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비참하게 살았던 천재 여성들

 히파티아 (Hypatia, 355-415)
그리스 아테네와 헬레니즘 시대 살았던 전설적인 여성 철학자, 수학자.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대학 교수 딸로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제일의 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함. 그녀는 유창한 강연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남자 수학자들은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 뛰어난 미모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히파티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학문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종교 권력이 강해진 뒤, 키릴루스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학자들을 모두 이교도로 단정, 박해하기 시작함. 이때 히파티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잔혹한 대접을 받았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운명의 그날, 거룩한 사순절 기간 중 피터가 이끄는 야만적인 폭도들은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모두 벗기고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녀의 살은 날카로운 칼에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은 불덩이 속에 던져졌다." 


 밀레바 마리치 (Mileva Maric, 1875-1948)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아내. 유럽의 "비주류" 민족인 세르비아 계인데다 선천성 관절 이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 4살 연하였던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둘은 서로의 천재성에 반해 결혼을 하고,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 이론을 비롯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물리학 논문 3편을 공동 저작한다. (특히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 이론 완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밀레바를 멀리했고, 급기야 자신의 사촌인 엘사와 재혼하기 위해 밀레바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 밀레바에겐 2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아인슈타인은 아랑곳 않고 그들은 버린 채 미국으로 망명한다. 버림받은 밀레바는 이후 굉장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아이슈타인이 미국에서 세계적 명성을 높여가는 동안 그녀는 초라한 동네의 피아노 강사와 수학 교사 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두 번째 아들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자신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년에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얼마 뒤 전도유망했던 이 천재 여성 학자는 73세의 초라한 노파가 돼 쓸쓸히 숨을 거둔다. 


 판위량 (潘玉良, 1895-1977)
중국 최초의 서양화가. 8살 때 부모를 잃고 아편 중독자인 외삼촌에 의해 6년 동안 키워짐. 14살에 외삼촌에 의해 기생집에 팔려감. 이곳에서 첫 손님이었던 세관 고위 공무원 판찬화(潘贊化)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판찬화는 위량을 첩으로 맞아 그녀의 미술적 재능을 일깨워 줌. 이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위량은 누드화에 심취, 공중 목욕탕을 전전하며, 혹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보며 누드화를 그린다. 그녀의 누드화는 비천한 출신이라는 사회적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한 상징이었으나, 기생 출신에 누드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조롱과 지탄을 받는다. 상하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남편의 후원으로 파리로 유학,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학계와 예술계에서 촉망받는 여류화가 겸 교수가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창기 출신이라는 과거가 들춰지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받았고, 자신의 출신성분이 남편의 신변까지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돌아가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

미국의 여류 시인. 영국의 유명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로, 오븐에 머리를 넣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자살로 유명한 시인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생산했던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음. 플레이스는 이후 남성위주의 배타적 창작 환경에 의해 희생된 천재 시인으로 기록됨.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여류화가. 천재적인 그림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인생 역정으로도 유명한 여성. 7살에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됨. 14살에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 (2천 여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겨우 30여 명이었음.) 18살에 버스를 타고 가다 대형 교통사고가 나 버스 손잡이를 지탱하는 쇠파이프가 가슴에서부터 골반, 허벅지를 관통하는 끔찍한 치명상을 당함. 모르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엄청난 고통을 잊기 위해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 1928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천재 화가였던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결혼.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끊임없이 디에고의 아이를 가지려 했으나 거듭 유산함. 디에고는 아내의 불행에도 줄기차게 바람을 피웠고, 급기야 프리다와 절친한 친누이와 애정 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미칠 듯한 절망 속에 프리다는 그림에 빠져듦.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예술 활동을 벌였고, 그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사고의 후유증으로 수 차례의 척추수술을 받았고 급기야 회저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등 상상키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받음. 이런 중에도 반미 공산주의 시위 및 반전 운동에 참여. 1954년 사망.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864-1943)
1864-1943. 로댕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 여성 조각가. 마치 조각을 위해 태어난 듯,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열정을 보였다. 19세에 로댕을 만나 그의 제자 겸 조수, 예술적 경쟁자, 그리고 연인 관계로 발전함. 그러나 로댕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극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은 까미유는 평생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소피 제르맹 (Sophie Germain, 1776-1831)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독학으로 수학을 배워 18세기 철옹성 같았던 남녀차별의 벽을 뚫고 유럽 제일의 여성 수학자로 발돋움한 천재 여성. 당시 학계의 무시무시한 차별 속에서도 수많은 남성 학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학 및 초고난이도의 수학 이론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함. 그러나 그녀는 조국 프랑스로부터 그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맘.

 

 

 
 에이다 백작부인 (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2)
영국의 대문호 로드 바이런의 친딸. 유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백작부인이 된 상류층 여성으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음.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에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컴퓨터 개발을 시작한 찰스 배비지를 도와 실제 컴퓨터 제작을 주도했으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이론에 대한 (수백 년이나 앞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천재 여성은 그러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아편을 강제 복용했으며, 말년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등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음.

 

 
진성여왕 (재위 기간 887-897)

몰락해가던 통일 신라의 51대 여왕. 당시 수많은 남자 왕위 계승자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왕이 된 왕으로, 신라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명민한 천성과 장부 같은 골상”을 가진 성군이었음.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으로 농민층을 안정시키려 했으며, 위홍을 시켜 신라의 유물을 보수하고 향가를 집대성하는 등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등용해 신라의 정치와 문화를 개혁하려 했으나 기득권인 진골 귀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됨. 이후 신라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번번이 무산. 재위기간 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남. 한반도의 마지막 여왕이 된 진성여왕은 이후 보수적인 유교 사가들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함.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진성여왕을 근친상간과 난교를 일삼은 음탕한 여군주이자 나라를 망하게 한 요녀로 묘사함. (그러나 이는 신라 왕족 사이에 행해지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이야기. 진성여왕은 자신의 숙부와 공식적인 남편 관계였고 이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나혜석 (1896-1948)
일제시대 개화기를 살았던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여성 운동가. 부유한 명문가의 자손이자 친일파의 아내로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나 자신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독립운동과 여성 교육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으며 승승장구 했으나, 파리 유학 시절 최린과의 간통 혐의, 남편의 배신 등으로 급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함. 그는 사회적 멸시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연이어 언론에 여성 차별과 권리에 대한 파격적인 발언을 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음.

 

* 덧붙이고 싶은 인물...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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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비참하게 살았던 천재 여성들

 히파티아 (Hypatia, 355-415)
그리스 아테네와 헬레니즘 시대 살았던 전설적인 여성 철학자, 수학자.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대학 교수 딸로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제일의 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함. 그녀는 유창한 강연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남자 수학자들은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 뛰어난 미모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히파티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학문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종교 권력이 강해진 뒤, 키릴루스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학자들을 모두 이교도로 단정, 박해하기 시작함. 이때 히파티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잔혹한 대접을 받았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운명의 그날, 거룩한 사순절 기간 중 피터가 이끄는 야만적인 폭도들은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모두 벗기고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녀의 살은 날카로운 칼에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은 불덩이 속에 던져졌다." 


 밀레바 마리치 (Mileva Maric, 1875-1948)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아내. 유럽의 "비주류" 민족인 세르비아 계인데다 선천성 관절 이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 4살 연하였던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둘은 서로의 천재성에 반해 결혼을 하고,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 이론을 비롯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물리학 논문 3편을 공동 저작한다. (특히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 이론 완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밀레바를 멀리했고, 급기야 자신의 사촌인 엘사와 재혼하기 위해 밀레바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 밀레바에겐 2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아인슈타인은 아랑곳 않고 그들은 버린 채 미국으로 망명한다. 버림받은 밀레바는 이후 굉장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아이슈타인이 미국에서 세계적 명성을 높여가는 동안 그녀는 초라한 동네의 피아노 강사와 수학 교사 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두 번째 아들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자신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년에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얼마 뒤 전도유망했던 이 천재 여성 학자는 73세의 초라한 노파가 돼 쓸쓸히 숨을 거둔다. 


 판위량 (潘玉良, 1895-1977)
중국 최초의 서양화가. 8살 때 부모를 잃고 아편 중독자인 외삼촌에 의해 6년 동안 키워짐. 14살에 외삼촌에 의해 기생집에 팔려감. 이곳에서 첫 손님이었던 세관 고위 공무원 판찬화(潘贊化)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판찬화는 위량을 첩으로 맞아 그녀의 미술적 재능을 일깨워 줌. 이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위량은 누드화에 심취, 공중 목욕탕을 전전하며, 혹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보며 누드화를 그린다. 그녀의 누드화는 비천한 출신이라는 사회적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한 상징이었으나, 기생 출신에 누드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조롱과 지탄을 받는다. 상하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남편의 후원으로 파리로 유학,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학계와 예술계에서 촉망받는 여류화가 겸 교수가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창기 출신이라는 과거가 들춰지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받았고, 자신의 출신성분이 남편의 신변까지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돌아가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

미국의 여류 시인. 영국의 유명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로, 오븐에 머리를 넣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자살로 유명한 시인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생산했던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음. 플레이스는 이후 남성위주의 배타적 창작 환경에 의해 희생된 천재 시인으로 기록됨.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여류화가. 천재적인 그림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인생 역정으로도 유명한 여성. 7살에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됨. 14살에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 (2천 여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겨우 30여 명이었음.) 18살에 버스를 타고 가다 대형 교통사고가 나 버스 손잡이를 지탱하는 쇠파이프가 가슴에서부터 골반, 허벅지를 관통하는 끔찍한 치명상을 당함. 모르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엄청난 고통을 잊기 위해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 1928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천재 화가였던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결혼.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끊임없이 디에고의 아이를 가지려 했으나 거듭 유산함. 디에고는 아내의 불행에도 줄기차게 바람을 피웠고, 급기야 프리다와 절친한 친누이와 애정 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미칠 듯한 절망 속에 프리다는 그림에 빠져듦.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예술 활동을 벌였고, 그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사고의 후유증으로 수 차례의 척추수술을 받았고 급기야 회저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등 상상키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받음. 이런 중에도 반미 공산주의 시위 및 반전 운동에 참여. 1954년 사망.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864-1943)
1864-1943. 로댕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 여성 조각가. 마치 조각을 위해 태어난 듯,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열정을 보였다. 19세에 로댕을 만나 그의 제자 겸 조수, 예술적 경쟁자, 그리고 연인 관계로 발전함. 그러나 로댕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극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은 까미유는 평생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소피 제르맹 (Sophie Germain, 1776-1831)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독학으로 수학을 배워 18세기 철옹성 같았던 남녀차별의 벽을 뚫고 유럽 제일의 여성 수학자로 발돋움한 천재 여성. 당시 학계의 무시무시한 차별 속에서도 수많은 남성 학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학 및 초고난이도의 수학 이론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함. 그러나 그녀는 조국 프랑스로부터 그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맘.

 

 

 
 에이다 백작부인 (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2)
영국의 대문호 로드 바이런의 친딸. 유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백작부인이 된 상류층 여성으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음.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에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컴퓨터 개발을 시작한 찰스 배비지를 도와 실제 컴퓨터 제작을 주도했으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이론에 대한 (수백 년이나 앞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천재 여성은 그러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아편을 강제 복용했으며, 말년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등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음.

 

 
진성여왕 (재위 기간 887-897)

몰락해가던 통일 신라의 51대 여왕. 당시 수많은 남자 왕위 계승자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왕이 된 왕으로, 신라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명민한 천성과 장부 같은 골상”을 가진 성군이었음.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으로 농민층을 안정시키려 했으며, 위홍을 시켜 신라의 유물을 보수하고 향가를 집대성하는 등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등용해 신라의 정치와 문화를 개혁하려 했으나 기득권인 진골 귀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됨. 이후 신라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번번이 무산. 재위기간 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남. 한반도의 마지막 여왕이 된 진성여왕은 이후 보수적인 유교 사가들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함.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진성여왕을 근친상간과 난교를 일삼은 음탕한 여군주이자 나라를 망하게 한 요녀로 묘사함. (그러나 이는 신라 왕족 사이에 행해지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이야기. 진성여왕은 자신의 숙부와 공식적인 남편 관계였고 이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나혜석 (1896-1948)
일제시대 개화기를 살았던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여성 운동가. 부유한 명문가의 자손이자 친일파의 아내로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나 자신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독립운동과 여성 교육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으며 승승장구 했으나, 파리 유학 시절 최린과의 간통 혐의, 남편의 배신 등으로 급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함. 그는 사회적 멸시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연이어 언론에 여성 차별과 권리에 대한 파격적인 발언을 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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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파티아 (Hypatia, 355-415)
그리스 아테네와 헬레니즘 시대 살았던 전설적인 여성 철학자, 수학자.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대학 교수 딸로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제일의 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함. 그녀는 유창한 강연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남자 수학자들은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 뛰어난 미모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히파티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학문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종교 권력이 강해진 뒤, 키릴루스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학자들을 모두 이교도로 단정, 박해하기 시작함. 이때 히파티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잔혹한 대접을 받았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운명의 그날, 거룩한 사순절 기간 중 피터가 이끄는 야만적인 폭도들은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모두 벗기고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녀의 살은 날카로운 칼에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은 불덩이 속에 던져졌다." 


 밀레바 마리치 (Mileva Maric, 1875-1948)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아내. 유럽의 "비주류" 민족인 세르비아 계인데다 선천성 관절 이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 4살 연하였던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둘은 서로의 천재성에 반해 결혼을 하고,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 이론을 비롯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물리학 논문 3편을 공동 저작한다. (특히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 이론 완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밀레바를 멀리했고, 급기야 자신의 사촌인 엘사와 재혼하기 위해 밀레바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 밀레바에겐 2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아인슈타인은 아랑곳 않고 그들은 버린 채 미국으로 망명한다. 버림받은 밀레바는 이후 굉장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아이슈타인이 미국에서 세계적 명성을 높여가는 동안 그녀는 초라한 동네의 피아노 강사와 수학 교사 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두 번째 아들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자신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년에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얼마 뒤 전도유망했던 이 천재 여성 학자는 73세의 초라한 노파가 돼 쓸쓸히 숨을 거둔다. 


 판위량 (潘玉良, 1895-1977)
중국 최초의 서양화가. 8살 때 부모를 잃고 아편 중독자인 외삼촌에 의해 6년 동안 키워짐. 14살에 외삼촌에 의해 기생집에 팔려감. 이곳에서 첫 손님이었던 세관 고위 공무원 판찬화(潘贊化)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판찬화는 위량을 첩으로 맞아 그녀의 미술적 재능을 일깨워 줌. 이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위량은 누드화에 심취, 공중 목욕탕을 전전하며, 혹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보며 누드화를 그린다. 그녀의 누드화는 비천한 출신이라는 사회적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한 상징이었으나, 기생 출신에 누드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조롱과 지탄을 받는다. 상하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남편의 후원으로 파리로 유학,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학계와 예술계에서 촉망받는 여류화가 겸 교수가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창기 출신이라는 과거가 들춰지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받았고, 자신의 출신성분이 남편의 신변까지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돌아가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

미국의 여류 시인. 영국의 유명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로, 오븐에 머리를 넣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자살로 유명한 시인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생산했던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음. 플레이스는 이후 남성위주의 배타적 창작 환경에 의해 희생된 천재 시인으로 기록됨.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여류화가. 천재적인 그림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인생 역정으로도 유명한 여성. 7살에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됨. 14살에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 (2천 여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겨우 30여 명이었음.) 18살에 버스를 타고 가다 대형 교통사고가 나 버스 손잡이를 지탱하는 쇠파이프가 가슴에서부터 골반, 허벅지를 관통하는 끔찍한 치명상을 당함. 모르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엄청난 고통을 잊기 위해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 1928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천재 화가였던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결혼.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끊임없이 디에고의 아이를 가지려 했으나 거듭 유산함. 디에고는 아내의 불행에도 줄기차게 바람을 피웠고, 급기야 프리다와 절친한 친누이와 애정 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미칠 듯한 절망 속에 프리다는 그림에 빠져듦.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예술 활동을 벌였고, 그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사고의 후유증으로 수 차례의 척추수술을 받았고 급기야 회저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등 상상키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받음. 이런 중에도 반미 공산주의 시위 및 반전 운동에 참여. 1954년 사망.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864-1943)
1864-1943. 로댕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 여성 조각가. 마치 조각을 위해 태어난 듯,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열정을 보였다. 19세에 로댕을 만나 그의 제자 겸 조수, 예술적 경쟁자, 그리고 연인 관계로 발전함. 그러나 로댕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극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은 까미유는 평생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소피 제르맹 (Sophie Germain, 1776-1831)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독학으로 수학을 배워 18세기 철옹성 같았던 남녀차별의 벽을 뚫고 유럽 제일의 여성 수학자로 발돋움한 천재 여성. 당시 학계의 무시무시한 차별 속에서도 수많은 남성 학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학 및 초고난이도의 수학 이론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함. 그러나 그녀는 조국 프랑스로부터 그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맘.

 

 

 
 에이다 백작부인 (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2)
영국의 대문호 로드 바이런의 친딸. 유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백작부인이 된 상류층 여성으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음.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에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컴퓨터 개발을 시작한 찰스 배비지를 도와 실제 컴퓨터 제작을 주도했으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이론에 대한 (수백 년이나 앞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천재 여성은 그러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아편을 강제 복용했으며, 말년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등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음.

 

 
진성여왕 (재위 기간 887-897)

몰락해가던 통일 신라의 51대 여왕. 당시 수많은 남자 왕위 계승자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왕이 된 왕으로, 신라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명민한 천성과 장부 같은 골상”을 가진 성군이었음.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으로 농민층을 안정시키려 했으며, 위홍을 시켜 신라의 유물을 보수하고 향가를 집대성하는 등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등용해 신라의 정치와 문화를 개혁하려 했으나 기득권인 진골 귀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됨. 이후 신라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번번이 무산. 재위기간 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남. 한반도의 마지막 여왕이 된 진성여왕은 이후 보수적인 유교 사가들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함.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진성여왕을 근친상간과 난교를 일삼은 음탕한 여군주이자 나라를 망하게 한 요녀로 묘사함. (그러나 이는 신라 왕족 사이에 행해지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이야기. 진성여왕은 자신의 숙부와 공식적인 남편 관계였고 이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나혜석 (1896-1948)
일제시대 개화기를 살았던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여성 운동가. 부유한 명문가의 자손이자 친일파의 아내로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나 자신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독립운동과 여성 교육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으며 승승장구 했으나, 파리 유학 시절 최린과의 간통 혐의, 남편의 배신 등으로 급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함. 그는 사회적 멸시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연이어 언론에 여성 차별과 권리에 대한 파격적인 발언을 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음.

 

* 덧붙이고 싶은 인물...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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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외할머니께서 이사를 하신다고 해서 강원도 화천에 다녀왔다.

올해 여든일곱이신 할머니는 늘상 조용한 시골에서 지내고 싶다는 말을 하셨다.

작년에는 공주쪽에 집을 장만하긴 했는데.. 너무 멀고 연고도 없는 관계로 이사를 하지 못했다. 결국 그 공주 집은 애물단지가 되어버렸구...

이번엔 춘천에 계신 외삼촌께서 화천에 집을 장만해서 외할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춘천에서 30분 정도 거리라 수시로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아 이번 주말에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화천까지 4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가시는 동안 내내 언제 도착하는지 물으시는 모습이... 왠진 너무 멀리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인 것 같아 안쓰러웠다.

늘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시는 할머니..

작년에 큰 외삼촌이 돌아가신 이후로 더 그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 같다.

전쟁통에 외할아버지와 사별하시고 반백년을 홀로 사신 할머니..

아들까지 앞서 보낸 그 심정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정정하신데... 늘 어서 저세상 가야 하는데.. 하는 말씀을 달고 사신다.

이사를 하면서... 오래전에 이미 마련해둔 수의 보따리를 방에 가장 먼저 들여놓으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사짐을 나르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셔서 그렇게 하긴 했지만.. 휑한 방 가운데 수의 보따리를 덜렁 놓고 나오자니 웬지 찹찹한 기분이었다.

평균 수명 76세를 기준으로 보면 장수하신 편이지만, 100세 이상 사신다고 그것이 무슨 자식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그나마 새로 이사하신 곳이 앞이 탁 트인 전망 좋은 곳이라 그나마 흡족해하시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사시던 곳과 멀리 떨어진 불안감을 다 가릴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오늘밤 그 넓은 공간에서 혼자 계실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시며 잠자리에 드셨을까...

기름보일러에 기름까지 꽉꽉 채워드리고 돌아왔지만.. 문득 할머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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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안 2005-10-11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요.. 감사합니다.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요즘 세간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삼성 후계자 문제에 대해 히스토리를 아주 조목조목 적어놨네요.

그냥 월급쟁이로 사는 사람에게는 정말 신기한(?)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래두 한번 읽어보니 재미는 있네요..

세습을 하려면 해라... 단, 세금은 제대로 내라.. 요즘 이게 대세라는데.. 쩝...

탈세냐 절세냐 하는 것이 백짓장 한장 차이라는데.. 왜 월급쟁이에게는 늘 이런 기회마저 없는걸까요.. 언제나 사전공제하고 나오니.. 헐...

월급쟁이는 다들 철학자가 되어야 하나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나요..

악법도 법이다.

쩝.. 난 소크라테스 별로 안좋아하는데..

뭐.. 좀 다른 얘기한 유명한 철학가 없수... ㅎㅎ..

[커버스토리]이재용 ‘대권’ 승계 시나리오
삼성화재·삼성전기 등 2류기업 경영 맡겨 성공신화 만들기

삼성구조본 ‘이재용팀’ 비밀 가동 후계구도 정리 전력투구


최근 일련의 ‘삼성 죽이기’에는 원 오브 뎀

(one of them)이 아닌 온리(only)로 커버린 삼성의 영향력에 대한 견제가 가장 크다.

그러나 ‘삼성 죽이기’가 마냥 비상식적인 것은 아니다. 분명히 삼성에서 단초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계열사간 순환출자다. 이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삼성전자 이재용 상무의 후계자 만들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더욱이 이 상무는 이 회장이 증여한 종잣돈 40여억 원을 수백 배로 불리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것이 이 상무의 개인적인 역량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삼성그룹 전체의 지원 때문이라는 것이 ‘국민정서법’의 판결이다. 또 이는 실정법에 의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 판결 내용이 ‘국민정서법’과 같을지는 두고봐야 한다. 문제는 실정법이 ‘혐의없음’으로 판결이 나더라도 ‘국민정서법’의 판결을 뒤집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 국민의 뇌리에서 사라질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삼성은 오랜 기간 짊어지고 갈 원죄(?)를 잉태한 셈이다. 삼성이 대한민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이런 삼성의 차기 총수로 내정된 이재용 상무를 해부한다.

〈특별취재팀〉


지난 9월 13일 정·재계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미국 휴스턴 MD앤더슨 암센터로 치료를 받으러 도미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 다시 이 회장의 중병설이 돌았다. 후계자로 내정된 삼성전자 이재용 상무도 서둘러 아버지에게 갔다.

이 상무가 곧 대권을 물려받을 것이란 성급한 시나리오가 떠돌았다. 이건희 회장이 두 형을 제치고 처음으로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 1976년 9월 중순, 고(故) 이병철 회장이 암 수술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면서 삼성측에서 뭔가 구체적인 결정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이 특별한 건강 이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런 시나리오는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제 이재용 상무의 후계 승계에 대해 삼성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삼성 내부에서는 ‘차기 회장=이재용’이란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 삼성 계열사의 한 간부급 직원은 “왜 안되느냐”고 반문하며 후계 승계를 당연시했다. 이 직원은 “대부분의 직원들은 전문경영인은 단기목표에만 급급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영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오너 경영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상무가 경영권을 이어받는 것에 대해 컨센서스가 형성돼 있다는 얘기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시민단체나 정치권도 경영승계는 인정하되 세금을 더 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삼성 밖에서도 ‘차기 회장=이재용’을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이 상무의 경영 승계는 오래 전부터 진행돼왔다. 이건희 회장이 1976년 36살에 큰형인 맹희씨, 작은형인 창희씨를 제치고 후계자로 낙점된 데 비해 외동아들인 이재용 상무는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낙점된 것이나 다름 없다. 대학교 때부터 후계자로 키워지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이건희 회장 건강 이상으로 급부상

이재용 상무의 후계자 만들기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5년이다. 이건희 회장이 증여한 돈 40여억원으로 삼성에버랜드(옛 중앙개발)의 전환사채(CB)를 헐값에 매입했다. 삼성에버랜드는 삼성생명 등 계열사를 지배하는 일종의 지주회사다. 먼저 인프라(지분)부터 건설해 기반을 닦아놓은 것이다.

다음으로 착수한 것이 구체적인 경영능력 확보였다. 인터넷 붐을 타고 e삼성을 만든 것. 이 상무는 e삼성을 통해 도약을 시도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엄청난 손해를 보고 e삼성은 모두 정리됐다. 이후 이재용 상무의 후계 승계와 관련한 내용이 자취를 감췄다.

다시 후계 승계 시나리오가 나온 것은 2004년 초다. 이 상무가 둘째 아이를 얻은 것. 이 상무가 어엿한 중년 가장이 된 것이다. 가뜩이나 건강이 좋지 않은 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어야 하기에 이 상무의 후계구도 가시화를 서둘러야 할 판이다. 여기에 걸림돌은 있다. 이건희 회장 등 삼성의 최고경영자(CEO)로부터 경영수업을 받았다고 이 상무가 뛰어난 경영실력을 발휘할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렇기에 삼성 구조본은 이재용 후계 구축에 지속적인 힘을 쏟고 있다. 대표적인 시나리오가 그를 삼성그룹 내 2류기업인 삼성화재나 삼성전기에 보낸 뒤 그룹의 지원으로 1류기업으로 발돋움시켜 그의 CEO 경력을 관리해주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재계에서는 이 상무가 삼성전기·삼성화재의 CEO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삼성전기는 10년 전만 해도 삼성SDI(옛 삼성전관)와 비슷한 주가를 기록하는 등 한때 삼성의 대표적인 기업이었지만 현재는 부진한 상태다. 삼성화재도 삼성생명에 가려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기업에서 이 상무가 성공적인 CEO를 해낼 경우 입지가 충분히 다져지게 된다. 득실을 따져볼 때 득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후 이 상무의 삼성전기·삼성화재 CEO 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주주들도 이재용 상무의 후계 승계에 대해 드러내놓고 반대한 적이 없다. 물론 이재용 상무가 공식적으로 그룹 경영권을 승계한다고 발표한 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는데도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심각한 반대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깔려 있다. 주주들이 삼성의 오너경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다. 당연히 A다. 삼성전자의 순익은 연간 1조원이 넘는데다 배당금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어서다. 삼성이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은 그 중심에 이건희 회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삼성은 현재 그 중심에 이재용 상무를 끼워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전문경영인을 그 자리에 넣었을 경우 이 회장 수준의 카리스마를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재용팀’ 금융감독원 인사 스카우트

그렇다면 이재용 상무가 언제쯤 총수 자리를 이어받을까. 삼성 구조본에는 ‘이재용팀’이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구조본에서 공식적으로 부인한 이 팀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다. 직원의 면면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 그만큼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뉴스메이커’ 취재팀은 한 가지 단서를 잡아냈다. 삼성 구조본은 올해 초 금융감독원의 ㅇ팀장을 상무로 스카우트했다. 그에게는 억대의 연봉과 사택으로 타워팰리스가 제공됐다. 물론 차도 주었다. ㅇ상무는 외국박사(회계학) 출신이다. 그는 ‘이재용팀’에서 계열사 지분 관리와 그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을 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삼성 지배구조, 즉 순환출자방식(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부진·서현·윤형씨 등 여동생들의 지분정리도 있어야 하기에 이런 부분도 검토 대상이다. ㅇ상무가 과거에 쓴 보고서가 삼성의 정서와 일치한다고 본 이건희 회장이 스카우트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이학수 부회장이 직접 ㅇ상무를 만나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정도로 삼성은 이재용 상무의 후계 구도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결국 ‘이재용팀’이 가동되고 있다는 것은 머지않은 장래에 후계구도를 가시화할 것이란 예측을 낳는다. 이를 서두를 수밖에 없는 것은 이건희 회장의 건강 때문이다. 그 시점은 2007년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다.

이재용 상무 이력

*1968년 6월 23일 서울 출생

*1984년 2월 청운중 졸

*1987년 2월 경복고 졸

*1991년 12월 삼성전자 입사

*1992년 2월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학사)

*1995년 3월 일본 게이오대 비즈니스스쿨 MBA 졸업(석사)

*1997년 8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사과정 이수

*2001년 3월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DBA 수료

*2001년 3월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

*2002년 삼성이건희장학재단 이사(현)

*2003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현)

*2004년 S-LCD 등기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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