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후배 중 하나가 이런 말을(물론 내 기억 속에서 각색이 좀 되었겠지만) 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들은 후로 나는 이 후배를 숭배했다.

"전에는 '나'가 있고 '남'이 있고, 그 사이에 '관계'가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관계'들이 바로 '나'더라구요"  

 

사람이라는게 제 몸뚱아리와 제 영혼으로 이루어진 개별 생물체라고는 하지만, 사실 사람은 군락을 이루어서만 살 수 있는 집단 생명체다. 예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람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그 속에서 삶을 꾸리도록 적응해 왔다. 이게 '인간'을 규정하는 큰 조건 중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군락 속에서 살아간다는건 수많은 '남'들과 마주침을 뜻한다. '남'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 '남'들이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나'들임을 알고 있다. 사자에게 사슴은 '남'이 아니다. 그건 그저 먹거리, 또 다른 사물일 뿐이다. 최소한 '남'을 인정한다는건, 그가 나와 동등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보면 남도 남이 아니다. 

이 '남'들 중에서도 우리는 '너'를 찾는다. '너'는 가능태가 아닌 실재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남'들 중에서 내 앞에 구체적으로 존재하게 된 당신이 '너'이다. 이름을 부르자 비로서 꽃이 되었듯 말이다. '나'와 '너'의 만남은 서로가 서로를 '너'로 인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관계' 혹은 '관계맺음'이라고 부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 상당수는 '나'에게 '너'이다. 우리의 관계맺음은, 그것이 얼마나 살갑냐 혹은 살벌하냐를 떠나 이미 하나의 '관계'다.  

 

관계를 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너'를 다시 '남'으로 되돌리는 행위.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와 '나'가 맺은 관계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나'의 한 부분, '너'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관계는 우리 사이를 이은 실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교집합이었으니까. 그 교집합 속에서 모세혈관에서 삼투 작용이 일어나듯 우리는 섞이고 있었으니까. '너'를 보낼지언정 내 안에는 '너'의 일부가, 우리가 맺었던 '관계'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건 '나'의 문제다. 그리고, '너'를 '남'으로 되돌린다고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상처주지 말자. 싸울 지언정 마음으로부터 미워하지 말자. 그 미움이 쌓여 '너'를 보내고 나서도 그 미움은 여전히 '나'의 안에 남을 것이다. 혈관에 노폐물이 쌓이듯 그 미움, 증오는 나를 병들게 할 것이다. 때로는 짜증도 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투정도 부릴 수 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때로는 모순적이고 때로는 비논리적이기도 한다. 못마땅 하더라도, 깊게 이해하자. '나' 또한 그러하니까. 그게 '인간적'이다.

진정한 분노는 '관계'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을 향해서 분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사람을 미워하면서 정의를 세울 수는 없다. '정의'란 결국 사람들을 위한 정의니까.

'너'를 미워하면서 '남'까지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2008 년의 마지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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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31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31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31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8-12-3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멋진 글입니다. 어제는 기행문으로 도인의 자태를 보여주시더니 오늘은 도인의 경지에서 쓸 수 있는 글로 가슴을 치게 만드시는군요 :)

맞아요. 미움은 쌓이고 쌓여 자신을 병들게 하지요. 그런데 그 미움을 털어내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안 될 때가 있어요. 그건 인격의 문제일 수도 성향의 문제일 수도 노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성향을 탓해보기도 하고 자신을 더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인격수양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사색에 잠기거나 책을 읽기도 하죠. 근데 문득 내가 미워하는 '너'는 무엇을 하고 있나? 엿보기를 시도하다 '너'의 면연력에 감탄을 하게 될 때도 있더군요.

병이 드는 건 미움을 털어내지 못하는 내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보다 강한 면연력을 갖고 미움의 바이러스를 유발하면서도 본인은 감염되지 않는 '너'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될 때, 그리고 그 '너'에게 애초에 나는 '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때 약한 사람들은 미움을 털어내는 것보다 차라리 감싸안고 병에 드는 게 낫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알면서도 말입니다.

한 해 마지막 날 잘 보내세요. 저는 오늘 신랑이랑 대청소하고 날 꼴딱세고 놀꺼예요! 오늘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고 하잖아요! 크크 해피 뉴~이어(ㄹ)~~!

turnleft 2008-12-31 16:40   좋아요 0 | URL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부모님이 굉장히 엄하셨어요. 제가 잘못된 일을 하면 엄청나게 혼이 나곤 했지요. 그런데, 중학생 쯤 되었나, 머리가 굵어지면서 부모님의 인간적인 약점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무단 횡단도 슬쩍 하시고, 때로는 불의 앞에 눈을 감기도 하시는 모습도 보였지요. 제 도덕적 판단과 삶의 준거와도 같았던 부모님의 그런 면을 보는건 어린 저에게 꽤 충격이었습니다. 당신들도 잘못 많이 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뭐라고 하나 하는 반항심도 생기곤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만, 만약 제가 그 때 부모님의 그런 면을 따지면서 대들었더라면 당신들께 굉장히 큰 상처를 드렸겠구나 싶어요. 그 분들도 인간인데, 그저 평범하게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일 뿐인데, 그걸 약점삼는건 공평하지 않잖아요. 당신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런 모순을 보이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소시민적이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잘못이 없으면 좋겠지만, 있다 하더라도 부모님과 저와의 관계에서 저한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보기에 얄밉고 얌체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그게 뭐 대수일까요. 사람 사는게 다 그런거다 하는거죠. 안 하면 좋겠지만, 그거 뜯어 고치는 것보다는 관계 전체를 크게 보는게 더 유익하다고 봐요. 뭐, 이 정도는 도인이 아니더라도 조금 더 노력하면 할만하지 않나요? ^^;

어쨌든, 연말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 조심~

가시장미 2008-12-31 18:45   좋아요 0 | URL
크크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 예까지 친절하게 들어주시니 아주 이해가 잘 되는군요. 친절한 턴형~!! ㅋㅋ

근데요. 얄밉고 얌체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얌체짓을 하는 모습을 보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는데, 저한테 그렇게 한다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어버리더군요. 그것 또한 모순이겠죠. 그래서 저처럼 소신민적인 사람은 그런 모순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바로잡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라는 말하고 싶어진다는 거죠. -_ㅠ

뭐, 대청소 다 하고 또 살짝 들어와서 댓글 달고 있습니다. 아 배도 많이 나왔는데 허리를 많이 썼더니 힘들어요. 헉헉.. 신랑이 요즘 인터넷을 너무 많이 하니깐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다른 남자랑 채팅이라도 하나.. 뭐 그런 이상한 눈초리 ㅋㅋ 뭐 채팅은 아니지만 다른 남자랑 댓글을 주고 받고 있으니 이거 찔려야 하는건지.. -_-;;; 어쨌든, 감사!

turnleft 2009-01-02 07:44   좋아요 0 | URL
헉, 조심해야지. 장미님 남편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수가 있겠군요;;

마노아 2009-01-01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전 네꼬님 서재에서 감탄하고 왔는데 여기서도 감탄+감동이에요. 관계를 쭉 이으면 '나'가 된다는 것. 제가 건투를 빈다를 읽으면서 내가 선택한 것들을 다 이으면 그게 곧 나라는 말에서 크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을 때가 떠올라요. 제게 턴님은 아름다운 '너'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나는 덕분에 막 힘이 솟고 있어요. ^^

turnleft 2009-01-02 07:45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다 잘 될 거에요 :)

2009-01-01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2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