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6 #시라는별 50
인생연감
- 프리모 레비
무심한 강물은 하염없이 돌지만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고
거대한 빙하는 표류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착을 하려다가
한순간에 미끄러져 어린 생명의 숲들을 지우기도 한다.
바다는 풍요로울수록 더욱 탐욕을 내며 싸우고
태양과 별과 행성들은 언제나처럼 자기궤도를 유지하며
지구별 역시 정교한 우주의 이치대로 돌고 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니다.
반란의 씨앗에다 지능까지 높다는 그 멍청한 인간들은
항상 불안하고 탐욕스런 나머지 마구 짓밟고 파괴해왔다.
조만간 울창한 아마존 숲과 삶이 꿈틀거리는 이 세상
그리고 마지막엔 따뜻한 인간들의 가슴까지
모조리 황폐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 이 시는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가 자살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따로 남긴 유서가 없으므로 이 시가 결국 유서가 된 셈이다. 강물과 빙하는 디아스포라를 연상시키며, 자연과 우주는 특별한 사태 없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데, 유독 인간만은 다르다. 68세에 그는 결국 인간에 대한 희망의 단서를 찾지 못하고 완전히 절망한 것처럼 보인다.(이산하)
이산하 시인이 편역한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은 가슴을 쿡쿡 찌르거나 저릿하게 만드는 아픔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이산하 시인이 쓴 편역자 해설은 프리모 레비의 68년 인생을 수용소 경험을 중심으로 영화처럼 그려 보여 읽고 또 읽게 된다. 문장은 간결하고 내용은 풍성하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지낸 기간은 1년 10개월이었다. 스물넷에 체포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스물다섯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살아 있는 43년 동안 그가 한 일은 수용소에서 겪은, 믿고 싶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그 참혹한 일들을 기록으로 증언하는 것이었다. 회고록도 쓰고 소설도 쓰고 시도 썼다. 이산하 시인의 말처럼 ˝추억이 고통이고 기억이 고문˝인 사람이 상처
투성이인 그 기억들을 일일이 끄집어내 어떻게 쓰고 또 쓸 수 있었는지,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또 아프다.
나는 전태일 평전을 읽기 전까진 ‘자살‘에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년 전태일이 그 앞길 창창한 삶을 내려놓겠다 결심하기까지 있었던 숱한 사건들을 읽으면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저리 살아보지 않고서, 저리 처절해보지 않고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프리모 레비의 죽음 또한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레비의 자살을 이산하 시인은 이렇게 해석한다.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투신자살을 했다. 그는 죽음으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다시 들어간 것이다. 지난번에 타의였고 이번엔 자의였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회의를 끝내 떨치지 못한 그의 마지막 항변에 나는 거듭 동의하면서도 거듭 절망한다.˝
이산하 시인은 프리모 레비의 작품들이 ˝잎이 무성한 여름나무보다는 간명한 겨울나무˝ 같다고 했다. 나는 막바지로 접어드는 여름의 찬란한 빛과 뜨거운 열기가 스며든 숲에서 ˝간명한 겨울나무˝로 추운 계절을 버틴 뒤 살아남을 여름나무의 무성함을 오감으로 즐겼다. 이 또한 인생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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