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3 #시라는별 41
연결 지점
- 백은선
노랑과 검정
빨강과 검정
초록과 검정
텅 빈 무대에서 노래 불러
노래 불러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이제부터 누구에게 미안해야 할지
사슴의 마음으로 고민하고
사자의 발톱으로 점쳐보았지요
세상에는 나쁜 것이 너무 많고
자꾸다 다 보이는데
왜요?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고자질하는 애를 혼내는 눈빛으로
보세요?
재스민은 몇 년 동안 꽃 피우지 않고
유리호프스도 꽃 피우지 않아요
블루베리도요
엄마
엄마
부르면 아파져요
토끼의 귀로 듣고
조개의 발로 이동하며
꽃이 없어도 죽지 않으면 좋아요
반성은 짧고요
질 나쁜 생각하며 살아요
일희일비하며
검정 다음 검정
검정 다음 검정
다정하고 아름다운
갈피갈피 정다운
하얗게 빛나는
섬을 섬이라고 말해도 누구도 눈총 주지 않는
구름입니다
총입니다
초록 잉크입니다
달력입니다
한없이 풀리는 길고 긴 실타래입니다
커다랗고 커다란 숨을 쉬었지요
그림자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
선아
사랑해
꽃도 열매도 없이 오래 살자
누구의 꽃도 되지 않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백은선 시인과의 첫 만남이 나쁘지 않다. ‘좋다‘가 아닌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시들이 쉽게 읽히지는 않으나, 곱씹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움받는 기분>>에 대해 지난번에 내가 쓴 짧은 평을 약간 수정하고 싶어졌다. ˝시로 쓴 고발서˝라기보다 ˝시로 쓴 고발극˝에 가깝다. 시인에겐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없이 풀리는 길고 긴 실타래처럼˝ 많다.
해설을 쓴 양경언 문학평론가는 독자들이 이 시집에 수록된 시와 만나는 시간을 ˝‘백은선‘이라는 이름의 ‘포에트리 슬램‘을 경험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포레트리 슬램 poetry slam‘은 시인이 각종 장치를 거둬낸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몸만으로 시를 낭독해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퍼포먼스를 일컫는다고 한다. 수록된 시들을 몇 편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시인이 ˝텅 빈 무대˝에서 읽어준다는, 아니
고백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 누구에게 미안해야 할지 / 사슴의 마음으로 고민하고 / 사자의 발톱으로 점쳐보았지요˝
<연결 지점>은 세상 만물이 연결돼 있어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영향들 중 아주 크게 자리하는 감정 중 하나가 ‘미안함‘이 아닐까. 그런데 대체 누구에게 왜 미안해 해야 하는지 시인은 묻는다. ˝사슴의 마음˝ 같은 감성과
˝사자의 발톱˝ 같은 지성으로 미안한 것들을 떠올려 보지만 나쁜 것이 ˝자꾸만 다 보이는˝ 세상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이 든다.
꽃을 피우지 않아도, 열매를 맺지 못해도, ˝섬을 섬이라고 말해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시인은 살고 싶다. 이런저런 눈치 봐가며 숨 죽이듯 살지 않고, ˝커다랗고 커다란 숨을˝ 쉬며 오래 오래 살고 싶다. 줄기로만 호흡할 지언정 ˝누구의 꽃도 되지˝ 않고 오직 ‘나‘로 말이다.
지지 마
꼭 이겨줘
마음껏 생각할 수 있게
생각한 대로 말하고 움직일 수 있게
쓸모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 있어도 된다고
죽을 때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우리가 거의 죽은 날> 중)
시는 백은선 시인이 생각한 것을 ˝마음껏˝ 말하게 해주는 무대다. 이 무대에서는 ˝쓸모를 고민하지 않고˝ 말해도 된다. 그러나 어느 무대든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기에, ‘고민하지 않고 마음껏‘은 불가능의 영역이다. 다만 백은선 시인은 그 직전까지 다다르고자 생각의 실타래를 길게 풀 뿐. 시인아, 당신 말대로 ˝죽을 때까지 살아˝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