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 klein

calvin klein은 1943년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FIT(패션공과대학)를 졸업하고, 1968년 친구의 아버지로 부터 1만불을 빌어서
시작한 [캘빈클라인 Ltd]는 코트 기성복의 hit로 패션계로 데뷰했다.
처음에는 세븐즈 애비뉴 7번가의 뉴욕 호텔에 작은 Room을 꾸며서 출 발했으나,
어느날 본위트테일러 백화점의 상품부장 돈 오브라이언이 잘못 하여
엘레베이터를 6층에서 내려 우연히 캘빈클라인의 쇼룸에 들어와 버 렸다.
그의 디자인을 본 그 바이어는 그자리에서 5만달러 상당의 주문을 했고
그것은 캘빈 클라인의 성공의 계기가 되었다.
돈을 빌려준 친구는 현재의 파트너 배리 슈발츠이다.
1972년 스포츠웨어 부분을 만들고
아메리칸 캐쥬얼을 디자인의 기본적인 모토로 신봉하는 그는
유럽과 다른 단순성과 캐쥬얼한 점으로 미국의 여 성을 매혹 시켰다.
기성복에서는 최연소 코디상을 1978년 2월 까지 3번이나 수상했다.
같은 해 3월에는 화장품과 향수의 회사도 설립하고,
사진가 아빙 팬의 독특한 선전활동에 힘입어 성공을 거두었다.



캘빈 클라인은 평범한 일상복에서 격조 높은 멋을 창조하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일상복 스타일이라 일컬어지는 뉴욕 스타일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으며 모던하고 세련된 캐주얼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절제된 세련미! 캘빈 클라인
90년대 들어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물욕적인 사치성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중시하게 된 시대적인 변화 때문이다. 다시 말해, 캘빈 클라인은 정신적인 만족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에 적합한 캐주얼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 특성은 천연섬유의 사용과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세련미에 있으며, 옷만이 아니라 향수, 시계 등 다양한 상품 라인을 추진하고 있다.



디자이너 분석품격을 강조하는 캐주얼 스타일
대담한 노출 패션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면서 강하게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 부드러운 색상으로 세련된 여성미를 연출하거나 심플한 라인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여유로운 스타일과 천연섬유의 사용으로 착용감을 중시한 캘빈 클라인은 입는 순간부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은 캐주얼한 아이템일지라도 품위를 강조할 뿐 아니라 여성의 섹시한 매력까지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편안한 활동성을 중시한 디자인
캘빈 클라인을 멋있게 입고 싶다면 셔츠와 스트레이트형 일자 바지로 편안한 활동성을 연출해 보자. 셔츠는 색상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아이템으로, 천연 소재를 사용할 경우 품격을 강조할 수 있다. 부드러운 색상으로 상하의를 조화시키거나 몸에 피트한 상의를 입으면 매력적인 코디가 완성된다.




미국 패션을 이끌어 온 가장 미국적인 디자이너를 꼽으라면 단연 캘빈 클라인이다. 청교도 정신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극도로 장식을 배제해 깨끗한 재단과 실루엣, 다른 디자이너들이 미처 관심을 기울이 지 않았던 청바지와 속옷, 향수라는 틈새시장 개척, 섹스를 연상시키는 도발적 광고.. 시대를 꿰뚫어보는 정확한 마케팅전략과 과감한 개척 정 신으로 그는 70년대부터 남녀노소, 부자 서민 할 것 없이 어떤 디자이너도 넘보지 못할 만큼 폭넓은 고객 층을 확보하고 있다.
클라인 개인의 삶에도 미국적인 요소는 짙게 드리워 있다. 무엇보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인물이다. 42년 뉴욕 브롱크스 출신. 아버지는 헝가리 출신 유태인으로 식료품 가게를 했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클라인은 어릴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5살때 이미 의상 스케치를 시작했고 누이의 인형옷을 즐겨 지어줬다. 62년 뉴욕 패션기 술학교(FIT)를 졸업한 다음에는 5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집에 돌아와서 매일같이 아스피린을 먹어야 하는 생활이었 다고 클라인은 회고한다. 68년에는 어릴 적 친구 베리 슈와르츠에게서 1만달러를 지원받아 뉴욕 7번가에 자기 이름을 걸고 코트가게를 차린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오는 법.. 패션전문매장 '본위트 텔러'의 바이어가 엉뚱한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가 그의 옷을 보고 한번에 5만달러 어치를 주문하게 된다. 심플한 파스텔 톤의 옷은 폭발적으로 팔려 나갔다. 73년에 는 전국 1천개 넘는 매장에 그의 옷이 깔렸다. 같은 해 기성복 사상 최 연소로 코티상을 받는 영광을 안게 된다.




74년 그는 일대 변신을 꾀한다. 그때까지 만들던 값싼 폴리에스터 제품을 끊고 고급스럽고 비싼 자연직물 옷으로 방향을 바꿨다.
78년 시작한 청바지 사업은 그의 성가와 수입을 크게 높였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품위를 지키고 있을 때 그는 좀 더 꼭 끼는 청바지를 만들어 값을 곱절로 올려받았다. 매번 논란을 일으켰던 선정적인 광고 기법 도 이때 처음 선을 보인다. 당시 14세였던 여배우 부룩 실즈가 "나와 내 캘빈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광고로 청바지는 첫 1주에 20만벌이 팔렸다.
82년 내놓은 속옷과 88년부터 시작한 향수 '옵세션','이터너티','CK 원' 광고에도 클라인의 전속모델 격인 케이트 모스, 랩 가수 마키 마크 의 누드가 종종 등장한다. 주로 흑백으로 아무 설명 없이 '캘빈 클라인' 이라고만 쓰는 광고는 수많은 모방자들을 낳았다.
캘빈 클라인의 명성이나 인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광고나 마케팅 전략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의상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코티상을 73년부터 3차례 연달아 받았고, 패션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93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남성복, 여성복 두 분야에서 동시에 상을 따낸다.
무엇보다 그의 옷은 시대 흐름과 맥을 함께 한다는 게 강점이다. 그는 90년대 들어 더욱 도전적이고 젊은 정신을 반영하는 옷을 만든다. 이렇게 작고 짧은 옷을 누가 입느냐는 초기의 평론가들의 불평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이 바로 그 옷을 입을 때'라고 그는 주장했다.
캘빈 클라인은 항상 '현대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시대가 변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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