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8 매일 시읽기 51일
절망은, 없다
- 황인숙
장이 파할 무렵.
번들거리는 판대기 위의 돼지족발에 앉아 있던
희망이 500원어치씩 희망꾼들 안주로
야금야금 삼켜지고
그래도 잔뜩 남은
희망이 다른 희망들과 함께
보따리로 꾸려진다.
꾸려진 희망들은 저마다 잠을 찾아가고
안 꾸려진 희망들은
정류장 근처에 몰려 아우성친다.
beat it! beat it! 튀는
덤핑 희망 카세트 노래에 맞추어
희망이 도처에 넘치고 있다.
하청받은 희망. 급조된 희망.
수요 없는 희망. 정비 불량의 희망.
공장도 가격의 희망. 썩어나는 희망.
썩지도 못하는 희망.
무단 복제 해적판 희망. 수입된 희망.
S.F 희망. 금메달급 희망이
진눈발과 함께 지분거리고,
희망은 돼지족발 위에 앉아 있고
500원어치씩 희망꾼들 끼니로 삼켜지고
그래도 남은 희망은
다른 희망과 함께 보따리로 꾸려지고
그래도 안 꾸려진 희망은
위생적인 어둠 속에서
비위생적인 불빛으로 흐르고
어떤 희망은
일렬로 세워진 리어커 아래
모로 쓰러져 잠이 들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면
그것은 흠뻑 정전기를 띠고
묻어나온다.
희망은 막차 운전대 위에 앉아 있고.
황인숙 시인의 첫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를 오늘까지만 읽기로 한다. 여전히 잘 읽히지 않는다. 이 시집에서 가장 발랄한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를 제외하곤 시들이 대체로 난해하다. 내 이해력이 고작 이 정도인가 하는 자괴감 같은 것이 파도처럼 밀려오는가 싶다가, 위의 시 ‘절망은, 없다‘에서 그 파도가 쑤욱 밀려났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우리 대다수의 삶은 다 고만고만하다. 어릴 적엔, 또한 젊을 적엔(지금도 어르신들이 보는 나는 젊다) 뭐든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노력만 한다면.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건 이십대 중반에 깨달았고, 노려한 꿈이 좌절돼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서른 넘어 느꼈다. 뭔가를 희망한다면.
‘절망은, 없다‘에는 희망들로 넘쳐난다. 돼지족발 위에도, 덤핑 카세트 위에도, 막차 운전대 위에도. ˝하청받은 희망. 급조된 희망. / 수요 없는 희망. 정비 불량의 희망. / 공장도 가격의 희망, 썩어나는 희망/ 썩지도 못하는 희망./ 무단 복제 해적판 희망. 수입된 희망.˝
온갖 것에 ‘희망‘이란 딱지가 붙는 건 희망할 것이 거의 없다는 역설의 표지이다. 희망값은 500원. 500원치 희망은 그 양과 질이 어느 정도일까. 아주 거창한 희망은 아니지 않을까. 돼지족발을 안주 삼아 술잔 들이키는 이들의 희망이란 그저 삼 시 세 끼 잘 먹고, 자식새끼 잘
건사하고, 하루하루 500원이라도 모아 내 집 장만할 수 날이 아닐까.
‘희망 고문‘은 말 그대로 고문이 될 수 있다. 시칠리아 라는 섬이 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끼어 있는 이 섬은 두 나라간 전쟁이 터질 때면 반드시 거쳐가는 정류장 같은 곳이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시칠리아는 두 나라의 잦은 싸움으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꼴이 되길 십상이었다. 그래서 이 나라에 퍼지게 된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내일은 더 나빠질 거야.˝
많은 이들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바란다. 시칠리아에서는 그런 내일을 꿈꾸기 힘들었다. 하여 그들은 내일을 버티기 위해, 저 말을 만들어냈다. 오늘이 된 내일이 어제보다 나쁘지 않으면 살 만했기에. 저 속담에는 시칠리아인들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들어 있다. 내일이 더 나쁠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살으라는. 다행히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진다면 하늘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살으라는.
‘절망은, 없다‘는 ‘절망은, 있다‘ 절대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로 읽힌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절망이 날마다 문을 두드리고 방 안으로 쳐들어온다. 인생이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받아들이면 삶에 찾아드는 이런저런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견디기가 조금 낫다. 그래서 나는 ˝내일은 더 나빠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산다.
˝모로 쓰러져 잠이˝ 들어 있는 희망. 주머니 깊숙이 들어 있는 희망. ˝손을 빼면˝ ˝정전기˝ ˝묻어나오는˝ 희망. 절망의 다른 이름은 희망. 절망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절망이 온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희망이란 놈은 ˝막차 운전대 위에˝ 간당간당하게라도 앉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해도, 절망만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