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침형 인간은 못된다. 그렇다고 늦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하루 최소 8시간의 수면은 취해 줘야 하루가 편하다. 그러니, 일찍 잤다고는 해도 6시간만에 일어나는건 지독히도 힘들었다. 5시 반.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나야 한다면 아마 수면부족보다 스트레스로 먼저 쓰러졌을거다.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짐을 꾸려 차에 싣는다. 이 모텔은 숙박비가 비싼 대신 간단하나마 아침 식사를 주니 식사를 하고 check out 을 할 생각이다.
이 시간에 일어난건 오직 하나 해 뜨는 시간에 Mesa Arch에 오르기 위해서다. 6시 반 정도가 됐지만 아직 하늘은 깜깜하고 별이 총총 떠 있다. 여유 있을 법도 하지만 모를 일이다. 태양은 내 예상보다 훨씬 민첩하게 움직이는 놈이니까.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아직 공원 관리인(Park Ranger)들은 출근 이전이다. 원래는 여기서 국립공원 연간 출입권을 살 예정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당일 이용 요금을 내고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문제는 $10짜리 잔돈이 없어서 $20을 낼 수밖에 없었는 것;; 눈물을 머금고 $20을 집어넣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들어갈까 1.724 초 쯤 고민했다.)
역시나,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약간 늦은 듯 하다. Mesa Arch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니 이미 하늘은 훤해져 있다. 서둘러 장비를 내리고 trail 을 따라 걷는다. 미리 찾아 본 정보에 의하면 10분 정도 거리의 쉬운 난이도의 trail 이라고 한다. 하지만 평소 운동도 안 하고 하루종일 앉아서만 일하던 몸이다보니 이 정도도 쉽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짊어진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를 감안하더라도 심각한 운동 부족임이 느껴진다 -_-; 어쨌든, 헉헉대며 오르막을 따라 걷다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Mesa Arch 다. 그 주변으로 10여명의 사람들이 이미 삼각대를 펼치고 진을 치고 있다. 나중에 보니 단체로 기념 사진도 찍는 걸로 봐서 어느 동호회 혹은 학교에서 단체로 온 듯 했다.

Mesa Arch 아래로 보이는 풍경

역광 속에 실루엣으로 지형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다행히 많이 늦지는 않아서 지평선 부근에서 수평으로 들어오는 빛이 붉게 어른거리는 Mesa Arch 를 담을 수 있었다. 사암 절벽에 반사된 햇빛이 Arch 아랫 부분을 붉게 물들인다. 수평 방향에서 들어오는 햇빛은 지면 근처의 지형들을 실루엣으로 잘 드러내고 있는데, 붉은 arch 를 프레임 삼아 사진을 담으니 멋진 조화가 이루어진다. 조금 더 있으면서 찍어도 될 법 했지만, 사람들이 내려오기 전에 얼른 장비를 챙기고 다시 길을 내려온다. 빨리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삼각대를 서로 부딛히며 단체로 우루루 걷는건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차를 다시 뻬서 Canyonland National Park 의 최정상인 Grand View Point 로 향한다. 가장 안 쪽에서부터 시작해 바깥으로 나오면서 둘러볼 예정이다.
Canyonland National Park 은 크게 4 개의 구역(district)으로 구분된다. The Island in the Sky, the Needles, the Maze, 그리고 이들을 관통해 지나가는 두 강(Green River, Colorado River) 유역들이다. 이 중 the Maze 는 off-road 로만 접근할 수 있어 이번 여행에서는 일찌감치 제외를 했고, 강 주변은 카약을 타는 투어가 있는데 역시 시간 관계상 다음을 기약했다. 남은 2 개의 구역 중 오늘 방문한 곳이 바로 the Island in the Sky 구역이다. 이름이 시사하듯, 이 구역은 Canyonland National Park 의 가장 높은 지대에 속한다. 평균 해발 고도 6,100 피트(= 1859m, 대략 한라산 높이다)의 고지대까지 차를 끌고 올라가 주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Grand View Point 에서 보이는 Canyonland N.P.

깊게 패인 계곡
Grand View Point 는 Island in the Sky 구역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곳에서는 Canyonland National Park 전체가 360도 파노라마로 눈 앞에 펼쳐진다. 광대하다. 사실 너무 광대해서, 어떻게 사진으로 담아야 할 지를 모르겠다.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잠시 trail을 따라 걷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다른 관광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혼자 여행다니면 심심하지 않냐고 묻곤 한다. 혼자 다니던 누군가와 함께 하던 각각의 장점이 있겠지만, 혼자서가 아니라면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고독"이다. 이 넓고 낯선 공간 속에 홀로 존재함을 느낀다는 것,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느껴지는 그 끝없이 깊은 평화로움을 말이다. 그런데, 이 곳은 뭔가가 다르다. 그저 홀로 있다는 느낌을 넘어서 아예 존재에 대한 느낌마저 무뎌진다. 눈 앞에 펼쳐진 저 자연의 광대함과 어우러진 다른 어떤 감각이 나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벽한 정적이었다. 바람 소리도, 새 울음소리도, 부스럭거리는 수풀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절대 무음의 세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혹은 읽고 있는 순간 잠시 주변의 소리에 귀기울여보라. 혼자 있는 순간조차 우리는 소음 속에 살아간다. 머언 경적 소리나 하수구 물 내려가는 소리, 혹은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까지. 이 모든 소리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해 보라. 그것도 귀를 막아 얻은 닫힌 침묵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열린 침묵의 세계를. 잠시 바위 위에 걸터 앉는다. 나는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곳에서는 "나"를 잊는다. 오직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과, 뺨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의 감촉만이 나의 육신을 증거할 뿐, 이 곳에 앉아 있는 나는 오로지 사유로만 존재할 뿐이다.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외딴 곳으로 숨어들었던 은둔자들이 갈구했던 평화와 명상의 시간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것 같다.

아침 식사 중인 chipmunk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뭐, 그래봐야 10분 정도지만;;) 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관광객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사진으로 몇 장 담는다. 여전히 어떻게 사진으로 담아야 할지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단 몇 컷을 담고 다시 차로 향한다. 아침 식사 시간인지 chipmunk 한마리가 풀숲에서 열매를 뒤지고 있다. 마주친 관광객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차를 돌려 Buck Canyon Overlook 으로 향한다. 이 곳은 사실 Grand View Point 와 거의 같은 조망을 보여준다. 높게 솟은 봉우리(mesa = 탁상 대지)와 붉은 대지, 깊은 계곡들. Overlook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은 어떻게 이런 지형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를 설명해주고 있다.

절벽 위의 덤불.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서부 영화에서 많이 봤던 장면이다 ^^;
Utah 에서 만날 수 있는 지형들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흥미롭게도 이들 다양한 지형들이 생겨난 가장 큰 원인은 한 가지로 압축된다. 소금. 오래전, 지금의 Utah 지역은 캘리포니아 지역을 포함한 태평양 판(pacific plate)의 동부 연안에 해당했다. 이 판이 동쪽으로 밀려나면서 북미 판(north american plate)과 충돌을 했고, 이 과정에서 Utah 지역에 해당하는 바다가 양 쪽 판(plate) 사이에 갇히면서 닫힌 바다가 되었다. 이 닫힌 바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물이 증발되면서 바닥에 두꺼운 소금 침전물이 쌓이게 된다. 그리고 그 위로 다시 강물 등에 휩쓸려 온 토양이 여러 겹으로 쌓이면서 다양한 색의 사암지층을 형성한다.
자, 이제 무대 준비는 끝났다. 서로 부딛힌 판이 지진을 일으키며 두텁게 형성된 퇴적층을 위로 밀어올리면서 본격적인 자연의 조각이 시작된다. 바닥에 깔린 소금층은 여타 암석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끄럽기 때문에 그 위에 쌓인 암석층이 지형의 변화에 따라 미끄러지고 부딛히면서 조금씩 갈라지게 된다. 그 틈으로 물이 스며들면서 아래 쪽의 소금층에 이르게 되고, 소금이 물에 녹으면서 지하에 커다란 빈 공간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빈 공간이 함몰되면서 그 위의 방대한 지역이 갑자기 땅 속으로 쑥 꺼지게 되는 것이다. 일부만 함몰되면 계곡이 되는 것이고, 일부만 남으면 Island in the Sky 같은 mesa 가 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Canyonland National Park 에서 볼 수 있는 스케일 큰 지형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 후에 비바람과 물의 침식작용이 세밀한 부분들을 만들어 나간다. 이 과정은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보다 자세하게 보게 되니 그 때 설명하도록 하자.

Green River Overlook 에서 내려다 본 풍경

계곡 부분만 확대한 모습
일단 Buck Canyon Overlook 을 떠나 Green River Overlook 으로 향한다. 너무 늦기 전에 Arches National Park 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이 곳이 Island in the Sky 구역의 마지막 방문지가 될 것이다. 이 곳에서는 Canyonland National Park 을 가로지르는 Green River 가 만들어낸 Y 자 모양의 계곡을 볼 수 있다. Green River 는 정말 문자 그대로 녹색으로 보인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건조한 지형 속에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이나 온갖 식물들이 집중되어 자라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삼각대를 세팅한 김에 계곡을 배경으로 셀카도 찍어 본다. 이번 여행에서 몇 안되는 내 사진이다.

웃고 있지만 저 바위 너머는 천길 낭떠러지..;;
자, 이제 정말 Arches National Park 으로 떠날 시간이다. 장비를 다시 챙겨 차로 돌아가려는데, 아까 Grand View Point 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 앞에서 걸어오고 있다. 서로 왜 쫓아다니냐고 농을 친 후에 제대로 통성명을 한다. 백인인 Scott과 중남미 계열인 Gabriel이다. 둘 다 Chicago 에서 왔는데, Gabriel 은 원래 고향이 Santo Doningo로 미국에 온지는 얼마 안 된다고 한다. 반면 Scott 은 미국 토박이로 이 지역은 여러 번 여행했다면서 여러 장소를 추천해 준다. 내 일정을 말해줬더니 Bryce Canyon의 Queen's Garden trail 을 강력 추천. 좋은 정보다.
이들과 작별을 고하고 차를 돌려 나선다. 다음 목적지는 Arches National Park 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