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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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9 매일 시읽기 92일 

정말 부드럽다는 건 
- 이규리 

토마토를 구워보면 
구울수록 더 부드러워져서는 
눈물이 많아져요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후의 모습들은 저렇게 무른 모습이 좋겠어요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하고 
당신은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니 

구운 토마토를 먹으면 
눈가가 붉어져서는 
문득 오래전 잊고 있던 내용을 
돌아다볼 듯해요 

제 안의 독소를 빼내주시니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8일 만에 다시 펼친 이규리 시집. 시집이 보이지 않았다. 또 엄한 데 두고 기억 못하는 내 머리를 탓하며 추적을 해보았으나 시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겨. 그러다 오늘, 책들이 쌓여 있는 아들 책상을 정리하는데, 넙적한 교과서와 교과서 사이에 옅은 보랏빛의 이규리 시집이 숨어 있었다.아니. 시집 스스로 숨어 든 게 아니라 엄마한테 뿔 난 아들이 엄마가 좋아하는 책을 숨겨 복수전을 펼친 것이었다.

나는 보들보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고도 싶었다. 속은 그득하고 단단하면서 겉은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 조금은 되어 가고 있다고,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자부심 같은 것이 차오를라치면 어김없이 찍어 내리는 존재가 있다. 바로 아들이다. 어제와 오늘. 아들은 ˝구운 토마토˝ 대신 엄마의 야단을 먹고 ˝눈가가 붉어져˝서는 누구 말처럼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눈물 섞인 비명을 내뱉고는 토라져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럴 때면 나는 ˝하염없이 무너˝져 내린다.

구운 토마토를 먹어본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 토마토를 구우면 독소가 제거된다는 기사를, 혹은 방송을, 읽었거나 시청한 적이 있다. 나도 구우면 내 안의 독소가 빠지려나. 물러지려나. 부드러워지려나. 힘쓸 일이 없어지려나. 나를 구워 내 ˝바깥으로 놓아보˝면 그게 가능하려나.

˝정말 부드럽다는 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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