씀대로 하고 싶은거 하고 살면 되죠. (게다가, 서재방도 따로 있고.)

2006-03-20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6-03-20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크기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더라구요..^^
님보다 더 작은 집에서 시작한 부부는 점점 크게 불리면서 알콩달콩 살고 있고요
타워팰라스에서 시작한 제가 아는 어느 부부는 2년도 못되서 이혼했답니다.
부부간의 교감만 좋다면 표면적인 17평은 심리적인 타워펠리스가 될꺼라고
생각되요..^^

2006-03-20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리스 2006-03-2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7평을 71평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게 사랑의 힘이지요.
동시에 71평을 17평이 아닌 1.7평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게 불화란 것이죠.

조선인 2006-03-20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딱 18평 연립에서 시작했어요. 흐뭇 흐뭇.

urblue 2006-03-2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그러셨군요~ 반가워라. 수니님 부부처럼 결혼 10년 기념 파티, 이런 거 하게 될 날을 기다려야겠어요. 그땐 뭐 더 넓은 집에서 더 잘 살겠죠. ^^

냐오님, 엄마 말씀에 의하면 전 결혼을 너무 쉽게 보고 있답니다. ㅋㅋ 그치만 뭐 어려울 게 있나요. 예물이니 예단이니 이런 거 하나도 안 하겠다고, 예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하겠다고 결정만 내리면 그 다음에는 할 일도 없는걸요.

나무님, 죄책감 들지 않을 정도의 소비와 나눔이라니, 멋진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야겠군요! 친구가 걱정했다는 소릴 듣고는 좀 기분이 상했어요. 어떤 생각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왠지 서운하더라구요.

수단님, ㅎㅎ 깜짝 놀라시기는. 제 로망이 3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책방이잖아요. 이번참에 책방을 2개나 가지게 되어서 흐뭇합니다. 사이즈 작은 게 조금 문제지만.

숨은님, 알죠, 잘 사시고 계신 거. 저도 그렇게 살고 싶잖아요. ㅎㅎ
그러고보니 제 동생도 결혼할 때 집에서 좀 받긴 했습니다. 워낙 가진 게 없어놔서 말이에요. 그치만 녀석은 그 돈 엄마한테 갚는다고 합니다.

urblue 2006-03-2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심리적인 타워팰리스라니, 너무 멋진 말이잖아요. >.< 애인이 메피님처럼 절 떠받들어 주면 더 좋을텐데 말입니다. ㅋㅋ

숨은님, 그럼요, 그럼요. 마음도 가까이, 몸도 가까이 딱 붙어서 살 건데 집 넓으면 뭐하겠어요. 저도 열심히 잘 살겁니다. ^^

낡은구두님, <앙상블>이라는 만화가 생각나요. 사랑의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는 부부 얘기.. 아자!

조선인님, 오~ 동지가 또 계시는군요. 다들 이리 잘 살고들 계시니까 힘이 납니다. ^^

비로그인 2006-03-2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알아서 하는 결혼이라니 블루님 정말 멋지시네요..^^
저희는 18금반지 하나씩 나눠낀게 전부였답니다.독일이야 전세가 없고 지금도 제 집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침대하나 달랑 새로 사서 시작한 그 작은 월세집이 생각나네요..ㅎㅎ
누구보다 잘 사실 거로 보예요..^^

urblue 2006-03-2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대하나 달랑 사셨다구요? 그러고보면 저희는 이것저것 많이도 사고 있네요. ^^
제 친구 중에도 독일 남자랑 결혼한 애가 있는데, 신랑이랑 같이 한국에 왔을 때 결혼 반지라고 보여주는게 18K 금반지였어요. 그것도 이뻐보이기만 하던걸요.

로드무비 2006-03-2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고보니 결혼할 때 가전제품을 냉장고만 달랑 한 개 새로 샀었네요.
시계도 선배언니가 선물받은 걸 세트로 주어서 한 개씩 나눠 끼고.
반지 18K는 기본.
서재 자랑 자꾸 하시니 배가 살살 아파옵니다.=3=3=3

반딧불,, 2006-03-20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좋죠.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근데 살다보니 조금만 여유가 있었으면 하고 부러워합니다;; 속물 맞거덩요~~^^
그래도 믿음과 신뢰만 있으면 더 잘 살 수 있죠. 화이팅.

urblue 2006-03-20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처음에 홍대 앞에서 봤던 집들은 대개 14~5평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엄청 넓은 집이에요. ㅎㅎ

새벽별님, 님도 32평에서 시작한 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 그러니까, 하나도 안 부러워할래요~

로드무비님, 언제 서재 자랑 자꾸 했다고 그러시는지. ㅎㅎ
결혼 반지 찜해 놨어요. 18K 금반지로.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

urblue 2006-03-2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행복할게요. ^^

balmas 2006-03-2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평이면 넓은 거 아녜요??? ('')(..)('')

urblue 2006-03-21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넓은 거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흑흑...

urblue 2006-03-2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하지만 가진 책 다 가지고 오면 책방 두 개로도 모자란다구요. 게다가 제가 읽을만한 건 얼마나 될지...흠...

마태우스 2006-03-2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이 이렇게도 멋진 분이신지 미처 몰랐습니다.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꾸벅.

urblue 2006-03-2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도 멋진'이라니, 저도 몰랐는걸요. ^^a

2006-03-21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3-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멋지세요! 저두 소파도 길거리에 나온 걸 줏어오고 식탁도 남이 이사가면서 파는 걸 사오구 그랬어요. ^^ (앗, 좀 심했죠?)

urblue 2006-03-2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만난 다른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결혼한 동생이 주말마다 시부모님 댁에 가서 점심 저녁을 함께 먹는답니다. 예외가 없다네요. 결혼한지 벌써 몇년인데! 엄청 갑갑하겠지요. 그래도 싫다 소리도 못하고. 집도 사주고,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많은 굉장한 분들인 모양이지만. 물론 없는 집이면 없는대로 아쉽고 힘든 경우가 많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요.
애인도 장남이긴한데... 흠... 애인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뭐 나중에야 어떨지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에요. ^^;

urblue 2006-03-2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다녀가셨네요. 반갑습니다.
웬만하면 가진 걸로 어떻게 해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그러기도 쉽지 않네요. 자꾸 이거저거 사들이고만 있습니다. 에휴. 그나마 소파랑 식탁은 들여놓을 자리가 없으니 다행이지 뭐여요. ^^;;

클리오 2006-03-2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괜찮은데 그 놈의 집땜에.. 지금도 엄마는 한번씩, 남자가 집 한채 확 사줄 수 있는 재력이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하지만... 엄마는 돈보다 맘편한게 최고라는 사실을 잊으셨나봐요.. ^^

2006-03-21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eylontea 2006-03-22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남이 아니라 결혼은 내가 하는 거죠.. 나와 상대편만 오케이 한다면.. 서로가 바라보는 것이 같으면.. 그것으로 결혼 준비도 결혼 생활도 하는 것이죠..

urblue 2006-03-2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고맙습니다. 결혼하는데 이런저런 조건들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봐 왔어요. 전 그런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 같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행이지요. ^^

다시 숨은님, 음, 그러셨군요.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도 사생활이라는게 있는 거니까...
무거운 얘기 아니에요. 제가 결혼한다고 이런 저런 얘기 늘어놓을 때마다 이미 경험하신 분들이 다정한 충고와 조언을 해 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는걸요. ^^ 고맙습니다.

클리오님, 집 한채 확 사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마음 편하게 해 줄 능력이 있으면 된 거네요. ^^

동그라미 2006-03-2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마음 편하게 해주고 두사람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행복해요..축하드려요 잘사세요 이쁘게...

urblue 2006-03-2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그라미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