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6 매일 시읽기 69일 

귀띔
- 안도현 

길가에 핀 꽃을 꺾지 마라 
꽃을 꺾었거든 손에서 버리지 마라 
누가 꽃을 버렸다 해도 손가락질하지 마라 


안도현 시인이 8년 만에 낸 시집의 제목은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이다. 시집의 3부 <식물도감> 의 한 부분에서 이 제목을 따왔다.

능소화가 어떤 꽃인가 찾아 보니, 여름에 곧잘 눈에 띄던 주황색 꽃이다. 왕의 성은을 입은 궁녀가 두 번 다시 자신을 찾지 않는 왕(이런 왕이 어디 한둘이었을까)을 그리워하다 기다리다 병이 들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가 묻힌 자리에 꽃이 피어 담장을 타고 오른 것이
능소화라고. 간절한 그리움은 그렇게 타고 오르게 만든다. 이 전설로 능소화의 꽃말은 그리움과 명예, 기다림이 되었다고. 그리움과 기다림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명예에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지 못한 기간 동안 왕을 기다리는 궁녀처럼 자신에게 오지 않는 시를 그리워만 했던가 보다. ‘시인의 말‘이 조금 아프다.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누군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고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 말하는 사람일 뿐, 내가 정작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대체로 무지몽매한 자일수록 시로 무엇을 말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

˝시로 무엇을˝ 말하려 하지 않겠다면 시를 대체 왜 쓰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가, 시인의 속뜻은 우러나는 시가 아닌 쥐어짜는 시를 쓰지 말라는, 시인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귀띔>은 안도현 시인을 유명하게 만든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연상시키는 잠언 같은 시다. 두 시는 시인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담고 있다. 그 무엇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시인의 말> 마지막 문장이 인상 깊다. ˝나무는 그 어떤 감각의 쇄신도 없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안도현 시인이 이 시집에서 ˝어떤 감각의 쇄신˝으로 시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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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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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5 매일 시읽기 68일

오늘 Today 
- 메리 올리버 

오늘 나는 낮게 날고 있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모든 야망의 주술을 잠재우고 있지. 

세상은 갈 길을 가고 있어, 
정원의 별들은 조금 붕붕대고, 
물고기는 뛰어오르고, 각다귀는 잡아먹히지. 
기타 등등.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 쉬고 있어, 
깃털처럼 조용히. 
나는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사실은 굉장히 멀리 
여행하고 있지. 

고요. 사원으로 들어가는 
문들 가운데 하나. 
Stillness. One of the doors​into the temple. 


메리 올리버가 일흔일곱의 나이에 낸 시집 <<천 개의 아침 A Thousand Morning>>을 열흘 만에 다 읽었다. 모두 서른여섯 편. 한 권의 시집에 실린 시들이 모두 좋기는 거의 처음인 듯하다. 하루 몇 편씩 시들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점은 이렇다.

차분한 즐거움, 조용한 쾌활함, 빛나는 통찰력, 스미는 행복감. 

메리 올리버는 예술가들의 고향이라는 프로빈스타에서 반평생을 살았다지.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가보지 못할 그곳은 풀과 나무와 새와 바다와 물고기 등등 온갖 생명체로 넘쳐나는 곳이라지. 시인의 눈은 세상에 대한 환희로 반짝거리고 시인의 뇌는 환희에서 탄생한 통찰로 번뜩인다. 번역도 빛난다.

˝정말이지 개미는 활기가 넘친다니까! 
발에 밟히면서 얼마나 법석을 떠는지 봐.˝(<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개미는 시인 자신 같다. 사는 동안 누구 ˝발에 밟히˝지 않고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밟히고 찢겨도 ˝활기˝를 잃지 않는 것, ˝쾌활하게˝ 살아가는 것, 그런 힘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나? 메리 언니의 경우에는 자연이다. 자연은 또한 신이다. 신은 도처에 있다. ˝먼지 속˝ ˝꽃밭˝ ˝바다˝ ˝섬˝ ˝얼음의 대륙들˝ ˝모래의 나라들˝에 (<아름다운 장소들로의 여행에 대하여>). 나는 무신론자지만 자연의 경이를 접할 때면 조화가 넘치는 세상을 창조한 그 누군가가 꼭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소우주라는 생각이 든다. 메리 올리버는 그런 소우주들의 세계를 시로 그려냈다. 경쾌하나 경박하지 않게. 유쾌하나 유치하지 않게. 심오하나 심각하지 않게.

시들을 읽는 동안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 워즈워스, 코울리지, 키츠, 셸리가 떠올랐다. 대학원 시절 그들의 시들을 읽는 동안 느꼈던 감흥이 되살아나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빛 조각들이 얼마나 눈부신지, 비 온 뒤 물기 머금은 초록빛은 또 얼마나 찬란한지를 그들은 노래했었다. 그들의 노래 덕에 나는 산과 숲에 들어섰을 때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코를
크게 벌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자연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그들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메리 올리버는 낭만주의 시인들의 정서를 따르되 감정의 과잉에 빠지지 않는다. 환희에 젖어들되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어떻게 가능하지 하는 의문이 들만큼. 시인의 젊은 시절 시들이 궁금해질 만큼.​

1935년생인(우리 엄마보다 한 살 적다) 메리 올리버는 2019년 1월 19일 여든세 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나는 나의 개 퍼시를 생각하게 될 테니까>라는 시는 시인이 꼭 퍼시처럼 살다 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는 병이 날 때마다 이겨내고 또 이겨냈으니까,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이겨내다가 떠났으니까. 

그는 엄숙함과 익살스러움의 혼합체니까.˝  

나는 풍진 세상을 견디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는 ‘유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메리 언니는 고개 숙이지 말아야 할 것에 고개 숙이지 않는 ˝엄숙함˝과 나를 좌절시키는 것에 좌절하지 않으려는 ˝익살˝을 동시에 지닌 시인이 아니었을까. <나의 개 퍼시 . . >에서 시인은 말한다. ˝나는 구름 속에서 그의 형상을 자주 보고 그건 나에게 끊임없는 축복이니까.˝ 바다 건너 한 독자가 이 시구를 빌어 하늘의 별이 된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는 당신의 시집에서 당신의 형상을 자주 볼게요. 그건 나에게 끊임없는 축복continual blessing입니다.˝

오늘, 나는 이 축복을 누렸다. 아들과 함께 뒷산을 산책하며 알록달록 치장을 벗어 던진 가난한 나무들과 흰구름들 사이로 떨어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열한 산 아들은 늘 내게 말한다. ˝엄마 늙지 마요, 할머니가 되지 마요.˝ 나는 이제부터 메리 언니가 쓴 시를 비틀어 답해주리. ˝너는 자랄 거고 / 그렇게 되려면 / 나는 늙어야만 하고 / 그다음엔 죽을 거야, 그리고 그건 / 네 탓이 아니야.(원문은 ‘네 탓이 될 거야˝ <붕, 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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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0-12-06 14:35   좋아요 0 | URL
떠남은 늘 새롬을 선사하는 듯해요. 일어나 떠나시라, 권합니다요~~

라로 2020-12-06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부터 메리 올리버 팬이지만 행복한책읽기 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놓쳤던 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너무 읽고 싶어졌어요!! 메리 올리버는 돌아가신 제 친정 엄마보다 5살 더 많으신데 더 오래 사셨네요...... 조용한 쾌활함이라니 넘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메리 올리버!!😍

행복한책읽기 2020-12-06 14:41   좋아요 0 | URL
저는 올해야 메리 언니를 알게 됐어요. 엄마뻘이나 언니라고 할라고요.ㅋ 산문집보다 시집이 더 좋네요. 라로님 어머님은 멀리 떠나셨군요. 제 엄니는 기억의 끈을 줄이면서 이승의 끈을 붙잡고 계세요. 코로나로 자주 못봐 마음이 ㅠㅠ 해요
 

20201204 매일 시읽기 67일 

소란 
- 새얼백일장 중등부 시 차상 

왁자지껄 소란함도 잠시 
선생님께서 전체 무음을 누르시면 
화면 속의 친구들은 
차츰 턱을 괴고 점점 엎드리고 
화면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발표 시간이 되어 
선생님께서 전체 무음 해제를 누르셔도 
화면 속의 친구들은 
여전히 무음 속에 갇혀서 
좀처럼 소란함을 찾기 힘들다 

난리 법석 쉬는 시간이 그립다 
화상 수업 쉬는 시간이 되면 
화면 속의 친구들은 
이름이 쓰여진 검은 화면을 띄운 채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코로나 19 시대의 수업 풍경이, 한 단면이 선히 보인다. ˝난리법석 쉬는 시간이 그립다˝는 구절에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대개 소란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한다. 세상에 나와 있으면 시끌벅적하니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잠적해 오롯이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코로나 대유행은 전세계인들에게 그런 시간을 강제로 제공했다. 다만, 우리집은 아이들이 거의 집을 떠나질 않아 소란스러울 때가 많다. 밥 먹어! 핸드폰 그만! 숙제 해! 이런 독촉에 이어지는 대답들은 거의 비슷하다. 10분만! 이것만 하고! 아이 진짜! ㅡㅡㅡ나야말로 아이고! 으으으!

​새얼백일장은 1986년 제1회 백일장을 시작으로 전국 최대 규모로 성장한 순수문예백일장이라고 한다. 제35회 백일장은 코로나 19로 야외가 아닌 우편을 통한 비대면 작품 공모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고등부 장원과 차상 수상자에겐 학업장려금도 제공되고 수시 전형대학 특별 전형 혜택도 주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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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김지하 지음 / 아킬라미디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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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매일 시읽기 66일  

그 소, 애린 50 
- 김지하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물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1986년 실천문학사에서 첫 출간된 김지하 서정시집 <<애린 1,2>>는 90년대 솔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가 품절되었다. 현재는 아킬라미디어에서 2016년 1,2권을 묶어 출간된 판본이 있다. 2016년도 판은 개인적으로 겉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린‘이 대체 무슨 뜻인가 했더니, 1권 <간행에 붙여> 에서 시인이 친절히 설명해 준다. 

˝모든 죽어간 것, 죽어서도 살아 떠도는 것, 살아서도 죽어 고통 받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한 진혼곡이라고나 할까. 안타깝고 한스럽고 애련스럽고 애잔하며 안스러운 마음이야 모든 사람에게, 나에게, 너에게, 풀벌레 나무 바람 능금과 복사꽃, 나아가 똥 속에마저 산 것 속에는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매순간 죽어가며 매순간 태어나는 것을. . . . / 아직도 바람은 서쪽에서 불고, 아직도 우리는 그 바람결에 따라 우줄우줄 춤추는 허수아비 신세, 허나 뼈대마저 없으랴. 바람에 시달리는 그 뼈대가 울부짖는 소리 그것이 애린인 것을. . . . . . / 애린은 한 권의 시 묶음이기도 하다. 부디 모두 애린이어라!˝

<<애린>>은 아린 마음들을 노래하고 있기에 읽는 독자도 덩달아 마음이 애린다. 몸도 마음도 어디 딱히 둘 곳이 없을 때, 그래서 삶이 참 외롭고 쓸쓸하다 싶을 때, 펼치면 좋은 시집이다. 슬픔은 슬픔으로,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애린(愛悋)의 한자어 뜻은 아깝게 여김이다. 시인이 이 의미로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나를 아깝게 여기고 사랑하라! 이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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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2 매일 시읽기 65일 

그 소, 애린 4 
- 김지하 

외롭다 
이 말 한 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라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 가는 빗살 
빗살 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난날들 스쳐 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 건넬 이 이 세상엔 이미 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질 것 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진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 자락 
이리 외롭다. 


어제 메리 올리버의 <정원사>를 읽다 떠오른 김현 선생의 문장, 더 정확하게는 김지하 시인의 문구 때문에 내 집 책꽂이에 꽂혀만 있던 김지하 서정시집 <<애린>> 둘째권을 펼쳤다. 이 시집은 김지하 시인이 마흔여섯 되던 해인 1986년에 출간되었다. 나는 이 시집을 길에서 발견했다. 누군가 이사하며 폐품으로 쌓아올려 놓은 책들 사이에서 찾아냈다. 언젠가 읽으리라 생각하며. 그 언젠가가 오늘이 되었다.

<<애린>> 둘째권은 <소를 논함> <그 소, 애린> <그런데 저쪽에서> 총 3부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그 소 애린>은 50편의 연작시이다. 그 중 몇 편을 읽었는데, 흠, 물리적 감옥을 나온 시인이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김현 선생은 이 시집을 두고 ˝마음의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일기˝라고 썼다.(<<행복한 책읽기>> 105쪽)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쓰리다. 누구에게도 고백하기 어려워 더 쓰리다. 들어줄 이가 마땅치 않아 시인은 ˝외롭다˝고 허공에 대고 말한다. 허공을 바라보니 ˝가느다란 햇살들이˝ 허한 속을, 쓰린 속을 칼날처럼 베고 지나간다. 아, 더 아프다. 인생 중반이 넘어가면 삶은 참 헛헛해하고 쓸쓸해진다. 시인의 말따나 ˝아무것도˝ 딱히 쥐어지지 않고 ˝그리움마저˝ 끊어지곤 한다. 중년의 쓸쓸함을 나는 다음 시에서 더 진하게 느꼈다.

<그 소, 애린> 6
아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날 우습게 알기 시작했고
아이들마저 이제는 말 대답이 느리다
아무런 노여움도 슬픔도 없이
머얼건 애들
눈자위 건너다보는
내 눈자위에 걸린 머얼건
저 낮달
한낮 이 머얼건 쪼각달.

조각달이 아니고 ˝쪼각달˝이라니. 시인의 마음이 쪼각쪼각 찢겼나 보다. 찢긴 속을 무엇으로 꿰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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