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귀경길에 차가 하도 많이 밀려 춘천 방향의 우회로를 탔다가 박수근 미술관이 근처에 있는 것을 알았다. 언제 한번 들르마 생각했지만 보통 하루 내지 이틀 집에 다녀오는 걸로는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이번엔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자그마치 9일의 휴가라 꼭 가보리라 생각했다.

설날, 동생네와 친구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서울로 돌아갔고, 혼자 남은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사촌 동생의 차를 끌고 <박수근 미술관>으로 향했다. 집에서 1시간 반 거리.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란 하늘에 따뜻하게 내리쪼이는 햇빛을 받으며 한산한 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기분에 김밥 싸올걸 그랬나,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춘천, 양구 방면의 국도로 들어섰는데, 표지판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두 번이나 미술관에 전화를 하고도 조금 헤맨 후에, 거의 2시간이나 걸려 미술관에 도착했다.


박수근 미술관
 



디자인 공모를 통해 2002년에 완공했다는 미술관은 아담하고 예쁘다. 따뜻한 햇살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 춥게 느껴졌는데, 파란 봄날 가면 훨씬 좋을 것 같다.

2004년 10월부터 2005년 3월 31일까지 <고향으로 돌아온 박수근의 작품들>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하고 있다. 입장료는 단돈 천원. 기념전시실에는 박수근의 연표와 사진, 생전에 쓰던 물품들, <굴비>를 비롯한 유화 석점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전시실

박수근은 지인들에게 보내는 연하장, 크리스마스 카드 등을 직접 목판화로 제작했다. 예쁘고, 소탈하고, 무엇보다 정성스러워 보인다. <미술>이라는 제목의 스크랩북에는 박수근이 잡지, 신문 등에서 오려붙인 각종 그림들이 있다. 루오의 <그리스도와 제자>, 세잔느의 <정물>,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 모딜리아니의 <나부> 등 다양한 서양 작품들과 중국 화가들의 그림, 불상 등이 보인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라는 제목의, 을지문덕의 활약을 그린 동화책도 보인다. 사진을 보니 젊은 날의 박수근은 상당히 미남이다. 부인에게 청혼을 한 편지는 애틋하고, 가족들과 찍은 사진이 많다. 꽤나 가정적인 사람이었나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창신동 집에서


굴비 (1962)

기획전시실에는 박수근의 습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독특한 화풍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다양한 습작들. 종이에 볼펜으로 혹은 연필로 슥슥 그린 단순한 스케치이지만 역시나 정겹다. <앉아있는 여인> 두 점과 <앉아있는 소 1, 2> <기름장수> <노상> 등의 제목이 붙은 그림들과 목판화 <농악> <두 사람>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데, 미술관 사이트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도록을 살걸 그랬나.


기획전시실





 









유화들은 따로 전시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번 전시는 이게 다란다. 여러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기획에 따라 일부 작품들만 전시한다고 한다.

왕복 3 시간의 거리인데, 이것만 보고 돌아가기는 어쩐지 아쉬워서, 쉽게 미술관을 떠나지 못했다. 미술관 앞 언덕에 올랐다가, 동상 앞에 가 섰다가, 미술관 옥상을 걷기도 하다가, 못내 서운한 채로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서울서는 편도 3시간이므로 따로 내려가기는 앞으로도 어려울 듯 싶다. 3월 이후에, 유화전이 열리면, 다시 집에 내려가는 길에 들러봐야겠다.

 

박수근 미술관 사이트 http://210.178.146.5/cyber/park/pa_ma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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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5-02-1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알어보고 가야겠군요 작년에 춘천엘 갔을때는 시간이 촉박해서 못 갔는데 최소 세시간 이상은 있어야 겠더라고요. 그때는 소양강에서 유람선을 탔는데도 시간에 맟출 자신이 없어 못 갔었는데 그렇게 찾어가서 볼것이 없다면 무척 허탈하겠는데요. urblue님, 설 잘 쇠셨죠? 그림 잘 보고 갑니다.

호밀밭 2005-02-12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수근 미술관이 있는 줄 몰랐어요. 나이가 들수록 박수근 그림이 푸근하게 느껴져서 좋아요. 굴비 그림도 딱 마음에 들고요. 아담하고 예쁜 미술관 꼭 가 보고 싶네요. 설 잘 보내셨나요. 따뜻한 주말 맞으세요.

urblue 2005-02-1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오랫만에 뵈니 반갑습니다. ^^ 집에서 소풍삼아 다녀오기는 좋은데, 서울에서는 역시 너무 멀어요. 습작들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 유화를 보고 싶었거든요. 그게 아쉽네요.

호밀밭님, 저도 그때 우회로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아마 몰랐을겁니다. 근처에 박수근기념공원도 있다고 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서 들르지 않고 그냥 돌아왔어요. 따뜻할 때 여기저기 들러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시기 전에 꼭 어떤 작품들을 전시하는지 확인하시구요. ^^

비연 2005-02-1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가고 싶은 곳인데...너무 멀어서 늘 망설이고 있죠.
urblue님 페이퍼 보니 더욱 맘이 가네요...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5-02-12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습작들만도 저리 좋은데, 유화를 못 보셨다니 무지 아쉽겠습니다. 저도 언제 꼭 가보고 싶은데요. ^^ 최근에 무슨 작품인가가 경매에서 박수근의 그림이 5억엔가 팔렸다는데, 5억이라는 돈과 그의 그림들은 얼마나 큰 차이인지 가늠할 길이 없었는데...

파란여우 2005-02-12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나무와 소녀와 여인네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은 집들을 자주 그린 박수근. 그의 도록만 해도 묵직한걸로 세 권이나 소장하고 있는 저도 한때는 물감을 두텁게 덧칠하는 그의 화법을 흉내내곤 했었지요. 유아블루님! 뜻깊은 명절을 보내셨군요.

2005-02-12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erky 2005-02-1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비. 저 작품 예전에 어디선가 봤었는데,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 그림이 박수근 작품이었군요.

urblue 2005-02-1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rky님, 박수근의 그림은 한 번 보면 잘 잊히지가 않아요. 박수근 미술관 사이트에 가시면 다른 그림들도 감상하실 수 있답니다. ^^

파란여우님, 그림도 그리시나요? 와우. 역시 예술가적 기질이 배어납니다. 이번엔 그냥 왔는데, 담에 유화전 할 때는 꼭 도록을 사야겠어요.

노웨이브님, 글쎄, 5억과 그림의 상관 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비연님, 맞아요, 서울서 가기는 너무 멀죠. 그래도 날 따뜻해지면 여행삼아 한번 다녀오세요. 춘천을 경유한 1박 2일 코스를 소개하던데 괜찮을 것 같습니다.

merced 2005-02-1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재밌었겠다. 길치 친구 말만 듣고 아무 때나 금방 갈 수 있는 덴줄 알았더니, 그렇게 먼 줄 몰랐는 걸. 9일의 연휴중에 아무것도 안 하고 친구들만 좀 만나서 수다 떨고 마냥 늘어져 있었어.... 400년전이라도 보러 갈 걸이라는 생각이, 여기 왔다가, 연휴 마지막날이 저무는 이제야 나네.... 알라딘에 책 살 거 없나 구경하러 왔다가 언니 서재가 있다는 게 생각나서, 들어와서 재밌게 보고 잘 놀다 가요.

urblue 2005-02-13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냐, 너?

balmas 2005-02-13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수근 미술관이 거기 있었군요. 정말 하루에 갔다오기는 힘들 듯 ...

merced 2005-02-1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누군지 알 수 없게 돼 있나? 하지만 그런 말투로 물어보면 무서운 걸.
다다를수없는나라, 코스미코미케 (아직 못 구했어여), 두개의 탑, 문연.... 이제 생각날까?

urblue 2005-02-14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라고 생각은 했다. 그렇게 많이 알려주지 않아도 안다구. ㅋㅋ 언제 전화해라.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