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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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좌파의 전통이 강한 나라라고 하지만, 이탈리아 작자들의 책을 읽은 것은 아주아주 오랜만이다. 이탈리아 좌파의 학문적 경향이 어떤지는 전혀 알 수 없고, 안토니오 네그리가 제법 유명한 사람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이 책을 공동저술한 마이클 하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책은 아주 재미있었다. 저자들은 근대-제국주의-제국주의적 (국가)주권이라는 것과, 탈근대-제국-제국주권이라는 한 쌍의 시대를 구분한다. 전자는 안과 밖, 대립, 위기와 대응 같은 '이분법'이 통용되는 시대였지만 탈근대, 즉 제국의 시기에는 그같은 이분법은 적용되지 않는다. 핵심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밖'이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인민에서 대중으로, 변증법적 대립에서 잡종성의 관리로, 근대 주권의 장소에서 제국의 무장소로, 위기에서 부패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전과 자본 자체의 팽창에서 오는 모순에 대해 자본은 효과적으로 대응한 나머지, 근대의 국경을 넘어버렸다. 오늘날의 제국은 무정형으로 편재하는, 존재다--
저자들이 묘사하고 있는 '제국'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영화 '매트릭스'에 표상된 세계를 생각했다. 인간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매트릭스의 제국은, 네그리의 '제국'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우화가 아닐까 싶다. 스스로 성장하고, 동시에 위기를 만들어내는 제국. '소통'이라는 무정형의 인간행위(새로운 형태의 노동)를 통해 팽창하는 제국.
그렇다면, 이 제국에 맞선 '저항'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좀 옛스런 말투처럼 들리지만, 이들은 공화주의적 원칙을 내세운다. 이 공화주의의 첫번째 층위는 도주, 탈출, 그리고 유목주의다. 안과 밖이 따로 없는데 어디로 도주를? 이들이 말하는 탈주의 개념에는 지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동시에 포함되며,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온갖 종류의 '삐딱해지기'가 모두 포함된다. 제국의 소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주권국가의 국경을 넘어버리는 일(이동 노동)이라든가, 젠더에 따른 관습적 구분을 벗어던지는 새로운 탈인간화 같은 일.
자본의 전지구화(無장소)에 맞선 21세기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의 형태로 노동의 이동성(無장소)을 제시한 것은 설득력있었다. 비록 현실에서는 쫓겨난 이들의 어쩔수 없는 선택으로 '노동의 이동'이 이뤄지고 있지만, 거기에서 전복의 가능성을 열어보이는 네그리의 '구멍찾기'는 재미있었다. 여기에다가 '탈출'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패셔너블해 보인다. 팽창할대로 팽창한 제국의 생산 메커니즘을 러프하게나마 그려보인 것도 좋았다. 지난 세기 좌파들의 금과옥조였던 변증법을 거부하라고 선언하는 것도 쌈빡해보인다.
그런데! 우리 모두 이민노동자가 될 수는 없잖아. 어디에서? 움직이는 자본의 제국은 '밖으로의 도주'를 허용치 않는데, '무장소의 저항'은 어떻게 이뤄져야 한단 말인가. 허무한 도주를 벗어날 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네그리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에 또다시 허무하다. 어차피 책을 통해 '나의 저항'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길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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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서남동양학술총서 20
정문길.최원식.백영서.전형준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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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티의 문제는, 참 뭐라 단언하기 힘들다. 누구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고, 이건 오만가지 책들에서 인용되는 걸로 봐서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상상 나부랭이'로 치부해버리기엔 덩치가 너무 크다.
하지만 '민족이란 무엇이다'(그것을 '국민'으로 번역하든 '민족'으로 번역하든) 딱 잘라 말하기 힘들다 해도, 분명한 것은 있다. 한 사람의 아이덴티티는 국민, 민족, 부족, 종족, 인종, 종파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규정된다. 이름을 지은 사람이 타인이든 자신이든 간에, 이런 이름들이 따라붙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긴 힘들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이 붙건 간에,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삶(사회-문화)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셔널리즘 내지는 네이션의 테두리에 고정된 사고를 버리자고 백날 말해야 무의미하다. 이런 원론은 대가리가 있는 족속이라면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다(그나마도 못 알아주는 꼴통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생각을 진정으로 네이션의 테두리를 넘어 확장할 수 있으려면, 네이션의 테두리 안에 가둬진 자신을 해방시키고 테두리 밖의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구체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 테두리에 갇혀있음으로 해서 나의 인식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지, 또 나의, 그리고 우리가 테두리를 고수함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피해를 입는지를 알아야 한다.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는 좀 학술적인 책이다. 어떤 이에게는 재미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셔널리즘의 테두리를 좀 벗어나고픈 사람에게는 반드시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
내 얘기를 하자면, 내셔널리티의 테두리에서 내 인식을 해방시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무슨 얘기냐, 울나라의 꼴통 우익보수파들이 구역질난다는 의미다. 모든 것을 국수적으로 취급하는 재수없는 종족들이 보기 싫다는 그런 의미에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이런 내셔널리즘의 테두리는 내 머릿속에서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아시아? 좋다, 아시아. 누가 뭐래도 나는 아시안이다. 국경을 넘어(울나라는 그나마 제대로 된 국경조차 없지만) 글로컬하게 인식을 확장시키자--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네이션의 테두리 안에서 동아시아를 사고할 경우 '중국-한국-일본-동남아시아 기타등등 여러나라' 이렇게 밖에는 머리가 안 굴러간다는 점이다. 아시아는 나라 이름을 주욱 열거해놓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고, 또한 개별 국가들의 총합과도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아시아를 '아시아 국가들의 총합'으로 볼 경우, 네이션의 틀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집단, 많은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그 특수성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을 뿐더러, 그들을 아예 배제해버리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엄연히 실존하고 있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없애버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강자의 논리대로 테두리를 긋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동아시아? 동북아시아라 하면 보통 한-중-일을 지칭하는데, 이 경우 명백히 중화문화권이었고 동남아 국가들과 역사적 배경이 다른 베트남을 사상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나라 이름 부르기'로 만들어 버리면, 재일교포와 조선족 같은 한반도 출신 이민자들은 물론이고 우리가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지역 강자'(때로는 중국 때로는 일본)의 그늘에 가리워져 버린다.

책은 그렇게 가리워져버렸던 집단을 재조명하고 있다. 타이완 섬에 살던 원주민들은 청 말기 중국의 이주민들 때문에 한차례 식민주의를 겪었고, 일본과 중화민국에 의해 잇단 지배를 받았다. 우리가 '한때 자유중국'이라 불렀던 그 섬의 이야기를 우린 제대로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가 한때 그 섬을 '자유중국'이라 불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반공주의가 맹위를 떨쳤기 때문에 자의반타의반 '중화민국 국민'으로 정체성을 고정시킬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화교 이야기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2000년 첸수이볜의 승리와 타이완의 '타이완화'를 보면서 갖는 복합적인 상실감에 대해서는 물론 알지 못한다.
뿐만인가. 일본의 근대성을 논할 때,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논할 때 일본과 아시아국가들의 관계만 보게 될 경우 일본 내부의 피식민지들, 아이누와 오키나와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류큐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미국 점령지에서 다시 그들 스스로 '일본인'임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 따위는. 티벳은 또 어떤가. 중국 내 숱한 '회족', 변방의 회교도들은 어떤가. '나라이름 부르기'에서 떨궈져버리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책은 중국인과 일본인, 한국인, 한국내 화교, 재일교포 등 다양한 사람들의 짦은 논문을 묶어놓은 형태로 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 너무 학술적이거나 시의성이 없는 것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인식의 틀을 조금이나마 넓히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네이션의 틀을 머리속에서 깨뜨리기 위해서는 우선 틀 밖에 '버려졌던'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과 함께, 책에서 재밌었던 것은 '한반도의 실험'으로 제안된 부분이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는 동아시아의 블럭화가 중국-일본 사이의 선점 경쟁으로 엇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선 남북 화해-경제 블럭화를 통해 중-일이 못 벗어나고 있는 내셔널리즘의 틀을 부수면서 '새로운 동아시아 주의'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중요한 것은, 남북 화해 역시나, 국가주의를 벗어나 우리가 스스로를 '주변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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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시대의 철학 -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현대의 지성 120
지오반나 보라도리 지음, 손철성.김은주.김준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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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테러가 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두 명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쳤다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TV를 켰다. CNN방송은 아무 설명도 없는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죄로 부랴부랴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사로 달려가 호외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달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신없이 외신을 들춰보고 기사를 '써제꼈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때 임산부였고, 뱃속의 아이는 아마 태중에서 '테러'와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야 할 '테러시대'라는 것에 대해 나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조지 W 부시가 선언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됐고, 결국 이라크전이라는 고전적 의미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논란, 김선일씨의 피살 등의 사건들을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듯이, '테러시대'는 이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9.11 사건 이후로 나의 의식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생겼다. 중동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하게 됐고 이라크를 방문하게 됐다. 이후 3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중동' '이슬람'이라는 단어들이 맴돌았다. 신경과민증 혹은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와 마음으로 중동을 찾아 헤맸다. 중동 내지는 이슬람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다소 안목이 생긴 것도 있지만 언제나 머리가 '고팠다'고 할까, 항상 뭔가 결핍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9.11 이 있은 직후에, 선배 한 분과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몇년 지나면 이 사건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인 분석들이 쏟아져나오겠지, 이 사건이 세계사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될지 궁금하다...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런 책이었다. 미국 바싸르대학 교수라는 저자는 9.11 테러가 일어나고 두 달 뒤, 뉴욕에서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책은 두 사람과의 개별 인터뷰와 함께, 두 '석학'의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버마스, 데리다. 얼마나 저명한 '철학자들'인가!

하버마스의 이야기는 그닥 인상적이지 못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데리다와의 대화 부분이다. 두 사람의 인터뷰 스타일은 정반대였던 듯하다. 하버마스가 간결하게 '신사처럼' 얘기했다면, 데리다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가운데에서 정곡을 찌르는 스타일이랄까. "9.11은 대사건이 되겠지요"라는 질문에, 데리다는 "무엇이 '대' '사건'인가"를 되묻는다. 9.11이라는 숫자들로 '명명'함으로써 이 사건을 반복해서 되뇌이게 만드는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테러/테러시대/테러시대를 불러온 모순들을 마치 '종결된 사건'인 양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데리다, 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해체'다. (데리다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무튼) 데리다는 우선 9.11 이라는 '이름'을 해체하고, '테러' 혹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를 지적한다. 무엇이 공포(terror)인가. 이 '공포'의 원인은, 그것이 미래에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 이런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냉전이라는 최소한의 균형조차 깨어진 뒤에 찾아온 '팍스 아메리카나'. 9.11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미국'이라는 안전판을 강타하고 부숴버린 것이었고, 거기에서 '미래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 것임을 지적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자면(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미국이 지목한 '테러리스트'들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 데리다는 이를 특유의 '자가-면역' 논리로 해석한다. 스스로의 면역체계를 부수면서, 안에서부터 생겨난 병리학적 존재들.

테러와의 전쟁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지금의 이라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폭력적인 교조주의에서 근본주의자들 스스로가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데리다라고 해법을 알까. 철학자에게 '현실적 해법'을 내오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문제의식으로 족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똘레랑스(관용)'라는 말이 유행을 했던 것 같은데, 재미난 것은 '관용'에 대한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정반대되는 평가다. 하버마스는 비록 '관용'이라는 말이 어떤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민주적인 사회'에서라면 그 한계가 다수의 뜻에 따라 합리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면서 '관용'의 유효성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 데리다는 '관용'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기독교적 성격을 지적하는 동시에, 관용은 어디까지나 '문턱'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저러하지만, '너'의 행동도 이러저러한 수준까지는 봐줄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관용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다. '봐줄' 수 있는 한도, 그것이 관용이다. 관용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데리다가 내놓는 것은 '환대'라는 개념이다. 네가 비록 이러저러할 지라도 나는 받아들인다- 보라도리는 데리다가 말한 '환대' 혹은 '초대'의 개념을 '용서'와 연결짓는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책임.
내 집에 누가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손님을 환대한다면-- 반가운 손님이 올 수도 있고,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나를 찌를 수도 있다. 환대는 나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을 가져다주는 그런 개념이다. 관용을 넘어선 '완전한 환대'는 법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데리다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기존의 논리를 해체하고 새롭게 상상하지 않는 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해체주의자의 지적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문제의식은 결국 '유럽' '계몽주의'의 문제를 향해 간다. 이성, 합리화, 이런 것들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근대화의 프로젝트를 포기해야할 것인가.
타리크 알리 같은 사람은 "9.11 이후에 변한 것이 과연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9.11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평가절하한다. 과연 9.11은 어떤 사건이었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미-소 양극체제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면, 냉전이 끝나고 10년만에 일어난 9.11은 미국 일극체제를 향해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었다. 빈 라덴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을 '적'으로 명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화에 반기를 들었다. 빈라덴의 선전포고를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화/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반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데리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를 통칭해서 '아브라함적 종교'라 부른다. 하버마스는, 이 아브라함적 종교들 중에서 '구미'의 종교에 해당되는 기독교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일신교 특유의 배타성과 폐쇄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여러가지 역사적, 경제적 원인이 있겠지만) 이같은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모순이 축적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경(근본주의의 발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찾는 것, 합리화와 근대화(표현이 좀 이상하군)는 더더욱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이 부분에서는 데리다 또한 문제의식이 일치한다. 미국에 맞서는 (척하고 있는) 지금의 유럽에 한정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이상'이라는 의미로 '유럽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책 말미에는 이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해 두 사람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발표한 '공동선언문'이 실려있다.

9.11의 의미와 계몽주의의 문제-- 이것은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이기에,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던진 짤막한 이야기는 그저 '분석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분석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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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0-05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 님의 글이 이주의 리뷰로 추천돼 있어 냉큼 들어왔답니다. 축하드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볼 수 있기를요.. ^^..

제가 봐온 딸기 님의 여느 글과는 사뭇 어조가 다른데요. 9.11 테러에 대한 하머마스와 데리다의 입장, 특히 데리다의 '환대' 개념을 소개하면서 9.11 테러를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글은 차분하면서도 엄정한 분석의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 말의 정직한 의미에서 '정치한 글'이라는 생각입니다.

9.11 테러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최근에는 '화씨 911' 같은 영화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고발(?)도 이뤄졌지만, 여전히 '트라이앵글'의 갈등, 이란을 비롯한 에너지원을 둘러싼 각축은 도를 더해가는 듯합니다.

딸기 님의 글을 너무 잘 읽어서 몇 자 쓴다는 게 췌사가 될 수도 있었겠네요. 이주의 리뷰로 선정된 것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추천도 하고 갑니다.

딸기 2004-10-06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블로그를 근근히 유지하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브리즈님이라구요. ^^

balmas 2004-10-0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딸기님.
좋은 서평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음 서평 볼 때부터 좋은 서평이구나 했는데(첫번째 추천자는 바로 접니다. ㅋㅋ),
이 주의 서평으로 뽑히셨군요. 축하드릴게요.

딸기 2004-10-0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처음에 추천 1 올라가있길래, 단순하고도 상상력이 없는 저는
'알라딘 편집부에서 추천도 해주나보다'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한동안 알라딘 접근을 피하다가(돈이 넘 많이 들어요 ㅠ.ㅠ) 최근 블로그질을 개시했는데
새로운 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

가을산 2004-10-06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이미지, 아직도 오드아이시네요. ^^

딸기 2004-10-06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가을산님. 오늘 하루종일 알라딘에서 놀고 있는데, 여러 분들 만나뵙게 되네요.
얼마전 가을산에 다녀왔답니다. 벌써 2주 전이던가...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할 무렵의 가을산에서 청량한 기분 한껏 만끽하고 왔어요. 가을산님은 이 가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블리니 종합병원에서 초음파 심장검진을 받다. 대수롭지 않은 검사이거니 했는데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같은 불쾌한 소음이 기계를 통해 들렸다. 내 심장이 내는 소리라고 했다. 검사 결과 분명한 심장비대임이 판명되었다.

나는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심장이 그렇게 커졌다 이 말이지! 그런데 사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암으로 인한 더러운 죽음과 심장으로 인한 깨끗한 죽음 말이다. 그렇다면 내겐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 같다.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에서

나는 낙관적인 사람이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농담 한마디 던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이라고! 투르니에 할아버지, 당신 참 대단한 분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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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제왕,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서 읽고 있다. 이미 10년전쯤에 처음 소설책을 구입한 이래 수차례 '완독'에 실패한 것은 내 게으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의외로 내겐 이 책이 그닥 흡입력이 없었다. 솔직히 앞부분, 지겨웠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1편은 버섯마을같이 생긴 귀여운 호빗네 마을만 기억나고, 2편은 거의 기억이 안 난다. 3편은 제법 장관이어서 재밌게 봤다. 스펙터클에 압도되기도 했고.
하지만 (반지팬들께는 죄송하지만) 뭐 그렇게 감동적인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없는 영화'라는 점도 맘에 안 들고,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린것 같지도 않고. 그 영화 만드는데 돈이 꽤 들어갔을 것 같기는 하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어느 순간, 소설가의 '느낌'이 나에게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고 치자. 실제로 나는 하루키의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어느 한 작가의 레퍼토리를 그렇게 많이 찾아읽은 케이스가 드물 정도로. 하루키 소설의 탄탄한 구도와 문장력도 좋아하지만, 내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외로움' 내지는 '상실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떠나버릴까봐 늘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 중에, 불현듯 다가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내 내면에 있는 막연한 그런 두려움을, 하루키 소설을 통해서 확인한다. 하루키가 느끼는 두려움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나한테도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 어쩌면 바로 그런 기분 때문에 조금은 두려워하면서 하루키의 소설들을 계속 읽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내게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작가가 느끼는 어떤 감정이 갑자기 내게로 확 밀려들어올 때. 그런 면에서 톨킨이라는 작가는, 그동안 내게 별로 전해준 것이 없었다.

제법 긴 여행을 앞두고 있다. 이번 여행에 무슨 책을 가져갈까. 반지제왕 2권 뒷부분이 조금 남았는데, 이 책은 종이커버라서 다른 책들보다 훨씬 가볍다. 3권을 가방에 꿍쳐넣고 떠나기 위해 2권 남은 부분을 맹렬하게(그래봤자...이지만) 읽고 있던 차였다. 톨킨은 영국의 고풍스런 윤리에 젖어있는 듯하고, 꽤나 늙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글 곳곳에서 배어나오는 귀족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냄새는 도대체 맘에 들지가 않는다.
다만 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작가의 감수성 섞인 언어들, 옛이야기에 대한 향수 같은 것들은 맘에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띈 인물은 파라미르. 아라곤은 작가가 완벽하게 설정해놓은 지도자이고, 프로도는 역시나 '설정된' 구도자 혹은 순례자, 간달프는 '설정된' 현자의 냄새를 풍기는 반면에 파라미르에 대한 묘사는 아주 구체적이고 정성스럽다. 어쩌면 톨킨은 파라미르에게 아라곤보다 더한 애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속으로 이런저런 감상들을 궁시렁거리며 읽어나가다가 이런 구절을 만났다.

And so Gollum found them hours later, when he returned, crawling and creeping down the path out of the gloom ahead. Sam sat propped against the stone, his head dropping side-ways and his breathing heavy. In his lap lay Frodo's head, drowned deep in sleep; upon his white forehead lay one of Sam's brown hands, and the other lay softly upon his master's breat. Peace was in both their faces.

거미귀신이 나오는 동굴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을 거미귀신에게 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돌아오는 길이고, 샘은 프로도에게 골룸을 경계하라는 말을 하다가 잠이 든 참이다.

Gollum looked at them. A strange expression passed over his lean hungry fage. The gleam faded from his eyes, and they went dim and grey, old and tired. A spasm of pain seemed to twist him, and he turned away, peering back up towards the pass, shaking his head, as if engaged in some interior debate. Then he came back, and slowly putting out a trembling hand, very cautiously he touched Frodo's knee - but almost the touch was a caress. For a fleeting moment, could one of the sleepers have seen him, they would have thought that they beheld an old weary hobbit, shrunken by the years that had carried him far beyond his time, beyond friends and kin, and the fields and streams of youth, an old starved pitiable thing.

저 구절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읽으면서 결국은 눈물을 글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와버린' 불쌍한 존재에 대한 애도 혹은 그의 외로움에 대한 동정일 수도 있겠지. 기나긴 소설의 3분의2를 읽어오면서 처음으로 작가와 '소통'하고 있다고 느꼈고, 이 구절 때문에 이 소설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내 마음대로 단정해버렸다. 자아분열된 골룸 안의 갈등은 문법에 맞지 않는 방정맞은 대사들 때문에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작가는 저런 순간을 예비해놓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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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09-1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 제 서재로 빌려 갈게요.
어떤 존재에 대한 연민.. 만큼 인간적인 것도 달리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해와 이타심, 소통과 사랑이 연민에서 시작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딸기 2004-09-15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어떤 사람이 몹시 원망스럽고 미운 적이 있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인데 말이죠. 솔직히 얘기하면 제 시어머님이셨어요. 어떤 순간에 몹시 원망스러웠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초겨울날 전화를 드렸어요. "김장 담그려고 배추 절여놨다" 그러시더군요. "느이 것도 같이 담그느라고 좀 많이 했다" 그러시더군요. 저는 어머님께 말씀 안 드리고 이미 김장 해버렸었거든요.
어머님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울컥 하는 거예요. 혼자 배추 씻어절이느라 고생하고 계실 어머님 모습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핑 돌더군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연민이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연민이로구나. 이해타산으로는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것, '정'이라는 말보다 조금 서글픈 그런 존재감이 바로 '연민'이라는 것.

딸기 2004-09-1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서 갑자기 어머님에 대한 애정이 생겨나더군요. 어머님도 그러시지 않을까, 철없고 고집센 며느리 보기 싫고 밉다가도 어느 순간에 저에 대해 연민이 생기면서 자식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비로그인 2004-10-0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톨킨의 책은 동생을 통해 예전에 알았지요. 그게 반지의 제왕인지는 나중에 알았지만, 저는 피터 잭슨의 B급 영화를 재밌게 본지라, 영화를 아주 재밌게, 역시! 하면서 보았어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믿고 봐서인지, 반지의 제왕에 대한 비판도 별 무신경이랍니다. 최근엔 본 영화들이 없어서 감지덕지...합니다요.

근데 결혼하신 분이군요. 오... 재롱금지에 딸기에, 어쩐지 미혼으로 보였는데 말여요.

딸기 2004-10-0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을 딱 보면, 걍 '아줌마'입니다 ^^

하이드 2004-11-0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반지전쟁으로 고등학교때 보고 이제, 영화 개봉하면서, 매년 엄마와 연례행사로 개봉 첫날 회사 휴가까지 내고 봤는데요. 3부에선 그야말로, 그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 아 이제 얼마 안남았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 주르륵.

환타지 좋아하는데, 그 모든 가상세계를 창조한 톨킨이 정말 대단하고, 그 방대한 환타지 세계를 믿을 수 없는 열정으로 영화로 옮긴 피터잭슨이란 감독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 디비디를 보면, 영화반, 제작반인데, 제작기간도 영화만큼 스팩터클하거든요.) 작가와의 공감을 말씀하시면, 전 종종 힘들때 제가 걷고걷고 또 걷는 프로도와 일행들이라고 생각하고, 이쯤이야 생각한답니다.

아, 올겨울은 반지의 제왕이 없어서 너무 허전해요. ㅜ.ㅜ

딸기 2004-11-0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들때 프로도를 생각하신다니, 너무 힘든 케이스를 모델로 삼고 계신 것 아닙니까. 프로도와 샘의 고난을 생각하면, 웬만한 힘든 길은 다 견뎌낼 수 있을 것 같군요. 영화는 3부가 역시나 최고였죠!