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바흐의 추측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지음, 정회성 옮김, 강석진 감수 / 생각의나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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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수학문제가 있다. 문제 자체는 단순하다.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 문제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말 그대로 '일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삼촌 페트로스 파파크리스토스. 첫사랑 이졸데에게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골드바흐의 추측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수학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쓴 소설이라는 식으로 여기저기 소개가 나와 있어서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의외였다. 너무 재미있었다. 얼마나 재미있었냐면- 숨도 거의 못 쉬고(헉헉) 페트로스의 일생에 내 인생의 4시간을 몰아넣었다.

'만약 네 큰 삼촌이 그 문제를 풀었다면 멋지다거나 훌륭하다는 등의 찬사를 보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이상의 찬사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돼 버렸어. 네 큰 삼촌은 문제를 풀지 못했으니까. 인생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니? 인생의 비결은, 항상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우는데 있는 거야.' (아버지의 이야기)

'모든 인간은 스스로 택한 절망적인 상황에 절망할 권리가 있는 거야.''내 생각에 괴델이 저 지경에 이른 건, 그러니까 저렇게 미쳐 버린 건, 진리의 절대적 형태에 너무 가까이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인간은 결코 진리 앞에서 잠자코 있지 못하지' 라는 따위의 시구도 있지. 성경에 나오는 '지식의 나무'나 너희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를 한번 생각해봐. 저런 류의 사람들은 보통의 기준을 뛰어넘어. 인간에게 허용된 것 이상을 알려고 들지. 신에 대한 오만한 행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 아닐까?' (새미의 이야기)

수학에 관한 소설이라는 말도 맞지만, 이 책은 그보다는 인생에 관한 소설이다. 인간의 욕망과 오만, 가까운 이들 사이에 흔히 나타나는 미묘한 갈등, 남의 심정을 살살 긁어 괴롭히고 싶은 복수심, 우리가 종종 내뱉는 변명,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집착 따위를 가볍고 재치있는 문제로 펼쳐보인다.

'이졸데는 내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어.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여행을 떠나지도 못했을 거야. 하지만 그녀는 최초의 자극제에 불과했지.' (삼촌의 이야기)

'아테네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일련의 내 행동에 대해 회의가 든 것이다. 내 오만했던 자세는 진정 페트로스 삼촌을 정신적으로 치유해주겠다는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가? 혹시 나 자신의 욕구, 즉 내 사춘기 자아에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무슨 권리로 그 불쌍한 노인의 얼굴을 과거의 환영으로 덮어씌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용서받지 못할 어리석음의 결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의 이야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돌던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가 대체 누구인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관대해지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절대이성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 것처럼.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하나하나의 에피소드에 아포리즘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대한 통찰력. 요슈타인 가아더의 <카드의 비밀>만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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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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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청년이 팔레스타인 땅을 돌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그린 만화책이다. 우선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만화다운 코믹함과 극도의 리얼리티가 양립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단히 잘 그린 그림들이다. 내용은? 군데군데 유머가 엿보이면서도 슬픔을 슬픔답게, 괴로움을 괴로움답게 잘 잡아냈다. 그러면서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냥 보란 말이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만 시기상으로 1988 인티파다 직후의 모습을 담은 것인 관계로 현재와는 시간차이가 나는데, 지금이라고 뭐 팔레스타인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 있겠는가. 생지옥같은, 그러나 <사람이 살고 있는> 그 땅의 모습은 오히려 갈수록 악화되고만 있겠지.지랄같은 이스라엘 놈들은, 세계가 바쁠때면 신이 나서 더 분탕질을 친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한다고 발광하는 틈에 아리엘 샤론 개같은 인간은 팔레스타인인 6명 사살, 9명 사살, 그리고 무장단체 하마스 지도자 표적살해. 이것이 지난 사흘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이다. 재작년 아프간 전쟁 일어나자마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공격했었다. 세상엔 살인마가 너무 많다. 지난 2년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2000명 넘게 죽였다. 이런 현실에 화가 난다면 조 사코의 만화책을 보기를. 더욱더 많이 화가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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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무, 0의 세계
로버트 카플란 지음, 심재관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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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와 없음의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숫자 '영(0)'이다. 로버트 카플란의 '존재하는 무 0의 세계'는 0이라는 숫자를 통해 존재의 역설을 증명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살핀다.저자는 0이라는 숫자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적 접근방식을 택했다. 고대유적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돌며 0이 남긴 자취와 그것이 취해온 다양한 형태들을 파악하는 것이다.'시간과 사상의 강물을 헤쳐온 0의 여정'은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비를 넘나든다. 바빌로니아에서 탄생한 0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버렸다. 숫자에 기하학적(시각적)으로 접근했던 피타고라스 시대의 수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 0을 보는 투시경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0은 인도에 가서 다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카, 수냐, 아카사, 암바라 같은 여러가지 이름을 거느리고. 0은 장소를 옮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충만한 없음'이라는 인도 특유의 공(空) 사상과 맞물리며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바다 건너 마야에서 이 불가사의한 존재는 시간과 결합돼 어둠의 주술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시간의 메커니즘에 집착했던 마야인들의 순환론적 세계관,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시간의 주기성이 이 곳에서 0을 이해하는 열쇠다. 0은 달력의 첫 장과 끝 장 사이, 시간의 주기가 끝나고 시작되는 교차점에 위치한 불길한 숫자. 그래서 그들은 종말의 얼굴을 한 0의 앞에 제물을 바쳤다.

중세 유럽으로 건너가면 0은 신비로운 연금술과 만난다. 기독교의 직선적 세계관에서 보이지 않는 실체를 운운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0은 악마였다. 그러나 0은 '살아남았다'. 수학(이성)의 시대가 종교의 시대를 흔들기 시작하고 오늘날 보는 것과 유사한 방정식이 등장하면서 0은 드디어 문제의 해답을 주는 친구, '인수분해라는 춤의 안무자'가 된다. 미분적분 단계에 오면 0은 '극한'이라는 개념과 만나면서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안내자로 모습을 바꾼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그것을 기호화하는 과정을 통해 수학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합성체를 만들어낸다. 이런 작업을 거듭 거치면서(반복적 추상화) 인간은 '현재 바라다 보이는 전망을 뛰어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당나귀가 사자가 되고 싶어하듯 허풍을 떨며 마치 자기가 숫자인 것처럼 행세했던 0이라는 놈'(15세기 프랑스 문헌)은 당당히 숫자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넘어, 위계질서에 젖은 인간의 사고체계에 알레고리와 변화의 리듬을 부여하는 존재로 격상된다.숫자의 세계를 수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냥 '수학책'이다. 이 책의 묘미는, 수학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한껏 찔러준다는데 있다. '인류의 역사는 0의 역사다'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되겠지만, '상상력과 이성이 만나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며 이 세계를 이끌어왔다'고 하면 그럴듯한 얘기로 들리지 않겠는가.

역사의 강물을 따라 흘러온 독자에게 저자는 재미난 질문을 던진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無)'라는 것의 실체를 볼 수 있을까? 뒷부분에서 저자는 '완벽한 진공'을 포함해 '무'를 눈으로 보고 싶어했던 과학자들의 몇가지 실험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영, 즉 '무'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해줄 수는 없을까. 공간의 끝과 시간의 시작이 만나는 곳, 우리의 0이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없음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옴팔로스(세계의 배꼽)는 어디일까. 아인슈타인에게 물어보라.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인 '0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20세기의 거인이 서있다. 때로는 악마의 얼굴로, 때로는 산술판의 빈 자리로, 때로는 열쇠로 여겨졌던 0은 최근 들어 '1'이라는 짝을 만났다. 디지털 세상을 이끄는 코드, 세상의 지배자가 되려 하는 0의 위력은 21세기에 더욱 커져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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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거닌 날들
막심 고리키 지음, 한은경, 강완구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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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거닌 날들.(Reminiscenes of Lev Nikolaevich Tolstoy).톨스토이, 그리고 막심 고리키라는 이름만 보고 선뜻 책을 집어들었다. 톨스토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어릴 적 읽었던 바보 이반 류의 동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혹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따위 몇개의 단편들 외에는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톨스토이라는 이름이 내 맘을 움직인 것은 마하트마 간디 때문이다. 얼마전 간디 전기에서 톨스토이와 간디의 대화(편지라는 매개를 통한 것이긴 했지만)를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그렇다면 톨스토이와 고리키의 대화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으려나.

막심 고리키. 그 이름 하면 또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고 싶어서 서점을 뒤졌었다. 나는 고리키가 그냥 위대한 작가인 줄로만 알았지, 우리나라에서 그의 책이 정식 출간되어 판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뭘 모르는 10대 소녀는 동네 서점들을 찾아다니며 '<어머니>라는 소설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펄 벅의 <어머니> 밖에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대학교 때,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을 수 있었는데 인상적인 작품이기는 했지만 사실 내 기대에는 못 미쳤다. 그 소설의 제목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던 탓일까, '읽고픈 욕망을 오래 묵혔다 읽은' 만큼의 감동은 없었고 다소 교조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고리키의 또다른 작품(제목은 생각 안 남)을 읽었는데 비슷한 감상을 가졌었다(여담이지만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역시 시대의 차이 때문인지 그저 그랬었다).

<톨스토이와 거닌 날들>은 고리키가 톨스토이와의 대화, 톨스토이를 보면서 느낀 것들, 톨스토이가 숨진 뒤의 회고 등을 적은 것이다. 짤막한 글들과 뒷부분 추모사 비슷한 회고담으로 구성돼 있다. 톨스토이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현자의 공격에 상처 입을 때마다 약간씩 뒤틀리는 심사를 숨김없이 드러내놨다. 글 속에 나타난 톨스토이는 아주 지적이고 위대한 문인인 동시에,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다중적인 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리키는 존경해 마지 않았던 레프 니꼴라예비치(톨스토이의 이름)를 가리켜 '늙은 마술사'라는 표현을 썼다. 톨스토이의 말에 고리키의 글이니, 책은 당연히 멋지고 아름답고 재미있으면서 때로는 조금 고약하다. 하지만 짧은 글에 너무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이 책을 놓고 나같은 무식자의 <감상>을 적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고리키가 톨스토이를 회고하며 한 말을 옮겨놓는다. '이 사람이 여기 살고 있는 한 나는 지구의 고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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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월간말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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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내전과 마약, 납치, 석유 그리고 페르난도 보떼로의 나라. 내 머리 속의 콜롬비아는 그런 곳이다. 한반도보다 다섯 배나 되는 넓은 나라, 아마존, 새들이 많이 사는 곳. 콜롬비아의 석유와 미국의 돈, 이스라엘제 무기가 합쳐져 마약상과 게릴라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나라.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가비오따쓰는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동쪽에 세워진 생태공동체다. 파올로 루가리라는 사람이 꿈과 상상력만으로 만들어낸 토피아(topia). 존재하지 않는 곳(유토피아)이 아닌, 실존하는 이상향. 이 곳에 대해 더이상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에 다 나오니까.


남는 것은 궁금증 하나. 지금도 있을까? 가비오따쓰에서는 지금도 자연과의 하모니를 꿈꾸는 사람들이 소나무 숲속에서 노래를 하면서 살고 있을까?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조용하고 안전하고 깨끗한 기계들을 만들면서, 오리노꼬강의 진흙으로 제방을 쌓고 손수 만든 풍차를 돌리면서 살고 있을까.메데인 공원에 있는 보떼로의 비둘기 조각상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따라 오리노꼬강, 사바나, 제비갈매기, 과이보 인디언, 풍차와 펌프, 희망과 절망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들어가는 입구는, <가비오따쓰>다.


'사막이란 상상력이 고갈된 상태일 뿐입니다. 가비오따쓰는 상상력이 만발한 오아시스입니다.'(파올로 루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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