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7 #시라는별 72 

이 시대의 사랑 
- 최승자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어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는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 년 하늘 빛이 무거워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내가 최승자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작년 늦가을 안도현 시선집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에서였다. 그 시선집에 실린 최승자 시인의 <개 같은 가을이>는 미친 개가 사람을 덥석 물기라도 하는 듯 내 마음을 덥석 물었더랬다. 그 길로 나는 시인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을 구매해 일주일동안 읽었다. 시집을 관통하는 시인의 서글픈 내적 정서가 내 마음을 천둥처럼 크게 울렸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개 같은 가을이> 중) 

안도현 시인은 이 강렬한 시구를 두고 ˝이 도발적 직유 하나로도 최승자는 시인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최승자는 시인이다. 천상 시인이다. 그런데 가난한,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한 시인이다. 그것도 모자라 게으르기까지 한 시인이다.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앞길 막막한 시인. 그런 시인이 몇 년만에 시집 대신 복간 산문집으로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긴 손가락에 담배 끼워 입에 문 채 연기를 피워올리는 나이 든 시인의 모습이 너무 반가워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부터 냉큼 사서 틈틈이 읽었다.

산문집 2부 <양철북 유감>이란 꼭지를 읽다, 아, 시인의 데뷔작이 이런 배경으로 탄생한 거였구나를 깨닫고책꽂이에서 『이 시대의 사랑』​ 을 꺼내 다시 읽었다.

[1975년 1월, 졸업을 한 달쯤 앞둔 대학생 청년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밤에 애인과의 데이트 후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노상에서 체포되었다. 뒤에 옮겨 적은 글들은 간첩 혐의로 체포된 그 청년이 1975년 5월 자신의 독방 안에서, 자신에게 차입되었던『양철북』​​이라는 책을 반환하면서 그 뒤표지 안쪽에 편지처럼 써넣은 글이었다. / 그리고 그 책을 차입해주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번호가 매겨진 부분은 다음 차입시에는 그 책들을 넣어달라는 뜻이고, 나머지 부분은 자신의 심경을 시처럼, 넋두리처럼 적어본 것이리라. 1975년은 그 청년에게는 물론
내게도 엄청난 양의 절망의 피를 흘리도록 강요했던 한 해였다(그때 그 절망적인 체험의 한가운데서 나는 내 데뷔작들 중의 하나인 <이 시대의 사랑>이라는 시를 썼고, 다시 7년 뒤 그때의 체험을 뒤돌아보며 <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시를 썼다.)](115쪽)

간첩 혐의로 체포된 이십대 청년이 차가운 독방에 갇힌 채 『양철북』 뒤표지 안쪽에 써넣은 글은 이것이었다. ​

[다섯 자 여덟 치 / 내 뼈를 누일 곳 없어 / 빗발 스며드는 고분 속에 누웠다. / 곰팡의 색깔은 요염하고 / 그 속에서는 역사의 냄새가 난다. / 75년 5월.]

최승자 시인이 <이 시대의 사랑>이라 썼던 저 시대의 청년들은 ˝발이 묶인 구름˝으로 ˝밤마다 복면한 바람˝의 호출을 받고 시대의 ˝뜨거운 암호˝를 해독해 나갔다. 모든 젊은이가 그리 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저 연인들은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풀어 보려 애쓰며 살았고, 살아냈다.

25세 데뷔 시인이 달콤하거나 아름다운 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45년간 살아낸 후 70세 할머니 시인으로 돌아와 말한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인인가. 
그만 쓰자. 
끝. 

시인은 고작 38세의 나이에 스스로를 ˝메마른 불모의 시인˝이라 불렀다.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불모의 딱딱한 뼈다귀만을 내놓는 시인˝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잎사귀 떨군 채 가녀린 몸뚱이 하나로 시린 겨울을 버텨내는 나무들이 기어코 꽃봉오리를 밀어올리듯, 천상 시인 최승자가 푹푹 고으면 구수한 맛을 내는 찐한 뼈다귀 국물맛 시로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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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7 1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뼈다귀! 국물맛!!!같은 시인의 산문과 일기! 책읽기님이 포착 하신 앙상한 나뭇가지 이토록 추운 겨울 이겨내고 봄날 새싹을 돋게 되겠죠. ^^

행복한책읽기 2021-12-27 23:53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새싹처럼 최시인이 시를 틔웠으면 좋겠어요. 시로 병을 치유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Falstaff 2021-12-27 13: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980년대에 <이 시대의 사랑>을 읽었고 시집 속에 나오는 시를 열 편 정도 외웠던 거 같습니다. 이젠 거의 다 잊었지만 한 번 읊어볼까요? 물론 너무 많이 틀릴 겁니다. 세월이 있으니까요.

197X년 우리들의 사랑 -아무도 그 시간의 화상을 지우지 못했다-
몇년 전 제기동 빈 거리엔 먼지들만 횡행했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시궁창에 빠진 헤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고. 제대하여 늙은 복학생들은 아무 여자하고나 장가가버리고 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약혼해버리고 착한 아이들은 알맞은 향기를 내뿜으며 시들어갔다. / 어느덧 방학이 오고 잠이 오고 깊은 눈이 왔을 때 제기동 빈 거리는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로 진흙탕을 이루었고, 우리는 잠 속에서도 ˝사랑해, 죽여줘˝라고 잠꼬대를 했다. 향유고래 울음소리 같은 밤기적이 울려퍼지고....

아이고, 모르겠습니다. 이젠 도통 기억나지 않네요.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아들아 내 손이 비었구나 네게 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우리가 아무리 기총소사를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는 개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고요히 침을 흘리며 죽어갔다. 뭐 잔뜩 생각나는데 어디다 가져다 붙여야 하는지 아리송하군요. ㅋㅋㅋㅋ 덕분에 오랜만에 최승자 생각을 했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12-28 00:02   좋아요 1 | URL
꺄아악~~~~!!! 폴스타프님~~~ 문학청년이었던 거예요??? 대~~~~박!!! 첫 연은 틀린 곳이 하나 없습니다. 우왕 우왕~~~ 이러시면 어쩝니까. 아주 반해버리겠습니다.^^;; 이 시가 이 시집에는 수록돼 있지 않아서, 검색했는데. 와. 폴스타프님 진짜 짱이세요. 술잔 앞에 놓고 음성 지원 받고파요. ^^

페넬로페 2021-12-27 15: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개 같은 가을
매독 같은 가을!
와, 상상도 못해 본 글 입니다^^
시인의 삶이 궁금해지네요~~
첫 번째 사진 넘 멋있어 허락받지 않고 퍼 갑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12-28 00:10   좋아요 2 | URL
시인의 삶은, scott님이 올려준 글처럼 많이 짠해요. 삶의 궁핍함을 만회하겠다는 듯 20대 때 쓴 시들은 도발적이고 선언적이에요. 시어들이 펄떡펄떡 파닥거리는 물고기들 같아요. 저 시집이 그랬어요. 저랑은 결이 참 다른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그래서 더 끌리는 시인이에요. 삶을 참 처절하게 산 젊은 그 시인이 ˝아저씨 없는 아줌마˝가 되어서는 아주 조금 편해지신 듯해 쫌 안도했답니다. 사진은, 인물 외 뭐든 퍼가셔도 되는데, 넘 멋있다고 해주셔 오히려 제가 페넬로페님께 감사합니다^^

희선 2021-12-29 0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뼈다귀라고 아주 쓸모없지는 않겠습니다 거기에서 겨울나무를 떠올리셨군요 나무는 겨울을 나면 다시 움을 틔우네요 나무는 겨울이라고 해도 쉬지 않을 거예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12-29 07:50   좋아요 1 | URL
네. 그랬어요. 찐한 국물맛 우러낼 수 있다면 뼈다귀어도 괜찮겠죠. 세상에 쓸모없는건 없고, 쓸모를 모르는 사람만 있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