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추석''?…남자는 괴로워
# 아내 눈치 보랴 어머니 심기 살피랴… 괴로운 명절



경남 마산에 가족이 있는 김종민(47·순신개발 상무)씨는 전남 해남의 금광개발 현장에서 일한다.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집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명절을 손꼽아 기다릴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김종민씨는 “명절이 즐거운 게 아니라 괴롭다”고 말했다. 김씨는 “차례 음식만 놓고 봐도 넉넉하게 준비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와 간소하게 차리기를 원하는 아내 사이에 끼여 힘들다”며 고충을 말했다. 그는 “부모님 심기 살피랴 아내 눈치보랴 스트레스를 받는 데다가 아내가 며느리로서 받는 스트레스도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온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김도경(38·외국계 생명보험사 보험설계사)씨도 ‘가정정치’의 최대 관심인 ‘명절 정국’이 다가오면 신경부터 곤두선다. 지난 9년간의 결혼 생활은 ‘명절정국’에서 생존하는 내공을 쌓는 기간이었다.

“우선 약을 쳐야 합니다. 명절 열흘 전부터 빨래나 설거지, 아이 보기를 평소보다 더 열심히 하죠. 명절 기간에도 아내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 계속 체크하면서 예의주시합니다. 명절이 끝났다고 안심하면 안 되죠. 일정 기간 동안 날마다 안마도 해주고 가사를 도맡아 하면서 아내가 폭발하지 않도록 잘 컨트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남편도 명절 음식 준비며 설거지며 아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문제는 어른 눈치. “웬 눈치? 소신껏 하면 되지”라고 의아해할 수 있을 것. 하지만 어차피 1년에 한두 번 있는 명절에 잠깐 들르는 건데 부모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싫어서 실천을 못 한다는 남자도 적지 않다. 핑계일 뿐일까.

김도경씨는 “차례 음식을 도와주거나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어머니와 형수는 ‘왜 자꾸 남자가 부엌에 드나드느냐’고 말린다”며 “아내는 도와 달라는 신호를 계속 보내는데 중간에 끼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김종두(34·가천길재단)씨는 명절 때면 아내와 다투는 게 연례행사여서 겁부터 난다. “명절요? 정말 괴롭죠. 명절 끝엔 해마다 ‘일을 도와줬네, 안 도와줬네’ 옥신각신합니다. 마음이야 도와주고 싶죠. 하지만 외아들이 부엌일 하는 것을 어른들이 싫어하시니…. 나는 부모님과 아내 입장을 모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부모님보다 자기 입장을 더 고려해 달라고 하니…. 그래도 그렇게 할 수는 없죠.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야 찾아뵙는 것인데…. 아내의 입이 쑥 나와도 도와줄 수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싸움이 되고….”

이상우(32·삼성경제연구소)씨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양성평등의 흐름이 공존하는 시대를 사는 ‘낀 세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양성평등이라고 하면 이론적으로는 한 번은 우리집에서 한 번은 처가에서 차례를 지내야죠. 하지만 한국적인 현실에서 그게 됩니까. 그렇게 하면 장인 어른도 싫어할 겁니다. 결국 명절의 끝은 싸움으로 결론이 나더군요. 나중에 내가 차례를 지낼 때는 간소하게 해야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 “양가에 용돈 더 드리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에 울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만큼이나 경제적인 부담으로 인한 고민도 크다.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의 여론조사에서 남성 중 가장 많은 29%가 명절 때 ‘선물비, 제수용품 등 돈 문제’로 걱정한다고 답했다. 이어 ‘최악의 교통난’(27%), ‘음식준비, 대청소, 설거지 등 가사노동’(16%)이 차지했다. 여성 응답자는 34%가 ‘가사노동’을 꼽았고 이어 ‘돈 문제’(24%), ‘교통난’(16%), ‘과식 및 다이어트 방해’(14%)를 들었다.

김종두씨는 명절 때면 100만원 정도 신용대출을 받는다.
“평소 양가 부모님에게 못했던 것을 명절에 하려고 신경을 쓰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부담이죠. 우선 양가에 똑같이 30만원씩 용돈을 드립니다. 봉투에 차이가 나면 아내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양가 부모님 용돈에 차례비, 교통비 등 모두 합쳐 100만원 넘게 필요해요. 신용대출을 받아서 충당할 수밖에 없어요.”

이진구(가명·38·서울시정개발연구원)씨는 용돈 문제로 결혼 초기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 “명절이 되어 아내에게 본가에는 30만원, 처가에는 20만원씩 용돈을 드리라고 했어요. 처가를 차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죠. 처가는 차례를 지내지 않지만 본가는 차례를 지내고 있어 제수용품 사는 데 돈이 더 들 것 같아서 내 딴에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사정이 거꾸로였다면 처가에 돈을 더 드리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내가 들고 일어났어요. ‘어떻게 다 같은 자식인데 이럴 수 있느냐’는 게 이유였죠. 결국 똑같이 맞췄습니다. 명절은 결혼 안 했을 때가 좋았어요. 스트레스도 스트레스이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왜 그래야 하는지 가슴 아픕니다.”

김도경씨는 “명절이 되면 경제적인 부담이 ‘장난이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씨는 “양가 부모에게 드리는 용돈 외에도 본가에 20만원 정도 더 차례비를 내야 한다. 처가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처형이 아내를 키우다시피 해 따로 선물도 준비해야 하고, 조카 용돈까지 챙기려면 허리가 휠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본가에서 처가로 옮기는 차 안에서는 ‘이번 명절은 어떻게 잘 넘겼나’ 슬슬 아내 눈치 봐야 하니 정신적·경제적으로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 처가에서 동서들과 비교되는 것도 스트레스

며느리들이 시가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사위도 처가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장인 장모에게 용돈 팍팍 잘 찔러주는 동서의 거드름이 눈꼴사납기도 하고, 그런 동서와 비교되는 것 같아 왠지 구석을 찾고 싶은 마음도 들고….



이진구씨는 처가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이렇게 말했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처가가 부담스럽죠. 자주 왕래하는 사이가 아니잖아요. 명절 때나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솔직히 자존심 상하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장인 장모가 은연중 다른 동서와 비교되는 말을 하기도 하고…. 며느리가 시가의 ‘시’자만 나와도 얼굴을 찌푸리듯이, 속 좋게 웃는다고 사위가 처가에서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죠. 그래도 전 이해해요. 가족이란 게 서로 이해하는 것 아닌가요? 아내는 불만 있으면 다 이야기하지만 전 그렇게 안 한다는 게 차이죠.”


결혼 4년차인 차경호(가명·31·현대캐피탈)씨도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사위로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명절 때 차례만 끝나면 아내는 부모님이 안 볼 때 ‘언제 처가에 갈 거냐’고 자꾸 물어봅니다. 차례 후에도 손님들이 찾아오니 쉴 수가 없어서 그런다는 거 잘 압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이 아쉬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 타이밍을 살피는 거죠. 그러다가 결국 ‘왜 빨리 우리 집에 안 가냐’는 아내의 재촉에 옥신각신 다툼으로 번지고…. 원래 우리 집안이 기독교이기도 했지만 아내가 불편해 하는 게 눈치가 보였는지 부모님이 올해부터는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어요. 아들로서 죄송하죠.”

윤지훈(31·의약품 수입업체)씨는 “명절 연휴가 길지도 않고 비용 문제, 교통 문제도 있는데 언제까지 명절을 챙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추석 당일 본가에 가서 아침식사 하자마자 처가로 곧바로 이동해 점심만 먹으면 하루가 끝나는데, 이젠 식사 한번 하고 끝내는 게 명절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3대 독자인 김지혁(35·한국언론재단 미디어진흥팀)씨도 ‘낀 세대’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사실 명절 2∼3주 전부터 남자끼리 모여 선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20∼30기의 조상 묘를 벌초하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명절이 번거롭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고요. 그래도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은 명절 때 차례를 지내지 않으면 슬퍼하시니 조상신이니 뭐니 믿지 않아도 하지 않을 수가 없죠. 내가 3대 독자인데 앞으로 후손들이 그 많은 묘 벌초하고 차례 지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요. 이대로 가면 앞으로 명절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래도 아내가 내 입장을 이해해 주니 난 나은 편입니다.”

글 김청중 ck@·박진우 dawnstar@,

사진 남제현 기자 jeh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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