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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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이 핵폭탄에 반대한 것을 알고 있고, 혼자 조용히 반대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명운동에 가두시위까지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외에는-- 없다. 영국 사람이라는 것 정도일까나.

맑스의 사위이기도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을 몇년 전에 읽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1996년 정도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라파르그의 책과 러셀의 책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됐는데, 내용은 사실 비슷하다. 노예가 아닌 그리스 '시민'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사색을 예로 든 것도 그렇고, 여가를 강조한다는 것도 그렇고, 내용에선 별 차이가 없다. 문체를 놓고 보면 라파르그의 책은 위트와 독설이 넘치는 반면 러셀의 책은 내용에 걸맞지 않게 진지하달까. 전자는 '여유와 사색'에 대한 밀도 있는 한편의 에세이인 반면 후자는 러셀의 다종다양한 문제의식이 담긴 글들을 묶어놓은 것이라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러셀의 이 책은, 솔직히 그닥 재밌지는 않았다. 이 사람, 아니 이 분, 대단한 분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책에 전개된 주제들에서 논리적 정합성이라기보다는 노인네 잔소리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기나긴 인생에 걸쳐(98년을 살았으니 길긴 길었다)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민하고 투쟁해왔던 내용들을 짧은 글로 정리해놓았으니 외려 '책이 부실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게다. 적어도 러셀은 이 책 이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과 같은 글들에선 시대가 안겨준 고민으로 인해 결국 상아탑 밖으로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던 늙은 철학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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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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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반복에, 일부러 독설을 뿜어내는 우스꽝스런 마초이즘--
그런데, 이런 마루야마의 소설이 아주 좋다. 옛날식 소설에 안주하는 게으름뱅이 멍청이 소설가들은 가라, 계집애같고 게이같은 놈들아, 평론가 나부랭이들아, 나는 이렇게 초인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글을 써서 승부를 볼 것이다, 영화와 싸울 것이다, 찬연한 이미지를 글로써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식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런 선언을 할 자격이 있다. 신경숙 따위가 추천사를 쓰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일년에 소설 한두권 들춰볼까 말까 하는 나같은 독자에게 완벽한 면죄부를 주는 소설가의 고백록이 아닌가! 지지부진한 소설들, 구태의연한 '옛날 소설들'에 지치고 싫증난 나같은 독자가 마루야마의 소설에 열광하고 말았으니, 자부심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래, 소설가들 잘못이었어, 내가 무식한 독자였던 것이 아니었어, 새로운 이미지를 형상화해주는 새로운 소설만 있다면 얼마든지 읽어주겠단 말이다! 나는 마루야마의 논리에 편승해서 수준높은 독자가 되어버린다.
사실 이 책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혹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전혀 읽을 필요가 없다. 제목 그대로, 마루야마 겐지가 소설가로서 자신의 각오를 쓴 글들이다. 스물 몇살 때부터의 에세이들을 모아놓았는데 다만 놀라운 것은, 어쩜 이 사람은 젊은 시절이나 나이가 들어서나, 말하는 내용이 이리도 똑같을 수 있나 하는 점이다. 녹슬지도, 무뎌지지도 않다니. 이런 인간이니깐 그런 소설을 쓰지... 나는 줄곧 <천년동안에>의 작가 마루야마 겐지를 떠올리면서 이 책을 읽었다. 문장은 의외로 졸문에, 반복에, 재미 하나도 없다. 아무튼 성질 유별난 작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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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4-2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예전에 써놓은 글 아닌가요? 암튼, 서재를 방치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셨나요?

딸기 2004-04-2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예전에 써놓은 글 아닌데요. 이 책 읽은지 얼마 안 됐거든요. ^^
서재는, 계속 방치--입니다. 다만, 아시잖아요 ^^ 리뷰 자꾸 쓰면 마일리지 올라가는거~~

브리즈 2004-10-0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편집자가 내게 물었다. "어떤 독자들을 상정하고 소설을 쓰는가?" 나는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목적을 갖고 전력투구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나,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여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남자들이다."
그러자 편집자는 이렇게 반박했다. "이해는 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문학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되물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가?"
편집자는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후 그는 두 번 다시 그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 228쪽.

나는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 것이 싫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처럼 질주하는 편이 좋다. 그 쪽이 훨씬 재미도 있고, 훨씬 감동적이다. - 246쪽.

99년에 읽었던 책이에요. 그 무렵 겐지의 소설에 푹 파져 있던 터라 읽었었는데, 책의 앞 내지 여백에 이렇게 베껴 놓았었네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졸문과 반복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요. ^^.. 괜히 딴지 걸다 갑니다. ㅎㅎ..

딸기 2004-10-0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에 걸려서, 철푸덕~~
저도 마루야마의 소설 몇개(아주 쬐끔) 재밌게 읽었어요. 감히 마루야마의 글을 졸문이라 내갈긴 것은, 한번 마루야마 흉내를 내봐야지, 했던 거지요. ^^
 
음양사 1
Reiko Okano / 세주문화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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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니아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작품'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건 참 쉽지가 않다. 함부로 평을 했다가 누구한테 욕 먹을까 두렵다는 뜻이 아니라, 주변에 이 작품에 대해 잘 알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작품을 보는 내 눈에도 분명 선입견이 몇겹은 끼었을 것이라는, 그런 얘기다. 그런 '작품'이 바로 음양사다. 이 만화에 대해서라면- 이미 내 주변에도 매니아들이 많이 있고, 또한 영화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만화이건 책이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기승전결을 좋아하느냐, 옴니버스를 좋아하느냐. 얼토당토 않은 구분일 수 있겠고, 내 대답도 그저 '기승전결이 깔린 옴니버스를 좋아한다'는 것에서 그친다. 완벽한 틀을 갖추고 있는 것도 좋지만, 옴니버스 작품에서 기승전결은 그저 화자의 심리상태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 정도로 끝나야지 얘기가 너무 확장되어 나가면 오버하게 된다. 음양사는 처음에 옴니버스로 시작되는 듯했다. 그 멋진 그림- 이 작품의 매력의 99%는 사실 그림에서 나온다. 일본의 여러 만화가 그렇듯이 그림 그리는 이와 각본짜는 이가 따로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림 그린 오카노 레이코는 다름 아니라 데스카 오자무의 며느리라고 들었다. 그림은 100점 아니라 백의 백승을 주고 싶다.

책의 주인공은 네 사람이다. 세이메이의 친구이자 셜록홈즈의 '왓슨'같은 인물이었던 히로마사는 절대순수, 선을 구현하는 인물로 변하면서 오히려 생명력이 없어진다.
히로마사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세이메이의 사형일 텐데, 이 인물은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온 듯한 인상을 풍겼다. 히로마사가 正이라면 사형은 反이고, 둘을 合으로 만드는 것이 세이메이의 몫이다. 세이메이의 연인 마쿠즈는 정-반-합을 이끄는 촉매다. 사실 내가 매력을 느낀 인물은 세이메이보다는 히로마사와 마쿠즈 쪽이었다. 히로마사라는 인물은 평범한, 그러나 평범치 않은 인물로서 외모에서 선량한 느낌을 풍겼고, 마쿠즈는 뭔가 수수께끼의 열쇠를 쥐고 있는 흔치않은 여인으로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세이메이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인지?
담담하고 고요한 물같던 세이메이, 뭔가 사연을 안고 있지만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 같았던 세이메이는 점차 영웅으로 변모한다. 천지를 구하라! 제각기 사연을 품은 귀신들을 달래고 세상을 좀더 살만하게 만드는 것에 만족해야 했을 세이메이가 천지 음양의 조화를 뒤바꾸는, 즉 이 세계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가져올 인물로 격상되면서 '음양사'는 거창해지고 꼬이고 재미가 없어져버렸다. 붓으로 그린듯한 멋진 필치의 그림들마저도 스크린톤으로 범벅이 됐다.
게다가 이 줄거리엔 즐거운 장치들이 거의 없다. 그나마 볼거리가 됐던 것이 세이메이와 마쿠즈의 관계였는데 갑자기 신파로 돌아가버리지 않나, 히로마사는 순수의 화신이 되지 않나... 이 작자가 대체 어떤 식으로 벌려놓은 판을 수습할지.
아무튼 일본에 가면 소장본으로 구입하고 싶은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재미보다 아쉬움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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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4-27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에서라도 세계를 구하면 안 되나요?
흐흐...

딸기 2004-04-2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술쟁이, 여기와서까지 '흐흐' 심술을 부리다니.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장병옥.이윤섭 옮김 / 창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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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부터 1988년 1차 인티파다까지 다루고, 뒤에 미국계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별도 항목으로 다뤄놨다. 프리드먼의 솔직한 '취재기'이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감은 있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레바논 내전 당시 베이루트에 주재하다가 이후 예루살렘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 프리드먼이 93년에 펴낸 책이니 딱 10년이 됐다.

그 10년 동안 변한 것들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변한 것이라면 당시 프리드먼의 '낙관적 전망'보다 훨씬 더 상황이 안 좋아졌다는 점. 93년은 오슬로 평화협정이 맺어진 시기였고, 프리드먼의 견해는 따라서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2차 인티파다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목숨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극히 대조되는 것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변치않은 것은 사건의 '주역들'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그들의 지도자들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리엘 샤론은 베이루트의 '룰'을 모른채 레바논 내전에 뛰어든 무뢰한(그러나 상당히 담백한 -_-)으로 그려지고, 야세르 아라파트는 능구렁이로 묘사된다. 죽은 시리아의 아사드는 더없이 잔혹한 인물로 나타난다.

사실 내가 재미있게 본 것은 이 책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지도자는 국가(집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지도자의 캐릭터가 한 국가의 발전경로를 어느 정도까지 결정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어설픈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결정론적으로 세상을 보던 것과는, 지금 나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국제관계에 대해 주워듣고읽다 보면 지도자의 인성이라는 것이 국가의 행로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시리아와 레바논의 케이스를 여기에 바로 대입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지도자론에 너무 충실한 이들은, 종종 오류를 범하곤 한다. 시오노 나나미처럼 '위대한 독재자'론으로 흐른다거나, 한 국가/민족집단의 역사적 발젼경로를 무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그런 종류의 위험을 알고는 있지만, 의외로 지도자의 캐릭터는 굉장히 중요한 것 아닐까? 이 문제에 집착하는 까닭은, 박정희 정권을 어떻게 볼 것인지 여.전.히.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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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 로이터 통신의 팔레스타인 리포트
로이터 통신 엮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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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통신의 팔레스타인 리포트. 분쟁과 평화과정의 역사적 장면들을 포착한 사진들이 아주 인상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글보다는 사진을 봐야 하는 책이고, 편집도 사진 위주로 되어 있다. 클린턴과 아라파트, 라빈, 무바라크, 후세인 국왕이 한 방에서 제각기 넥타이를 정돈하는 모습처럼 역사적 장면과 그 뒤안길을 생생하게 포착해놔서 자료사진 가치도 크고 재미도 있다.

그런가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치 장면,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이 오열하는 모습은 너무 슬프고 비극적이다. 책 제목에서 보이듯 비극은 끝나지 않고 있고, 독선과 아집도 계속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마지막 사진은 무지개다.

'베들레헴 하늘을 수놓은 이 무지개 사진을 통해 나는 극히 아름다운 순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예수의 탄생지를 방문하는 내 꿈도 포착한 것 같았다. 더구나 새로운 세기의 첫해가 끝나는 시기에 무지개가 뜬 것은 더 의미깊어 보였다. 팔레스타인 봉기가 4개월 째에 들어서는 등 어지러운 시절이라 그 모습이 더 각별했다. 바리케이드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례자들이 베들레헴에 모여들었다.
그날은 하늘이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가끔씩 그 사이를 뚫고 햇빛 줄기가 비쳤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구룸을 벌리고 위에서 희망을 보내주려 하는 것 같았다. 한 순간, 예수탄생 교회 밖에서 베들레헴 상공에 뜬 이 아름다운 희망의 무지개를 보고 내 가슴은 뛰었다. 나는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오래가지 않았고 곧 사라졌다.' (피터 앤드류, 2002년 12월)

다시 한번 역사를 향해 '누구의 죄인가'라는 대답 없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이-팔 사태를 개괄적으로 알기 원한다면 이 책이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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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열정사이 2006-08-06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주문해서 볼려구요. 가장 중립적 입장에서 쓰여진 자료를 찾고싶었는데, 이책이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