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과 약혼한 마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1
장 미셸 살망 지음, 은위영 옮김 / 시공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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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 없지만 시간이 남아서 읽다보니 내가 가장 보고듣기 싫어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가! 처형과 고문에 대한 그림과 글이 넘쳐나는데 너무너무 싫어서 '내가 지금 이런 걸 왜 읽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돈이 아까워 다 읽었다.

장 미셸 살망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참 못 썼다. 시공디스커버리총서가 대부분 그렇듯이. 마녀사냥이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얼마나 잔인하게 진행됐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98%이고 역사적 맥락(이런 걸 컨텍스트라 그러던가)에 대한 설명은 1% 밖에 안 된다. 그림들이 아주 많이 나오는데 책 크기가 작다보니 그림도 작고 또 얼마나 잔인한지. 다만 <중세의 음흉함>이라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이 책에서는 1% 밖에 안 다루고 있지만, 낭만주의자들의 新마녀觀이 그나마 잔인한 묘사에 쪼글쪼글 오그라든 내 마음을 풀어줬다.

소득이 있다면, 덕택에 마녀사냥의 시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았던 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특히 집단이 개인에게,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저런 적나라한 폭력이 너무 무서운데 말야. 어쩌면, 만일 내가 마녀사냥의 시기에 북동부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어쩌면 나는 마녀들에게 돌을 던지는 우매한 군중, 딱 그런 사람이었을지 몰라.마녀들에 대한 공포,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숲>에 대한 공포 아닌가. 나약한 인간들이 보통 그렇듯, 나는 초자연은 고사하고, 자연 자체도 무서운 사람이다. 바다도 무섭고 숲도 무섭다. 물 덩어리도 무섭고, 나무 덩어리도 무섭다. 왜냐? 말 그대로 <덩어리>이기 때문에. 덩치가 엄청나게 커진 물방울과 나뭇가지들이 시너지 효과를 내서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원초적인 공포. 미셸 투르니에가 <예찬>에서 인용해놓았던 괴테의 <오리나무 숲>. 아들아 아들아...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숲을 빠져나왔을 때에 이미 아들은 싸늘하게 시신으로 변해있더라는. 가본 적도 없는 <북유럽의 숲>은 무섭다. 살망의 책은 이 숲에 대한 공포감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또 나(우리)는, 군중심리에 안주 혹은 기생하는 것에서 심지어 재미를 느끼고 있으며, 독야청청의 꿈조차 꾸지 않는 사람(들) 아닌가. 남 손가락질하면서 '이 정도 괴롭힘은 괜찮을 거야, 이건 사소한 것인데 뭐' 하면서 '괴롭힘의 시너지 효과'가 인간에게 가져올 고통을 애써 모른체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그렇게 해서 우리 <어리석은 자들의 집합>은 일부의 교묘한 책략에 속아넘어간 척 하면서 약자들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거잖아. 그렇게 해서 매카시즘이니 빨갱이 사냥이니 하는 <현대판 마녀사냥>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거잖아.

어쨌거나 지지부진한 마녀 이야기 중에 그나마 맘에 들었던 글 한 토막.'지옥의 가루가 그녀의 힘을 북돋아 가공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두 눈은 더욱 번득여 순결한 달빛조차 그녀의 눈빛 아래 힘없이 사그라들고 공포에 떨었다. 그녀가 사위를 천천히 둘러보았을 때 자연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나무들이 말을 하고 지나간 일들을 들려주었다. 풀잎들이 약초로 변했다.하룻밤 사이에 갈색으로 그을린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그녀가 불꽃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면밀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불꽃이 그녀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 신이니 혼탁하고 강렬한 화원(火源)인 것을!'(쥘 미슐레, <마녀> 중에서)

그럴듯한 걸. 악마의 속삭임, 그녀와 악마가 만나는 교접의 현장은 추잡한 매춘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음흉하면서 격정적인 재탄생! 그 뒤의 저 마녀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주류를 벗어나 <변방>에서이긴 하지만 추종자들도 제법 모아놓고 고고하게 살아간다. 이른바 마녀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인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마녀는 정복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변방에서 늘 만족한다? 마녀에게는 어떤 꿈이 있을까. 어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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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와 태도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김성한 옮김 / 창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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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프리드먼 미워한다. 왜냐고?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반유태주의냐고? 반유태주의라는 말 자체에 반대한다. 그건 유태인들이 자기네 잘못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넌 나치야!' 하고 몰아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극도로 이데올로기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는 유태인들 모두를 미워했지만(이스라엘, 너네는 존재 자체가 죄악인 나라야) 적어도 2명은 용서해줄 수 있다. 아인슈타인과 노엄 촘스키. 그럼 프리드먼은? 몹시 싫어하지만 그의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있다. 일단 이 사람은, 아랍-이슬람(비아랍권 이슬람도 포함해서)을 잘 아는 사람이고, 미국인들 중에서 아마 아랍-이슬람권을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돌아다니는 사람일 것이다. 둘째 프리드먼은 미국 '온건파 자유주의자'들의 중동 인식을 알게 해준다. 세째 미국 정부의 중동정책 수립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왕세자의 '획기적 중동평화방안'을 사실상 특종보도한 것이 프리드먼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읽다보니- 촘스키가 <숙명의 트라이앵글>에서 지적한, 전형적인 가치왜곡 방법들이 너무나 너무나 많이 눈에 띄어서 토할 뻔 했다. '(유럽의) 언론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때리는 것은 맨날 보도하면서, 팔레스타인이 자폭테러 하는 건 잘 보도를 않는다'. 웃기고 자빠졌네. '2000년부터 시작된 현재의 이-팔 분쟁은 아마도 '자살전쟁'으로 이름붙여질 것이다' 누구 맘대로- 어쩜 프리드먼 맘대로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자살전쟁? 팔레스타인인들의 자폭테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그런데 어째서 팔레스타인인 사망자 수가 이스라엘 사망자수의 3배나 되는 거지? 곡학아세 하는 방법은 이문열에게서 배웠나?

'우리는 전쟁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에서 이겨서 아랍 동맹국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빈 라덴과 탈레반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의 지지와 존경을 이끌어낼 것이다'9.11 테러 나고 미국이 아프간전 따까리들 모집할 때, 그러나 정작 전쟁에 몸 대어주려는 '우방'이 별로 없었을 때 프리드먼이 한 말이다. 현재의 이라크전 계획에도 그대로 통용될, 저 말. 차라리 미국의 오만과 일방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저런 태도는 정직하다.

물론 프리드먼은 나름대로 통찰력이 있고 또 극악무도 꼴보수는 아니다. 난 96년부터 뉴욕타임스에 실린 프리드먼의 글을 읽었는데, 그 때는 인상이 괜찮았었다. 일단 문장이 간결하고 메시지가 명확하다는 점, 그런 문체상의 장점을 무시할 수 없었고 또 꼴통으로 보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지난번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봤더니, 이 아저씨가 너무 출세를 해서 좀 방자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 책은 정말 내용이 너무 없었다. (웃긴 얘기지만 내 주변의 어떤 분은 그 책 읽고 되게 감동한 모양이다. 그 분은 언제나 자기자신이 세계화시대의 메인스트림에 들어있다는 확신을 갖고 계신 분인데,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보니 무엇을 보고듣고 읽어도 '뒤집어보기' 내지는 '삐딱하게 보기'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불쌍하게도.)

그런데 9.11 이후에 쓰인 칼럼들을 주로 모아놓은 이번 책을 보니, 9.11 사건 때문에 프리드먼이 많이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모든 미국인들처럼. 평소의 페이스에서 좀 벗어나서, 예전과 달리 신랄하고 공격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리드먼의 장점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지점에 있었는데. 스스로도 느꼈는지, 뒷부분 비망록에 그런 얘기를 털어놨다. 같은 얘기가 반복되어서 책의 밀도가 떨어진 점도 아쉬웠다.재밌었던 부분은 프리드먼이 자기가 생각해도 기특했는지 수차례 언급했던 '초강대개인' 개념이랑, 이란에 대한 얘기,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세자에 대한 얘기. 이슬람을 두개의 섬(세속정권과 종교세력의 권력나눠먹기)으로 비유해 설명하면서 빈라덴 문제를 이 관점에서 파악한 부분('빈라덴의 도전은 분점에 만족 않고 세속 권력까지 먹으려 했던 것')도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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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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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책은 노엄 촘스키와 프랑스 학자들의 대담/인터뷰를 엮은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刊).정작 촘스키의 언어학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숙명의 트라이앵글>이라든가 <불량국가>, 몇해전 읽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등등의 책들과 몇편의 단문들로 해서 낯설지는 않다. 사실 촘스키는 글 자체는 비비 꼬여 있지만 말하는 내용이 명확.명쾌해서 오히려 책읽는 재미가 떨어지게 만드는 저자 중의 한 명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새로운 사실(fact)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촘스키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겠지. 오히려 외신이나 사료들을 찾아 읽으면서 행간읽기 연습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촘스키의 펜에서 나오는 신랄함, 그것이 주는 원초적인 배설감을 얻기 위해서 읽는다면 또 몰라도. 레바논 내전에 대한 백서 형태로 구성된 <숙명의 트라이앵글>을 제외하면 사실 촘스키를 읽으면서 나는 별다른 충격이나 감동을 받지 못했었다.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진보적, 실천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하워드 진의 글을 접하면서 세상을 오래 지켜본 老학자에게서 전해오는 강인한 시대의식에 감동 또 감동했었던 것과는 달리.

그런 면에서 보면 <누가 무엇으로...>는 오히려 괜찮았다. '드니 로베로와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가 인터뷰하고 레미 알랭그레가 삽화를 그리고 강주헌이 옮기다'라고 책 표지에 써있는데, 삽화는 맘에 안 들었지만 프랑스 학자 2명의 인터뷰 방식은 꽤 괜찮았고 번역도 좋았다. 아무래도 인터뷰 글들이다보니 에세이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촘스키의 예의 그 <비꼬기>가 아닌 진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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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저편 - 체 게바라 시집
체 게바라 지음, 이산하 옮김, 엮음 / 문화산책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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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돈이 없어서 통 책을 사지 못했다. 후배가 건네주는 <읽다 남은> 책들을 전해받아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어제 서점에 들러 이 책을 발견했다. 먼 저편, 그리고 체 게바라의 이름. 그러고보니 신문 서평에서 본 것도 같다. <체 게바라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산하 시인이 체 게바라의 글들을 시집 형태로 묶어냈다는 것, '체 게바라의 찢어진 군화를 꿰매고 구겨진 전투복을 다리미질하는 마음으로 엮었다'던 시인의 고백.

진열대에 놓인 책을 본 순간 불현듯 너무너무 읽고 싶어져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른 사들고(실은 덩달아 몇권의 책을 더 사기까지 했다) 미리 약속돼있던 친구들과의 모임에 갔는데 내내 '집에 가서 책을 읽어야지'하는 생각이 마음이 근질거렸다. 그리고 오늘, 모처럼 휴가를 내어 집에서 쉬면서 두근거림을 내리누르며 책장을 펼쳤다.


언제였더라. 내가 처음으로 체 게바라의 사진을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그를 소개한 글을 읽으면서 <혁명가의 삶>에 도취되었던 때가, 가능하다면 나도 저런 혁명가가 되고 싶다면서 동경하고 꿈꾸었던 때가. 그리고 또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면서 하나둘 포기하고 지우고 생각조차 안 하기 시작한 것이, 나는 <정치 냉소주의자>라고 잘났다는 듯 서슴없이 선언하기 시작했던 것이. 생각해보면 아주 오래된 일 같고, 또 다시 생각해보면 아주 최근의 일 같기도 하다.

겨울이 되어서일까. 'Though we never thought that we could lose, there's no regret' 다시 떠오른 아바의 , 그 노래가사가 자꾸 생각이 난다. 노랫말처럼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싸우다가 볼리비아에서 죽은' 이 사내, 흑백사진 속에서 별 달린 베레모를 쓰고 왼 손에 시가를 들고 멋지게 웃고 있는 이 사람, 죽고 나서는 손목까지 잘려나갔다는 전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산하의 편집 덕분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한편의 시이고, 역사의 한 장면이다.


나는 체 게바라의 시에 포스트잍을 잘라 붙였다. 무려 17개의 노란 딱지들이 책갈피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갔고, <마른 우물처럼> 말라붙어있던 내 감정도 책장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나이 열다섯에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고민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오래전 읽었던 다미야 다카마로의 글(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일주일 동안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고민했다는)을 다시금 떠올렸다.

'인간은 모든 것들의 기준이다'라는 선언, 아바나로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한 구절, 총구에서 총알이 하나씩 빠져나갈 때마다 '내 안의 파쇼도 하나씩 빠져나가리라'는 그 말, <진정한 혁명의 시작>을 뒤로한 채 또다른 혁명을 꿈꾸며 쿠바를 떠날 때 했던 고백, 그 모든 것들이 가슴을 울린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무언가가 나를 부른다고 얘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부름을 좇아 떨쳐일어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평생을 살아도 '별빛이 나를 부른다'는 말은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체 게바라의 시들이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 거지. 결국 내 마음을 두드리고 흔드는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가 걸었던 <삶> 그 자체일 터이니까.


'내가 이루고 싶었던/그 많은 희망들 중에서/가장/순수한 희망만을 남겨놓고/나는 떠납니다'.<감동>이라는 흐릿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울면서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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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 - 코소보를 둘러싼 나토의 발칸 전쟁이 남긴 것들
타리크 알리 외 지음,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옮김 / 이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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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주위는 대리인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TV에 비친 전쟁의 참상을 보며 마음아파하고, CNN식의 화려한 테크노전쟁 보도를 보면서 저널리즘의 무자비한 상업주의를 비난하고, 아니, 상업주의 언론을 비난하는 대의에 동의해주고, 월급의 2-3%를 가난한 아이들에게 전달되도록 복지재단에 맡기고, 코트 깃에 조지 W 부시의 얼굴이 그려진 뱃지를 다는 것으로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에 대한 추모를 대신하고,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정치적 관심을 대체시켜왔다.

그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전쟁을 비난하고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규탄해온 나에게 로베르 레데케르는 '대의 민주주의와 대리 민주주의를 혼동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정치를 없애버리는 과정'으로서의 전쟁. 더우기 인도주의라는 것을 내세운 전쟁. <인권 제국주의>라 이름붙은 전쟁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뉴 레프트 리뷰> 편집장인 타리크 알리가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 펴낸 <전쟁이 끝난 후>라는 책은 1998년의 코소보 공습과 나토의 뒤에 숨은 미국의 얼굴, 발칸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한 책이다. 짧은 글들로 구성돼 있지만 한편 한편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미셸 초스도프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노엄 촘스키, 가지 카플란. 책에 실린 <코소보: 나토팽창전쟁>을 기고한 로빈 블랙번은 페리 앤더슨의 뒤를 이어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장을 지낸 사람이다.

코소보 전쟁의 진실을 설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얼마전 <쿼크로 이뤄진 세상>에서 발견했던 그 말, '사색한다'는 말을 생각했고 다가올 이라크 전쟁을 상상했다. 언제부터인가 지식(정보)를 쌓아두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업무상 필요하다는 이유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명목으로 책 한권 한권을 쌓아올리듯, 위태로운 지식의 돌무더기를 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사색하지 않는 독서는 무의미하다, 가치판단을 보류한 채 쌓아두는 역사지식은 기만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작은 책 한권이 너무 무거워서 부담스럽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내 머리는, 내 마음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은 책 내용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를 관찰해서 이끌어낸 지적 병력(病歷)의 진단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권이냐, 주권이냐. 대리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훌륭한 지적이지만 TV영상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는데 선량한 개인들이 '인도주의 이데올로기'를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또한 비아냥거리는 대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도주의는 분명 의미있는 가치 아닌가. 그동안 '사색'을 미루고 기피했던 차에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만 쏟아지지 답답해진 것은 당연하다.

'미국은 승리를 선언하긴 했지만 아직 평화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승자들이 코소보 협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이 관철되었다고 판단할 때까지 폭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노엄 촘스키, <코소보 평화협정>)

촘스키의 말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앞으로 벌어질 이라크전에도 역시나 들어맞을 것이다. 코소보를 놓고 역사를 이야기한 논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든 일들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논자들이 던져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을 얻으면서, 사색을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해본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지금 너의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네가 무관심하게 TV에서 지켜본 일들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반대하고, 항의하고, 투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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