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31 매일 시읽기 94일 

그래도 사랑해 
- 행복한책읽기 

아들 사랑해
내 인생의 애물단지 그렇지만...

장난기 드글드글한 네 두 눈도
사랑해

베베거리며 떨어대는 네 입도
사랑해

찰떡 같이 쫀득쫀득한 네 볼도
사랑해

너무 짧아 소매 넘치는 네 두 팔도
사랑해

짤막해서 웃기고 안쓰런 네 손가락도
사랑해

언제나 불룩 솟아 있는 네 배도
사랑해

오동통하고 탱글탱글한 네 엉덩이도
사랑해

튼실하고 탄탄한 네 허벅지도
사랑해

알통이 불끈 솟는 네 종아리도
사랑해

방바닥을 쿵쿵 찍어대는 네 두 발도
사랑해

엄마는 네 모든 걸
사랑해

그러니까 말썽 좀 그만 피워!!!
그런 너도 또또 사랑해^^


2020년 마지막날 시는 무엇을 읽고 쓸까. 그제 도착한 책 김소영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 를 보고 떠오른 것이 6년 전 내가 쓴 저 글이었다.

나의 아들은 뱃속에서부터 나를 힘들게 한 아이였다. 힘듦의 종류와 강도만 다를 뿐, 이 아이는 해마다 내게 과업 같은 숙제를 내민다. ˝엄마, 이런 나도 감당이 되나요?˝ 약을 올리듯. 나는 아이를 낳기 전부터 믿는 바가 있었다. ˝신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아이를
주신다˝고. 신은 믿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회자되어온 저 말은 믿었고 저 말에 기대 지금껏 살고 있다. 나를 아는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 같으면 감당 못해. 너니까, 언니니까 가능해. 과연?

올초 코로나19가 터졌을 때만 해도 사스나 메르스 때와 비슷하리라 여겼다. 개학을 못하고 학교를 못 가는 사태가 이렇게까지 장기화되리라곤 꿈에도,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2020년 상반기는 식구들 삼 시 세끼 챙기고 온라인 수업에 당사자도 엄마도 적응하는 데 에너지를 소비한 듯하다. 내가 숨을 고르고 정신을 차린 건 한여름이 훌쩍 지나 선선한 바람이 찾아들 때쯤이었을 것이다.

인생에도 육아에도 이른바 ‘고비‘라는 것이 있다. 어떤 고비가 닥칠 때마다 그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준 것 중 하나가 책이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을 워즈워스의 시에서 처음 발견한 날부터 내 삶의 경구처럼 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폄하하는 시선들이 내게는 늘 불편했다.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면 ˝쓸데없는 소리˝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랬기에 나는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어른으로 크고 싶었다.

무너졌다. 내가 아들을 키우면서 알게 된 사실은 바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아이는 다르게 대해야 하고,
다르게 대하려면 왜 다른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육아서나 심리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절대원칙이 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기.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기. 저 시는 그런 마음에서 탄생한 것이다. 저 시를 쓴 날로부터 6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놀랍게도 아들은 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덩치만 커졌을 뿐.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어린이들의 진솔한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늘 우리 가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들어가며 8)

나의 아들은 내가 절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을 세상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어린이‘다. 이 아이 덕에 나의 세계가 넓어진다는 사실에 흐뭇해하며 의기양양해하던 때가 있었다. 코로나19는 그 득세도 꺾어 버렸다.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어린이라는 세계>>를 찬찬히 읽을 예정이다. 어린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와 숱한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거기에 ‘어린이‘의 위대함이 깃들어 있다.

‘사랑해‘는 언제 들어도 좋은가. 식상할 때도 오글거릴 때도 있지만 그런 느낌조차 사랑으로 덮는 한 해를 만들어볼까.

모두들 해피뉴이어!! 건강하세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1-01 0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이도 어린이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텐데, 그런 걸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지금 나이를 먹은 사람도 어린이였던 때가 있었는데...

저는 예전에 다른 거 거의 생각도 안 했어요 코로나19는 많이 걱정했군요 2021년에는 2020년보다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행복한책읽기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고 싶은 거 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1-01 08:44   좋아요 1 | URL
희선님두요. 같이 더 나은 해를 만들어보아요. 알라딘 친구 맺어 반가웠어요^^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130 매일 시읽기 93일

겨울 꿈 
- 이규리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불가능  
언제 어디서나 불가능한 가능 

갈 수 없어요 
가고 싶어요 

안녕 

용기를 내어 
죽자사자 뛰어왔는데 
여보 
이건 꽃이 아니잖아 

그토록 아무것도 아니었던 의문들 
이 간결한 근심들 

눈알을 버린다면 그때 꽃을 볼 수 있을 거라는데 

미안해 
당신을 버릴래 

부질없음을 부질없어하는 회오리 
꽃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어 

그리고 쏜살같이 먼 풍경이 되고 마는 북서풍 


2020년을 이틀, 더 정확하게는 하루하고 두어 시간을 남겨둔 12월 30일 수요일. 밤 아홉 시 30분. 내가 사는 곳 현재 기온 영하 11도. 한파가 몰려든 겨울밤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시는 이규리 시인의 <겨울 꿈>.

<겨울 꿈>은 첫 두 행이 시의 묘미를 여실히 보여준다. 압축과 응축의 미학. ˝언제 언디서나 가능한 불가능 / 언제 어디서나 불가능한 가능˝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나온 날들이다. 물론 그 날들로 절실히 가고 싶지는 않고, 어떤 날들은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꽃인 줄 알고 ˝죽자사자 뛰어왔는데˝ 꽃이 아니었어 라고 해서 무릎이 꺾였다. 궁금해 미칠 것 같았던 ˝의문들˝과 속이 타들어가도록 애태우던 ˝근심들˝이 그저 ˝간결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이었노라 해서 또 다시 무릎이 꺾였다. 허무하고 허무한데 ˝부질없음˝조차 ˝부질없˝다 해서 꺾인 무릎이 또 꺾여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꽃은 처음부터˝ 없었고,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듯한 ˝북서풍˝은 내 손에 잡히지도 못한 채 떠난 화살처럼 ˝먼 풍경˝으로 물러났다. 허무하고 또 허무해라.

한 해가 저문다. 올해 나는 무슨 꿈을 꾸었지. 꿈을 꾸기는 했던가. 생각해 보니 내가 꾸는 꿈은 꾸어봤자 이룰 수 없는 꿈임을 깨닫고 언젠가부터 꿈을 꾸는 것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듯하다. 그래도 살더라. 꿈을 꾸어도 살고, 꿈을 꾸지 않아도 산다면, 어느 쪽을 택해서 살까. 시를 읽고 긁적이기 시작한지 93일째. 이 모든 행위도 ˝부질없음˝의 회오리로 날아올라 아주 ˝먼 풍경˝으로 자리하다 기억 속에서조차 잊힐지 모른다. 그럼 어떤가. ˝부질없음을 부질없어하는 회오리,˝ 부질없음을 전복시키는 역설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꺾였던 무릎 우두둑우두둑 곧추 세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삐거덕거려도 길을 가야지. 꿈은 걷는 자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니.

겨울 꿈이 시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무민 가족과 크리스마스 대소동 + 무민 가족과 마법의 모자 + 무민 골짜기로 가는 길 - 전3권 무민 골짜기 이야기 시리즈
이유진 옮김, 토베 얀손 원작 / 어린이작가정신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격하게 소장하고프다. 울가족이 사랑하는 무민. 본다, 읽는다, 스민다, 가 바로 적용되는 무민. 울아들의 애장 도서들 중 하나. 새 시리즈 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130 #코스모스 대항해를 마치며 

우주를 글로 탐험하다 

2020년 11월 2일 ‘코스모스호 타고 히치하이킹 100일‘이란 거창한 이름 아래 여섯 명의 대원들과 글로 탐험하는 우주 대항해에 돌입했다. 대원들 중 한 명은 중도 탈락했다. 다행히 우주를 유영하지 않고 어딘가에 정착해 자기만의 항해를 이어가는 중이다. 나머지 다섯 명의 대원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의 간격을 너무 멀리 떨어뜨리지 않고 항해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2020년 12월 27일, 100일로 예정되었던 코스모스 대항해는 대원들의 열정과 성실 덕에 44일이나 앞당긴 56일만에 끝이 났다. 이 뿌듯함. 이 감격. 이 기쁨.

˝과학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쓰든 인류의 운명은 과학에 묶여 있다. 과학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과학은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것이다. 인류가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자연을 좀 더 잘 이해한 자들이 생존에 그만큼 더 유리하다.˝(25)

코스모스 1장에서 세이건이 한 말이다. 대항해 첫 날, 나는 저 글 옆에 이렇게 썼다. ˝재미 있기를 진심 바란다.˝ 세이건은 옳았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한 독자에게는. 나는 과알못이다. 과학계까진 아니어도 과학 서적에는 눈을 돌려볼까 생각하며 책을 뒤적거려본 적이 있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과학책은 정말 재미 없어! 이런 나에게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과학‘이란 세계의 문턱을 약간 낮춰준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왜냐.매 정거장마다 어라, 이건 뭐지 하며 예상치 못한 수확을 거두는 느낌이었고, 머릿속이 불룩불룩해졌다 꺼졌다를 수도 없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게 선사한 의외의 즐거움은 어렵기만 한 천문학 설명으로만 가득하리란 내 수준 미달의 어리석은 예상을 단칼에 쳐내고, 우주 연구에 관한 세네카의 글을 시작으로서양 철학, 동양 사상, 역사학, 사회학, 생물학, 화학, 고생물학, 수학 등등 온갖 지식에다 맛깔난 이야기들까지 곁들여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행성 지구의 크기를 정확하게 잰 에라토스테네스, 그는 레이철 카스 이전, 그것도 기원전 3세기에 시와 과학을 결합할 줄 알았던 작가였다.​알렉산더리아의 최고 자랑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었다. 이곳은 ˝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진정한 의미의 연구 현장이었다.˝(57)​

˝도서관 관계자들은 세상의 모든 문화와 모든 언어를 샅샅이 뒤졌다. 사람들을 해외로 보내서 책을 사들였고 장서를 확충해 갔다. 알렉산더리아에 정박한 상선은 관리의 검문을 받았는데, 검문의 목적은 밀수품 적발이 아니라 책 찾기에 있었다. 책 두루마리가 발견되면 즉시 빌려다가 베낀 뒤, 사본은 도서관에 보관하고 원본은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 . . . . 알렉산더리아 도서관에는 일일이 손으로 쓴 파피루스 두루마리 책이 50만여 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8)

이 모든 이야기가 1장에 등장한다. 과학책에서 책과 관련된 이런 흥미진진한 역사를 듣게 되다니, 1장부터 나는 <<코스모스>>에 매료되었다. 코스모스는 과학적 사실만이 아니라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이것은 글을 아름답게 풀어나간 세이건의 문장력일 것이다.아무리 머리 굴려도 이해 못하겠는 건 저만치 밀쳐놓고 내 이해 범위 안에서의 과학책 재미나게 읽기가 가능하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일깨워 준 책. 하늘의 별이 된 세이건은 또 한 명의 추종자가 탄생한 것을 보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리라.

나는 세이건이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작가는 글로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볼 때, 나는 세이건이 세상과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가 좋았다. 긍정적이면서 반성적이다. 그는  1장에서  강조한  과학의 자정 능력을 마지막장에서 다시 소환한다.

˝과학하기 규칙. 첫 번째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란 가정은 모조리 철저하게 검증돼야 한다. 과학에서 권위에 근거한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있는 그대로 이해돼야 한다.˝(660)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발견한 것이 곧 진리라고 건방을 떨지 않기. 의심하기. 수정하기. 또 탐구하기. 이건 과학 이전에 내가 아는 인문학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이 은하처럼 너무 멀게만 느껴지지 않고 우리 태양계 달이나 행성들처럼 조금 가깝게 여겨졌는지 모르겠다. 세이건은 평화주의자이자 박애주의자이다. 그는수소의 재에서 시작한 인류가 광막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지금 여기까지 걸어온 지난한 역사를 알기에, 우리인간이 희귀종이자 멸종 위기종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함부로 미워하거나 죽이지 말자고 말한다. 미운 마음이 드는 것이야 어찌할까만, 미움이 차별과 박해와 학살로 이어지는 짓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이건이 우리에게 하는 마지막 말은 이렇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675)

세이건 덕에 한층 더 귀중해진 나는 나와 같은 과알못 지인들에게 <<코스모스>> 전도사 행세를 할 생각이다. 코스모스 덕에 유성도 육안으로 보았고, 목성 토성 대근접은 유튜브로 시청했으며, 며칠 전에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스페이스오딧세이까지 찾아 보았다. 내가 과학으로 다가가고, 과학이 내게로 다가와, 내 세상도 조금 넓어졌다. 우주처럼 광대하게 ~~~~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실이 젤 뿌듯하다. ^^​
^^

마지막으로 초딩님이 내 댓글에 달아준 영상을 첨부한다. 

https://youtu.be/8YfolfC4K_g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20-12-30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스모스 중도 탈락 4회 경험자 syo가 찬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0-12-31 00:11   좋아요 0 | URL
축하 감사요. 마음 어수선할 때 이런 것까지 살뜰히 챙기다니. 몸둘 바를^^;;;

라로 2020-12-30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인체의 과학에 도전해 보세요!! 저는 해부학 책 읽고 과학이 너무 좋아졌어요!!😅

행복한책읽기 2020-12-31 00:13   좋아요 0 | URL
윽. 인체까지. 라로님 그곳은 은하계보다 더 복잡한 우주 아닌가요? 그 세계를 좋아하고 누비는 라로님이 그저 존경스러워요^^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129 매일 시읽기 92일 

정말 부드럽다는 건 
- 이규리 

토마토를 구워보면 
구울수록 더 부드러워져서는 
눈물이 많아져요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후의 모습들은 저렇게 무른 모습이 좋겠어요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하고 
당신은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니 

구운 토마토를 먹으면 
눈가가 붉어져서는 
문득 오래전 잊고 있던 내용을 
돌아다볼 듯해요 

제 안의 독소를 빼내주시니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8일 만에 다시 펼친 이규리 시집. 시집이 보이지 않았다. 또 엄한 데 두고 기억 못하는 내 머리를 탓하며 추적을 해보았으나 시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겨. 그러다 오늘, 책들이 쌓여 있는 아들 책상을 정리하는데, 넙적한 교과서와 교과서 사이에 옅은 보랏빛의 이규리 시집이 숨어 있었다.아니. 시집 스스로 숨어 든 게 아니라 엄마한테 뿔 난 아들이 엄마가 좋아하는 책을 숨겨 복수전을 펼친 것이었다.

나는 보들보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고도 싶었다. 속은 그득하고 단단하면서 겉은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 조금은 되어 가고 있다고,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자부심 같은 것이 차오를라치면 어김없이 찍어 내리는 존재가 있다. 바로 아들이다. 어제와 오늘. 아들은 ˝구운 토마토˝ 대신 엄마의 야단을 먹고 ˝눈가가 붉어져˝서는 누구 말처럼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눈물 섞인 비명을 내뱉고는 토라져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럴 때면 나는 ˝하염없이 무너˝져 내린다.

구운 토마토를 먹어본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 토마토를 구우면 독소가 제거된다는 기사를, 혹은 방송을, 읽었거나 시청한 적이 있다. 나도 구우면 내 안의 독소가 빠지려나. 물러지려나. 부드러워지려나. 힘쓸 일이 없어지려나. 나를 구워 내 ˝바깥으로 놓아보˝면 그게 가능하려나.

˝정말 부드럽다는 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